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09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누가 가난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는가

시편 109편에는 서로 닮았지만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두 장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6절의 「그를 다스릴 악한 사람을 세워 주십시오. 고발자가 그의 오른쪽에 서기를 바랍니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재판을 받으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오른쪽에는 그를 고발하는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가 죄가 있다고 판결받기를 바라고, 그의 기도마저 죄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두 번째 장면은 시편의 마지막 절 「그분께서 가난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시기 때문입니다」입니다. 이번에도 누군가의 오른쪽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서 계신 분은 고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가난한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서 계십니다. 시편 109편은 누군가를 무너뜨리려는 고발의 목소리로 가득하지만, 마지막에는 그 고발 앞에 선 사람의 오른쪽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장면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읽기 어려운 기도 가운데 하나를 만나야 합니다.

시인은 원수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의 아내가 남편을 잃고 자녀들이 아버지를 잃기를 바랍니다. 그의 후손이 끊어지고 조상들의 죄까지 기억되기를 바라는 무서운 말들이 이어집니다.

이 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이런 저주를 해도 된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이 무서운 저주들은 시인 자신이 아니라 그를 고발하는 원수들이 퍼붓는 말일까요?

실제로 시편 109편의 한가운데에는 누가 저주를 말하고 있는가라는 중요한 해석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저주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피해서도 안 되지만, 그 저주를 곧바로 하나님의 뜻이나 모든 신자가 따라야 할 기도 방식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이 시편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칼이나 창이 아닙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말에 맞서는 것은 또 다른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8109편 본문 읽기 →

「잠잠히 계시지 마십시오」 — 말로 공격받는 사람의 기도

시편 109:1–5 본문 →

지휘자를 위한 다윗의 시입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 잠잠히 계시지 마십시오.시편 109:1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기 전에 하나님께 침묵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조용해지기를 먼저 요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잠잠히 계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나를 거슬러 악한 입과 속이는 입을 열고 거짓된 혀로 내게 말했습니다. 미움의 말들이 나를 에워싸고 그들은 까닭 없이 나와 싸웠습니다.시편 109:2–3 · 두루새김

여기서 거듭 등장하는 것은 입과 혀와 말입니다. 그 말들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시인은 「저를 에워쌌고」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말이 사람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적군이 한 사람을 포위하듯, 거짓된 말들이 시인을 포위한 것입니다.

시인은 단순히 누군가가 자신을 험담해서 기분이 상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과 고발이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상황을 호소합니다. 특히 3절의 「아무 까닭 없이」라는 말은 자신에게 정당한 공격의 이유가 없다는 시인의 주장입니다. 본문은 이 고발의 구체적인 사건이나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그들은 내 사랑을 고발로 갚습니다. 그러나 나는 기도합니다. 그들은 내게 선 대신 악을, 내 사랑 대신 미움을 안겼습니다.시편 109:4–5 · 두루새김

시인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베푼 사랑이 미움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원문에서는 ‘대신’에 해당하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두루새김은 이 관계를 「도리어」와 「갚았습니다」라는 말로 풀어 줍니다.

시인은 자신이 준 것과 되돌아온 것 사이의 부당한 교환을 고발합니다.

사랑을 주었는데 미움이 돌아왔습니다.

선을 베풀었는데 악이 돌아왔습니다.

관계가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정반대로 움직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기도합니다」

4절 후반은 히브리어로 매우 짧습니다. 직역하면 「그러나 나는 기도」입니다. 동사가 생략된 압축적인 표현입니다. 두루새김은 이것을 「그러나 저는 기도합니다」라고 풀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행동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기도했는지도 이 절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원수들이 자신을 고발하는 상황에서 자신은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두 종류의 말이 서로 마주 보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원수들은 시인을 향해 거짓된 말을 쏟아 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특히 1절에서 하나님께 침묵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대비는 더욱 선명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모든 말 가운데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견디기 어려운 것은 원수들의 말이 너무 많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아직 말씀하지 않으시는 현실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시편은 길고 무서운 저주의 말로 들어갑니다.

이 저주를 말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6–19절의 저주는 누구의 말인가

6절부터 19절까지는 한 사람에게 쏟아지는 저주가 이어집니다. 그가 악한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고 재판에서 죄가 있다고 판결받으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고, 아내와 자녀들이 비참해지고, 그의 이름과 후손이 끊어지기를 바라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인 자신이 원수를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로 읽는 것입니다. 6절은 직접적인 명령형으로 시작하지만, 앞에서 말하던 사람이 바뀌었다는 표시가 없습니다. 또한 20절에서 시인은 자신을 고발하는 자들이 여호와야훼께 이러한 대가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원수들이 시인을 향해 퍼붓는 저주를 시인이 인용한 것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 읽기는 시편에 나타나는 대명사의 변화에 주목합니다. 1–5절에서 시인의 원수들은 여러 사람입니다. 그런데 6절부터 갑자기 저주의 대상이 「그」라는 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20절에 이르면 다시 자신을 고발하는 여러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읽기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6절에서 원수들의 말을 인용하기 시작한다는 분명한 표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첫 번째 읽기도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시인은 여러 원수들에게 공격받고 있다고 말하다가 한 사람과 그 가족 전체를 향한 저주를 길게 이어 갑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본문만으로 6–19절에서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불확실성은 사소한 문법 문제가 아닙니다. 시편의 의미를 크게 바꾸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읽기를 따르면, 우리는 심하게 억울함을 당한 시인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을 구할 수 있는지 마주하게 됩니다. 두 번째 읽기를 따르면, 우리는 한 사람이 원수들에게 얼마나 잔혹한 저주를 당했는지 듣게 됩니다.

어느 경우든 저주의 말이 지닌 폭력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발자가 그의 오른쪽에 서기를 — 재판에서 시작되는 저주

시편 109:6–8 본문 →

악한 사람을 세워 그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 고발자가 그의 오른쪽에 서기를 바랍니다. 그가 재판을 받을 때 죄인으로 판결받고 그의 기도마저 죄가 되기를 바랍니다.시편 109:6–7 · 두루새김

저주는 재판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고발자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그의 오른쪽」입니다. 고발자가 재판받는 사람의 바로 곁에 서 있습니다. 이는 그를 향한 고발이 얼마나 가까이, 얼마나 위협적으로 다가와 있는지 보여 줍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7절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도움과 자비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는 그 사람이 기도할 때조차 그 기도가 죄로 여겨지기를 바랍니다. 재판을 받으면 죄가 있다고 판결받고, 하나님께 기도해도 죄가 됩니다.

이 저주가 이루어진다면 그는 사람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구원의 길을 찾기 어려운 처지가 됩니다.

그가 살 날은 짧아지고 다른 이가 그가 맡은 자리를 차지하며,시편 109:8 · 두루새김

여기서 「그가 맡은 자리」(⁨פְּקֻדָּה⁩)에 해당하는 말은 맡겨진 임무나 감독의 직무, 책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자리인지는 이 시편에서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이 저주가 그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리까지 없애려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제 그가 남긴 가족에게까지 저주가 확대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발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탄은 문맥에 따라 적대자나 고발자를 가리킵니다. 민수기 22:22에서는 하나님의 천사가 발람의 길을 막아서는 적대자의 역할로 등장하며, 스가랴 3:1에서는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오른쪽에 서서 고발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시편 109:6에서는 이어지는 재판의 문맥에 비추어 법정의 고발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를 반드시 후대에 특정한 악한 영적 존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 ‘사탄’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 사도행전 1:20에서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가 남긴 자리를 설명하면서 시편 109:8의 후반부를 인용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구절을 유다를 대신할 사람이 사도가 맡은 일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근거로 사용합니다(사도행전 1:15–26). 그러나 이것을 시편 109편 전체가 처음부터 가룟 유다 한 사람만을 가리키도록 쓰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주에 등장하는 아내와 자녀의 파멸까지 유다에게 그대로 적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잃기를 — 한 사람의 파멸이 가족 전체로 번지다

시편 109:9–15 본문 →

그의 아이들은 아버지를 잃고 그의 아내는 남편을 잃기를 바랍니다.시편 109:9 · 두루새김

저주는 여기서 더욱 견디기 어려워집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바라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에게 속한 가족의 미래까지 무너지기를 바랍니다. 10절에서는 그 아이들이 떠돌며 구걸하는 모습까지 등장합니다.

그 아이들이 떠돌고 또 떠돌며 구걸하고 무너진 제 집터에서 나와 찾아 헤매기를 바랍니다.시편 109:10 · 두루새김

「이리저리 떠돌며」라는 표현은 안정된 거처 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원문에서는 ‘떠돌다’에 해당하는 말이 반복되어 이 모습을 강조합니다. 아이들이 안정된 거처를 잃고 가진 것 없이 떠도는 장면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정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면 남겨진 가족은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은 자신들을 보호할 사람이 없을 때 착취와 가난에 시달리기 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2:22–24에서는 남편을 잃은 여자와 부모를 잃은 아이를 괴롭히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신명기 10:18에서는 하나님이 이들을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시편 109편의 저주에서는 바로 그 아내와 자녀들이 비참한 처지에 놓이기를 바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긴장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다른 곳에서는 보호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사람들에게, 이 구절에서는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 닥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빚 받을 사람이 그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가고 낯선 이들이 그가 애써 얻은 것을 빼앗으며, 그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이어 줄 이가 없고 아버지 잃은 그의 아이들을 불쌍히 여길 이도 없기를 바랍니다.시편 109:11–12 · 두루새김

여기서 중요한 말은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12절의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는 관계 안에서 베풀어지는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해지기를 바라는 저주가 아닙니다.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이 어떤 관계에서도 자비와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기를 바라는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저주의 잔혹함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 말들을 단순히 정의로운 심판에 대한 아름다운 기도라고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아버지를 잃을 아이들까지 고통받기를 바라는 내용은 본문을 읽는 사람에게 심각한 윤리적 질문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 질문 때문에 저주의 강도를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조상들의 죄까지 기억되기를

13–15절에서는 저주가 한 세대를 넘어갑니다.

그의 후손이 끊어지고 다음 세대에는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기를 바랍니다. 그 조상들의 죄가 여호와야훼 앞에 기억되고 그 어머니의 죄는 지워지지 않기를 빕니다.시편 109:13–14 · 두루새김

여기에는 두 가지 방향의 기억이 나타납니다. 그 사람의 조상들이 지은 죄는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반면 그 사람과 후손들의 이름은 땅에서 지워지기를 바랍니다.

죄는 남고, 이름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후손을 통해 이름이 이어진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이 다음 세대에 기억되고 가족의 계보가 이어지는 것은 그 사람이 사회 안에 남긴 자리와 미래가 계속 이어진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저주는 그 이어짐까지 끊어지기를 바랍니다.

시편에 이러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죄 없는 자녀들을 부모의 죄 때문에 반드시 처벌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명기 24:16에서는 자녀가 부모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되며, 각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에스겔 18:20에서도 아들이 아버지의 죄를 짊어지지 않고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는 원칙이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물론 구약에는 한 세대의 죄가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습도 나타납니다(출애굽기 20:5–6). 그러나 죄가 역사 속에 남긴 결과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과, 죄 없는 자녀에게 부모의 죄를 그대로 떠넘겨 처벌해도 된다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시편 109편의 저주는 그런 문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율법이나 교훈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닥치기를 바라는 극단적인 파멸의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표현된 모든 저주를 하나님의 일반적인 정의의 원칙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6절은 왜 이토록 끔찍한 저주가 등장하는지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 뒷부분 「무너진 집을 떠나 먹을 것을 찾아다니기를」은 히브리어 구문이 어려운 자리입니다. 원문에서는 무엇을 찾는지, 무너진 집과 이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먹을 것을 찾아 무너진 집을 떠나는 모습으로 풀었습니다. 또 이 시편을 신약의 원수 사랑에 관한 가르침과 함께 읽을 때에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44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2:19–21에서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며, 악을 선으로 이기라고 권합니다. 이 가르침이 악과 불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복수를 자신의 권리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사랑을 베풀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 — 저주가 겨냥하는 죄

시편 109:16–20 본문 →

그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 생각은 않고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을, 마음이 꺾인 사람을 죽이려고 뒤쫓았으니.시편 109:16 · 두루새김

이 절은 앞선 저주 전체에 이유를 부여합니다.

원문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기를 기억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사랑을 베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말로 풀었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을 몰랐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사랑을 베푸는 일을 자신의 행동 원칙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그 사람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12절의 「한결같은 사랑」과 16절의 「사랑」은 원문에서 같은 말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도 자비를 받지 못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의 저주에 나타나는, 행한 대로 돌려받는 논리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논리가 앞서 언급된 자녀들의 고통까지 모두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16절에 나오는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시편의 후반부에서도 다시 나타납니다. 16절에는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뒤쫓는 악인이 등장합니다. 22절에는 「저는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호소하는 시인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16절의 피해자를 시인 자신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이 시편의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싸움이 아닙니다. 강한 자가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을 고발하고 괴롭히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저주를 원수들의 말로 읽는다면 16절도 원수들이 시인에게 덧씌운 죄목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은 실제로 가진 것이 없는 시인을 도리어 가진 것 없는 사람을 해친 악인이라고 비난하는 셈입니다. 이 역시 가능한 읽기이지만, 본문은 어느 쪽이 실제 상황인지 확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시편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시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이 누구의 오른쪽에 서시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중요해지는 표현입니다.

저주를 옷처럼 입은 사람

17–19절에서는 저주가 마치 손에 잡히는 물질처럼 묘사됩니다.

그는 저주를 사랑했고 저주가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복을 기뻐하지 않았고 복은 그에게서 멀어졌습니다.시편 109:17 · 두루새김

다른 사람을 향해 퍼붓던 저주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저주를 제 옷처럼 입었고 저주는 물처럼 그의 속으로, 기름처럼 그의 뼛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시편 109:18 · 두루새김

저주는 먼저 옷이 됩니다. 그런데 옷처럼 몸 바깥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물처럼 몸속으로 들어갑니다. 기름처럼 뼛속에 들어갑니다.

물과 기름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거나 몸을 돌보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저주가 물과 기름처럼 몸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바깥에서 시작된 악이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뒤덮는 이미지입니다.

그 저주가 그를 감싸는 옷이 되기를, 그가 늘 동여매는 띠가 되기를 바랍니다.시편 109:19 · 두루새김

처음에는 저주를 옷처럼 입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저주가 그를 감싸는 옷과 늘 매는 띠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어디를 가든 옷을 입고 다니듯, 저주가 언제나 그와 함께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0절의 「이것이」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이 나를 고발하는 자들, 내 목숨을 거슬러 악한 말을 하는 자들이 여호와야훼께 받는 대가이기를 바랍니다.시편 109:20 · 두루새김

이 절은 긴 저주와 다음 기도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습니다. 앞에서 저주를 시인 자신의 기도로 읽는다면, 「이것이」는 그가 원수들에게 닥치기를 바라는 대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저주를 원수들의 말로 읽는다면, 「이것이」는 자신에게 퍼부어진 저주를 가리키며, 그 저주가 원수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20절 역시 앞선 해석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두 읽기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사실이 있습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악한 말이 아무런 결과 없이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겨누어 악한 말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하나님 앞에 가져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대한 판단을 하나님께 구합니다.

이 점에서 시편은 단순히 개인적인 복수의 욕망을 표현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정당한지, 그들이 어떤 대가를 받는 것이 합당한지를 하나님 앞에서 다룹니다.

21절에서 시인의 목소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은 앞선 구절들처럼 단순히 저주가 임하기를 바라는 형식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그가 저주를 좋아했고 저주가 그에게 왔다는 식으로 사건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이미 드러난, 행한 대로 돌려받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이어지는 저주의 문맥 안에서 그에게 닥치기를 바라는 결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시편에는 원수들의 악행을 고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들이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시편 35편에서는 시인이 자신을 거짓으로 고발하는 사람들과 싸워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특히 자신이 그들을 위해 슬퍼하고 기도했지만, 그들은 자신을 대적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시편 35:11–16). 시편 69편에서도 원수들의 부당한 공격과 수치를 호소하다가 그들에게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는 기도가 이어집니다(시편 69:22–28).

「그러나 주 여호와야훼」 — 저주에서 구원의 간구로

시편 109:21–25 본문 →

그러나 당신, 주 여호와야훼여,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돌보아 주십시오.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은 선하니 나를 건져 주십시오.시편 109:21 · 두루새김

시인은 원수들에 관한 이야기를 멈추고 하나님을 직접 부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원을 구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까요?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선하니」. 이 두 표현이 기도의 근거입니다.

앞에서는 악인이 「사랑을 베풀 생각을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뒤쫓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 한결같은 사랑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에게서 사랑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도 하나님에게는 한결같은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문에서는 12절, 16절, 21절, 26절에 같은 낱말이 쓰입니다. 두루새김은 16절에서는 「사랑」으로, 나머지 세 구절에서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옮겼습니다. 이 시에는 사람이 사랑을 저버릴 때 일어나는 파괴와,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심으로써 이루시는 구원이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의 악의에 대한 마지막 대답을 또 다른 사람의 악의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사랑에서 찾으려는 기도입니다. 물론 앞의 긴 저주를 시인의 기도로 읽는다면, 그가 실제로 이 원칙을 얼마나 온전히 실천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긴장이 남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21절에서 시인이 분명하게 호소하는 것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내 마음은 속 깊이 찔렸습니다.시편 109:22 · 두루새김

처음에는 사람들이 거짓된 말로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공격이 자신의 마음과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여 줍니다.

그는 원수들의 말 때문에 실제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와 털려 나가는 메뚜기

기울어 가는 그림자처럼 나는 사라졌고, 메뚜기처럼 털려 나갔습니다.시편 109:23 · 두루새김

첫 번째는 그림자입니다. 해가 기울면 그림자는 길어지고, 해가 지면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시인은 자신의 삶이 그렇게 끝을 향해 가며 사라지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이미지는 조금 낯섭니다. 메뚜기는 가볍고 작은 생물입니다. 사람이 손이나 옷에서 털어 내듯 쉽게 밀려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그렇게 내쳐지는 존재가 되었다고 느낍니다.

그림자는 시간이 지나며 사라지는 모습입니다. 메뚜기는 외부의 힘에 의해 쉽게 밀려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삶이 사라져 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금식으로 내 무릎은 휘청거렸고 내 살은 기름기가 빠져 말랐습니다.시편 109:24 · 두루새김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종교적 금식인지, 고통 속에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 상황인지 본문만으로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몸이 실제로 약해졌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저주의 대상은 모든 재산을 잃고 떠돌며 가진 것 없이 살기를 바라는 말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시인 자신도 가난하고 몸이 약해진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강력한 권력자가 자신의 적들을 마음대로 처벌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어려운 자리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나는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듭니다.시편 109:25 · 두루새김

머리를 흔드는 행동은 멸시나 조롱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편 22:7에서도 고통받는 사람을 보는 이들이 비웃고 머리를 흔듭니다.

처음에는 악한 자들이 입을 열어 속이는 말을 하고, 거짓된 혀로 자신을 공격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를 보기만 해도 머리를 흔듭니다. 말로 시작된 공격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구하는 구원은 단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일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과 존엄이 회복되고, 원수들이 퍼뜨린 악한 말이 더 이상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게 되는 일입니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 그것을 분명하게 요청합니다.

「그들이 저주하더라도 주님은 복을 내려 주십시오」

시편 109:26–29 본문 →

시인은 「여호와야훼, 제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며 21절에서 드렸던 구원의 기도를 다시 반복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당신의 손이 하신 일인 줄, 여호와야훼, 당신이 이루신 일인 줄 그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시편 109:27 · 두루새김

원수들은 시인을 공격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의 첫 문장과 이어집니다. 「잠잠히 계시지 마십시오」. 시인은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행동하셔서 그 일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저주하더라도 당신은 복을 내려 주십시오. 그들은 들고일어났다가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당신의 종은 기뻐하게 해 주십시오.시편 109:28 · 두루새김

앞에서는 저주가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저주와 복이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그들이 어떤 말을 할지는 시인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자신의 삶에 마지막 영향을 미칠지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기를 구합니다.

나를 고발하는 자들이 치욕을 옷으로 입고 제 부끄러움을 겉옷처럼 두르기를 바랍니다.시편 109:29 · 두루새김

앞의 저주에서는 저주를 옷처럼 입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이 구절은 원수들의 후손까지 사라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다시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퍼부은 거짓과 고발이 드러나고, 그 결과 자신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시인의 모든 고통과 분노가 완전히 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흐름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기도는 마지막에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거짓된 입에서 감사하는 입으로

시편 109:30–31 본문 →

내 입으로 여호와야훼께 크게 감사하겠습니다. 많은 사람 한가운데서 찬양하겠습니다.시편 109:30 · 두루새김

이 찬양은 반드시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보고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감사하겠습니다」, 「찬양하겠습니다」는 앞으로 드릴 찬양의 결심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시편의 많은 탄식에서 나타나는 흐름과 닮아 있습니다. 고통을 호소하던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그분의 구원을 신뢰하며 찬양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가장 깊은 반전은 마지막 절에 있습니다.

고발자의 오른쪽에서, 가난한 사람의 오른쪽으로

참으로 그분은 가진 것 없는 이의 오른쪽에 서시어 그의 목숨에 판결을 내리는 자들에게서 그를 구원하십니다.시편 109:31 · 두루새김

6절에서는 고발자가 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기를 바랐습니다.

31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가난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십니다.

히브리어 표현에서도 같은 핵심적인 구성이 반복됩니다. 두 구절은 같은 동사와 오른쪽이라는 위치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는 사람과 목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고발자들의 편에 서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의 정의는 악을 판단하시는 일과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시는 일을 함께 포함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시편 82:3–4에서는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행하고 그들을 악인들의 손에서 구하라고 명령합니다. 시편 72:12–14에서는 왕이 가진 것 없는 사람과 도움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의 생명을 억압과 폭력에서 되찾아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오른쪽 자리가 바뀌다

시편 109:1–31 본문 →

처음에는 고발자가 오른쪽에 서기를 바라는 저주가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셔서 그를 구원하신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이 대조는 시편의 저주가 누구의 말인지에 대한 문제와 별개로, 시 전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긴 저주와 고발의 말들이 끝난 뒤 남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읽으며 상처받은 사람이 왜 극단적인 말을 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극단적인 말이 모두 옳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해친 사람의 악이 드러나고 바로잡히기를 바라는 것과, 그 사람의 죄 없는 가족까지 파멸하기를 바라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시편 109편의 저주를 오늘날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기도문으로 그대로 사용하는 일은 신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억울하다고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언제나 의로운 피해자라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시편 109편의 첫 장면에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악한 자들이 입을 열고, 거짓된 혀가 움직이며, 미움의 말들이 한 사람을 둘러쌉니다. 그를 향한 고발은 재판의 말로 이어지고, 무서운 저주들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모든 말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잠잠히 계시지 마십시오」. 그의 몸은 약해지고 마음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머리를 흔들며 조롱합니다.

그러나 시편은 그를 둘러싼 고발자들의 모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시인은 다시 누군가의 오른쪽을 바라봅니다.

처음에는 그곳에 고발자가 서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야훼께서 서 계십니다.

시인은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신의 입으로 감사하겠다고 말합니다. 시편의 시작에서는 사람들이 입을 열어 속이는 말을 했습니다. 끝에서는 시인의 입이 열립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기 위한 말입니다.

그 찬양의 이유를 시인은 마지막 한 문장으로 남깁니다. 「그분께서 가난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목숨을 두고 판결을 내리는 자들에게서 그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