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08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새벽을 깨우는 믿음과 버림받은 현실

시편 108편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하나님, 제 마음은 굳게 서 있습니다」라며 자신이 얼마나 굳게 서 있는지 선언합니다. 밤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새벽을 깨우겠다고 말합니다. 여러 나라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하늘보다 높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몇 절 뒤, 같은 시인이 뜻밖의 말을 꺼냅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신 것 아닙니까?」

마음은 굳게 서 있는데, 하나님은 자신들을 버리신 것 같습니다.

이 둘은 어떻게 함께 존재할 수 있을까요?

흔히 믿음이 굳건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편 108편의 믿음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결심합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낙관과는 다른 종류의 확신이 있습니다. 현재의 형편이 좋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결같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부릅니다.

시편 108편의 거의 모든 내용은 이미 다른 두 시편에 등장했던 말씀입니다. 2–6절은 시편 57:8–12와, 7–14절은 시편 60:7–14와 거의 일치합니다. 시편 57편에서는 위협받는 사람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찬양합니다. 시편 60편에서는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는 공동체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시편 108편은 두 시편의 뒷부분을 가져와 하나의 노래로 엮었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집니다.

처음에는 개인의 마음이 굳게 서 있습니다. 그러나 곧 여러 나라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주변 민족들을 다스리신다는 선언이 들립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여전히 적의 요새를 돌파할 수 없고, 군대와 함께 나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시편 108편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아직 그 약속대로 보이지 않는 현실 사이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9108편 본문 읽기 →

오래된 두 노래가 새로운 기도가 되다

시편 108:1 본문 →

다윗의 노래, 시입니다.시편 108:1 · 두루새김

시편의 표제는 이 노래를 다윗과 연결합니다.

시편 57편의 표제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있을 때라는 상황을 제시합니다. 시편 60편의 표제는 아람과 에돔을 상대로 한 전쟁의 상황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개인이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가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시편 108편에는 그 두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는 표제가 없습니다. 다윗과의 연결만 남아 있습니다.

이 노래가 정확히 언제 현재의 형태로 구성되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직접 기존 노래를 결합했는지, 후대에 다윗과 연결된 시편들이 새로운 예배의 상황에서 결합되었는지도 표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본문이 두 시편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시편 57편에서는 처음에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원수들의 위협을 호소하다가, 후반부에서 마음을 굳게 하고 찬양합니다. 시편 60편에서는 처음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탄식하다가, 후반부에서 하나님의 선언을 붙들고 도움을 구합니다. 시편 108편은 두 시편의 앞부분에 있던 구체적인 어려움의 묘사를 생략하고, 마음이 굳게 서 있다는 찬양과 하나님의 약속을 중심으로 새롭게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어려움 자체를 완전히 지우지는 않습니다.

12절의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신 것 아닙니까?」라는 탄식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노래는 오래된 고난의 기억을 지워 버리고 승리의 말만 모은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찬양과 간절한 기도를 함께 드릴 수 있도록 오래된 기도의 말씀을 다시 배열한 노래입니다.

같은 말씀이 새로운 상황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찬양했던 말이 오늘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됩니다.

과거에 도움을 구했던 기도가 오늘 다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기도가 됩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겠다 — 기다림보다 먼저 시작되는 찬양

시편 108:2–3 본문 →

하나님, 내 마음은 굳게 서 있습니다. 내 온 존재로 노래하며 연주하겠습니다.시편 108:2 · 두루새김

여기서 「굳게 서 있습니다」는 확고하게 세워지고 준비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시인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기분이 좋아졌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심에 이어지는 원문의 표현이 조금 낯섭니다. 히브리어 아프 케보디는 문자 그대로 옮기면 ‘나의 영광도 또한’이라는 뜻입니다. 원문에서 ‘나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사람 안의 고귀한 부분, 자신의 존재에서 가장 귀한 부분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반드시 혀나 영혼 가운데 하나로 한정해야 할 충분한 근거는 없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표현을 「저의 온 존재로」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고귀한 것까지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참여시키겠다는 결심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시인이 악기들을 깨웁니다.

깨어나라, 하프와 리라야.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시편 108:3 · 두루새김

보통은 새벽이 사람을 깨웁니다. 밤이 지나고 빛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잠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순서를 뒤집습니다.

새벽이 자신을 깨우기 전에, 자신이 먼저 노래를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새벽보다 먼저 일어나 찬양하겠다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아침 일찍 예배하겠다는 결심 이상의 의미를 느끼게 합니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을 때 찬양을 시작하는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시편의 후반부를 이미 알고 읽으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시인은 아직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군대와 함께 나서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새벽을 기다린 뒤에야 노래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노래합니다.

시인의 마음이 굳게 서 있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도 하나님께 노래하겠다는 방향이 정해졌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은 현실을 모르는 밝은 감정이 아닙니다. 현실이 아직 어두워도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정하는 태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6:9과 30:12에서도 비슷하게 인간의 영광이 기쁨이나 찬양과 연결됩니다.

여러 민족 가운데서 울리는 노래 —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보다 높다

시편 108:4–6 본문 →

여호와야훼여, 여러 백성 가운데서 당신께 감사하고 여러 나라 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겠습니다.시편 108:4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도 알리려 합니다.

그런데 이 선언은 시편의 후반부와 긴장을 이룹니다. 8–10절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토와 주변 민족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모압과 에돔, 블레셋이 하나님의 승리 선언에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앞부분은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선언하고, 후반부는 여러 민족들과의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이 마주한 구체적인 전쟁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가 찬양하는 하나님은 자기 민족의 군사적 성공만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온 세계에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온 세계가 그분의 영광을 알아야 할까요?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보다 먼저 두 가지 성품을 말합니다.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당신의 진실하심은 구름까지 닿기 때문입니다.시편 108:5 · 두루새김

「한결같은 사랑」은 관계 안에서 지속되는 사랑과 변함없는 돌보심을 가리키며, 「진실하심」은 참됨과 믿을 만함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 사랑을 한결같이 지키신다는 사실이 함께 선포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을 고백한 직후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늘 위로 높이 오르십시오. 당신의 영광이 온 땅 위에 드러나게 해 주십시오.시편 108:6 · 두루새김

5절에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하늘 위까지 드높습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하늘 위로 높이 오르시기를 바랍니다.

5절에서는 그분의 진실하심이 구름까지 닿습니다.

6절에서는 그분의 영광이 온 땅 위에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고백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온 세계에 드러나고 인정받기를 바라는 찬양의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그 영광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시편은 곧바로 구원의 기도로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57:11의 같은 내용이 나오는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늘에까지 이른다고 말하지만, 시편 108:5에서는 하늘 위로 높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 차이를 지나치게 큰 신학적 변화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현재의 시편에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하늘의 높이를 넘어서는 것으로 노래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 — 찬양이 구원의 기도가 되다

시편 108:7 본문 →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들이 구출되도록 당신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시편 108:7 · 두루새김

지금까지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구원을 요청합니다.

시인은 그들이 강한 사람들인지, 전쟁에서 승리할 만한 능력을 가졌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근거로 구원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보다 높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지금 구원이 필요한 처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과 현재 고난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고난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니 곧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구합니다.

여러 사람의 구원을 위해 한 사람이 응답을 구하다

이 절에는 대명사의 변화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복수입니다. 그러나 끝에서는 「제게 응답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여러 사람의 구원을 구하면서 한 사람이 자신에게 응답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만을 위해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사랑받는 사람들의 구원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12절에 이르면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신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어려움이 자신의 기도가 됩니다.

그런데 이 구원 요청에 이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땅과 민족들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땅을 나누시고 골짜기를 재신다 — 누구의 땅인가

시편 108:8–10 본문 →

하나님께서 그 거룩하심을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기뻐 뛰리라. 세겜을 나누고 숙곳 골짜기를 재리라.」시편 108:8 · 두루새김

지금까지는 시인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두루새김이 「자신의 거룩하심을 두고」라고 옮긴 말은 ‘그의 거룩함 안에서’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소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방식도 있지만, 원문만으로 하나님이 어느 건물이나 장소에서 말씀하셨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겜을 나누시고 숙곳 골짜기를 재시겠다고 하십니다. 땅을 나눈다는 것은 각자가 차지할 몫을 정하는 일입니다. 골짜기를 잰다는 것도 땅의 크기와 경계를 정하는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세겜은 요단강 서쪽의 중앙 산지에 있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창세기 12:6–7에서 아브라함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그의 후손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숙곳은 요단강 동쪽 지역과 관련된 지명으로, 창세기 33:17에서 야곱이 머물렀던 곳으로 등장합니다. 두 지역을 함께 언급함으로써 시인은 요단강 양쪽에 걸친 땅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땅을 소유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얼마나 강한가에 있지 않고, 그 땅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땅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차지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소유물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선물로 나타납니다.

길르앗, 므낫세, 에브라임, 유다 — 하나님께 속한 땅과 백성

「길르앗은 내 것이고 므낫세도 내 것이다. 에브라임은 내 투구요 유다는 내 지휘봉이다.」시편 108:9 · 두루새김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 지역과 연결되고, 므낫세 지파는 요단강 동쪽과 서쪽 양편에 물려받을 땅을 받았습니다(여호수아 13:29–31, 17:1–11).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북부의 중요한 지파였고, 유다는 남부 지역의 중심 지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여러 지역과 지파를 두루 언급합니다.

고대의 전투에서 머리를 보호하는 장비는 방어를 위해 중요했습니다. 에브라임은 그러한 보호와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유다의 지팡이는 다스리는 힘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창세기 49:10에서도 유다와 통치자의 지팡이가 연결됩니다.

그러나 에브라임과 유다는 서로 경쟁하는 모습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선언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 구절의 중심은 어느 지파가 더 뛰어난가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땅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국경이 흔들리고 지파와 지역이 갈라져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는 그 모든 것이 여전히 그분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언은 이스라엘의 영토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모압은 대야, 에돔은 신발, 블레셋에는 승리의 함성

「모압은 내 몸을 씻는 대야다. 에돔 위로 내 신발을 던지고 블레셋을 향해 승리의 함성을 지르리라.」시편 108:10 · 두루새김

대야는 주인이 몸을 씻을 때 사용하는 물건입니다. 강력한 민족이 하나님의 눈에는 일상적인 용도로 사용하시는 그릇처럼 묘사되는 것입니다.

에돔 위로 신발을 던지시는 표현은 조금 더 어렵습니다. 신발을 던지는 행위를 다스릴 권리나 차지한 땅을 표시하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주인이 종에게 신발을 던지는 모습을 떠올리며 에돔의 굴복을 표현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관습으로 확정하기보다, 하나님이 에돔을 다스리시며 그보다 위에 계심을 표현하는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처음에는 세겜과 숙곳이라는 특정한 지역에서 시작합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로 넓어집니다. 마지막에는 모압과 에돔, 블레셋이라는 주변 민족들에까지 이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토만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들을 위협하는 민족들 위에도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다만 이런 고대의 전쟁 승리 표현을 오늘날 특정 국가나 민족에 대한 적대감의 근거로 직접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시인은 고대 이스라엘이 경험하던 영토와 전쟁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노래합니다. 이 선언을 현대의 정치적 영토 주장이나 전쟁이 정당하다고 보증하는 말씀으로 곧장 옮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편의 가장 놀라운 반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모든 땅을 다스리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정작 시인은 그 땅으로 자신을 누가 인도할지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룻기 4:7에서는 신발을 벗어 권리를 넘기는 일을 확인하는 관습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시편 108편의 신발을 던지시는 행위와 정확히 같은 관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블레셋 부분에서는 시편 60:10의 히브리어는 블레셋에게 외치는 명령형으로 읽히지만, 시편 108:10은 하나님이 블레셋을 향해 승리의 함성을 지르시겠다는 일인칭 표현입니다. 시편 108편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시는 형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셨고(창세기 12:7, 15:18–21), 이스라엘은 그 땅을 차지한 이후에도 외부 민족들의 공격과 내부의 분열, 왕국의 쇠퇴와 패배를 겪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직접 땅을 나누시고 민족들을 다스리신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왕이나 군대가 그 권위를 대신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땅이라고 하셨는데, 왜 우리는 들어갈 수 없는가

시편 108:11–12 본문 →

누가 나를 요새 성읍으로 데려가겠습니까? 누가 나를 에돔까지 이끌겠습니까?시편 108:11 · 두루새김

하나님은 에돔 위로 신발을 던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아직 에돔까지 갈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요새 성읍」은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을 가리킵니다. 에돔은 사해 남쪽과 동남쪽에 걸친 산악 지역과 관련되며, 험한 지형은 적의 공격을 막는 데 유리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에돔의 특정한 성읍 하나를 가리킨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두 번째 물음의 동사 나하니(⁨נָחָה⁩)는 읽기가 갈립니다. 형태상 완료형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누가 나를 에돔까지 인도했는가?」라는 과거의 인도를 묻는 뜻으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반면 앞의 물음과 이어지는 간구를 고려하면, 두루새김의 「누가 저를 에돔까지 인도하겠습니까?」처럼 앞으로 자신을 인도할 분이 누구인지 묻는 나란한 표현으로 읽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원문의 형태와 문맥 사이에 긴장이 있으므로 어느 하나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자기 힘만으로 적의 요새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 당신은 우리 군대와 함께 나서지 않으십니다.시편 108:12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이 하늘 위까지 드높다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도 자신의 땅과 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이 둘 가운데 하나가 거짓일까요? 시인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잘못 이해한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선언이 실제 현실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이 질문을 해결하려면 시편이 말하는 두 가지 차원을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권위와 약속에 대해 말씀하시는 차원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실제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선언과 백성이 현재 경험하는 현실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간격을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직접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은 현재의 현실이 그 약속과 어긋나 보인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긴장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 긴장을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신 것 아닙니까?」라는 질문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비난을 쏟아내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분이 자신들을 버리신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말하면서, 여전히 그분께 도움을 구합니다. 시편 44:9–26에서도 공동체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탄식하면서 구원을 구합니다.

시편 108편은 그러한 탄식의 말을 가져오면서, 앞에 확고한 찬양의 결심을 놓았습니다. 그 결과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더 이상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께 탄식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시인의 마음이 굳게 서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문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이 함께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다른 곳으로 돌아서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결심입니다.

시편 108편은 하나님이 왜 군대와 함께 나서지 않으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죄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했는지, 어떤 전략적 실패가 있었는지, 하나님이 언제 다시 함께하시게 되는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시편 108편만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의 패배 원인을 특정한 죄나 사건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자신들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60:3–5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을 버리시고 땅을 흔드셨다는 탄식이 등장합니다. 시편 60편의 앞부분에는 하나님의 분노와 백성의 실패를 암시하는 탄식이 있지만, 시편 108편에서는 그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또한 시편 89편에서는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을 찬양하다가, 후반부에 이르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을 버리신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탄식합니다(시편 89:38–51). 두 시편 모두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이 현재 경험하는 현실 사이의 긴장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주는 구원은 헛됩니다 —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도움

시편 108:13 본문 →

우리가 고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십시오. 사람이 주는 구원은 헛됩니다.시편 108:13 · 두루새김

여기서 「헛됩니다」는 헛됨, 무가치함, 속임과 관련된 의미를 지닙니다. 시인은 사람이 주는 구원이 마지막까지 의지할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모든 사람의 도움과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의 문맥은 전쟁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주는 구원이 헛되다는 고백은 군사력과 사람의 전략만으로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시인은 다음 절에서 자신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대신하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힘입어 자신들이 용감하게 싸울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핵심은 인간의 능력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아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20:1–4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자기보다 많은 군대와 말과 전차를 보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어 싸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08편은 바로 그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시인은 군대의 규모와 무기가 충분한지를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나서시는지를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이해는 사무엘상 17:47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전쟁이 칼과 창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전쟁의 결과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든 군사적 충돌에 하나님이 어느 한쪽의 승리를 보장하신다는 일반 원칙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마다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용감하게 싸울 것입니다 —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승리의 고백

시편 108:14 본문 →

하나님을 힘입어 우리는 용감히 싸우겠습니다. 그분이 우리 적들을 짓밟으실 것입니다.시편 108:14 · 두루새김

시편은 마지막에 다시 확신의 목소리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 확신은 처음의 확신과 조금 다릅니다. 처음에는 「제 마음은 굳게 서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찬양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공동체의 결심이 됩니다.

「용감하게 싸울 것입니다」는 능력 있는 일을 행하거나 용감하게 행동한다는 의미를 표현합니다. 「우리는」 용감하게 싸웁니다. 「그분께서」 적들을 짓밟으십니다. 인간의 행동과 하나님의 행동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는 백성이 실제로 행동하고, 승리를 이루는 가장 깊은 힘은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새벽을 깨우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힘입어 용감하게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이유로 가만히 머물지 않습니다.

찬양할 때도 스스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위기에 맞설 때도 하나님을 힘입어 행동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힘이 마지막까지 의지할 근거가 아님을 알면서 맡겨진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의 마지막을 실제로 적들이 패배했다는 기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승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직 이루어질 일을 바라보는 고백입니다.

시편은 전쟁의 결과를 보여 주지 않은 채 끝납니다.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시편 108:1–14 본문 →

시편 108편은 두 가지 사실을 함께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 땅과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권위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적의 요새가 튼튼하고, 하나님이 군대와 함께 나서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입니다.

시인은 이 둘을 억지로 일치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현재의 실패를 성공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반대로 현재의 실패를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두 사실을 함께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나 시편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 반드시 자신이 계획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자신의 땅을 선언하시는 고대 이스라엘의 상황을 오늘의 개인적인 목표나 국가적 전쟁에 곧바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이 시편이 보여 주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확정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시편 108편의 믿음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자신의 확신을 굳게 붙드는 태도가 아니라, 아직 모든 것이 잘되고 있지 않은 때에도 진실하신 하나님을 붙드는 태도입니다.

시편 108편을 다시 처음부터 읽으면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아직 새벽이 밝지 않은 시간입니다. 하늘에는 어둠이 남아 있습니다. 시인은 하프와 리라를 향해 외칩니다. 「깨어나라.」 그리고 자신이 새벽을 깨우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시편의 이야기는 그가 노래를 부르자마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적의 요새는 튼튼하고, 그곳으로 자신을 인도할 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군대와 함께 나서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현실을 모두 인정한 뒤에도 마지막에 다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용감하게 싸울 것입니다.」

시편의 처음에서 그는 새벽을 깨우겠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도 시편은 해가 떠올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힘입어 나아가겠다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끝납니다.

새벽을 깨우겠다고 노래한 사람은 아직 어둠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둠이 끝날 때까지 노래를 미루지 않습니다.

하프와 리라가 깨어납니다.

아직 새벽이 오지 않았지만, 찬양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