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18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버려진 돌이 중심이 되는 날

시편 118편에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두 장면이 함께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야가 한 일들을 이야기하겠다」(17절)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 여호와야훼여, 부디 구원해 주십시오」(25절) 하고 다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미 구원받았는데 왜 다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시편의 앞뒤가 맞지 않아서 생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누구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는지 알게 된 사람입니다.

시편 118편은 한 사람이 막다른 곤경에서 여호와야훼를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집에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장면으로 나아갑니다. 이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적들보다 여호와야훼가 강하시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죽음에 가까이 갔다가 살아남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이 건물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반전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기쁨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이 계속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이 여러 장면을 하나로 묶는 문장은 시편의 처음과 마지막에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에게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기 때문이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18:1 · 본디새김

시편 118편은 이 선언이 현실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 진실한 고백이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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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같은 말을 하도록 부르다

시편 118:1–4 본문 →

시편은 감사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혼자 감사하지 않습니다. 여러 집단을 차례로 부르며 동일한 고백을 요청합니다.

자,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그의 인애는 영원하다.」시편 118:2 · 본디새김
자, 아론의 집안은 말하여라. 「그의 인애는 영원하다.」시편 118:3 · 본디새김
자,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말하여라. 「그의 인애는 영원하다.」시편 118:4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아론의 집안은 그 가운데 특별한 제사장 직무를 맡은 집단입니다(출애굽기 28:1).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이 표현이 이스라엘 안의 경건한 사람들을 뜻하는지, 이스라엘 밖에서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로 구별되는 집단들이 하나의 고백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나 제사장의 직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에서는 모두가 같은 사실을 인정하도록 합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근거는 자신의 지위나 자격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변함없는 인애입니다.

이러한 응답 형식은 역대하 5:13에서도 발견됩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장면에서 노래하는 이들과 악기 연주자들은 여호와야훼가 선하시며 그분의 인애가 영원하다고 찬양합니다. 역대하 7:3에서도 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스라엘이 같은 고백을 드립니다. 따라서 시편 118편의 반복은 단순한 문학적 강조를 넘어 공동체가 함께 부를 수 있는 예배의 언어로 읽힙니다.

처음에는 여러 집단이 하나님의 인애를 고백하도록 요청받습니다. 이어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그 인애를 어떻게 경험했는지 이야기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고백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이제 한 사람의 삶에서 구체적인 사건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시편의 정확한 저작 시기와 최초 사용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왕이나 전쟁에서 구원받은 지도자의 감사 노래였을 가능성도 있고, 공동체의 구원을 한 사람의 목소리로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후반부의 성전 출입과 축복의 말은 이 시가 예배에서 사용되기에 적합한 형식을 지녔음을 보여주지만, 특정한 역사적 의식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막다른 곳에서 넓은 곳으로

시편 118:5–9 본문 →

막다른 곤경에서 나는 야를 불렀다. 야는 내게 응답하여 나를 넓은 곳에 두었다.시편 118:5 · 본디새김

시편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의 변화가 이 한 절에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곤경을 ‘막다른’ 상태로 표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넓은 곳’에 놓이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좁은 곳에서는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이 제한됩니다. 사방이 막혀 있으면 도망칠 수도 없고 스스로 길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이와 달리 넓은 곳은 움직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자리입니다.

여호와야훼는 막다른 곳에 있던 사람을 넓은 곳으로 옮기셨습니다.

이 이미지는 뒤이어 등장하는 적들의 행동과 이어집니다. 10–12절에서 적들은 시인을 반복해서 에워쌉니다. 5절의 공간적 대조가 10–12절의 위험을 미리 압축해서 보여준 셈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넓은 곳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자세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싸웠는지,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어떤 경로로 포위에서 벗어났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단 두 가지 행동만을 강조합니다.

자신은 야를 불렀고, 야는 응답하셨습니다.

시인이 가장 중요하게 기억하는 것은 탈출 방법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신 분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내 편이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하겠는가?시편 118:6 · 본디새김

이 말은 사람이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은 실제로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위협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폭력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아니라, 인간의 힘이 자신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내 편’이라는 표현을 자신이 원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무조건 지지하신다는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신이 옳기 때문에 하나님이 편들어 주셨다고 먼저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7절에서도 그는 여호와야훼가 자신을 돕는 이들 가운데 자기편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을 바라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원수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적들의 위협 때문에 무력했던 사람이 이제 그들을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야훼에게 피신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다.시편 118:8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에게 피신하는 것이 귀족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다.시편 118:9 · 본디새김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을 더욱 구체화합니다. 사회적 권력과 보호 능력을 가진 귀족들조차 궁극적인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권력자나 유력자의 후원은 실제적인 보호 수단이었습니다. 왕이나 귀족은 군사력과 재산,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그런 인간적인 도움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의 도움이 아무리 커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사람의 도움을 거절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생명과 미래를 궁극적으로 책임지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시인은 자신이 겪은 위협의 크기를 밝힙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돕는 이들’은 본디새김이 택한 읽기입니다.

세 번의 포위, 세 번의 여호와야훼의 이름

시편 118:10–14 본문 →

모든 민족이 나를 에워쌌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나는 반드시 그들을 베어 버리겠다.시편 118:10 · 본디새김
그들이 나를 에워쌌다. 참으로 나를 에워쌌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나는 반드시 그들을 베어 버리겠다.시편 118:11 · 본디새김
그들이 벌들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처럼 꺼졌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나는 반드시 그들을 베어 버리겠다.시편 118:12 · 본디새김

이 반복은 단순히 적의 숫자가 많았다는 정보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포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느끼는 압박을 언어로 재현합니다.

어디를 보아도 적이 있고, 어느 방향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모든 민족’이라는 표현이 실제로 세계의 모든 민족이 전쟁에 참여했다는 뜻일 필요는 없습니다. 고대의 전쟁 노래에서 압도적인 적대 세력을 전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은 이 시의 화자가 단순한 개인적 다툼을 넘어 국가적인 위협을 겪은 왕이나 지도자일 가능성을 높입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자신을 하나의 ‘나’로 표현했을 가능성도 열어 둡니다. 본문에는 화자의 정체를 확정할 이름이나 사건이 제시되지 않습니다.

세 번 반복되는 포위의 묘사마다 똑같은 응답이 뒤따릅니다. 본문은 분명 적대 세력과의 대결을 말하며, 적을 베어 버리겠다는 강한 전쟁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의 근거는 자신의 군사력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은 전쟁을 이기는 주문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기 능력만으로 승리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여호와야훼의 권능과 도움에 의지하여 적들을 대적했다고 고백합니다.

벌들은 한꺼번에 몰려드는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개별적으로는 작아도 떼를 이루면 사람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반면 가시덤불의 불은 빠르고 거세게 타오르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적들의 수와 기세는 압도적이었지만, 그들의 힘이 영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에서 여호와야훼의 인애가 영원하다고 고백한 것과 대조되는 장면입니다. 적들의 위협은 거세지만 사라집니다. 여호와야훼의 인애는 지속됩니다.

13절에서는 갑자기 말하는 대상이 바뀝니다.

너는 나를 넘어뜨리려고 세차게 밀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가 나를 도왔다.시편 118:13 · 본디새김

앞에서는 ‘그들’이라고 부르던 적들이 이제 ‘너’라는 단수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이 ‘너’가 특정한 적대자를 가리키는지, 여러 적을 한 인격처럼 묘사하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러 적의 포위를 이야기하다가 마치 눈앞의 상대에게 말하듯 직접 대면하는 장면으로 바뀐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시인은 상대의 공격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넘어뜨리려는 힘이 실제로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말은 그 적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야는 나의 힘과 노래이며, 나의 구원이 되었다.시편 118:14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출애굽기 15:2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넌 뒤 부른 노래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파라오의 군대에 쫓기던 이스라엘도 앞에는 바다, 뒤에는 군대가 있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 벗어날 수 없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출애굽기 14:10–31).

시편 118편의 화자가 정확히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구원을 노래하는 언어는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의 노래를 되살립니다. 그는 자기 삶에서 일어난 일을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비추어 이해합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야훼가 지금 자신을 도우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아밀람은 ‘베어 버리겠다’로 옮긴 히브리어 활용형입니다. 보통 ‘할례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왔으며, 여기서는 ‘잘라 내다’나 ‘물리치다’로도 풉니다. 적을 실제로 어떻게 처리했는지까지 이 동사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표현을 지나치게 순화해서 단순히 마음의 두려움을 이겨 냈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어서도 안 됩니다.

죽지 않고 살아서 이야기하겠다

시편 118:15–18 본문 →

의로운 이들의 천막에서 기쁨과 구원의 소리가 난다. 「여호와야훼의 오른손이 힘을 발휘한다.」시편 118:15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의 오른손이 높이 들려 있다. 여호와야훼의 오른손이 힘을 발휘한다.」시편 118:16 · 본디새김

이제 시편에는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시인이 경험한 구원이 더 이상 혼자만의 고백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권능과 구원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15:6에서도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오른손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시편 118편에서는 이 표현이 세 번 반복됩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공동체의 찬양은 앞에서 화자가 세 번 반복했던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라는 선언과도 호응합니다.

위기의 한복판에서는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구원을 경험한 뒤에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오른손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다시 자신의 목소리로 말합니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야가 한 일들을 이야기하겠다.시편 118:1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단순히 오래 살고 싶다는 소원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죽음은 단지 자신의 삶이 끝나는 사건만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할 목소리가 사라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시편 115:17–18도 죽은 이들과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대조합니다. 시편 118편에서는 같은 주제가 더욱 개인적인 고백으로 표현됩니다.

구원받은 생명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증언하는 생명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은 이 구원을 단순한 승리의 이야기로 끝내지 못하게 합니다.

야는 나를 엄하게 징계했으나 죽음에 넘기지는 않았다.시편 118:18 · 본디새김

시인은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적들의 행동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징계하셨다고도 고백합니다.

이 구절은 화자가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떤 잘못 때문에 징계를 받았는지, 적들의 공격 자체가 하나님의 징계였는지, 그 징계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고통이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는 일반적인 원칙을 이 구절에서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엄하게’라는 말은 그 경험이 실제로 심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죽음에 넘기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백성에게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게 해 주시는 분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화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엄한 징계조차 최종적인 멸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징계가 실재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인애가 지속된다는 사실이 이 시에서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고백은 예레미야 30:11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적절하게 징계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내용과 연결됩니다.

의의 문 앞에서

시편 118:19–21 본문 →

나를 위해 의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 야에게 감사하겠다.시편 118:19 · 본디새김
이것은 여호와야훼의 문이다. 의로운 이들이 이 문으로 들어간다.시편 118:20 · 본디새김

시편의 장면이 크게 바뀌는 부분입니다.

이 문은 이어지는 26절의 ‘여호와야훼의 집’과 27절의 ‘제단’을 고려할 때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앞서 5절에서 그는 막다른 곤경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문을 열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신 길은 단순히 적들에게서 멀어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러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20절은 19절에 대한 응답처럼 읽힙니다. 실제로 성전의 문을 지키는 사람들이 응답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편 24:7–10에서도 문을 향한 요청과 응답이 교차하는 예배의 언어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시편 118편에는 발화자가 누구인지 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반드시 제사장이나 문지기가 이 문장을 말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이 문을 ‘의의 문’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단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가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편 15편과 24편도 여호와야훼의 거룩한 곳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고,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의 삶과 성품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문 앞에 선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 증명하는 긴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제게 응답하시고 제 구원이 되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18:21 · 본디새김

그가 내세우는 것은 자신의 위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물론 이것이 의로운 삶의 중요성을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20절이 의로운 이들의 출입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의 흐름에서 중심에 놓인 것은 화자의 업적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구원입니다.

이러한 고백 뒤에 시편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

시편 118:22–24 본문 →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시편 118:22 · 본디새김
이것은 여호와야훼에게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우리 눈에 놀랍다.시편 118:23 · 본디새김

왜 갑자기 돌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바로 앞에서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문이 열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장면에서 이제 건축에 사용되는 돌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집을 짓는 사람들이 한 돌을 살펴보더니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결정적인 것은 처음에는 쓸모없다고 버려졌던 돌이 이제 건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변화를 ‘우리 눈에 놀랍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내린 판단과 하나님이 이루신 결과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것을 하나님이 중요한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화자는 여러 민족에게 둘러싸여 죽음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살아남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가 그를 도우셨고, 그는 살아남아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왔습니다. 버려진 돌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운명의 역전을 건축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돌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시편을 노래하는 왕이나 지도자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적들의 공격을 받고 몰락할 처지에 놓였던 사람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시 중요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민족에게 압박받으며 존립의 위기에 처했던 백성이 하나님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앞에서 묘사한 국가적인 위협과 구원의 경험을 근거로 삼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확정할 만한 명시적인 정보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을 택하든 비유의 중심은 같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마지막 말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 평가를 뒤집으셨습니다.

시인은 버려졌던 돌이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여 건물의 중심 자리를 차지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놀라운 변화가 여호와야훼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날은 여호와야훼가 만든 날이다. 이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자.시편 118:2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흔히 하나님이 주신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것도 넓은 신앙적 적용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시편의 문맥에서 ‘이날’은 단순히 달력의 어느 하루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으로만 읽기 어렵습니다. 바로 앞에서 시인은 사람들이 버린 돌이 중요한 자리에 세워진 놀라운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서 ‘만들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일반적인 진술만을 뜻하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문맥상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고 새로운 상황을 가져오신 일을 가리킨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날은 우연히 찾아온 행운의 날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구원이 드러난 날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구원이 이제 ‘우리’ 모두의 기쁨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은 로쉬 핀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문자적으로 ‘모퉁이의 머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건물의 기초에서 중요한 모퉁잇돌인지, 건물의 윗부분을 완성하는 중요한 돌인지 구체적인 위치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방식은 구약의 여러 장면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14–15장에서 이스라엘은 파라오의 군대를 스스로 이길 수 없는 상황에 처하지만, 하나님이 길을 여십니다. 사무엘상 2:1–10에서 한나는 하나님이 강한 자를 낮추시고 약한 자를 일으키시는 분이라고 노래합니다. 또한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에 관한 말씀을 인용하십니다(마태복음 21:42; 마가복음 12:10–11; 누가복음 20:17). 사도행전 4:11에서는 베드로가 이 구절을 예수께 적용하고, 베드로전서 2:7에서도 같은 말씀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신약이 시편 118편의 돌 이미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배척과 하나님의 높이심에 연결하여 읽은 명시적인 인용입니다. 그러나 시편의 본래 문맥에서 먼저 확인되는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버림받은 자의 처지를 뒤바꾸셨다는 구원의 고백입니다. 신약은 시편의 원래 장면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 속에서 다시 구원을 청하다

시편 118:25–27 본문 →

아, 여호와야훼여, 부디 구원해 주십시오. 아, 여호와야훼여, 부디 잘되게 해 주십시오.시편 118:2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의 승리 선언을 뒤집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하려면 이 시가 한 개인의 회고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감사와 간구가 함께 담긴 예배의 노래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앞부분의 화자는 자신이 경험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이제 앞으로도 여호와야훼의 구원과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과거에 받은 구원은 미래의 모든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는 보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 그분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부디 구원해 주십시오’는 호쉬아 나라는 말입니다.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요청에 간절함을 나타내는 ‘부디’가 결합한 표현입니다. 이 말에서 ‘호산나’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시편의 원래 문맥에서 이것은 단순한 환호가 아니라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신뢰의 표현입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오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우리는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한다.시편 118:26 · 본디새김

문장의 앞부분에서는 ‘오는 이’라는 단수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뒷부분에서는 ‘너희’라는 복수 대상에게 축복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성전으로 나아오는 한 사람과 그와 함께한 공동체를 맞이하는 예배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오는 이’가 반드시 왕이었는지, 특별한 순례자였는지, 예배 행렬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이름으로 복을 선언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오는 이를 축복합니다. 여기서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이름으로 축복을 나누는 장소로 나타납니다.

여호와야훼는 하나님이며 우리에게 빛을 비추었다. 축제의 제물을 밧줄로 묶어라, 제단의 뿔들에 이르기까지.시편 118:27 · 본디새김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빛과 빛을 비추는 행동은 자주 은혜와 구원의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민수기 6:24–26의 제사장 축복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비추시는 일이 은혜와 평강의 선포와 연결됩니다. 시편 118편에서도 어두운 곤경에서 구원받은 공동체가 하나님의 빛을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제물과 밧줄, 제단의 뿔에 관한 표현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는 본디새김처럼 축제의 제물을 밧줄로 묶어 제단까지 가져가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축제 행렬을 나뭇가지로 장식하거나 나뭇가지를 들고 제단에 이르도록 행진하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시인이 성전의 제단과 관련된 실제적인 예배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화자는 말로만 감사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나아왔고, 공동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이제 제단을 중심으로 한 축제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막다른 곤경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하나님의 집에서 드리는 감사로 이어진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의 ‘축제’에 해당하는 말은 하그로, 절기나 축제를 뜻하며 문맥에 따라 축제에 바치는 제물과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밧줄’로 번역된 말은 얽히거나 묶인 것을 가리키며, 나뭇가지와 관련하여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첫째 읽기에서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제물을 준비하는 모습이 강조되고, 둘째 읽기와 관련하여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축제와 무성한 가지들이 관련된 표현으로 옮깁니다. 히브리어 본문만으로 제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묶었는지, 나뭇가지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제단의 뿔들에 이르기까지’라는 표현은 제단의 뿔에 제물을 직접 묶었다는 뜻인지, 제단 가까이에 이르도록 가져갔다는 뜻인지 신중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7:2에 따르면 제단의 네 모퉁이에는 뿔이 있었습니다. 제단의 뿔은 제사 의식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레위기 4:7). 또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무리는 시편 118:25–26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분을 맞이합니다(마태복음 21:9; 마가복음 11:9–10). 특히 ‘호산나’라는 외침은 시편의 구원 요청을 이어받은 말입니다.

당신은 제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18:28–29 본문 →

당신은 제 하나님이시니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제 하나님, 당신을 높이 찬양하겠습니다.시편 118:28 · 본디새김

이 절에서는 시편의 화자가 다시 하나님께 직접 말합니다.

화자는 막다른 곤경에서 야를 불렀습니다. 사람들의 도움보다 여호와야훼를 신뢰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적들의 포위 속에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의지했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난 뒤에는 여호와야훼께 감사하기 위해 성전의 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모든 경험 끝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고백합니다.

당신은 제 하나님이십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인애를 고백했습니다. 이제 한 사람이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직접 ‘제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공동체가 함께 고백하는 진리는 개인이 실제로 의지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에게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기 때문이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18:29 · 본디새김

1절과 동일한 말이지만, 독자가 이 말을 듣는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좁은 곳과 넓은 곳, 포위하는 적들과 하나님의 도움, 죽음의 위협과 살아남은 생명, 닫힌 문과 열린 문, 버려진 돌과 모퉁이의 머릿돌, 그리고 구원의 기쁨 속에서 다시 드리는 간구를 지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의 선언은 처음과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만, 이제 그 말에는 본문 전체의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버려진 돌 앞에서 드리는 감사

시편 118:1–29 본문 →

시편 118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약한 사람이 강해지고 실패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 118편은 믿음이 있으면 언제나 승리하고,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가 사회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평가가 하나님의 판단과 같다고 쉽게 확신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이 버렸다고 해서 하나님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화자는 구원받았기에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을 경험한 자리에서 다시 여호와야훼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란 더 이상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이미 경험한 하나님의 신실함을 기억하며, 새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집을 짓던 사람들은 그 돌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가 행하신 일은 그들의 판단과 달랐습니다.

그 놀라운 일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살아남았고, 다시 노래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버려진 돌이 중요한 자리에 놓인 것을 본 사람들, 죽음의 위협에서 살아남아 성전의 문으로 들어온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여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호와야훼에게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기 때문이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라는 하나의 고백으로 모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