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참된 자랑
붙잡힌 사람이 달립니다
빌립보서 3장에는 한 사람의 삶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뀌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한때 무엇을 자랑할 수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 출신이었고, 베냐민 지파에 속했으며, 율법을 철저히 따르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열심을 증명할 행동도 있었습니다. 교회를 괴롭히고 억눌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자신에게 이익이 되던 것들을 손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과거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그는 이유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귀하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8절). 더 나은 도덕적 원칙을 발견했다고도, 몰랐던 어떤 진리를 배웠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한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게 된 일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평가하는 기준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가장 놀라운 변화는 바울이 무엇을 버렸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바울은 「나는 그것을 붙잡으려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12절).
이것은 역설입니다.
보통 사람은 아직 얻지 못했으므로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뒤쫓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미 붙잡혔기 때문에 달립니다. 예수님께 붙잡힌 사건이 그의 삶을 끝낸 것이 아니라, 이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지막에 한층 더 큰 전망으로 열립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까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바뀔 것을 기다립니다. 과거의 모든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게 된 사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달리는 사람, 그리고 자기 몸의 변화를 기다리는 사람. 그 세 모습은 예수님을 알게 된 한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 주는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빌립보서 3장은 크게 네 부분으로 움직입니다.
3:1–6 — 무엇을 의지할 수 있는가: 바울은 할례를 내세우는 사람들을 경계시키며, 자신에게도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말합니다.
3:7–11 — 무엇이 진정한 이득인가: 예수님을 알게 된 바울은 과거의 이익을 손해로 평가합니다. 그가 얻으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3:12–16 — 이미 붙잡혔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지 않고, 예수님께 붙잡혔기 때문에 목표를 향해 계속 달립니다.
3:17–21 — 누구를 따라 걸으며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적대하는 삶과 하늘의 시민권을 지닌 사람들의 삶이 대비됩니다.
이 네 부분을 관통하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무엇이 내 삶을 결정합니까?
바울은 처음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이야기합니다.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몸을 베어 내는 자들」과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을 규정하는가
바울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라고 권하면서 말을 시작합니다(1절).
그런데 곧바로 편지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몸을 베어 내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빌립보서 3:2 · 두루새김
앞에서는 사랑과 기쁨, 공동체의 하나 됨을 이야기했는데 여기서는 세 번 연속으로 위험을 알리는 강한 경고가 나옵니다. 바울은 이미 공동체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기를 요청했습니다. 이제 예수님 외의 다른 자격을 신뢰하도록 만드는 가르침을 경계합니다.
왜 할례를 내세우는 사람들을 「몸을 베어 내는 자들」이라고 부르는가
2절의 「몸을 베어 내는 자들」(κατατομή)과 3절의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περιτομή)에 쓰인 말은 원문에서 소리가 비슷합니다. 하나는 베어 냄·훼손을, 다른 하나는 할례를 뜻합니다. 바울은 할례를 내세우는 사람들을 「몸을 베어 내는 자들」이라고 부른 다음, 곧바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바로 우리」라고 선언합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주신 언약의 표였습니다(창 17:9–14). 그러나 구약성경 안에서도 할례의 의미는 몸에 남는 표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명기 10:16과 예레미야 4:4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요청하고, 신명기 30:6은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 구절들은 실제 할례를 무가치한 의식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언약의 표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충실함이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바울은 이 구약의 흐름과 연결되는 주장을 합니다.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며, 육을 의지하지 않습니다.빌립보서 3:3 · 두루새김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합니다.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육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과 육을 의지하는 것이 대비됩니다. 여기서 「육」은 단순히 인간의 몸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4–6절에서 바울이 직접 설명하듯, 혈통과 종교적 자격, 율법을 지키는 성취 등 사람이 자신의 신분과 행동을 근거로 내세울 수 있는 것들을 포함합니다.
자기에게 어떤 자격이 있는지를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경고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전통적인 해석은 이들을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사람들로 이해합니다. 바로 뒤에서 바울이 할례와 율법에 관해 길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자들이 실제로 빌립보에 와 있었는지, 그리스도인들이었는지, 어느 정도로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거친 표현을 당시 유대인 전체에 대한 평가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고, 바로 다음 단락에서 자신의 이스라엘 혈통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 외의 무엇을 하나님 앞에서 신뢰할 근거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자신의 이력은 어떨까요? 그가 내놓는 이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 사이의 급격한 전환 때문에 3장이 본래 별도의 편지였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그러나 편지가 여러 문서로 구성되었다고 확정할 증거는 없으며, 주제 전환이 크다는 사실만으로 별도 편지의 존재를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또 반대자들을 유대계 교사들로 단정하는 전통적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읽기도 있고, 「개들」이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일반적으로 쓰던 호칭이었는데 바울이 뒤집어 사용했다는 널리 알려진 설명도 고대 자료의 뒷받침이 충분한지 의문이 제기됩니다.
바울은 왜 자신의 이력을 이렇게 자세히 소개하는가
사실 나도 육을 의지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 육을 의지할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 그렇습니다.빌립보서 3:4 · 두루새김
바울은 할례와 율법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그 자랑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기준을 잠시 받아들인 다음, 그 기준으로 따지면 자신에게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그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정체성을 말합니다. 태어난 지 여덟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출신입니다. 베냐민 지파에 속합니다. 히브리 사람 부모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입니다.
그다음에는 자신의 선택과 활동으로 드러난 종교적 정체성을 말합니다. 율법을 따르는 일에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열심으로 말하면 교회를 괴롭히고 억눌렀습니다. 율법에 따른 의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출생으로 얻은 자격과 스스로 추구했던 성취가 모두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여덟째 되는 날」이 중요한 이유
유대교의 할례는 성인이 종교에 들어갈 때 선택하는 의식만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7:12와 레위기 12:3에 따르면 남자아이는 태어난 지 여덟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출생부터 이스라엘의 언약적 삶 안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베냐민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하나였고, 사울 왕의 출신 지파이기도 했습니다(삼상 9:1–2). 「히브리 사람 부모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라는 표현은 그의 가문과 이어받은 전통 속에서 히브리인의 정체성이 이어졌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열심은 어디까지 갔는가
6절에서 이력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열심으로 말하면 나는 교회를 괴롭히고 억누르는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빌립보서 3:6 · 두루새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이 말을 읽으면 이상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율법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새로운 예수님 운동을 위협으로 여겨 그 운동을 억누르는 일을 열심의 표현으로 삼았습니다. 갈라디아서 1:13–14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고 조상들의 전통에 열심이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열심은 실제 사람들을 괴롭히고 억누르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는 무엇을 뜻합니까? 모든 면에서 죄가 없는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뜻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속했던 율법적 삶의 기준에 따라 자신의 행동과 자격을 평가했을 때, 흠잡을 데 없다고 여길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기준 없이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분명한 기준에 따라 철저히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에 충실하게 살면서도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히고 억누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며 온 힘을 다해 살아가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거스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가 자랑할 수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해 뜻밖의 평가를 내립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 사람 부모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을 바울이 평소 어떤 언어만 사용했다는 뜻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가족적·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득이 손해가 된 이유
그러나 나는 내게 이익이 되던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 때문에 손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빌립보서 3:7 · 두루새김
원문에서 이익은 「이득들」(κέρδος)이라는 복수형이고, 손해는 단수형입니다. 바울은 장부를 정리하는 사람처럼, 할례와 혈통, 바리새파에 속한 일,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각각 이익으로 적어 두었다가 이제 그 항목들을 한꺼번에 하나의 손해 쪽으로 옮겨 놓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자신이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는 사실도, 여덟째 되는 날 할례받았다는 사실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바뀐 것은 그 항목들의 가치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버린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얻은 것이 크기 때문에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귀하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손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 3:8 · 두루새김
7절에서는 이익으로 여겼던 구체적인 자격을 말했지만, 8절에서는 「모든 것」으로 범위를 넓힙니다. 그리고 이 앎은 그리스도에 관한 정보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앎을 뜻하는 말은 대상과 실제 관계를 맺어 알아 가는 일도 포함하며, 「나의 주」라는 표현이 그 의미를 분명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아는 관계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쓰레기」(σκύβαλον)로 옮긴 말은 버려지는 찌꺼기나 오물, 배설물 등을 가리킬 수 있는 강한 표현입니다. 반드시 배설물이라는 한 가지 뜻으로 제한할 수는 없지만, 점잖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정도로 옮기기에는 훨씬 거친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좋게 포장하지 않고 철저하게 다시 평가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율법 자체가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9:4–5에서 그는 이스라엘에 속한 언약과 율법, 예배와 약속을 소중한 것으로 언급하고, 로마서 7:12에서는 율법이 거룩하며 계명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말합니다. 그가 손해라고 평가하는 것은 예수님과 비교하여 자신이 의지하고 자랑할 근거로 삼았던 것들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자격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중심에 둡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얻으려고 무엇을 버리는가
8절의 마지막 「그리스도를 얻고,」는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이며, 예수님을 얻는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9절이 이어서 설명합니다. 바울이 무언가를 버리는 이야기에서 멈추면, 신앙은 포기의 크기를 경쟁하는 일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바울의 삶을 바꾼 것은 상실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아는 일이 무엇보다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9:23–24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를, 강한 사람은 힘을,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말고, 여호와야훼를 알고 그분이 땅에서 한결같은 사랑과 정의와 의를 행하시는 분임을 깨닫는 일을 자랑하라고 하십니다. 원래 문맥은 유다 백성이 자기의 지혜나 힘이 아니라 여호와야훼를 아는 관계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바울이 이 표현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간의 자랑보다 우선한다는 주제적 연결은 바울이 왜 자신의 종교적 자격을 손해로 평가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
그분 안에 있는 사람으로 드러나려는 것입니다. 내가 지니려는 의는 율법에서 오는 나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의입니다.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입니다.빌립보서 3:9 · 두루새김
「율법에서 오는 나 자신의 의」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가 대비됩니다. 차이는 하나는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의가 어디에서 오는지, 무엇에 근거하는지를 대조합니다.
바울은 5–6절에서 율법에 따른 의로 흠잡을 데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더 높은 수준의 종교적 성취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근거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이력을 하나님 앞에 제시하여 자기 위치를 확보하려 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으로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인가, 「예수님의 신실하심」인가
9절의 그리스어 표현 디아 피스테오스 크리스투(πίστις)는 두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의를 얻는다는 읽기로, 두루새김은 이를 따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의」로 옮겼습니다. 바로 뒤에 「믿음에 근거하여」가 한 번 더 나오기 때문에 앞부분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신실하심을 통해 의를 얻는다는 읽기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이루신 의가 인간의 믿음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문장이 됩니다. 두 해석 모두 문법적으로 가능하며, 어느 쪽이 문맥을 더 잘 설명하는지에 관해서는 판단이 나뉩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이 원하는 의는 자기의 율법적 성취를 근거로 확보한 의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자격이 충분한가를 물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누구 안에 있는 사람으로 드러나는가를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으로 드러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자 합니다. 그 앎에는 뜻밖에도 고난과 죽음이 포함됩니다.
부활의 능력을 아는 길에 왜 고난이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며, 그분의 고난에도 함께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죽음을 닮아 가면서,빌립보서 3:10 · 두루새김
바울은 왜 부활의 능력을 말하면서 곧바로 고난을 이야기할까요?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다면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바울은 부활을 고난이 끝난 뒤에 주어질 위로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고 고난을 감당하는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는 고난을 겪으면 그 대가로 부활의 능력을 얻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부활의 능력과 고난의 참여는 모두 예수님을 아는 일에 속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나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함께 참여하기」(κοινωνία)로 옮긴 말은 1:5에서 빌립보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몫을 나누었다고 할 때 쓰인 말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복음을 위한 참여였고, 여기서는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고난을 바깥에서 바라보며 감사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삶이 그 고난에 연결되기를 원합니다.
이 말은 바울 자신의 고난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하거나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일에 부족한 것을 보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과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 겪는 고난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삶의 방향을 규정합니다.
「닮아 가면서」는 현재 진행되는 변화를 나타냅니다. 바울은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완전히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 방향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음 단락에서 자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왜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하는가
어떻게 해서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빌립보서 3:11 · 두루새김
「어떻게 해서든」을 바울이 부활의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해서 쓴 말로 읽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바울이 부활 자체를 의심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 목표를 향한 간절한 소망이 강조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의 마지막 목표를 어떤 성취나 지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자신의 현재 상태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부활」로 옮긴 말은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드문 표현으로, 일반적인 부활을 뜻하는 단어에 밖으로 나옴을 나타내는 요소가 더해진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특별한 종류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부활 소망은 다니엘 12:2처럼 죽은 사람들이 일어나 영원한 생명이나 수치에 이르게 될 것을 말하는 유대교의 부활 소망과 이어져 있습니다. 다만 바울은 그 소망을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이 달리는 이유
내가 이미 이것을 얻었다거나 이미 완전해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붙잡으려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3:12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이 이미 완전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미래를 불안하게 바라보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려는 사람처럼 말하지도 않습니다.
붙잡은 사람보다 먼저 붙잡으신 분
「붙잡으려고」(καταλαμβάνω)와 「붙잡으셨기」는 원문에서 같은 동사를 능동과 수동으로 쓴 것입니다. 여기서 순서가 결정적입니다. 바울이 열심히 달려서 예수님을 붙잡은 다음 예수님께서 그를 받아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바울을 붙잡으셨습니다. 바울의 달림은 그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사도행전 9:1–19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려고 다마스쿠스로 향하다가, 그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마주합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을 붙잡으려 했던 자리에서, 오히려 예수님께 붙잡힌 것입니다. 빌립보서 3:12가 그 장면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바울의 고백은 그가 돌아서서 새로운 부름을 받은 사건을 생각하게 합니다.
박해하던 사람이 이제 뒤쫓는다
6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괴롭히고 억누르는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12절에서는 목표를 붙잡으려고 「달려갑니다」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곳에 같은 동사 디오코(διώκω)가 쓰입니다. 뒤쫓다, 추격하다, 박해하다라는 뜻을 지닌 말이며, 14절의 「달려갑니다」에도 다시 나타납니다.
과거의 바울도 열심히 움직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사람들을 뒤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다시 뒤쫓습니다. 하지만 뒤쫓는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 붙잡힌 것은 바울에게서 열정과 행동력을 빼앗은 사건이 아니라, 그 열정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사람을 붙잡으려고 달리지 않습니다. 자신을 붙잡으신 예수님을 향해 달립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몸을 내뻗으며,빌립보서 3:13 · 두루새김
달리는 사람은 지나온 거리를 계속 돌아보면서 달릴 수 없습니다. 앞을 향해 몸을 뻗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과거를 기억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그는 바로 앞에서 할례와 혈통, 바리새파에 속했던 일과 교회를 괴롭히고 억누른 일을 매우 자세히 기억하여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잊고」는 기억을 지우는 행위가 아니라, 과거가 지금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되지 못하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과거의 자랑에 매달리지 않지만, 과거의 잘못을 없었던 일처럼 취급하지도 않습니다.
목표 지점을 향해 달려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로 부르시는 그 부르심의 상을 얻으려는 것입니다.빌립보서 3:14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을 관객이나 심판자가 아니라 달리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일반적인 경기에서 선수는 상을 얻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만, 바울은 그 달림의 출발점이 예수님께 붙잡힌 일이라고 밝힙니다. 상은 스스로 만들어 낸 성취에 대한 보상으로만 이해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위로 부르시는 그 부르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직 달리고 있습니다.
온전한 사람은 자신이 아직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바울의 말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성숙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합시다. 여러분이 어떤 점에서 다르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점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빌립보서 3:15 · 두루새김
바로 앞에서 아직 완전해지지 않았다고 말한 바울이 이제는 「성숙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원문에서 12절의 「완전해졌다」(τελειόω)와 15절의 「성숙한 사람들」(τέλειος)은 같은 어근의 말입니다. 문맥에 따라 완전히 완성된 상태를 가리킬 수도, 충분히 성숙한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어서, 두루새김은 두 곳을 다르게 옮겨 이 차이를 드러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아직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고, 15절에서는 성숙한 신자라면 바로 그 사실을 인정하고 같은 방향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이 이미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지 자랑하거나, 이미 다 이루었다는 확신으로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붙잡혔지만 아직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바울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곧바로 밀어내거나 모욕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방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까지 자신의 힘으로 통제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물론 이것을 모든 견해가 똑같이 옳으므로 무엇을 믿어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앞에서 분명히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했습니다. 다만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성숙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이른 자리에서 같은 걸음으로 계속 나아갑시다.빌립보서 3:16 · 두루새김
새로운 지식을 모두 갖추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이른 자리에서, 이미 받아들인 복음의 빛에 따라 계속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한 번의 결단으로 완전히 끝나는 일이 아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금 해야 할 순종을 미루는 일도 아닙니다.
왜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는가
형제자매 여러분,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우리가 여러분의 본보기이니, 우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빌립보서 3:17 · 두루새김
자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본보기로 제시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앞선 단락에 있습니다. 바울이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 붙잡혔기에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삶의 방향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자격을 신뢰하지 않고, 예수님을 아는 것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며,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면서 계속 예수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은 지도자를 무조건 따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여기라고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을 보라고 합니다. 또한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말합니다. 앞 장에서 소개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같은 실제적인 본보기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립니다.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왜 울면서 경고하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적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런 사람들에 관해 여러 번 말했는데, 지금은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빌립보서 3:18 · 두루새김
바울은 이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면서 웁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스르는 삶을 가볍게 여기지 않지만, 그런 사람들을 말하면서 기뻐하거나 승리감을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들의 멸망을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그들이 복음을 거스르는 현실 자체가 슬프기 때문일 수도,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이끌릴 것을 걱정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눈물의 이유를 한 가지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의 경고가 상대를 미워하는 표현으로만 제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적대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울은 그들을 단순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적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는 길과 삶의 가치를 이해하는 기준을 바꾸어 놓은 사건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적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 이상으로, 십자가가 드러내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과 어긋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2절의 할례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같은 집단으로 보는 읽기, 자신의 욕망에 따라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보는 읽기, 로마 사회의 가치관이나 이방 종교의 배경과 연결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특정 집단이 누구이며 어떤 행동을 했는지 단정하는 일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 배를 신으로 삼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들은 땅에 속한 것들에 마음을 쏟습니다.빌립보서 3:19 · 두루새김
배가 신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배」는 문자 그대로 먹는 욕망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들의 욕구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반면 이 장의 앞부분에서 할례와 율법이 논의되었기 때문에, 음식 규정이나 몸에 새긴 표시를 지나치게 의지하는 태도를 비꼰 표현이라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든 문제는 몸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최고의 권위와 가치로 삼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이든 종교적 자격이든,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앞선다면 그 삶은 십자가와 어긋나게 됩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에서 무엇을 자랑하는가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랑하던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얻으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어긋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음을 쏟습니다」(φρονέω)로 옮긴 말은 앞 장에서 공동체가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할 때 쓰인 동사와 같습니다. 지상에 있는 물건이나 현실 문제를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마음을 어디에 두는가를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다른 소속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 시민권은 이 땅을 떠나는 것을 뜻하는가
내가 이렇게 권하는 것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오실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빌립보서 3:20 · 두루새김
이 구절을 읽으면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가능한 한 이 세상의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배경과 연결해 보면 다른 그림이 나타납니다.
로마 식민도시 빌립보의 시민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도시였습니다. 로마의 제도와 법적 지위, 문화적 정체성이 특별하게 연결된 도시였고, 시민권은 법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바울은 그런 빌립보 사람들에게 시민 공동체나 시민권과 관련된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빌립보에 살고 있지만, 그들이 가장 깊이 속한 곳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늘로 떠나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올라가는가, 구원자가 오시는가
이 구절의 관심은 인간이 죽은 뒤 어디로 가는가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에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통치자에게 구원자라는 칭호가 쓰이기도 했으므로, 로마 식민도시의 독자들은 이 표현에서 통치권과 구원에 관한 사회적 의미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특정 로마 황제를 직접 겨냥하고 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무엇을 하실까요? 바울은 매우 구체적으로 대답합니다. 우리의 몸을 바꾸실 것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육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몸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몸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하늘 시민권을 로마 시민권에 대한 직접적인 정치적 저항의 말로 볼 것인지, 더 넓게 공동체의 소속과 충성을 나타내는 말로 볼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깊이 속하고 기대를 두는 분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낮은 처지의 몸이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복종시키실 수 있는 능력으로, 낮은 처지에 있는 우리의 몸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실 것입니다.빌립보서 3:21 · 두루새김
빌립보서 3장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끝납니다. 그 능력이 향하는 대상은 우리의 몸입니다.
「낮은 처지에 있는 우리의 몸」은 몸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질병과 고통을 겪고, 늙으며, 결국 죽습니다. 바울은 이런 현재의 몸을 낮은 처지에 있는 몸이라고 부르지만, 인간이 마지막으로 바라는 일을 몸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바꾸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닮아 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
10절의 「그분의 죽음을 닮아 가면서」와 21절의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σύμμορφος)는 원문에서 같은 어근을 씁니다. 앞의 것은 같은 모습으로 형성되어 간다는 뜻이고, 뒤의 것은 같은 형태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이 되풀이가 이 장의 앞부분과 마지막을 잇습니다.
현재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닮아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에 참여하는 삶이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아직 완전해지지 않았고 달리며 고난을 겪고 있지만, 몸의 변화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영광스러운 몸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복종시키시는 능력
여기에는 2장에서 말한, 모든 존재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주제가 이어집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높은 칭호가 주어졌다는 뜻을 넘어, 모든 것을 다스리실 권위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복종시키실 수 있다면, 우리 몸의 연약함과 죽음도 예수님의 구원 능력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전서 15:20–23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잠든 이들의 첫 열매라고 부르며,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오실 때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3:21에서는 같은 소망이 몸의 변화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이 연결에서도 부활은 인간의 몸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존재를 새롭게 하시는 일이며,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부활이 그리스도인들의 미래를 이해하는 근거가 됩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의 고백
무엇이 바울의 삶을 결정했을까요? 그의 자격이 아니라 예수님을 아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일은 그가 무엇을 이익이라고 부르는지, 무엇을 의라고 생각하는지,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 어떤 미래를 기다리는지를 모두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출발점은 예수님께서 먼저 바울을 붙잡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인간의 행동과 하나님의 은혜는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시니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도,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과도 다릅니다. 바울의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한 출발점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 붙잡힌 삶의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붙잡으셨기에 바울은 달리고, 예수님께서 몸을 바꾸어 주실 것이기에 바울은 기다립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고」라는 말은 과거를 지우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열심이 교회를 괴롭히고 억누르는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사실까지 정직하게 기억합니다. 그것은 잘못에 대한 책임을 피하는 태도가 아니라, 과거의 성공에도 과거의 실패에도 자신의 삶을 완전히 맡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무엇을 얻으면 내 삶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잃으면 내 삶 전체가 무너졌다고 느끼나요?
바울의 소망의 근거는 자신의 달리기가 완벽하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자신을 붙잡으신 예수님께서 누구신가에 대한 확신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무엇을 자랑하던 사람이었는지 압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더 이상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는 앞을 향해 몸을 내뻗고, 목표 지점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붙잡으신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