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10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오른쪽에 앉은 왕, 길가에서 물을 마시는 왕
시편 110편은 뜻밖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가 한 사람에게 자기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원수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왕은 자리에 앉도록 초대받았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왕에게는 두 번째 선언이 주어집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를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부르십니다. 원수들을 다스리는 왕이 어떻게 제사장이기도 한 것일까요? 왕권을 이야기하던 시가 갑자기 제사장에 관한 맹세를 들려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지막 장면도 특이합니다. 왕들과 민족들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심판이 펼쳐진 뒤, 시편은 길가의 시내에서 물을 마시고 머리를 드는 한 인물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이 세 장면을 연결하는 것은 여호와야훼가 왕에게 주시는 권위입니다. 시편 110편은 왕이 얼마나 강한지를 찬양하기보다, 왕의 권위가 어디에서 오며 무엇에 의해 유지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원수들이 아직 있는데도 왕좌에 앉으라는 명령
다윗의 시편. 여호와야훼가 내 주에게 한 선언이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의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내 오른쪽에 앉아라.」시편 110:1 · 본디새김
첫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이것이 시인의 소망이나 왕을 위한 축복의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선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נְאֻם)는 예언서에서 하나님이 권위 있게 말씀하실 때 자주 쓰이는 표현입니다. 시인은 왕의 위대함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내놓기 전에, 여호와야훼가 왕에게 직접 말씀하셨음을 알립니다. 왕은 자신의 업적을 내세워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여호와야훼의 선언이 있고, 그 선언에 따라 왕에게 자리가 주어집니다.
고대 왕궁에서 오른쪽 자리는 영예와 높은 지위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2:19에서는 솔로몬이 어머니 밧세바를 맞이하고, 자기 오른쪽에 자리를 마련하게 합니다. 시편 110편에서 그 자리를 내어 주시는 분은 인간 왕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왕이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설명이라기보다, 여호와야훼께서 그에게 특별한 지위와 권위를 부여하시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주」의 히브리어는 아도니(ʾadoni)로, 화자가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부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왕에게 원수들을 먼저 정복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원수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오른쪽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원수들을 발판으로 삼는다는 것은 완전한 굴복을 나타내는 고대의 승리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수행하겠다고 말씀하시는 주체는 왕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입니다. 「네가 원수들을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가 아니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의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입니다.
왕에게 주어진 확신의 근거는 이미 끝난 전쟁이 아니라, 아직 이루어질 일을 책임지겠다는 여호와야훼의 선언입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대의 권능의 지팡이를 시온에서 뻗으리라. 그대의 원수들 한가운데서 다스려라.시편 110:2 · 본디새김
「권능의 지팡이」는 왕의 통치권을 나타내는 홀의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그 지팡이를 뻗으시는 분 역시 여호와야훼입니다. 왕의 통치가 시온에서 시작되지만, 그 권위를 바깥으로 확장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왕이 원수들을 모두 제거한 뒤에야 안정된 통치를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원수들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다스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여호와야훼의 오른쪽에 앉으라는 명령은 왕에게 주어진 지위를 나타내고, 원수들 한가운데서 다스리라는 명령은 그 지위가 실제 세계에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왕에게 주어진 권위가 곧 저항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야훼의 통치를 대적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왕은 맡겨진 통치를 수행해야 합니다.
시편은 그렇게 왕좌와 전장을 연결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에 다윗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이 말의 화자가 반드시 역사적 다윗 자신인지, 아니면 왕을 높여 부르는 궁정의 화자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왕의 즉위나 왕권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불렸을 가능성은 있지만, 구체적인 작성 시기와 의식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시편 110편은 시편 2편과 연결됩니다. 시편 2:6–9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시온에 자신의 왕을 세우시고, 왕에게 민족들을 다스릴 권위를 주십니다. 두 시편 모두 왕권을 인간 왕의 독립적인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권위로 그립니다.
억지로 끌려온 군대가 아니라 기꺼이 나서는 백성
그대의 백성은 그대의 출전 날에 거룩한 광채를 두르고 기꺼이 나선다. 새벽의 태에서, 그대에게는 그대의 젊음의 이슬이 있다.시편 110:3 · 본디새김
앞에서는 여호와야훼와 왕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왕의 백성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기꺼이 나선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נְדָבָה)는 자원함, 자발적인 헌신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누군가에게 억지로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내어놓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말은 전쟁에 나서는 장면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왕의 군대가 기꺼이 출전에 참여하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권의 시에서 이것은 의미 있는 선택입니다. 왕의 힘을 이야기하면서 시인은 징발된 병력의 규모나 전쟁 장비를 나열하지 않습니다. 백성의 자발적인 참여를 묘사합니다. 시편이 제시하는 것은 이상적인 왕권과 그에 응답하는 백성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거룩한 광채」가 더해집니다. 이것이 백성의 장식이나 복장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지, 왕과 그의 군대가 지닌 거룩한 위엄을 그리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가 세우신 왕을 중심으로 백성이 모이는 장면은 단순한 병력 집결보다 엄숙하고 장엄하게 묘사됩니다.
이어서 시는 갑자기 새벽과 이슬의 이미지로 넘어갑니다.
새벽이 마치 생명을 낳는 어머니의 태처럼 그려지고, 그 새벽에서 젊음의 이슬이 나타납니다. 이슬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을 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이 이미지는 새로움과 생동감, 풍성함을 연상시킵니다.
앞의 백성들과 연결하면 새벽의 이슬처럼 새롭게 모여드는 젊은 무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슬이 직접 왕의 젊음과 활력을 가리킨다고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히브리어 문장 자체가 워낙 압축되어 있어 한쪽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으로 왕권이 세워지고, 이제 백성이 그 왕을 중심으로 기꺼이 모입니다. 왕에게 주어진 권위가 백성의 응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활기찬 출전 장면 바로 다음에, 시편은 전혀 다른 종류의 선언을 들려줍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상당히 다르게 읽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젊음과 이슬의 표현 대신, 새벽별보다 앞서 태어났다는 선언이 나타납니다(칠십인역 시편 109:3). 히브리어 본문을 따르면 출전하는 백성과 왕의 활력이 강조되는 반면, 칠십인역을 따르면 왕의 출생과 신적인 선언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따라서 이 절을 근거로 왕의 영원한 출생이나 끝없이 공급되는 청년 군대를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왕에게 내려진 또 하나의 선언 — 영원한 제사장
여호와야훼가 맹세했고, 뜻을 돌이키지 않으리라. 「너는 멜기세덱의 방식에 따라 영원히 제사장이다.」시편 110:4 · 본디새김
앞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왕에게 통치권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그를 제사장으로 세우십니다.
1절이 여호와야훼의 권위 있는 선언이라면, 4절은 여호와야훼의 맹세입니다. 단순히 어떤 직무를 맡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결정을 거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 왕은 나이가 들고 죽습니다. 왕좌에는 후계자가 오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이 왕에게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지위를 선언하십니다. 이 표현은 왕 개인이 죽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말인지, 그에게 부여된 제사장적 지위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말인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본문의 관심이 잠정적인 임명보다 훨씬 강한, 취소되지 않는 하나님의 결정에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멜기세덱일까요?
창세기 14:18–20에서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며 동시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아브람이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그가 전하는 축복에는 아브람의 승리를 하나님께 돌리는 내용도 들어 있습니다.
멜기세덱에게는 왕이라는 지위와 제사장이라는 지위가 함께 있습니다. 또한 살렘은 예루살렘과 연결되어 이해됩니다. 시편 76:2–3은 살렘과 시온을 나란히 언급합니다. 따라서 시온에서 왕의 지팡이가 뻗어 나오는 시편 110편에 멜기세덱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결을 이룹니다.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 제도가 수립되기 이전에 창세기 이야기 속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 제도에서 제사장 직무는 아론의 집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출애굽기 28:1; 민수기 18:1–7). 시편 110편이 왕에게 멜기세덱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를 단순히 아론 계열 제사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하는 선언과는 다릅니다.
다만 「멜기세덱의 방식에 따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구절은 문법적으로 까다롭습니다. 창세기의 멜기세덱을 본보기로 삼은 제사장직을 뜻한다고 읽을 수 있지만, 「멜기세덱」을 의로운 왕이라는 칭호와 관련짓고 앞의 표현을 하나님의 결정이나 명령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왕에게 제사장적 권위가 선언된다는 본문의 핵심은 유지됩니다.
그렇다고 시편이 이 왕에게 성막의 모든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인 제사 절차나 제사장 조직에 관한 규정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왕은 사람들 위에서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 속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10편에서 이 두 직무가 한 인물에게 결합됩니다.
이것은 왕의 권위를 무제한으로 확대하는 말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그 권위가 어디에 속하는지를 더 분명하게 합니다. 왕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권위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그의 왕권도, 제사장적 지위도 여호와야훼가 주신 것입니다.
그 맹세가 끝나자 시편은 다시 전장의 한복판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멜기세덱의 방식에 따라」를 칭호와 하나님의 결정으로 읽는 경우 특정 인물의 방식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약해집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윗의 집안과 왕권의 지속을 약속하십니다. 시편 110편 역시 인간 왕권의 지속을 하나님의 결정에 연결하지만, 여기에 제사장이라는 독특한 차원을 더합니다. 신약은 이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마태복음 22:41–46과 사도행전 2:34–36은 시편 110:1을 직접 인용하여 메시아의 지위를 설명하고, 히브리서 7:17–21은 4절을 인용하여 예수의 제사장직을 해석합니다. 이는 시편의 왕권과 제사장적 권위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이해하는 정경적 읽기입니다. 그렇다고 구약 본문에서 먼저 드러나는 왕권의 언어와 시온의 역사적 배경을 지울 필요는 없습니다.
왕의 오른쪽에 있는 주 — 심판이 시작되다
그대의 오른쪽에 있는 주가 자기 분노의 날에 왕들을 부수었다.시편 110:5 · 본디새김
1절에서는 왕이 여호와야훼의 오른쪽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가 「그대의 오른쪽」에 계십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1절의 「내 주」는 아도니(ʾadoni)로 읽히지만, 5절의 「주」는 아도나이(ʾadonai)로 읽힙니다. 후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5절의 주를 여호와야훼로 이해하면, 시편 앞뒤의 장면이 서로 호응합니다.
처음에는 왕이 여호와야훼의 오른쪽에 앉아 권위를 부여받습니다. 이제는 여호와야훼가 왕의 오른쪽에 계시면서 전쟁 가운데 그를 도우십니다. 하나는 왕에게 주어진 영예이고, 다른 하나는 왕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5절의 주를 여호와야훼로 읽는다면, 이어지는 심판을 하나님이 직접 수행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왕이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 그 심판을 수행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1절과 5절의 호칭이 다르고, 5절 이후에는 말의 주체도 명시적으로 반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이 둘의 관계를 자세하게 구분하기보다, 하나님의 권위와 왕의 통치가 결합된 승리를 묘사합니다.
그는 민족들 가운데서 심판하리라. 시체들로 가득 채웠고, 넓은 땅 위에서 머리를 부수었다.시편 110: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의 장엄한 왕권 선언을 훨씬 거칠고 무거운 현실로 끌어내립니다.
본문의 폭력성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심판을 단지 추상적인 악의 소멸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실제 전쟁의 파괴와 죽음을 연상시키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1절에서는 왕의 원수들이 등장했고, 5절에서는 왕들이 부서졌습니다. 6절에 이르면 민족들과 넓은 땅이 심판의 무대가 됩니다. 시온에서 시작된 왕권의 이야기가 여러 민족의 운명을 다루는 장면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시편 110편은 이 심판을 여호와야훼의 분노와 연결하지만, 심판받는 왕들과 민족들의 구체적인 죄목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지 않는 범죄 행위를 덧붙여 이 전쟁의 모든 세부 사항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 관한 시이지, 모든 인간 통치자가 자기 적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선언해도 된다는 허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은 인간 통치자가 자신의 권위를 쉽게 절대화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왕의 권위는 스스로 선언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에게서 받은 것이며, 심판의 궁극적인 권한도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6절에는 「머리」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시편의 마지막 절에서도 같은 말이 다시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바로 앞 시편인 시편 109:31에서도 여호와야훼는 궁핍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셔서 그를 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오른쪽이라는 위치가 도움과 보호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두 시편은 서로 울림을 줍니다. 6절의 「시체들로 가득 채웠고」라는 표현에는 무엇을 가득 채웠는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장의 땅이나 넓은 지역을 떠올리게 하지만, 구체적인 장소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심판하리라」는 앞으로의 행동을 나타내는 형태이고, 「가득 채웠고」와 「부수었다」는 완료된 행동을 나타내는 형태입니다. 시적인 선언 안에서 앞으로 이루어질 심판과 이미 성취된 것처럼 묘사되는 승리가 함께 놓여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을 특정한 전투의 정확한 진행 순서를 기록한 역사 서술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2:8–9에서도 하나님이 세우신 왕과 땅의 민족들이 연결되며, 그 왕의 권위를 거스르는 세력의 패배가 묘사됩니다. 시편 110편은 이러한 왕권의 주제를 더욱 직접적인 전쟁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부서진 머리와 다시 들린 머리
길가의 시내에서 마시리라. 그러므로 머리를 들어 올리리라.시편 110:7 · 본디새김
시편은 뜻밖에도 거대한 전투 장면을 작은 움직임 하나로 마무리합니다.
이 짧은 장면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앞의 심판 장면과 연결되는 주의 행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전쟁을 수행하는 왕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왕이 물을 마시는 모습으로 읽으면, 전쟁 중 길을 가던 왕이 물을 마시고 다시 힘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이 됩니다.
물을 마시는 행동과 머리를 들어 올리는 행동 사이에는 「그러므로」라는 관계가 있습니다. 물을 마신 뒤 힘을 회복하여 머리를 드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고,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당당히 머리를 드는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편은 마지막에 낮아져 있던 머리가 다시 높이 들리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6절에서는 머리가 부서집니다. 7절에서는 머리가 들립니다.
같은 신체 부위가 두 장면에서 정반대의 운명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대적의 권세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고, 이제는 승리한 쪽이 머리를 드는 모습을 봅니다.
시편이 선택한 마지막 배경은 왕궁이 아닙니다.
왕좌도, 시온의 성소도, 거대한 군대도 아닙니다.
길가의 시내입니다.
만약 물을 마시는 주체가 인간 왕이라면, 이 작은 장면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여호와야훼의 오른쪽에 앉도록 초대받고 원수들 가운데서 다스릴 권위를 받은 왕도, 길을 걸으며 물을 마시는 존재입니다. 그의 지위는 높지만 그는 여전히 인간입니다. 전쟁을 수행할 힘이 필요하며, 길 위에서 자신의 몸을 지탱해야 합니다.
왕의 권위는 장엄하지만, 그 왕이 움직이는 곳은 물이 흐르고 사람이 마시는 실제 세계입니다.
새벽의 이슬이 3절을 장식했다면, 마지막에는 길가의 시냇물이 등장합니다. 그 사이에 왕권의 맹세와 전쟁의 심판이 놓여 있습니다. 시편은 거대한 권위의 이야기 속에 생명과 활력을 연상시키는 물의 이미지를 남겨 둡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그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의식에 따라 물을 마시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왕의 즉위 의식이나 예루살렘의 특정 샘과 연결하는 해석도 가능성 이상의 확정적인 사실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게서 발견하는 통치의 질서
시편 110편의 두 선언을 함께 읽으면, 이 시가 왕의 권력을 무작정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첫 번째 선언에서 왕은 여호와야훼의 오른쪽에 앉습니다. 두 번째 선언에서 왕은 영원한 제사장으로 불립니다. 두 지위 모두 왕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통치를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왕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신 뒤 물러나시는 분도 아닙니다. 왕권의 출발도 하나님께 있고, 왕권의 지속을 보증하는 약속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기에 왕은 위임받은 권위를 행사하면서도 하나님에게서 독립할 수 없습니다.
첫 장면에서 왕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 앉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길 위에서 물을 마시고 머리를 듭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왕의 업적을 길게 나열하는 찬사가 아닙니다.
길가에 흐르는 시내와, 그 물을 마신 뒤 다시 들리는 머리입니다.
시편은 그 장면에서 멈춥니다. 원수들의 머리가 낮아진 자리에서, 승리한 쪽의 머리가 높이 들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