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권면과 끝인사

받은 사람과 채우시는 하나님

빌립보서의 마지막 장에는 뜻밖의 긴장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 형편에서도 만족하며 지내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배부름과 배고픔, 넉넉함과 부족함을 모두 겪어 낼 수 있고, 자신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몇 절 뒤에서는 빌립보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내 준 물질적인 도움을 이야기하며 크게 기뻐합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그렇게 기뻐하는 것일까요?

더욱 이상한 것은 그가 감사하는 방식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선물을 보내 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이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는 그 선물이 자기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보다, 그들이 베푼 일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이 장에는 두 번의 ‘채움’이 등장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이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채웠습니다(「필요한 것이 가득 채워졌습니다」, 18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19절). 바울이 이 편지에서 말해 온 그리스도 안의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바울은 그 이야기에 이르기 전에 공동체 안의 갈등을 다루고, 기뻐하라고 말하며, 걱정 대신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참되고 아름답고 칭찬할 만한 것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주제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본문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물음이 떠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주고받으며,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삶입니까?

빌립보서 4장은 이 질문에 추상적인 원칙으로만 대답하지 않습니다. 서로 의견이 달라진 두 여성, 그들을 도와야 하는 한 동료, 걱정하는 공동체, 부족함을 겪는 바울, 먼 길을 거쳐 도착한 선물, 그리고 마지막 안부를 나누는 사람들을 통해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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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

빌립보서 4:1–3 본문 →

4장은 특별히 다정한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나의 기쁨이며 승리의 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서 굳게 서십시오.빌립보서 4:1 · 두루새김

승리의 관이라는 말은 고대 세계에서 경기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기쁨이자 승리의 관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자신이 받은 높은 지위나 이룬 일이 아니라 사람들, 곧 빌립보 교회 자체입니다. 이것은 앞 장에서 바울이 자신이 이룬 일을 자랑할 근거로 삼지 않겠다고 말한 것과도 잘 어울립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고백 직후에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나는 유오디아에게 권하고 순두게에게도 권합니다. 두 사람 모두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빌립보서 4:2 · 두루새김

왜 바울은 두 사람을 따로 권하는가

「유오디아에게 권하고」라는 말 뒤에 「순두게에게도 권합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문에서도 ‘권하다·간청하다’라는 동사가 두 번 반복됩니다. 바울은 두 사람을 한꺼번에 묶어 꾸짖지 않고, 두 사람에게 같은 요청을 각각 제시합니다.

이 표현에서 반드시 두 사람의 책임이 똑같았다고 짐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한 사람만 지목하여 문제의 원인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전통적으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개인적인 갈등을 겪고 있었으며 그것이 공동체의 하나 됨을 해치고 있었다고 이해해 왔고, 이 해석은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두고 의견이 달랐는지, 실제로 개인적인 다툼이 있었는지, 혹은 복음을 전하는 일의 방향에 관한 차이가 있었는지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을 단순히 다투는 여성들로 묘사해 온 해석의 관행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빌립보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복음의 동료였다는 사실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읽기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두 사람의 지난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진실한 동료인 당신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두 여성을 도와주십시오. 그들은 클레멘스와 나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복음을 위해 나와 힘을 모아 싸운 사람들입니다. 이들 모두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적혀 있습니다.빌립보서 4:3 · 두루새김

바울은 두 사람을 문제를 일으킨 사람으로만 기억하지 않습니다. 「힘을 모아 싸운」이라는 표현의 원문에는 앞서 빌립보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함께 싸우기를 바란다고 말할 때 사용된 동사가 다시 등장합니다(1:27). 바울이 공동체 전체에 요청했던 일을 이 두 여성은 이미 자신과 함께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주변에 머무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수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등보다 더 깊은 정체성

바울은 두 사람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하면서, 「이들 모두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적혀 있습니다」라고 밝힙니다.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생각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그 표현을 사용해 두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두 사람을 서로 반대편에 선 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갈등 때문에 두 사람의 과거 전체를 부정하지 않고, 그들이 복음을 위해 수고했다는 이유로 지금 필요한 화해의 요청을 생략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같은 마음을 품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보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가를 먼저 기억합니다.

화해는 당사자들만의 책임인가

3절에서 바울은 말을 받는 사람을 한 사람으로 좁힙니다. 편지 전체에서 공동체를 향해 「여러분」이라고 말하다가, 이 대목에서는 특정한 한 사람을 「당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동료」에 해당하는 쉬지고스(σύζυγος)는 본래 멍에를 함께 멘 사람을 뜻하므로, 함께 일하는 동료나 동반자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쉬지고스’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읽는 견해도 있으며, 원문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에게 무엇을 부탁하는가입니다. 두 사람을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요청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다른 동료에게도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갈등이 있는 두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도울 수 있고, 함께 일했던 관계가 다시 바로 서도록 곁에서 수고할 수 있습니다.

화해가 필요한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다시 함께 서야 할 복음의 동료들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에서 하나 됨을 추상적인 원칙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 바로 다음에 언제나 기뻐하라는 권면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생명의 책과 이어지는 구약 본문으로, 출애굽기 32:32–33에서는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 가운데 하나님의 책이 등장하고, 다니엘 12:1에서는 책에 기록된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기쁨과 걱정 사이에서 하나님의 평화가 지키는 것

빌립보서 4:4–7 본문 →

주님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하겠습니다. 기뻐하십시오.빌립보서 4:4 · 두루새김

바울은 두 사람 사이에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한 직후에 기쁨을 요청합니다. 따라서 이 기쁨은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권면이 아니라,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공동체를 향한 권면입니다. 또한 바울 자신도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언제나」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가 기쁨의 근거를 상황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기쁨의 근거는 원하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슬픔을 느끼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에바브로디도가 죽을 뻔했던 일을 돌아보면서 슬픔을 이야기했습니다(2:27). 그가 요청하는 기쁨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잃지 않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기쁨 다음에 왜 너그러움이 나오는가

여러분의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빌립보서 4:5 · 두루새김

「너그러움」은 단순히 온순하거나 부드러운 성격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엄격하게 주장하기보다 상황과 사람을 헤아려 너그럽게 행동하는 태도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이 자기 입장만 주장한다면, 서로 옳은 말을 할 수는 있어도 함께 살아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리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을 헤아릴 수 있는 태도를 요구합니다. 「모든 사람이 알게 하십시오」라는 말처럼, 너그러움은 공동체 안에서만 통하는 태도가 아니라 바깥사람들에게도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의 삶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실제적인 태도를 통해 알려집니다.

바울은 그 근거로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라는 짧은 문장을 덧붙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지금 가까이 계시다는 뜻으로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깝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은 「가까이」가 거리의 의미인지 시간의 의미인지 문법적으로 확정하지 않으므로, 이 자리에서 어느 하나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면,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끝까지 지켜 내는 일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오심이 가깝다면, 그들은 지금의 갈등을 삶의 마지막 문제처럼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꿉니다.

걱정을 멈추라는 말은 걱정할 일이 없다는 뜻인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모든 일에서 감사하며 기도하고 간절히 구하여,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빌립보서 4:6 · 두루새김

바울은 걱정의 범위를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만큼 부정하면서, 기도의 범위는 「모든 일」로 넓힙니다. 그렇다고 걱정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과 빌립보 사람들에게는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일, 공동체 안의 어려움, 반대자들로부터 받는 압박, 생활에 필요한 것들처럼 실제로 걱정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걱정하는 감정이 생기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걱정할 만한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그 현실을 어떻게 하나님께 가져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기도는 자신의 필요를 하나님께 알리는 일이고, 감사는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며 기도한다는 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이미 받은 은혜를 하나님 앞에 함께 놓는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기를 구하는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원문에서는 ‘알려지다’에 해당하는 동사가 수동형 명령법으로 쓰여, 여러분이 바라는 것이 하나님께 알려지도록 하라는 구조로 말합니다. 기도의 중심을 우리의 기도 행위 자체에만 두지 않고, 자신의 필요와 요청이 하나님 앞에 놓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모르시기 때문에 우리가 알려 드려야 하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6:8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구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없던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걱정하는 현실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말씀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무엇을 지키는가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줄 것입니다.빌립보서 4:7 · 두루새김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걱정거리를 즉시 해결하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문제의 해결과 같은 것으로 보기 쉽고, 물론 문제의 해결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약속하는 것은 해결된 상황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상황을 살펴 충분히 이해한 끝에 얻는 평화보다 큰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지켜 줄 것입니다」(φρουρέω)로 옮긴 동사는 감시하거나 경비를 서고 지키는 일을 나타내며, 군사적인 경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은 걱정이 자라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 자리를 하나님의 평화가 지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문제가 사라져야만 평화가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문제가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 평화는 개인의 마음이 안정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은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을 품고, 공동체가 너그러움을 드러내기를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 걱정을 말씀드리는 사람들은 동시에 서로에게 너그럽게 살아야 하며, 기도와 화해는 이 편지에서 동떨어진 주제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너그러움」에 해당하는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 옳은 행동을 논할 때 글로 적힌 규정만 고집하지 않고 형편에 맞게 공정함을 생각하는 태도와 연결되었지만, 바울 시대에 실제로 쓰일 때는 친절과 부드러움의 의미도 중요했습니다. 「지켜 줄 것입니다」의 경비 이미지는 빌립보가 로마의 식민도시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독자들에게 익숙했을 수 있습니다. 다만 바울이 반드시 빌립보에 머물던 특정 군대를 염두에 두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나 마음이 고요한 상태만이 아니라 안녕과 온전함,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포함하는 폭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민수기 6:24–26의 제사장 축복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두 본문은 직접적인 인용 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평화를 주시고 지키신다는 주제에서 연결되며, 바울은 그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고 덧붙입니다.

평화는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4:8–9 본문 →

바울은 하나님의 평화를 약속한 뒤 곧바로 생각에 관한 권면을 시작합니다.

끝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 참된 것, 무엇이든 존중할 만한 것, 무엇이든 바른 것, 무엇이든 순수한 것,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 무엇이든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어떤 것이든 훌륭하거나 칭찬할 만하다면 그런 것들을 마음에 두십시오.빌립보서 4:8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흔히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라는 권면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분 좋은 생각만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목록에는 기분을 좋게 만드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이 참됩니까?

무엇이 올바릅니까?

무엇이 존중받을 만합니까?

무엇이 사람들 사이에서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현실을 왜곡하여 좋은 면만 보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참된 것을 먼저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불편한 사실을 외면하고 긍정적인 말만 반복하라는 뜻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왜 그리스도인에게 일반적인 덕을 생각하라고 할까

「훌륭하거나」(ἀρετή)로 옮긴 말은 그리스 세계에서 도덕적으로 뛰어난 덕을 가리키는 중요한 말이었고, 바울의 편지에서는 드물게 사용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설명하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도 참되고 존중받을 만한 것을 가리킬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공동체 밖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과 아름다움을 무조건 거부해야 한다는 태도와 다릅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칭찬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바울은 「참된 것」과 「바른 것」을 함께 말합니다. 어떤 것이 인기를 얻거나 좋은 평판을 얻는다는 이유만으로 참되고 바르다고 판단해서는 안 되며, 그는 잘 분별하여 판단할 것을 요구합니다.

생각과 행동은 떨어져 있지 않다

여러분이 내게서 배우고 전해 받고 듣고 본 것을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빌립보서 4:9 · 두루새김

8절에서는 생각하라고 했고, 9절에서는 실천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좋은 것을 생각하는 일 자체를 최종 목표로 삼지 않고, 그 생각이 실제적인 삶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추상적인 윤리 이론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실제 사람들의 삶을 통해 배우고, 듣고, 보고, 실천하는 가운데 형성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완벽한 사람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해 살아가면서 빌립보 사람들이 보아 온 삶을 다시 가리키며, 그들이 배운 복음과 실제로 본 삶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평화와 평화의 하나님

7절은 「하나님의 평화」를 말합니다.

9절은 「평화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첫 번째 표현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두 번째 표현에서는 그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자신이 강조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평화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어떤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지며 평화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평화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고요히 있는 상태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행동하고, 선한 것을 생각하며 실천하는 삶 가운데 경험되는 평화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 편지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에게 보내 준 선물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감사는 앞선 권면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실천했는지가 여기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훌륭하거나」로 옮긴 말이 바울의 편지에서 드물게 쓰이기 때문에, 이 구절을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옳은 삶을 말하던 언어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특정한 로마의 덕목 목록을 그대로 빌려 왔다고 확정할 근거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다시 꽃피운 마음

빌립보서 4:10 본문 →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여러분은 줄곧 나를 생각하면서도 그 마음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마침내 그 마음을 다시 꽃피웠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4:10 · 두루새김

「다시 꽃피웠기」(ἀναθάλλω)로 옮긴 말은 다시 싹트거나 푸르게 자라는 것을 나타내며, 식물이 다시 자라는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후원금이 도착했다는 설명보다 훨씬 따뜻한 표현입니다. 그들의 관심이 다시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선물이 도착하기 전까지 그들이 자신을 잊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줄곧 나를 생각하면서도 그 마음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는데」라는 말처럼, 문제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이 감사의 의미를 바꾸어 놓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도움을 보내는 일이 늦어졌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이 계속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이 다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것을 기뻐합니다. 선물은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된 사건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던 마음이 이제 바울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나를 생각하면서도」와 「그 마음」으로 옮긴 원문에는, 앞 장까지 바울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지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쓰인 ‘생각하다’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제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지 말합니다. 그 마음은 단순한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선물을 보내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8–9절에서 생각하고 실천하라고 했던 권면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을 생각했고, 기회가 생겼을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을 채우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선물이 없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이야기하며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형편에서도 만족하며 지내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다시 꽃피웠기」로 옮긴 그리스어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등장합니다.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의 뜻

빌립보서 4:11–13 본문 →

내게 부족한 것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형편에서든 만족하며 지내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4:11 · 두루새김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의 선물을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기쁨이 단순히 부족함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족하며」(αὐτάρκης)로 옮긴 말은 자신의 처지에서 충분함을 누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누리는 만족이 무엇에 근거하는지는 13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자기 자신에게 모든 것을 감당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족은 궁핍에 익숙해지는 일만이 아니다

나는 가난하게 지내는 법도 알고 넉넉하게 지내는 법도 압니다.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넉넉할 때나 부족할 때나, 어떤 형편에서도 지내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빌립보서 4:12 · 두루새김

우리는 흔히 부족한 상황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자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넉넉한 형편에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웠다고 말합니다.

왜 넉넉함에도 배움이 필요할까요?

넉넉함은 사람에게 부족함과 다른 종류의 위험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이 충분할 때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에 지나치게 의지하고, 넉넉함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최종적인 근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상황이 자신을 규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되지 않도록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비결을 배웠습니다」라는 특별한 표현

「비결을 배웠습니다」(μυέομαι)는 원어에서 어떤 비밀이나 특별한 지식에 입문하여 배우는 것을 뜻할 수 있는 동사이며, 여기서는 여러 형편을 경험하며 그에 대처하는 법을 익혔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바울은 만족하며 지내는 일을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터득한 비결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만족하며 지내는 법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가난한 형편과 넉넉한 형편을 모두 겪으면서 배웠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상황이 언제나 평탄해지는 것은 아니었고, 바울은 실제로 배고픔과 부족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나며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근거를 발견했고, 그 근거를 13절이 밝힙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3 · 두루새김

「이 모든 일」은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인가

이 구절은 시험에 합격하거나, 사업에 성공하거나, 어떤 어려운 목표를 이루려 할 때 용기를 주는 문장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문맥에서 「이 모든 일」은 먼저 바울이 방금 나열한 가난함과 넉넉함, 배부름과 배고픔, 풍요와 부족함을 포함합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목표를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는 일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과,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붙드신다는 확신은 다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뒤의 확신에 가깝습니다. 그는 배고픔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상황을 겪어 냅니다.

바울의 고백은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루는 능력이 아니라, 뜻대로 되지 않는 형편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바울이 정말로 어떤 형편에서도 만족하며 지낼 수 있다면, 그가 누리는 만족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일까요? 바울은 바로 다음 절에서 그 오해를 막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만족하며」로 옮긴 말은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자족, 곧 외부 환경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과 덕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삶과 연결하여 설명되기도 하며, 바울의 표현은 이런 언어와 맞닿아 있습니다. 「비결을 배웠습니다」로 옮긴 동사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신비 종교에 입문하는 행위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지만, 이 단어가 반드시 바울이 특정 신비 종교의 의식을 의도적으로 암시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족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뻐한다

빌립보서 4:14–17 본문 →

그렇지만 여러분이 내 고난을 함께 나눈 것은 잘한 일입니다.빌립보서 4:14 · 두루새김

14절은 「그렇지만」으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 형편에서도 만족하며 지내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지만, 빌립보 사람들이 자신을 도운 일이 필요 없거나 의미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잘했다고 분명히 인정합니다.

자족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선언도,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도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도 아닙니다.

물질적인 지원이 고난의 참여가 되다

바울은 단순히 돈을 보내 주었다고 하지 않고 「내 고난을 함께 나눈 것」이라고 말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이 바울과 같은 감옥에 갇힌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나누어 그의 짐을 덜어 주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행동을 자신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로 이해합니다.

복음의 공동체는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고난을 자기와 무관한 일로 여기지 않고, 그 관심이 실제적인 도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처음부터 함께했다

빌립보 사람 여러분,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이 처음 전해지던 무렵,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을 나와 함께한 교회는 여러분뿐이었습니다.빌립보서 4:15 · 두루새김

그들은 최근에 갑자기 바울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들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의 복음 사역에 참여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한 번이 아니라 거듭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습니다(4:16). 빌립보 사람들의 도움은 잠깐의 감정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계속 이어져 온 관계의 표현이었습니다.

바울은 왜 장부의 언어를 사용하는가

15절의 「주고받는 일」(δόσις)은 원문에서 ‘줌과 받음’이 나란히 놓인 말로, 상업적인 거래나 회계 기록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이 실제로 공동체와 주고받은 물질적 관계를 설명하면서 장부의 이미지를 활용한다고 이해할 근거가 있습니다. 이 표현은 17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장부에 이익으로 더해지는 열매가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빌립보서 4:17 · 두루새김

바울이 바라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선물이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돈을 받는 사람이면서도 그 돈을 준 사람에게 어떤 열매가 맺히는지를 생각합니다. 상업적인 거래에서는 주고받는 것의 가치를 계산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베푼 일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것을 하나님께서 빌립보 사람들의 장부에 일정한 금전적 보상을 쌓아 주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베풂이 하나님 앞에서 열매 맺는 행위라는 사실을 회계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바울은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신에게 이로운 것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도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을 더 바랍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서로에게 이로운 것을 생각하는 공동체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줍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서로 떨어진 위치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함께 복음에 참여합니다.

장부에서 제단으로

빌립보서 4:18 본문 →

나는 모든 것을 받았고, 남을 만큼 넉넉합니다. 에바브로디도에게서 여러분이 보낸 것을 받아 필요한 것이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것은 좋은 향기와 같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고 기뻐하시는 제물입니다.빌립보서 4:18 · 두루새김

이것은 실제적인 물질적 도움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자족이 물질적 필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 드러납니다. 그는 필요한 것이 있었고, 빌립보 사람들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그것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장의 뒷부분에서 그 선물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돈을 주고받는 회계의 언어가 사용되었다면, 이제는 제사의 언어가 사용됩니다. 선물은 좋은 향기와 같아지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며 기뻐하시는 제물이 됩니다.

왜 물질적인 선물이 향내가 되는가

「좋은 향기」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의 제사와 연결됩니다. 창세기 8:21에서 노아가 번제를 드린 뒤 여호와야훼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오고, 레위기에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향기로운 것으로 표현하는 말이 반복됩니다(레 1:9, 1:13, 1:17 등). 그 본문에서 향기는 단순히 냄새가 좋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가 그분 앞에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은 바로 그 언어를 빌립보 사람들이 보낸 물질적 선물에 적용합니다. 복음을 위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물질과 영적인 삶을 서로 무관한 것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보냈는데,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빌립보 사람들이 선물을 보낸 대상은 바울이었고, 에바브로디도가 그 선물을 가져왔으며, 바울이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선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받은 사람은 바울인데, 그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해석됩니다.

그들이 단순히 바울 개인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그의 필요를 채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물은 예수님의 일을 위한 섬김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모든 금전적 기부가 자동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된다고 넓혀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특정한 공동체가 복음을 위해 실제로 베푼 도움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행동을 한 마음과 관계, 목적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선행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구원에 바탕을 둔 공동체의 삶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의 마지막 선물

처음에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함께 몫을 나누어 온 것을 감사했습니다(1:5). 편지 가운데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노예의 모습을 취하신 일을 이야기했고,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다른 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위해 수고한 모습을 소개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서 빌립보 사람들의 구체적인 선물이 처음부터 계속되어 온 복음의 참여가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 줍니다.

장부에 기록될 수 있는 돈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좋은 향기로 묘사됩니다. 복음에 참여하는 삶은 일상의 물질적 행동까지 새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신의 필요가 채워졌다고 말한 직후, 빌립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실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의 예언자들은 제사를 드리는 행동과 하나님께 순종하며 정의롭게 살아가는 일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반복해서 경고했습니다. 이사야 1:11–17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불의한 삶을 지속하면서 드리는 제사를 책망하시고, 악행을 멈추고 정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본문은 제사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실제적인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빌립보서 4:18이 이사야의 본문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예배와 사람들 사이의 실제적인 행동이 분리될 수 없다는 주제적 연결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1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살아 있는 제물로 바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채워 주시는가

빌립보서 4:19–20 본문 →

나의 하나님께서는 영광 가운데 있는 그분의 풍성함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빌립보서 4:19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종종 물질적인 풍요를 약속하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은 같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바라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약속도, 빌립보 사람들이 바울에게 돈을 보냈으므로 하나님께서 더 많은 돈으로 보상하신다는 약속도 아닙니다. 문맥에서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의 필요를 채워 주었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주시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기준은 「그분의 풍성함」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은 빌립보 사람들이 보내 준 선물의 크기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과 돈을 주고받는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을 투자하여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거래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막연한 종교적 원리가 아니라, 자신이 가난함과 넉넉함을 모두 겪으며 의지해 온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빌립보 사람들의 필요도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채움의 반복이 보여 주는 것

18절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가득 채워졌습니다」라고 말하고, 1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빌립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 두 표현은 ‘채우다·가득하게 하다’라는 같은 동사에서 나와, 두 절을 강하게 연결합니다.

여기에는 누가 더 많이 주는가를 비교하는 경쟁이 없고, 모든 필요를 끝내 채우시는 분이 누구신지 드러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을 감사하면서도, 그 선물이 하나님의 풍성함을 대신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의 사랑도, 바울의 자족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 안에서 이해됩니다.

바울은 받았고,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급은 궁핍의 가능성을 없애는가

바울은 바로 앞에서 자신이 실제로 가난하게 지냈고, 배고픔과 부족함도 겪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19절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부족함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읽으면, 바울 자신의 경험과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우신다는 믿음과 사람이 실제로 가난함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편지에서 함께 나타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시는 방식을 단순한 공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신뢰는 물질적인 도움을 통해 나타날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언제나 넉넉한 형편에 놓일 것이라는 보장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우신다는 믿음은 원하는 형편만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신뢰로 이어집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이 모든 이야기를 찬양으로 마무리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빌립보서 4:20 · 두루새김

빌립보 사람들이 선물을 보냈고, 바울은 그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베푼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무관하게 따로 이루어지는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함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음의 참여입니다.

황제의 집에 속한 사람들이 보내는 문안

빌립보서 4:21–23 본문 →

편지의 마지막에는 안부 인사가 이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나와 함께 있는 형제자매들이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빌립보서 4:21 · 두루새김

바울은 공동체 전체를 향해 편지를 썼지만, 마지막에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부를 전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를 하나의 집단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있고, 그들을 도울 동료가 있으며,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 준 사람들과 편지를 듣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22절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특히 황제의 집에 속한 사람들이 안부를 전합니다.빌립보서 4:22 · 두루새김

「황제의 집에 속한 사람들」을 로마 황제의 직계 가족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이 표현은 황제의 노예, 노예 신분에서 풀려난 사람, 행정 업무를 맡은 사람 등 황실과 연결된 다양한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한 구절을 근거로 바울이 반드시 로마의 황궁에서 복음을 전했거나 황제의 직계 가족을 믿음으로 이끌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빌립보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높은 권력의 집에서 오는 문안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도시였고, 바울은 갇혀 있는 상태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편지의 끝에서는 로마 제국의 권력과 연결된 집안에 속한 사람들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들의 정확한 신분이나 지위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떤 공동체에 속하여 누구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빌립보서 3:20의 하늘 시민권에 관한 말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로마 제국의 여러 사회적 위치에 속해 있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서로를 성도로 부르고 안부를 나눕니다. 예수님 안의 공동체는 서로 다른 장소와 신분에 속한 사람들을 연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편지를 어떤 이름으로 끝냅니까?

황제의 이름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름도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빌립보서 4:23 · 두루새김

빌립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충분히 권한 뒤에도,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마지막 근거는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는 명령으로 편지를 닫지 않습니다. 은혜를 비는 말로 닫습니다.

조금 더 깊이

「황제의 집」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어디까지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4:22의 표현이 독특하며, 그것을 언제나 황제의 행정 조직 전체를 가리키는 고정된 전문 용어로 이해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다시 꽃피운 마음이 도착하다

빌립보서 4:1–23 본문 →

바울은 자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힘을 주신다고 말하면서도 빌립보 사람들의 도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면서도 그 필요가 실제 사람들의 선물을 통해 채워졌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삶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독립하는 삶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더 깊이 헤아리고 함께 나누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배운 자족은 아무것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힘을 주시는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다른 사람의 사랑을 기쁘게 받고, 자신이 받은 것으로 그들에게 이로운 것을 생각하는 삶이었습니다.

빌립보서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갇혀 있습니다. 넉넉함도 가난함도 경험한 그에게,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사람들이 보낸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물질적인 필요가 해결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을 다시 꽃피웠다는 사실입니다.

그 선물은 바울의 손에 도착했지만, 바울은 그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좋은 향기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하나님께서 빌립보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황제의 집에 속한 사람들까지 안부를 전하는 가운데,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라는 마지막 인사를 남깁니다.

편지는 은혜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은혜로 끝납니다.

바울의 손에는 그들이 보내 준 선물이 있고, 그의 마음에는 그들을 향한 감사가 있으며, 그의 마지막 말에는 예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