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09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누가 가난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는가
시편 109편에는 서로 닮았지만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두 장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6절의 「고발자가 그의 오른쪽에 서기를 바랍니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재판을 받으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오른쪽에는 그를 고발하는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가 유죄 판결을 받기를 바라고, 그의 기도마저 죄가 되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두 번째 장면은 시편의 마지막 절 「그가 궁핍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서, 그의 목숨에 판결을 내리는 자들에게서 그를 구원하기 때문이다」입니다. 이번에도 누군가의 오른쪽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서 계신 분은 고발자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궁핍한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서 계십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장면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읽기 어려운 기도 가운데 하나를 만나야 합니다.
시인은 원수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의 아내가 과부가 되고 자녀들이 고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후손이 끊어지고 조상들의 죄까지 기억되기를 바라는 무서운 말들이 이어집니다.
이 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이런 저주를 해도 된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이 무서운 저주들은 시인 자신이 아니라 그를 고발하는 원수들이 퍼붓는 말일까요?
실제로 시편 109편의 한가운데에는 누가 저주를 말하고 있는가라는 중요한 해석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이 문제를 한쪽으로 완전히 확정할 수 있는 인용 표지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주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피해서도 안 되지만, 그 저주를 곧바로 하나님의 뜻이나 모든 신자가 따라야 할 기도 방식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이 시편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칼이나 창이 아닙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말에 맞서는 것은 또 다른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잠잠히 계시지 마십시오” — 말로 공격받는 사람의 기도
지휘자를 위하여. 다윗의 시편. 제가 찬양하는 하나님, 잠잠히 계시지 마십시오.시편 109:1 · 본디새김
시인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조용해지기를 먼저 요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잠잠히 계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 그럴까요? 다음 절에서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들이 저를 거슬러 악한 입과 속이는 입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짓된 혀로 제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미움의 말로 저를 에워싸고, 까닭 없이 저와 싸웠습니다.시편 109:2–3 · 본디새김
여기서 반복되는 것은 입과 혀와 말입니다. 그 입에서 거짓말과 미움의 말이 쏟아집니다. 그 말들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시인은 “저를 에워싸고”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말이 사람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적군이 한 사람을 포위하듯, 거짓된 말들이 시인을 포위한 것입니다. 시인은 단순히 누군가가 자신을 험담해서 기분이 상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과 고발이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상황을 호소합니다.
3절의 “까닭 없이”라는 말은 자신에게 정당한 공격의 이유가 없다는 시인의 주장입니다. 본문은 이 고발의 구체적인 사건이나 상대방의 신원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객관적인 재판 기록을 가진 것처럼 모든 사실관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4–5절에 이르면 고통의 성격이 더욱 뚜렷해집니다.
제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은 저를 고발합니다. 그러나 저는 기도합니다. 그들은 선 대신 악을 제게 안겼고, 제 사랑 대신 미움을 안겼습니다.시편 109:4–5 · 본디새김
시인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베푼 사랑이 미움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대신”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이 말은 이 문맥에서 ‘무엇에 대한 보답으로’, ‘무엇 대신에’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시인은 자신이 준 것과 되돌아온 것 사이의 부당한 교환을 고발합니다.
사랑을 주었는데 미움이 돌아왔습니다.
선을 베풀었는데 악이 돌아왔습니다.
관계가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정반대로 움직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기도합니다”
4절 후반은 히브리어로 매우 짧습니다. 직역하면 “그러나 나는 기도”입니다. 동사가 생략된 압축적인 표현입니다. 본디새김은 이것을 “그러나 저는 기도합니다”라고 풀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행동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기도했는지도 이 절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원수들이 자신을 고발하는 상황에서 자신은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두 종류의 말이 서로 마주 보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원수들은 시인을 향해 거짓된 말을 쏟아 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특히 1절에서 하나님께 침묵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대비는 더욱 선명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모든 말 가운데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견디기 어려운 것은 원수들의 말이 너무 많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아직 말씀하지 않으시는 현실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시편은 길고 무서운 저주의 말로 들어갑니다. 이 저주를 말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6–19절의 저주는 누구의 말인가
6절부터 19절까지는 한 사람에게 쏟아지는 저주가 이어집니다. 그가 악한 재판을 받고, 수명이 짧아지며, 아내와 자녀들이 비참해지고, 그의 이름과 후손이 끊어지기를 바라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인 자신이 원수를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로 읽는 것입니다. 이 읽기에서는 1–5절에서 시인이 자신을 공격하는 원수들을 고발한 뒤, 6절부터 그들에게 합당한 보응이 임하기를 구합니다. 6절은 직접적인 명령형으로 시작하지만, 앞에서 말하던 사람이 바뀌었다는 표시가 없습니다. 또한 20절에서 시인은 자신을 고발하는 자들이 여호와야훼에게서 이러한 보응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원수들이 시인을 향해 퍼붓는 저주를 시인이 인용한 것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 읽기는 시편에 나타나는 대명사의 변화를 주목합니다. 1–5절에서 시인의 원수들은 여러 사람입니다. 그런데 6절부터 갑자기 저주의 대상이 “그”라는 한 사람으로 바뀌고, 20절에 이르면 다시 자신을 고발하는 여러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6–19절은 원수들이 시인 한 사람을 대상으로 내뱉은 저주일 수 있습니다. 특히 2–5절과 20절 모두 원수들이 악한 말을 한다는 점을 강조하므로, 그 사이에 놓인 긴 저주가 실제로 그들이 퍼부은 말이라고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이 경우 20절은 원수들이 자신에게 퍼부은 저주가 도리어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읽기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6절에서 원수들의 말을 인용하기 시작한다는 명시적인 표현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16절에서는 저주의 대상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죽이려고 뒤쫓았다고 말합니다. 이를 원수들이 시인을 공격하기 위해 꾸며 낸 비난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본문이 그것을 명시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첫 번째 읽기도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시인은 여러 원수들에게 공격받고 있다고 말하다가 한 사람과 그 가족 전체를 향한 저주를 길게 이어 갑니다. 물론 대표적인 원수 한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원수들을 하나의 인물처럼 묘사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해석자의 판단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본문만으로 6–19절의 화자를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불확실성은 사소한 문법 문제가 아닙니다. 시편의 의미를 크게 바꾸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읽기를 따르면, 우리는 심하게 억울함을 당한 시인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을 구할 수 있는지 마주하게 됩니다. 두 번째 읽기를 따르면, 우리는 한 사람이 원수들에게 얼마나 잔혹한 저주를 당했는지 듣게 됩니다.
어느 경우든 저주의 언어가 지닌 폭력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없는 인용부호를 확정적으로 넣거나, 반대로 아무런 문제없이 시인의 기도라고만 단정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에는 원수들의 악행을 고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들이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시편 35편에서는 시인이 자신을 거짓으로 고발하는 사람들과 싸워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특히 자신이 그들을 위해 슬퍼하고 기도했지만, 그들은 자신을 대적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시편 35:11–16). 시편 69편에서도 원수들의 부당한 공격과 수치를 호소하다가 그들에게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는 기도가 이어집니다(시편 69:22–28). 이런 기도들은 악을 단지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로만 취급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거짓으로 고발하며 무죄한 사람을 파괴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판단받아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109편은 그보다 더 어려운 질문, 곧 그 심판을 구하는 말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던집니다.
고발자가 그의 오른쪽에 서기를 — 재판에서 시작되는 저주
그를 다스릴 악인을 세워 주십시오. 고발자가 그의 오른쪽에 서기를 바랍니다. 그가 재판받을 때 유죄인 채 나오고, 그의 기도가 죄가 되기를 바랍니다.시편 109:6–7 · 본디새김
저주는 재판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재판받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의 곁에는 고발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고발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탄(שָׂטָן)은 문맥에 따라 적대자나 고발자를 가리킵니다. 시편 109:6에서는 이어지는 재판의 문맥에 비추어 법정의 고발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를 반드시 후대에 특정한 악한 영적 존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 ‘사탄’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고발자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그의 오른쪽”입니다. 고발자가 재판받는 사람의 바로 곁에 서 있습니다. 이는 그를 향한 고발이 얼마나 가까이, 얼마나 위협적으로 다가와 있는지 보여 줍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7절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도움과 자비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는 그 사람이 기도할 때조차 그 기도가 죄로 여겨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아무런 호소의 여지도 남기지 않으려는 말처럼 들립니다.
재판을 받으면 유죄가 되고, 하나님께 기도해도 죄가 됩니다.
이 저주가 이루어진다면 그는 사람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구원의 길을 찾기 어려운 처지가 됩니다. 이 표현은 저주가 단순한 분노의 감정 표현을 넘어 얼마나 전면적인 파멸을 요구하는지 보여 줍니다.
8절에서는 그의 생명과 지위까지 겨냥합니다.
그의 날들이 적어지고, 그의 직책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기를 바랍니다.시편 109:8 · 본디새김
여기서 “직책”은 맡겨진 임무나 감독의 직무, 책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직책인지는 이 시편에서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이 저주가 그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리까지 없애려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가 죽고, 그의 자리는 다른 사람이 차지합니다.
이제 그가 남긴 가족에게까지 저주가 확대됩니다.
조금 더 깊이
민수기 22:22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천사가 발람의 길을 막아서는 적대자의 역할로 등장하며, 스가랴 3:1에서는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오른쪽에 서서 고발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또 시편 109편은 신약에서도 직접 인용됩니다. 사도행전 1:20에서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가 남긴 자리를 설명하면서 시편 109:8의 후반부를 인용하고, 이 구절을 유다를 대신할 사람이 사도의 직무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근거로 사용합니다(사도행전 1:15–26). 같은 절에서 시편 69:25도 함께 인용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시편 109편 전체가 처음부터 가룟 유다 한 사람만을 가리키도록 쓰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직접 사용하는 부분은 직책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된다는 내용이며, 저주에 등장하는 아내와 자녀의 파멸까지 유다에게 그대로 적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자녀들은 고아가 되기를 — 한 사람의 파멸이 가족 전체로 번지다
그의 자녀들은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기를 바랍니다.시편 109:9 · 본디새김
저주는 여기서 더욱 견디기 어려워집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바라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에게 속한 가족의 미래까지 무너지기를 바랍니다. 10절에서는 그 아이들이 떠돌며 구걸하는 모습까지 등장합니다.
그의 자녀들이 떠돌고 또 떠돌며 구걸하고, 자기들의 폐허를 떠나 찾아다니기를 바랍니다.시편 109:10 · 본디새김
“떠돌고 또 떠돌며”라는 반복은 안정된 거처 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아이들이 안정된 거처를 잃고 궁핍하게 떠도는 장면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정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면 남겨진 가족은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과부와 고아는 자신들을 보호할 사람이 없을 때 착취와 빈곤에 노출되기 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2:22–24에서는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신명기 10:18에서는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시편 109편의 저주에서는 바로 그 과부와 고아들이 비참한 처지에 놓이기를 바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이 다른 곳에서는 보호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사람들에게, 이 구절에서는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 닥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11–12절에서는 그 상황이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채권자가 그의 모든 소유를 노리고, 낯선 이들이 그의 수고로 얻은 것을 약탈하기를 바랍니다. 그에게 인애를 계속 베풀 사람이 없고, 그의 고아들을 불쌍히 여길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시편 109:11–12 · 본디새김
12절의 “인애”는 관계 안에서 베풀어지는 신실한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해지기를 바라는 저주가 아닙니다.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이 어떤 관계에서도 자비와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기를 바라는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저주의 잔혹함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 말들을 단순히 정의로운 심판에 대한 아름다운 기도라고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고아가 될 아이들까지 고통받기를 바라는 내용은 본문을 읽는 사람에게 심각한 윤리적 질문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 질문 때문에 저주의 강도를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시편은 실제로 이렇게 말합니다.
조상들의 죄까지 기억되기를
13–15절에서는 저주가 한 세대를 넘어갑니다.
그의 후손이 끊어지고, 다음 세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기를 바랍니다. 그 조상들의 죄악이 여호와야훼 앞에 기억되고, 그 어머니의 죄가 지워지지 않기를 바랍니다.시편 109:13–14 · 본디새김
여기에는 두 가지 방향의 기억이 나타납니다. 그 사람의 조상들이 지은 죄는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반면 그 사람과 후손들의 이름은 땅에서 지워지기를 바랍니다.
죄는 남고, 이름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후손을 통해 이름이 이어진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이 다음 세대에 기억되고 가족의 계보가 지속되는 것은 사회적 존재와 미래의 연속성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이 저주는 그 연속성까지 끊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의 생명만이 아니라, 그가 남길 모든 흔적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신학적 문제를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시편에 이러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무고한 자녀들을 부모의 죄 때문에 반드시 처벌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편 109편의 저주는 그런 문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율법이나 교훈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닥치기를 바라는 극단적인 파멸의 언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표현된 모든 저주를 하나님의 일반적인 정의의 원칙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6절은 왜 이토록 끔찍한 저주가 등장하는지 설명하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 후반의 “자기들의 폐허를 떠나 찾아다니기를”은 히브리어 구문이 난해하여 무엇을 찾는지, 폐허와 이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자녀와 부모의 죄에 관해서는, 신명기 24:16에서 자녀가 부모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되며 각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에스겔 18:20에서도 아들이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않고 아버지가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물론 구약에는 한 세대의 죄가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습도 나타납니다(출애굽기 20:5–6). 그러나 죄의 역사적 결과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과, 무고한 자녀에게 부모의 죄를 그대로 전가해 처벌해도 된다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인애를 베풀지 않은 사람 — 저주가 겨냥하는 죄
그가 인애를 베풀기를 기억하지 않고,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과 마음이 꺾인 사람을 죽이려고 뒤쫓았기 때문입니다.시편 109:16 · 본디새김
이 절은 앞선 저주 전체에 이유를 부여합니다.
“기억하지 않았다”라는 표현은 그가 해야 할 일을 몰랐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인애를 베푸는 일을 자신의 행동 원칙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그 사람에게 인애를 베풀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인애를 베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도 자비를 받지 못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의 저주에 나타나는 응보의 논리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논리가 앞서 언급된 자녀들의 고통까지 모두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악행에 대한 심판과 그의 가족 전체를 향한 저주는 별도로 구별해 살펴야 합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은 누구인가
16절에 나오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시편의 후반부에서도 다시 나타납니다. 22절에서 시인은 자기 자신을 「저는 가난하고 궁핍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16절에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죽이려고 뒤쫓는 악인이 등장합니다. 22절에는 자신이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호소하는 시인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16절의 피해자를 시인 자신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이 시편의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싸움이 아닙니다. 강한 자가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을 고발하고 괴롭히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저주를 원수들의 말로 읽는다면 16절도 원수들이 시인에게 덧씌운 죄목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은 실제로 궁핍한 처지에 있는 시인을 도리어 궁핍한 사람을 해친 악인이라고 비난하는 셈입니다. 이 역시 가능한 읽기이지만, 본문은 어느 쪽이 실제 상황인지 확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이 시편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시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이 누구의 오른쪽에 서시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중요해지는 표현입니다.
저주를 옷처럼 입은 사람
17–19절에서는 저주가 마치 물질적인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는 저주를 사랑했고, 저주가 그에게 닥쳤습니다. 그는 복을 기뻐하지 않았고, 복은 그에게서 멀어졌습니다.시편 109:17 · 본디새김
다른 사람을 향해 퍼붓던 저주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17절은 앞선 구절들처럼 단순히 저주가 임하기를 바라는 형식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그가 저주를 사랑했고 저주가 그에게 왔다는 식으로 사건을 진술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이미 드러난 응보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이어지는 저주의 문맥 안에서 그에게 닥치기를 바라는 결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이미지가 더욱 강해집니다.
그는 저주를 자기 옷처럼 입었고, 저주는 물처럼 그의 속으로, 기름처럼 그의 뼛속으로 들어갔습니다.시편 109:18 · 본디새김
저주는 먼저 옷이 됩니다.
그런데 옷처럼 몸 바깥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물처럼 몸속으로 들어갑니다.
기름처럼 뼛속에 스며듭니다.
물과 기름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거나 몸을 돌보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저주가 물과 기름처럼 몸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바깥에서 시작된 악이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뒤덮는 이미지입니다.
19절에서는 다시 옷과 띠가 등장합니다.
그 저주가 그에게 그가 두르는 옷처럼 되고, 그가 늘 매는 띠가 되기를 바랍니다.시편 109:19 · 본디새김
처음에는 저주를 옷처럼 입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저주가 항상 두르는 옷과 띠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어디를 가든 옷을 입고 다니듯, 저주가 언제나 그와 함께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29절에서 중요한 변화를 맞습니다. 거기서는 원수들이 저주가 아니라 자기들의 수치를 겉옷처럼 두르기를 바랍니다. 시편은 이런 반복을 통해 악한 말과 그 결과가 서로에게 돌아가는 모습을 그립니다.
20절의 “이것이”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이 저를 고발하는 자들, 제 목숨을 거슬러 악한 말을 하는 자들이 여호와야훼에게서 받는 보응입니다.시편 109:20 · 본디새김
이 절은 긴 저주와 다음 기도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습니다. 앞에서 저주를 시인 자신의 기도로 읽는다면, “이것이”는 그가 원수들에게 임하기를 바라는 보응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저주를 원수들의 말로 읽는다면, “이것이”는 자신에게 퍼부어진 저주를 가리키며, 그 저주가 원수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20절 역시 앞선 해석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두 읽기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사실이 있습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악한 말이 아무런 결과 없이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거슬러 악한 말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고, 그들의 말에 대한 판단을 하나님께 구합니다.
이것은 직접적인 복수 행위와 구별됩니다. 시인은 자신이 원수를 죽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행동을 구합니다.
그렇다고 이 사실만으로 저주에 담긴 모든 소망이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기도의 말과 하나님이 실제로 옳다고 판정하시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21절에서 시인의 목소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는 이제 원수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떻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지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시편을 신약의 원수 사랑에 관한 가르침과 함께 읽을 때에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예수는 마태복음 5:44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2:19–21에서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며, 악을 선으로 이기라고 권합니다. 이 가르침이 악과 불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복수를 자신의 권리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당신” — 저주에서 구원의 간구로
그러나 당신, 여호와야훼 주여,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저를 돌보아 주십시오. 당신의 인애가 선하니 저를 건져 주십시오.시편 109:21 · 본디새김
“그러나 당신.”
이 말은 상대를 뚜렷하게 내세우는 표현입니다. 시인은 원수들에 관한 이야기를 멈추고 하나님을 직접 부릅니다.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까요?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당신의 인애가 선하니.” 이 두 표현이 기도의 근거입니다.
여기서 다시 인애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악인이 인애를 베풀기를 기억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 인애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에게서 인애를 기대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도 하나님에게는 인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의에 대한 마지막 대답을 또 다른 인간의 악의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인애에서 찾으려는 기도입니다. 물론 앞의 긴 저주를 시인의 기도로 읽는다면, 그가 실제로 이 원칙을 얼마나 온전히 실천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긴장이 남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21절에서 시인이 분명하게 호소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건져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심각하게 무너진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난하고 궁핍하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은 제 속에서 꿰뚫렸습니다.시편 109:22 · 본디새김
처음에는 사람들이 거짓된 말로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공격이 자신의 내면과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여 줍니다. “제 마음은 제 속에서 꿰뚫렸습니다”는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표현입니다.
그는 원수들의 말 때문에 실제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기우는 그림자와 털려 나가는 메뚜기
23절에서는 두 가지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저는 기우는 그림자처럼 사라져 버렸고, 메뚜기처럼 털려 나갔습니다.시편 109:23 · 본디새김
첫 번째는 그림자입니다. 해가 기울면 그림자는 길어지고, 해가 지면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시인은 자신의 삶이 그렇게 끝을 향해 기울어 가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이미지는 조금 낯섭니다. 메뚜기는 가볍고 작은 생물입니다. 사람이 손이나 옷에서 털어 내듯 쉽게 밀려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그렇게 내쳐지는 존재가 되었다고 느낍니다.
그림자는 시간이 지나며 사라지는 모습이고, 메뚜기는 외부의 힘에 의해 쉽게 밀려나는 모습입니다. 시인은 스스로를 붙들 수 없는 존재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사라져 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24절에서는 그 고통이 몸으로 나타납니다.
제 무릎은 단식으로 휘청거렸고, 제 살은 기름기가 빠져 말랐습니다.시편 109:24 · 본디새김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종교적 금식인지, 고통 속에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 상황인지 본문만으로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몸이 실제로 쇠약해졌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여기에는 앞서 나온 저주의 언어와 묘한 대조가 있습니다. 저주의 대상은 모든 소유를 잃고 떠돌며 궁핍해지기를 바라는 말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시인 자신도 가난하고 쇠약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강력한 권력자가 자신의 적들을 마음대로 처벌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어려운 자리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25절에 이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저는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보면 머리를 흔듭니다.시편 109:25 · 본디새김
머리를 흔드는 행위는 멸시나 조롱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편 22:7에서도 고통받는 사람을 보는 이들이 비웃고 머리를 흔듭니다.
처음에는 거짓된 입과 혀가 자신을 공격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를 보기만 해도 머리를 흔듭니다. 말로 시작된 공격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구하는 구원은 단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일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과 존엄이 회복되고, 원수들이 퍼뜨린 악한 말이 더 이상 자신을 규정하지 못하게 되는 일입니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 그것을 분명하게 요청합니다.
“그들이 저주하더라도 당신은 복을 내려 주십시오”
여호와야훼, 제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당신의 인애에 따라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시편 109:26 · 본디새김
시인은 21절에서 드렸던 구원의 기도를 다시 반복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당신의 손임을, 여호와야훼, 당신이 이를 하셨음을 그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시편 109:27 · 본디새김
원수들은 시인을 공격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의 첫 문장 “잠잠히 계시지 마십시오”와 이어집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행동하셔서 그 일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28절에 이르면 이 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대조 가운데 하나가 나타납니다.
그들이 저주하더라도 당신은 복을 내려 주십시오. 그들은 들고일어났다가 수치를 당했습니다. 당신의 종은 기뻐하기를 바랍니다.시편 109:2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저주가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저주와 복이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그들이 저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을 내리십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저주를 직접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어떤 말을 할지는 시인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자신의 삶에 마지막 영향을 미칠지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기를 구합니다.
앞에서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파멸되기를 바라는 저주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자신이 어떤 복을 받아야 하는지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리고 그 복이 원수들의 저주보다 강하기를 바랍니다.
29절에서는 다시 옷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저를 고발하는 자들이 치욕을 입고, 자기들의 수치를 겉옷처럼 두르기를 바랍니다.시편 109:29 · 본디새김
앞의 저주에서는 저주를 옷처럼 입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원수들이 수치를 겉옷처럼 두르기를 바랍니다.
29절의 심판 이미지는 앞선 긴 저주와 달리 원수들의 수치에 집중합니다. 이 구절은 원수들의 후손까지 사라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다시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퍼부은 거짓과 고발이 드러나고, 그 결과 자신들이 수치를 당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시편의 흐름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긴 저주의 말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고, 결국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과 원수들의 수치를 요청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기도는 마지막에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거짓된 입에서 감사하는 입으로
나는 내 입으로 여호와야훼에게 크게 감사하리라. 많은 사람 가운데서 그를 찬양하리라.시편 109:30 · 본디새김
2절에서는 악한 입과 속이는 입이 열렸습니다. 원수들은 거짓된 혀로 시인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30절에서는 시인 자신의 입이 등장합니다. 시편의 시작에서는 입이 사람을 해치는 도구였고, 시편의 끝에서는 입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찬양은 반드시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보고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감사하리라”, “찬양하리라”는 앞으로 드릴 찬양의 결심으로 나타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고, 이제 그분을 찬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시편의 많은 탄식에서 나타나는 흐름과 닮아 있습니다. 고통을 호소하던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그분의 구원을 신뢰하며 찬양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가장 깊은 반전은 마지막 절에 있습니다.
고발자의 오른쪽에서, 궁핍한 사람의 오른쪽으로
그가 궁핍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서, 그의 목숨에 판결을 내리는 자들에게서 그를 구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09:31 · 본디새김
6절에서는 고발자가 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기를 바랐습니다.
31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궁핍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십니다.
두 구절은 같은 동사와 오른쪽이라는 위치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는 사람과 목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고발자들의 편에 서셔서 궁핍한 사람을 정죄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이 대조는 시편의 저주가 누구의 말인지에 대한 문제와 별개로, 시 전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죽이려고 뒤쫓는 행동은 인애를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궁핍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셔서 그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따라서 이 시편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단지 누군가를 벌하시는 데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억압받고 고발당하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표현에서도 같은 핵심적인 구성이 반복됩니다. 6절은 ‘그의 오른쪽에 서기를’, 31절은 ‘궁핍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악을 판단하시는 일과 궁핍한 사람을 보호하시는 일을 함께 포함한다는 것은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시편 82:3–4에서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행하고 그들을 악인들의 손에서 구하라고 명령합니다. 시편 72:12–14에서는 왕이 궁핍한 사람과 도움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의 생명을 압제와 폭력에서 되찾아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이러한 본문들과 함께 시편 109편의 마지막 절을 읽으면, 하나님이 왜 궁핍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시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오른쪽 자리가 바뀌다
시편 109편은 누가 더 강한 말을 하는가보다, 마지막에 누구의 말과 판단이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가를 묻습니다. 시인은 그 마지막 판단을 하나님께 구합니다.
자신을 해친 사람의 악이 드러나고 바로잡히기를 바라는 것과, 그 사람의 무고한 가족까지 파멸하기를 바라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시편 109편의 저주를 오늘날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기도문으로 그대로 사용하는 일은 신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억울하다고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언제나 의로운 피해자라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고발자의 자리에 서 있는가, 아니면 궁핍한 사람을 보호하는 자리에 서 있는가? 물론 어떤 사람의 주장에 무조건 동의하거나 사실관계가 밝혀지기 전에 한쪽을 정당화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정의롭게 판단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거짓을 분별하고 사실을 확인하며 부당하게 공격받는 사람을 보호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시편 109편의 첫 장면에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악한 입들이 열리고, 거짓된 혀가 움직이며, 미움의 말들이 한 사람을 둘러쌉니다. 그를 향한 고발은 재판의 언어로 이어지고, 무서운 저주들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모든 말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잠잠히 계시지 마십시오.”
그의 몸은 쇠약해지고 마음은 깊이 상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머리를 흔들며 조롱합니다. 그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그를 둘러싼 고발자들의 모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시인은 다시 누군가의 오른쪽을 바라봅니다.
처음에는 그곳에 고발자가 서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야훼가 서 계십니다.
시인은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신의 입으로 감사하겠다고 말합니다.
시편의 시작에서는 사람들의 거짓된 입이 열렸습니다.
끝에서는 시인의 입이 열립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기 위한 말입니다.
그 찬양의 이유를 시인은 마지막 한 문장으로 남깁니다. 「그가 궁핍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서, 그의 목숨에 판결을 내리는 자들에게서 그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