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36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모든 이야기에 돌아오는 같은 대답
시편 136편에는 이상할 만큼 집요한 반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만드셨다는 말 뒤에도, 이집트의 맏이들을 치셨다는 말 뒤에도,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이끄셨다는 말 뒤에도 똑같은 문장이 따라옵니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막강한 왕들을 죽이셨다는 말 뒤에도 같은 후렴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는 말 뒤에 또다시 그 문장이 들립니다.
어떻게 창조와 심판, 전쟁과 구원, 광야의 인도와 일상의 양식이 모두 하나님의 인애를 증언할 수 있을까요?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의 인애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는 서로 다른 사건들을 그 인애라는 하나의 고백 아래 차례로 놓습니다. 세상이 만들어진 순간부터 이스라엘의 고난과 구원, 오늘도 계속되는 생명의 공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인애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더 깊이 읽으면 또 하나의 변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시편의 앞부분에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며,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분이십니다. 시인은 오래전 일어난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23절에 이르면 갑자기 「우리」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낮은 처지에 있을 때 우리를 기억한 이에게 감사하여라.」 하나님이 옛날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들이 어느새 지금 노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시선이 이스라엘을 넘어 「살아 있는 모든 것」으로 넓어집니다. 그 모든 시간과 장소를 관통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라는 후렴은 서로 다른 사건들을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품 안에서 다시 읽게 하는 고백입니다.
스물여섯 번 되풀이되는 고백
여호와야훼에게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기 때문이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1 · 본디새김
신들의 하나님에게 감사하여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2 · 본디새김
주들의 주에게 감사하여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3 · 본디새김
서로 다른 신들을 차례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하나님을 세 가지 표현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신들의 하나님」과 「주들의 주」는 다른 신적 존재들이 여호와야훼와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는 뜻이라기보다, 신이나 주인으로 불리는 모든 존재와 권세 위에 여호와야훼가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신명기 10:17에서도 이와 같은 칭호가 사용됩니다. 그 문맥에서 여호와야훼는 크고 능력 있는 분이며, 사람을 차별하거나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소개되십니다. 이어지는 18절은 그분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이방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높은 권위와 약자를 향한 돌보심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편 136편도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선언한 다음, 그분이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을 하셨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시편을 움직이는 진짜 힘은 각 절 뒤에 반복되는 후렴에 있습니다.
왜 같은 말을 스물여섯 번 반복할까?
시편 136편은 모두 스물여섯 절이며, 모든 절이 정확히 같은 후렴으로 끝납니다. 이 후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본디새김이 「인애」라고 옮긴 말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순간적으로 느끼는 친절한 감정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문맥에 따라 사랑, 자비, 신실함, 관계에 대한 충실한 헌신을 나타냅니다. 특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는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지속적으로 베푸시는 신실한 사랑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후렴에는 「영원」이라는 말이 덧붙습니다. 하나님의 인애는 한때 있었다가 사라지는 호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시편 전체의 형식을 결정합니다. 각 절의 앞부분은 계속 바뀝니다. 창조와 출애굽, 광야와 전쟁, 구원과 양식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절의 뒷부분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응답하며 부르는 찬양의 형식과 잘 어울립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포하면, 다른 사람들이 후렴으로 응답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역대기하 5:13에서는 성전 봉헌 때 노래하는 사람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함께 여호와야훼의 선하심과 영원한 인애를 찬양합니다. 역대기하 7:3과 에스라 3:11에서도 같은 고백이 공동체의 찬양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시편 136편이 정확히 어떤 순서와 인원으로 교창되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노래의 구조가 공동체의 반복적인 응답에 매우 적합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통 새로운 정보를 들을 때마다 새로운 설명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새로운 사건이 등장할 때마다 같은 대답으로 돌아옵니다.
그 반복은 기억해야 할 사건을 하나의 고백 안에 묶습니다.
사건은 계속 달라지지만, 그 사건을 통해 기억하는 하나님의 인애는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편이 열거하는 사건들에는 심판과 죽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긴장을 뒤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창조도 인애의 이야기다
홀로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이에게 감사하여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4 · 본디새김
명철로 하늘을 만든 이에게 감사하여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5 · 본디새김
물 위에 땅을 펼친 이에게 감사하여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6 · 본디새김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보다 먼저 창조를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는 이유는 자기 민족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존재하기 전부터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4절의 「홀로」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다른 어떤 존재의 도움도 받지 않으시고 일하신다는 추상적인 설명이라기보다, 시인이 열거하려는 놀라운 일들의 궁극적인 주체가 오직 여호와야훼라는 선언입니다. 앞에서는 「신들의 하나님」과 「주들의 주」라고 불렀지만, 이제 다른 어떤 신이나 권세도 이 놀라운 일들의 주체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이 땅을 펼치셨습니다.
그분이 빛들을 만드셨습니다.
창조의 모든 행동에서 주어는 한결같이 여호와야훼입니다.
「명철로 하늘을 만든」 하나님
명철은 분별과 이해, 통찰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명철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물의 질서와 관계를 이해하며 적절하게 이루는 지혜로운 능력을 나타냅니다. 잠언 3:19에도 여호와야훼가 지혜로 땅의 기초를 놓으시고 명철로 하늘을 굳게 하셨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시편 136편은 창조를 혼란스러운 힘의 분출로 그리지 않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명철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창조의 원리를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 놀라운 창조 행위 뒤에도 같은 후렴을 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애를 주로 용서나 구원처럼 인간을 직접적으로 돕는 행동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늘을 만드신 일 자체도 인애의 고백 안에 포함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창조는 생명이 살아갈 세계가 마련되는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하늘이 만들어지고, 물 위에 땅이 펼쳐지며, 낮과 밤을 다스릴 빛들이 놓입니다. 시인은 생명이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세계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창조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과시하는 행위로만 노래되지 않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명철로 세계를 이루셨고, 그 세계 안에서 생명이 살아간다는 사실이 찬양의 이유가 됩니다.
다만 6절의 「물 위에 땅을 펼친」 표현을 현대적인 지질학이나 천문학의 설명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은 고대의 시적 세계 이해 속에서 땅과 물의 관계를 묘사합니다. 창세기 1:9-10에서도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마른땅이 드러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셨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해와 달은 신이 아니라 만들어진 빛이다
큰 빛들을 만든 이에게 감사하여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7 · 본디새김
낮을 다스리도록 해를,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8 · 본디새김
밤을 다스리도록 달과 별들을.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9 · 본디새김
여기서는 문장 자체가 후렴에 의해 나누어집니다. 7절에서 큰 빛들을 만드셨다고 말한 뒤, 8~9절에서 그 빛들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고대 근동의 여러 문화에서 해와 달 같은 천체는 신적 존재로 숭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그것들을 신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만드신 빛들이라고 말합니다.
더욱이 해와 달은 각자 맡겨진 일을 수행합니다. 여기서 「다스리도록」이라는 표현은 창세기 1:16-18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은 큰 빛과 작은 빛을 만드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해와 달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의 자리를 정해 주는 표현입니다.
해는 낮을 다스리지만 세상을 창조한 신은 아닙니다.
달과 별들은 밤을 다스리지만 여호와야훼와 나란히 놓일 수 없습니다.
모두 창조주가 마련하신 질서 안에서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로써 시편은 하나님의 인애를 아주 넓은 범위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인애는 위기에 처한 사람을 특별한 기적으로 구해 내실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해가 낮을 비추고, 달과 별들이 밤하늘에 나타나는 세계의 일상적인 질서도 시인이 감사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이 구절 뒤에서 시편은 갑자기 이집트의 역사로 이동합니다.
해와 달이 낮과 밤을 다스리도록 하신 하나님이, 이제 인간의 권력과 억압이 가득한 역사 속에서 행동하십니다.
심판의 이야기에도 같은 후렴이 붙는 이유
맏이들을 쳐서 이집트를 친 이에게 감사하여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10 · 본디새김
그는 이스라엘을 그들 가운데서 이끌어 냈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11 · 본디새김
강한 손과 뻗은 팔로.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12 · 본디새김
10절에 이르면 시편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하늘과 땅, 해와 달을 만드신 일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이집트의 맏이들을 치신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 뒤에도 변함없이 같은 후렴이 따라옵니다.
사람들이 죽는 사건을 어떻게 하나님의 인애와 연결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시인이 어떤 자리에서 이 역사를 기억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억압받던 사람들의 자리에서 기억하는 출애굽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강제노동 아래 신음하던 백성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23-25는 하나님이 그들의 신음과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며 그들의 처지를 돌아보셨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보내라는 요구를 반복해서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 이집트에 재앙들이 내려졌고, 마지막에는 맏이들의 죽음이 일어났습니다(출애굽기 12:29-32).
시편 136편은 이 모든 과정을 자세히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대신 결정적인 심판을 언급한 다음, 곧바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두 사건은 하나의 구원 이야기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을 붙잡고 있던 억압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자신의 자리에서 그 사건을 하나님의 인애와 연결하여 찬양합니다.
그렇다고 이집트의 맏이들이 죽은 사건 자체가 고통스럽지 않다거나, 그 죽음에 어떤 윤리적 어려움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은 이스라엘을 억압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찬양하지만, 이집트에서 죽임당한 이들 각각의 운명이나 죽음의 윤리적 문제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후렴을 모든 죽음과 폭력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다는 일반적인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이 직접 연결하는 것은 억압받던 이스라엘의 구원과, 그들을 붙잡고 있던 권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무력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기억되십니다.
강한 손과 뻗은 팔
12절에는 출애굽기를 떠올리게 하는 익숙한 표현, 「강한 손과 뻗은 팔」이 등장합니다. 신명기 4:34와 5:15 등에서도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일을 설명할 때 이 표현이 사용됩니다.
손과 팔은 하나님의 힘을 인간의 신체에 비유하여 나타내는 말입니다. 특히 팔을 뻗는다는 모습에는 멀리까지 자신의 힘을 미쳐 행동하는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구원의 뜻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만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행동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출애굽에서의 그 행동은 파라오의 권력을 넘어 이스라엘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아직 출애굽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왔다고 해서 곧바로 안전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앞에는 바다가 있었고, 뒤에는 파라오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갈대 바다를 여러 부분으로 가른 이에게 감사하여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13 · 본디새김
그는 이스라엘을 그 한가운데로 건너가게 했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14 · 본디새김
그리고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갈대 바다에 털어 버렸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15 · 본디새김
시편은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만큼이나 파라오의 군대가 더는 이스라엘을 추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창조 장면과의 연결이 있습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이 물 위에 땅을 펼치셨습니다. 13~14절에서는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이 지나갈 길을 만드십니다. 두 장면 모두 물이 중심에 있고, 하나님이 그 물과 관련하여 땅이나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을 창조와 출애굽이 완전히 동일한 사건이라는 뜻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이 창조주와 구원자를 한 분으로 노래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처음에 인간이 살아갈 세계를 마련하신 하나님이, 위기에 처한 자기 백성을 위해 바다 가운데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앞에는 또 다른 길이 놓여 있었습니다. 광야입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여러 부분으로」는 잘라 나뉜 부분들을 나타내는 복수형 표현입니다. 이를 반드시 바다가 둘보다 많은 수의 통로로 갈라졌다는 지리적 정보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이 갈라져 나뉘었다는 동작을 강조하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갈대 바다」라는 이름만으로 그 위치를 오늘날 특정한 수역과 확정적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15절의 「털어 버렸다」는 동사는 출애굽기 14:27에서 여호와야훼가 이집트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로 휩쓸어 버리시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원문에는 흔들어 떨어뜨리거나 털어 내는 듯한 강한 움직임이 담겨 있습니다. 창조와 출애굽의 이러한 연결은 이사야 43:16-19에서도 발견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던 일을 기억하게 하신 뒤, 앞으로 새로운 일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시편 136편이 이사야의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창조와 출애굽의 언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 구약의 흐름과 이어집니다.
기적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는 인도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이끈 이에게 감사하여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1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뒤에 비해 놀라울 만큼 짧습니다.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에는 세 절을 사용했지만,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끄신 일은 단 한 절로 요약합니다. 그러나 이 한 절이 담고 있는 시간은 매우 깁니다.
이스라엘은 바다를 건넌 뒤 곧바로 약속의 땅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지났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한 상황을 겪었으며, 여러 차례 불평하고 불순종했습니다. 출애굽기 16~17장에는 만나와 물을 공급받는 이야기가 나오고, 민수기에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겪은 여러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136편은 그 사건들을 열거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이끈」 분이라고 말합니다.
한 번의 구원과 계속되는 인도
바다를 건너는 일은 결정적인 한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광야를 걷는 일은 계속되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애는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이끄셨다는 사실로 드러납니다. 출애굽은 해방의 시작이었지만, 그다음에는 살아갈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시인은 광야의 모든 어려움을 설명하지 않은 채, 그 긴 시간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생각할 때 특별한 위기에서 일어난 극적인 구원을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기적적인 사건 이후에 계속된 하나님의 돌보심도 같은 인애의 역사 안에 포함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다가 갈라지는 순간에만 하나님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분의 인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6절은 인애가 영원하다는 후렴을 특별한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인애는 결정적인 한순간에만 나타났다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길고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도 이어집니다.
큰 왕들의 패배와 유산으로 주어진 땅
큰 왕들을 친 이에게 감사하여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17 · 본디새김
그는 막강한 왕들을 죽였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18 · 본디새김
아모리 사람들의 왕 시혼을,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19 · 본디새김
그리고 바산 왕 옥을.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20 · 본디새김
그는 그들의 땅을 유산으로 주었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21 · 본디새김
자기 종 이스라엘에게 유산으로.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22 · 본디새김
시혼과 옥은 이스라엘이 요단강 동쪽 지역에서 맞섰던 왕들입니다(민수기 21:21-35). 그런데 시인은 왕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의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유산으로 주셨다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왕들을 치셨다는 행동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1~22절에 이르면 그 행동의 결과가 이스라엘이 살아갈 땅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를 늘리려는 정복자처럼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종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땅은 이스라엘의 생존과 공동체적 삶을 위한 유산이 됩니다.
다만 이 본문에 등장하는 전쟁과 살해의 언어는 그대로 존중해야 합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 역사를 찬양하면서 실제 폭력과 죽음이 포함된 사건들을 열거합니다.
그 폭력을 현대의 어떤 민족이나 국가가 자신들의 정복을 정당화하는 일반적인 원리로 사용할 근거는 이 시편에 없습니다. 시인은 특정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자신들이 받은 땅을 하나님의 선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시편은 비교적 분명한 역사적 순서를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날 것처럼 보이는 순간, 시인은 예기치 않은 말을 꺼냅니다.
「우리」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다
우리가 낮은 처지에 있을 때 우리를 기억한 이에게 감사하여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23 · 본디새김
그는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에게서 빼냈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24 · 본디새김
앞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고, 이스라엘을 바다 가운데로 건너가게 하셨으며, 이스라엘에게 땅을 유산으로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우리」라고 말합니다.
시편은 더 이상 오래전 조상들에게 일어난 사건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찬양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하나님의 인애와 연결하여 고백합니다.
「낮은 처지」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23절의 「낮은 처지」는 낮아지거나 비천해진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그 낮은 처지가 정확히 어떤 사건이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때를 다시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출애굽을 이야기했으므로, 그때의 비천한 처지를 회상하며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다고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출애굽 이후의 또 다른 역사적 위기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정착한 뒤에도 여러 차례 외적의 침략과 억압을 겪었습니다. 왕국의 몰락과 포로 생활을 포함하여 백성이 낮아진 상태를 경험했던 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만으로 특정한 시대나 사건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시편은 바벨론이나 포로 귀환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어느 한 사건에 고정하기보다, 하나님이 낮아진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에 주목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사실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낮아진 상태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기억한 이」라는 말의 깊이
23절에서 특히 중요한 동사는 「기억한」(זָכַר)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은 단순히 과거의 정보를 떠올리는 정신적인 활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맺으신 관계와 약속에 따라 행동하시는 일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24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음을 들으시고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창세기 8:1에서는 하나님이 노아와 방주에 있는 생물들을 기억하시고 바람이 땅 위에 불게 하십니다. 그 결과 홍수의 물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본문에서 하나님의 기억은 생명을 보존하거나 구원의 행동을 시작하시는 것과 연결됩니다. 시편 136:23-24도 같은 흐름입니다. 기억과 구원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앞의 긴 역사 회상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단지 자신들이 과거의 역사를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역사에서 자신들을 기억하셨던 하나님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시인은 창조와 출애굽의 거대한 사건들을 이야기한 뒤, 마침내 「우리를 기억한 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늘을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셨습니다.
바다를 가르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백성을 이끄신 하나님이 우리가 낮아졌을 때에도 우리를 기억하셨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사건들이 공동체 자신의 고백이 됩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현재의 하나님 신뢰와 연결됩니다. 시편은 하나님을 먼 옛날의 위대한 행위자로만 남겨 두지 않습니다. 지금 찬양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그분의 인애를 고백하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시인의 시선은 다시 한번 예상 밖의 방향으로 넓어집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모든 생물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그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먹을 것을 준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2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편 전체의 의미를 새롭게 비춥니다.
앞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고, 광야에서 인도하셨으며, 유산으로 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낮은 처지에 있는 「우리」를 기억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등장합니다.
왜 마지막에 먹을 것이 등장할까?
이 구절이 단순히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다시 언급하는 말이라면, 앞의 창조 부분에 들어가도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모두 이야기한 뒤에 이 구절을 놓습니다. 하나님의 인애는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사 안에서 드러났지만, 그분의 돌보심이 이스라엘에게만 제한되지는 않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은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을 포함한 생명 있는 존재들을 폭넓게 가리킬 수 있습니다. 시편 136편의 마지막 부분도 생명을 지닌 존재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노래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인애를 다시 창조 세계로 확장합니다.
하지만 처음의 창조 장면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5~9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25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세계에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계속 먹을 것을 주십니다. 창조가 과거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행동으로 묘사된다면, 먹을 것을 주시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는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을 계속 돌보시는 분입니다.
바다를 가르시는 놀라운 능력도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그러나 매일 먹을 것을 주시는 행동 역시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상의 복
시편 104:27-28에서도 생물들이 하나님께 먹을 것을 구하고, 그분이 먹을 것을 주실 때 그것을 거두어들이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그곳에서 인간을 포함한 생물들은 자신의 생존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들로 나타납니다. 시편 136:25도 같은 사실을 고백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일하고 먹을 것을 마련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인간은 노동하고 수확하며 음식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시선에서 보면, 인간의 노동과 자연의 풍요가 가능하도록 세계를 만드시고 생명을 유지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 고백은 인간의 활동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일상적으로 누리는 생명이 얼마나 많은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땅이 있어야 하고, 빛이 있어야 하며, 먹을 것이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은 그 공급을 계속 필요로 합니다.
시편은 그 모든 과정의 궁극적인 근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물론 이것이 현실 세계에 굶주림이나 죽음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기근과 가난, 생명의 상실을 반복해서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이면서 공급자이십니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의 선택을 이해하는 방식도 넓혀 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특별히 관계를 맺으신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밖의 생명을 돌보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시편의 시작에서 하나님은 「신들의 하나님」과 「주들의 주」로 불리셨고, 중간에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살아 있는 것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으로 노래됩니다.
특별한 언약 관계와 보편적인 생명 돌보심이 한 하나님 안에서 만납니다.
가장 평범한 일이 마지막 기적이 되다
시편에는 매우 큰 사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하늘이 만들어지고, 바다가 갈라지며, 막강한 왕들이 패배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를 마친 뒤 시인은 가장 평범한 일 하나를 말합니다. 먹을 것을 주십니다.
시편은 이 일을 다른 놀라운 사건들보다 낮은 수준의 행동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후렴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위기 속에서 구원하시는 일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구원 이후에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먹을 것을 공급하시는 일도 중요합니다.
실제로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직면했던 큰 문제 중 하나는 먹을 것이었습니다.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생존이 보장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계속 살아갈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시편 136편은 마지막에 먹을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함으로써, 구원받은 이후에도 지속되는 생명 돌보심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렇게 시편은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서 시작된 감사의 시선을 온 세계로 넓혀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문자적으로는 ‘모든 육체’ 또는 ‘모든 살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6:17에서는 홍수로 멸망할 생명 있는 모든 육체가 언급되고, 창세기 9:15-16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살아 있는 육체와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히브리어 원문의 「주는」(נָתַן)은 분사 형태로 나타나며, 하나님이 먹을 것을 공급하시는 지속적이고 특징적인 행동을 묘사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늘의 하나님에게 감사하여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시편 136:26 · 본디새김
마지막 절은 다시 처음의 명령으로 돌아옵니다.
1~3절에서 세 번 반복되었던 명령이 긴 역사 회상과 찬양을 거친 뒤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칭호가 조금 다릅니다. 「하늘의 하나님」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단지 하늘에만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을 포함한 온 세계에 대한 그분의 주권을 드러내는 칭호입니다. 에스라 1:2에서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하늘의 하나님이 자신에게 땅의 여러 나라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느헤미야 1:4-5에서도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특정한 지역의 신을 넘어 높은 권위와 통치권을 지니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시인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나, 모든 생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그 모든 행동의 주체가 바로 하늘의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시편은 특별한 장소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이나 성전이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이 점은 시편 135편의 마지막과 대조됩니다. 그곳에서는 시온에서 여호와야훼가 찬양받으시기를 바라는 말로 끝났습니다.
두 시편 모두 창조와 출애굽, 시혼과 옥의 패배를 회상합니다. 그러나 시편 135편이 여호와야훼와 무능한 우상들을 대조하며 찬양의 대상을 밝힌다면, 시편 136편은 그 하나님의 행동을 하나의 후렴 아래 모읍니다. 앞 시편이 여호와야훼가 누구신지를 강조했다면, 이 시편은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찬양해야 하는지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인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편 136편 전체를 읽고 나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하나님의 인애가 영원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말을 단순히 하나님이 언제나 친절한 감정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시편의 복잡한 내용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시편에는 창조와 구원뿐 아니라 심판과 전쟁도 등장합니다.
시편이 보여 주는 인애는 하나님의 신실한 관계와 행동에 관한 말입니다. 그분은 세계를 만드시고 유지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끄십니다. 그들이 낮아졌을 때에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인애가 영원하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세계와 백성을 향한 돌보심에서 변덕스럽게 돌아서지 않으신다는 신뢰를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인애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건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인애를 고백하면서, 그분이 행하신 복잡하고 때로는 어려운 역사까지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후렴은 모든 질문을 끝내는 대답이라기보다, 역사 속에서 계속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붙드는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반복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언제나 동일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창조와 구원은 다른 행동이며, 심판과 양식의 공급도 같은 성격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모든 역사를 한 분 하나님의 인애를 기억하는 노래 안에 놓습니다.
하나님의 인애가 영원하다는 것은 세상에 아무 변화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변하고 백성의 처지가 달라져도, 그들을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마지막 후렴이 울릴 때
시편 136편의 끝에는 거대한 기적이 없습니다.
바다가 다시 갈라지지도 않고, 새로운 왕이 패배하지도 않습니다. 노래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 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로 끝납니다.
이제 마지막 후렴이 들립니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도 들었던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말에는 하늘과 땅의 창조, 바다를 건넌 백성의 역사, 광야의 긴 시간, 낮아진 이들을 기억하신 하나님의 행동, 그리고 오늘도 먹을 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생명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스물여섯 번째 후렴이 끝나면 노래는 멈춥니다.
그러나 시인이 마지막으로 노래한 하나님의 행동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의 인애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