빌립보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권면과 끝인사

받은 사람과 채우시는 하나님

빌립보서의 마지막 장에는 뜻밖의 긴장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배부름과 굶주림, 넉넉함과 모자람을 모두 겪어 낼 수 있고, 자신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몇 절 뒤에서는 빌립보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내 준 물질적인 도움을 이야기하며 크게 기뻐합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그렇게 기뻐하는 것일까요?

더욱 이상한 것은 그가 감사하는 방식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선물을 보내 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이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는 선물이 자기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보다, 그들이 베푼 일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이 장에는 두 번의 ‘채움’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 편에 여러분이 보낸 것을 받아 가득 찼습니다」라고 말하고, 곧바로 「나의 하나님께서 …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이 바울의 필요를 채웠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에서 말해 온 그리스도 안의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바울은 그 이야기에 이르기 전에 공동체 안의 갈등을 다루고, 기쁨을 명하고, 걱정 대신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참되고 아름답고 칭찬할 만한 것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주제들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물음이 떠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주고받으며,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삶입니까?

빌립보서 4장은 이 질문에 추상적인 원칙으로만 대답하지 않습니다. 서로 의견이 달라진 두 여성, 그들을 도와야 하는 한 동역자, 걱정하는 공동체, 궁핍을 겪는 바울, 먼 길을 거쳐 도착한 선물, 그리고 마지막 문안을 나누는 사람들을 통해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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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

빌립보서 4:1–3 본문 →

4장은 특별히 다정한 호칭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자 면류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 안에 굳게 서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빌립보서 4:1 · 본디새김

면류관이라는 말은 고대 세계에서 경기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기쁨이자 면류관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자신이 받은 높은 지위나 성취가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빌립보 교회 자체가 그의 기쁨입니다.

이것은 앞 장에서 바울이 자신의 성취를 자랑할 근거로 삼지 않겠다고 말한 것과도 잘 어울립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고백 직후에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나는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유오디아에게 권하고 순두게에게 권합니다.빌립보서 4:2 · 본디새김

왜 바울은 두 사람을 따로 권하는가

이 문장에는 ‘권하다’가 두 번 반복됩니다. 원문에서도 같습니다. 바울은 두 사람을 한꺼번에 묶어 꾸짖지 않습니다.

유오디아에게 권합니다.

그리고 순두게에게도 권합니다.

두 사람에게 같은 요청을 각각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표현에서 반드시 두 사람의 책임이 똑같았다고 추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한 사람만 지목하여 문제의 원인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전통적으로는 두 사람이 개인적인 갈등을 겪고 있었으며 그것이 공동체의 하나 됨을 해치고 있었다고 이해해 왔고, 이 해석은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두고 의견이 달랐는지, 실제로 개인적인 다툼이 있었는지, 혹은 복음 사역의 방향에 관한 차이가 있었는지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을 단순히 다투는 여성들로 묘사해 온 해석의 관행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빌립보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복음의 동역자였다는 사실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읽기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두 사람의 이력을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동역자여, 그대에게도 부탁합니다. 그 두 사람을 도와주십시오. 그들은 클레멘스와 나의 다른 동역자들과 함께 복음을 위해 나와 더불어 싸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있습니다.빌립보서 4:3 · 본디새김

바울은 두 사람을 문제를 일으킨 사람으로만 기억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싸웠다(συναθλέω)’는 표현에는 앞서 빌립보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함께 싸우기를 바란다고 말할 때 사용된 동사가 다시 등장합니다(1:27). 바울이 공동체 전체에 요청했던 일을 이 두 여성은 이미 자신과 함께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 사역의 주변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수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등보다 더 깊은 정체성

바울은 두 사람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면서, 그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있다고 밝힙니다.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사상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32:32–33에서는 모세와 여호와야훼의 대화 가운데 하나님의 책이 등장하고, 다니엘 12:1에서는 책에 기록된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은 두 사람을 서로 반대편에 선 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전 수고를 인정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밝힌 뒤,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요청합니다. 갈등 때문에 두 사람의 과거 전체를 부정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수고했다는 이유로 현재 필요한 화해의 요청을 생략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보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가를 먼저 기억합니다.

화해는 당사자들만의 책임인가

3절에는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편지 전체에서 공동체를 향해 ‘여러분’이라고 말하던 바울이, 이 대목에서는 특정한 한 사람을 ‘그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동역자’에 해당하는 쉬지고스(σύζυγος)는 본래 멍에를 함께 멘 사람을 뜻하므로, 함께 일하는 동료나 동반자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쉬지고스’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원문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의 정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에게 두 사람을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갈등이 있는 두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곁에서, 함께 일했던 관계가 다시 바로 서도록 수고할 수 있습니다.

화해가 필요한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다시 함께 서야 할 복음의 동역자들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에서 하나 됨을 추상적인 원칙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에 매우 유명한 권면이 등장합니다.

기쁨과 걱정 사이에서 하나님의 평화가 지키는 것

빌립보서 4:4–7 본문 →

주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하겠습니다. 기뻐하십시오.빌립보서 4:4 · 본디새김

이 말은 익숙하지만, 바로 앞 단락과 연결하여 읽으면 다르게 들립니다. 바울은 두 사람 사이에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한 직후에 기쁨을 요청합니다. 이 기쁨은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권면이 아니라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공동체를 향한 권면입니다. 바울 자신도 투옥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언제나’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가 기쁨의 근거를 상황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기쁨의 근거는 원하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슬픔을 느끼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에바브로디도가 죽을 뻔했던 일을 회상하면서 슬픔을 이야기했습니다(2:27).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잃지 않을 수 있는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쁨 다음에 왜 너그러움이 나오는가

여러분의 너그러움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야 합니다. 주님이 가까이.빌립보서 4:5 · 본디새김

‘너그러움’은 단순히 온순하거나 부드러운 성격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권리를 엄격하게 주장하기보다 상황과 사람을 헤아려 관대하게 행동하는 태도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이 자기 입장만 주장한다면, 서로 옳은 말을 할 수는 있어도 함께 살아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너그러움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만 통용되는 태도가 아니라 바깥사람들에게도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의 삶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실제적인 태도를 통해 알려집니다.

바울은 그 근거로 「주님이 가까이」라는 매우 짧은 문장을 덧붙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지금 가까이 계시다는 읽기로,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너그럽게 살아가라는 권면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깝다는 읽기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와 다툼에 매달리지 않고 관대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원문은 ‘가까이’가 공간적인 의미인지 시간적인 의미인지 문법적으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서 어느 하나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면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끝까지 지켜 내는 일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고, 주님의 오심이 가깝다면 현재의 갈등을 삶의 마지막 문제처럼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꿉니다.

걱정을 멈추라는 말은 걱정할 일이 없다는 뜻인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와 함께 여러분이 구하는 것들이 하나님께 알려져야 합니다.빌립보서 4:6 · 본디새김

바울은 걱정의 범위를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만큼 부정하면서, 기도의 범위는 ‘모든 일’로 넓힙니다. 그렇다고 걱정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과 빌립보 사람들에게는 바울의 투옥, 공동체 내부의 어려움, 반대자들로부터 받는 압박, 물질적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걱정하는 감정이 생기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걱정할 만한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그 현실을 어떻게 하나님께 가져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기도와 간구에 ‘감사’를 덧붙입니다. 감사와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이미 받은 은혜를 하나님 앞에 함께 놓는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기를 구하는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하는 것들이 알려져야 합니다’

원문에서도 ‘알려지다(γνωρίζω)’에 해당하는 동사는 수동형 명령법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명령한 다음, 여러분의 구할 것들이 하나님께 알려지도록 하라는 구조로 말합니다. 기도의 중심을 기도 행위 자체에만 두지 않고, 자신의 필요와 요청이 하나님 앞에 놓이게 하는 데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모르시기 때문에 알려 드려야 하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6:8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구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없던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걱정하는 현실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아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무엇을 지키는가

그러면 모든 이해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입니다.빌립보서 4:7 · 본디새김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걱정거리를 즉시 해결하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구할 수 있지만, 여기서 바울이 약속하는 것은 해결된 상황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사람이 상황을 분석하여 충분히 이해한 끝에 얻는 평화보다 큽니다.

‘지킬 것입니다(φρουρέω)’는 감시하거나 경비를 서고 지키는 일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마음과 생각은 걱정이 자라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 자리를 하나님의 평화가 지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문제가 사라져야만 평화가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문제가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 평화는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안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은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을 품고, 공동체가 너그러움을 드러내기를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 걱정을 아뢰는 사람들은 동시에 서로에게 너그럽게 살아야 합니다.

기도와 화해는 이 편지에서 동떨어진 주제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너그러움’(에피에이케스)은 고대 그리스의 윤리적 논의에서 문자적인 규정만 고집하지 않고 형평을 고려하는 태도와 연결되었지만, 바울 시대의 실제 용례에서는 친절과 부드러움의 의미도 중요했습니다. 5절의 ‘주님이 가까이’를 주님의 현재적 임재로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7절의 ‘지키다’(프루레세이)는 군사적인 경비를 가리킬 수도 있고, 빌립보가 로마의 식민도시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경비의 이미지는 독자들에게 익숙했을 수 있습니다. 다만 바울이 반드시 빌립보의 구체적인 주둔군을 염두에 두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평화(샬롬)는 안녕과 온전함,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포함하는 폭넓은 의미를 지니며, 민수기 6:24–26의 제사장 축복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두 본문은 직접적인 인용 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평화를 주시고 지키신다는 주제에서 연결됩니다. 바울의 표현에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더해집니다.

평화는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4:8–9 본문 →

바울은 하나님의 평화를 약속한 뒤 곧바로 생각에 관한 권면을 시작합니다.

끝으로, 형제 여러분, 무엇이든 참된 것, 무엇이든 존경할 만한 것, 무엇이든 의로운 것, 무엇이든 순수한 것,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 무엇이든 평판이 좋은 것, 덕이 있으면, 또 칭찬할 만한 것이 있으면 그런 것들을 깊이 생각하십시오.빌립보서 4: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흔히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라는 권면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 목록에는 기분을 좋게 만드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이 참됩니까? 무엇이 올바릅니까? 무엇이 존중받을 만합니까? 무엇이 사람들 사이에서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현실을 왜곡하여 좋은 면만 보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것을 먼저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불편한 사실을 외면하고 긍정적인 말만 반복하라는 뜻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왜 그리스도인에게 일반적인 덕을 생각하라고 할까

‘덕’은 그리스 세계에서 도덕적 탁월함을 가리키는 중요한 말이었지만, 바울의 편지에서는 드물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도 참되고 존중받을 만한 것을 가리킬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자기 공동체 밖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과 아름다움을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와 다릅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칭찬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바울은 ‘참된 것’과 ‘의로운 것’을 함께 말합니다. 어떤 것이 인기를 얻거나 좋은 평판을 얻는다는 이유만으로 참되고 의롭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분별력 있는 평가를 요구합니다.

생각과 행동은 떨어져 있지 않다

여러분이 배우고 전해 받고 들은 것, 그리고 내게서 본 것을 행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빌립보서 4:9 · 본디새김

8절에서는 생각하라고 했고, 9절에서는 행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좋은 것을 생각하는 일 자체를 최종 목표로 삼지 않고, 그 생각이 실제적인 삶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도 빌립보 사람들이 이미 배우고 전해 받고 들었으며 바울에게서 보았던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추상적인 윤리 이론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실제 사람들의 삶을 통해 배우고, 듣고, 보고, 행하는 가운데 형성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완벽한 사람으로 제시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해 살아가면서 빌립보 사람들이 보아 온 삶을 다시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평화와 평화의 하나님

7절은 ‘하나님의 평화’를 말하고, 9절은 ‘평화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첫 번째 표현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두 번째 표현에서는 그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자신이 강조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평화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어떤 심리적 상태가 아닙니다.

그 약속은 참되고 의롭고 선한 것을 생각하고 행하는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평화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고요히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행동하고 선한 것을 생각하며 실천하는 삶 가운데 경험되는 평화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 편지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에게 보내 준 선물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감사는 앞선 권면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행했는지가 여기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덕’(아레테)이 바울의 편지에서 드문 표현이기 때문에, 8절을 그리스·로마 세계의 윤리적 언어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특정한 로마의 덕목 목록을 그대로 빌려 왔다고 확정할 근거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다시 꽃피운 마음

빌립보서 4:10 본문 →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 것은, 여러분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이제야 다시 꽃피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줄곧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빌립보서 4:10 · 본디새김

‘다시 꽃피웠다’는 다시 싹트거나 푸르게 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등장하며 식물이 다시 자라는 이미지가 담깁니다. 단순히 후원금이 도착했다는 설명보다 훨씬 따뜻한 표현입니다. 그들의 관심이 다시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선물이 도착하기 전까지 그들이 자신을 잊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마음의 부재가 아니라 기회의 부재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도움을 보내는 일이 늦어졌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이 계속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이 다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것을 기뻐합니다. 선물은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된 사건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던 마음이 이제 바울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10절의 ‘생각하는 마음’에는 앞 장까지 중요하게 나타났던 ‘생각하다(φρονέω)’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여러 차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지 이야기했고, 이제 빌립보 사람들이 자신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 마음은 단순한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선물을 보내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8–9절에서 생각하고 행하라고 했던 권면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을 생각했고, 기회가 생겼을 때 그의 필요를 채우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선물이 없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이야기하며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의 뜻

빌립보서 4:11–13 본문 →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형편에서든 자족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4:11 · 본디새김

바울은 선물을 기뻐하면서도, 그 기쁨이 단순히 궁핍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족하는’은 자신의 처지에서 충분함을 누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자족이 무엇에 근거하는지는 13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자기 자신에게 모든 것을 감당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족은 궁핍에 익숙해지는 일만이 아니다

나는 낮은 처지에 놓여 지낼 줄도 알고 있고, 넉넉한 형편에서 지낼 줄도 알고 있습니다. 배부름과 굶주림, 넉넉함과 모자람, 어떤 경우에든 이 모든 형편을 겪어 내는 비결을 전수받았습니다.빌립보서 4:12 · 본디새김

우리는 흔히 궁핍한 상황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자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넉넉한 형편에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웠다고 말합니다.

왜 넉넉함에도 배움이 필요할까요? 넉넉함은 사람에게 부족함과 다른 종류의 위험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이 충분할 때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에 지나치게 의지하거나, 풍요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최종적인 근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상황이 자신을 규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되지 않도록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비결을 전수받았다’는 특별한 표현

‘비결을 전수받았습니다(μυέομαι)’는 어떤 비밀이나 특별한 지식에 입문하여 배우는 것을 뜻할 수 있는 동사입니다. 바울은 자족을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터득한 비결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자족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낮은 처지와 넉넉한 형편을 모두 겪으면서 배웠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상황이 언제나 평탄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배고픔과 부족함을 겪었고, 그 과정을 지나며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근거를 발견했습니다. 그 근거를 13절이 밝힙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3 · 본디새김

‘모든 것’은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인가

이 구절은 시험에 합격하거나, 사업에 성공하거나, 어떤 어려운 목표를 이루려 할 때 용기를 주는 문장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문맥에서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 바울이 방금 열거한 여러 형편, 곧 낮은 처지와 넉넉함, 배부름과 굶주림, 풍요와 부족함을 포함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능력은 원하는 결과를 반드시 얻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원하는 일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과,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붙드신다는 확신은 다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그는 배고픔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상황을 겪어 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바울이 정말로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면, 빌립보 사람들이 보내 준 선물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의 자족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일까요? 바울은 바로 다음 절에서 그 오해를 막습니다.

조금 더 깊이

‘자족하는’(아우타르케스)은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스토아 철학의 자족 개념과 연결하여 설명되기도 합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외부 환경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과 덕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태도가 중요했고, 바울의 표현은 이런 언어와 접점을 지닙니다. ‘비결을 전수받았다’(메뮈에마이)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신비 종교에 입문하는 행위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지만, 여기서는 여러 형편을 경험하며 그에 대처하는 법을 익혔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 단어가 반드시 바울이 특정 신비 종교의 의식을 의도적으로 암시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족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뻐한다

빌립보서 4:14–17 본문 →

그래도 여러분이 내 고난을 함께 나눈 것은 잘한 일입니다.빌립보서 4:14 · 본디새김

14절의 첫마디는 ‘그래도’입니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지만, 빌립보 사람들이 자신을 도운 일이 불필요하거나 의미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잘했다고 분명히 인정합니다.

자족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선언이 아니며, 받은 도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도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삶이 궁극적으로 지탱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도, 빌립보 사람들이 자신의 고난을 함께 나누었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물질적인 지원이 고난의 참여가 되다

바울은 단순히 돈을 보내 주었다고 하지 않고 ‘내 고난을 함께 나눈 것’이라고 말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과 같은 감옥에 갇히지 않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의 어려움에 실제로 참여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나누어 그의 짐을 덜어 주었습니다.

복음의 공동체는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고난을 자기와 무관한 일로 여기지 않고, 그 관심이 실제적인 도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처음부터 함께했다

빌립보 사람 여러분,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던 무렵, 곧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셈으로 나와 함께한 교회는 여러분 말고는 없었습니다.빌립보서 4:15 · 본디새김

그들은 최근에 갑자기 바울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들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의 복음 사역에 참여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습니다(4:16). 그들의 도움은 일시적인 감정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의 표현이었습니다.

바울은 왜 장부의 언어를 사용하는가

15절의 ‘주고받는 셈(δόσις)’은 원문에서 ‘줌과 받음’이 나란히 놓인 표현으로, 고대의 금전 거래나 회계 기록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실제로 공동체와 주고받은 물질적 관계를 설명하면서 장부의 이미지를 활용한다고 이해할 근거가 있습니다. 이 표현은 17절에서 다른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선물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계정에 쌓이는 열매를 바라는 것입니다.빌립보서 4:17 · 본디새김

바울이 선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선물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돈을 받는 사람이면서도 그 돈을 준 사람에게 어떤 열매가 맺히는지를 생각합니다. 상업적인 거래에서는 서로 주고받는 것의 가치를 계산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베푼 일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계정에 일정한 금전적 보상을 적립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베풂이 하나님 앞에서 열매 맺는 행위라는 사실을 회계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유익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도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을 더 바랍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서로 분리된 위치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함께 복음에 참여합니다.

장부에서 제단으로

빌립보서 4:18 본문 →

나는 모든 것을 받았고 남을 만큼 가졌습니다. 에바브로디도 편에 여러분이 보낸 것을 받아 가득 찼습니다. 그것은 향내이고, 받으실 만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입니다.빌립보서 4:18 · 본디새김

바울의 자족이 물질적 필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 드러납니다. 그에게는 필요한 것이 있었고, 빌립보 사람들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그것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장의 후반부에서 그 선물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돈을 주고받는 회계의 언어가 사용되었지만, 이제는 제사의 언어가 사용됩니다. 선물은 향내가 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됩니다.

왜 물질적인 선물이 향내가 되는가

‘향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의 제사와 연결됩니다. 창세기 8:21에서 노아가 번제를 드린 뒤 여호와야훼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오고, 레위기에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향기로운 것으로 표현하는 말이 반복됩니다(레 1:9, 1:13, 1:17 등). 그 본문에서 향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가 그분 앞에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은 바로 그 언어를 빌립보 사람들이 보낸 물질적 선물에 적용합니다. 복음을 위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물질과 영적인 삶을 서로 무관한 것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보냈는데,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빌립보 사람들이 선물을 보낸 대상은 바울이었고, 에바브로디도가 그 선물을 가져왔고, 바울이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선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바울 개인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그의 필요를 채웠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모든 금전적 기부가 자동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된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특정한 공동체가 복음을 위해 실제로 베푼 도움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행동의 동기와 관계, 목적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선행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체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섬김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가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에 근거한 공동체의 삶이 예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마지막 선물

처음에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함께 몫을 나누어 온 것을 감사했습니다(1:5). 편지 가운데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노예의 모습을 취하신 일을 이야기했고,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수고한 모습을 소개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서 빌립보 사람들의 구체적인 선물이 처음부터 계속되어 온 복음의 참여가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 줍니다.

장부에 기록될 수 있는 돈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내로 묘사됩니다. 복음에 참여하는 삶이 일상의 물질적 행동까지 새롭게 규정한다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신의 필요가 채워졌다고 말한 직후, 빌립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실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제사를 드리는 행동과 하나님께 순종하며 정의롭게 살아가는 일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반복해서 경고했습니다. 이사야 1:11–17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불의한 삶을 지속하면서 드리는 제사를 책망하시고 악행을 멈추고 정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제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선언이 아니라 예배가 실제적인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조입니다. 빌립보서 4:18은 이사야의 본문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사람들 사이의 실제적인 행동이 분리될 수 없다는 주제적 연결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1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살아 있는 제물로 바치라고 권면하며, 빌립보서 4장은 그 원리를 아주 구체적인 상황에서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채워 주시는가

빌립보서 4:19–20 본문 →

나의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있는 그분의 풍성함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빌립보서 4:1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종종 물질적인 풍요를 약속하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은 같지 않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빌립보 사람들이 바울에게 돈을 보냈으므로 하나님께서 더 많은 돈으로 보상하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하지만, 선물을 보내는 사람에게 더 큰 물질적 이익이 보장된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주시는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기준을 ‘그분의 풍성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은 빌립보 사람들이 보내 준 선물의 크기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과 돈을 주고받는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을 투자하여 더 많은 수익을 얻는 거래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추상적인 종교적 원리를 설명하지 않고, 자신이 궁핍과 풍요를 모두 겪으며 의지해 온 하나님께서 빌립보 사람들의 필요도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채움의 반복이 보여 주는 것

18절의 ‘가득 찼습니다(πληρόω)’와 19절의 ‘채워 주실 것입니다’는 원문에서 같은 동사 ‘채우다·가득하게 하다’에서 나옵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의 필요를 채웠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누가 더 많이 주는가를 비교하는 경쟁이 없고,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궁극적인 분이 누구신지 드러납니다.

바울은 받았고,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을 감사하면서도 그 선물이 하나님의 풍성함을 대신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의 사랑도, 바울의 자족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 안에서 이해됩니다.

하나님의 공급은 궁핍의 가능성을 없애는가

바울은 바로 앞에서 굶주림과 부족함을 실제로 겪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19절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부족함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읽으면, 바울 자신의 경험과 충돌합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우신다는 믿음과 사람이 실제로 궁핍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편지에서 함께 나타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공급 방식을 단순한 공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신뢰는 물질적인 도움을 통해 나타날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언제나 풍요로운 형편에 놓일 것이라는 보장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우신다는 믿음은 원하는 형편만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신뢰로 이어집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이 모든 이야기를 찬양으로 마무리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빌립보서 4:20 · 본디새김

빌립보 사람들이 선물을 보냈고 바울은 그것을 받았지만, 마지막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베푼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무관한 독립적인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함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음의 참여입니다.

황제의 집에 속한 사람들이 보내는 문안

빌립보서 4:21–23 본문 →

편지의 마지막에는 문안이 이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문안하십시오.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빌립보서 4:21 · 본디새김

바울은 공동체 전체를 향해 편지를 썼지만, 마지막에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문안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를 하나의 집단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있고, 그들을 도울 동역자가 있고,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22절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특히 황제의 집에 속한 이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빌립보서 4:22 · 본디새김

이들을 로마 황제의 직계 가족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황제의 집’이라는 표현은 황제의 노예, 해방노예,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 등 황실과 연결된 다양한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황제의 집에 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빌립보 사람들에게 문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높은 권력의 집에서 오는 문안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도시였고, 바울은 갇혀 있는 상태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편지의 끝에서는 로마 제국의 권력과 연결된 집안에 속한 사람들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문안을 보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높은 지위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 안의 성도로서 문안에 참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빌립보서 3:20의 하늘 시민권에 관한 말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로마 식민도시의 신자들과 황제의 집에 속한 신자들이 같은 예수님 안에서 서로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예수님 안의 공동체는 서로 다른 장소와 신분에 속한 사람들을 연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편지를 어떤 이름으로 끝냅니까? 황제의 이름도, 자신의 이름도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빌립보서 4:23 · 본디새김

빌립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충분히 권면한 뒤에도,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마지막 근거는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는 명령으로 편지를 닫지 않습니다. 은혜를 비는 말로 닫습니다.

조금 더 깊이

‘황제의 집’이라는 표현의 정확한 범위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4:22의 표현이 독특하며, 그것을 언제나 황제의 행정 조직 전체를 가리키는 고정된 전문 용어로 이해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한 구절을 근거로 바울이 반드시 로마의 황궁에서 복음을 전했거나 황제의 직계 가족을 회심시켰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꽃피운 마음이 도착하다

빌립보서 4:1–23 본문 →

바울은 자족하는 사람이지만,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힘을 주신다고 말하면서도 빌립보 사람들의 도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면서도 그 필요가 실제 사람들의 선물을 통해 채워졌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삶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독립하는 삶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더 깊이 헤아리고 함께 나누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의 자족은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자기완결성이 아니라, 예수님께 의지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자유입니다.

바울은 갇혀 있습니다. 넉넉함도 궁핍도 겪은 그에게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사람들의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은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그가 가장 기뻐하는 것은 물질적인 필요가 해결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빌립보 사람들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을 다시 꽃피웠다는 사실입니다. 그 선물은 바울의 손에 도착했지만, 바울은 그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내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빌립보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황제의 집에 속한 사람들까지 보내는 문안을 전한 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라는 말로 편지를 닫습니다.

편지는 은혜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은혜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 기쁨도 있었고 갈등도 있었습니다. 고난과 궁핍이 있었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과 실제적인 선물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손에는 그들이 보내 준 선물이 있고, 그의 마음에는 그들을 향한 감사가 있으며, 그의 마지막 말에는 예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