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37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노래를 빼앗긴 사람들의 기억

시편 137편은 노래에 관한 시편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의 중심에는 노래할 수 없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바벨론에 사로잡혀 온 사람들은 강가에 앉아 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기를 나무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사로잡은 사람들이 시온의 노래를 불러 보라고 요구합니다. 포로들은 「우리가 어찌 낯선 땅에서 여호와야훼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시인은 노래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바로 그 경험을 노래로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무엇을 지키려고 했을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면 시편의 세 가지 움직임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시온을 기억하며 웁니다(1~4절). 이어 예루살렘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5~6절).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에돔의 행동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고, 바벨론이 자신들에게 행한 일을 되돌려 받기를 바랍니다(7~9절).

이 세 부분을 연결하는 말은 기억입니다.

그런데 기억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고향을 기억합니다. 다음에는 그 고향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마지막에는 고향을 파괴한 사람들의 행동도 잊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편은 이 기억의 움직임을 따라 슬픔에서 충성의 맹세로, 다시 격렬한 분노로 나아갑니다.

특히 마지막 두 절은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인은 바벨론의 어린아이들을 바위에 내리쳐 죽이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마지막 두 절을 잘라 낸 채 앞부분의 애절한 향수만 읽어서도 안 됩니다.

시편 137편은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이 어떻게 기억을 붙들고, 그 기억이 어떻게 복수를 향한 갈망으로까지 이어지는지를 숨기지 않습니다. 이 노래를 이해하려면 그 모든 과정을 따라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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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강가에서

시편 137:1–2 본문 →

바벨론의 강들 곁, 그곳에 우리는 앉았다. 시온을 기억하며 울기도 했다.시편 137:1 · 본디새김
그곳 한가운데 포플러나무들에 우리는 우리의 리라들을 걸었다.시편 137:2 · 본디새김

시편의 첫 장면은 놀랍도록 정적입니다.

사람들은 걸어가지 않습니다. 일하지도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준비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앉아 있습니다.

물이 흐르는 곳에서 잃어버린 시온을 기억하다

이 장면의 역사적 배경은 바빌로니아에 의한 유다의 멸망과 주민들의 포로 생활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묘사하는 강은 이스라엘이 지나왔던 출애굽의 바다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바다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경험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물가에 앉은 사람들은 자유로워졌다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웁니다.

이 점에서 바로 앞의 시편 136편과 강한 대비가 생깁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다 가운데로 건너가게 하신 일이 감사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낯선 나라의 물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바다를 건넌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강가에 주저앉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시편의 배치가 의도적으로 이러한 대조를 만들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연이어 읽는 독자에게는 분명한 긴장으로 다가옵니다.

구원을 경험했던 백성이 다시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래전의 구원은 지금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시편 137편은 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그들은 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을까?

시온은 단순히 출생지나 살던 동네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특별히 여호와야훼의 거처와 예배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시편 132:13-14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시온을 자신의 거처로 선택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시편 134편에서는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시편 137편에서 그 시온은 더 이상 그들이 찾아갈 수 있는 예배의 중심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기억 속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집과 땅만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공동체가 함께 모이던 장소,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던 삶의 중심이 함께 무너졌습니다. 이 사실이 1절의 눈물을 이해하게 합니다.

시온을 기억하는 일은 단순한 향수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기억은 자신들이 한때 누렸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삶을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첫 절에서 바벨론의 강들을 소개한 뒤, 시인은 다시 「그곳에」라고 말합니다. 2절에서도 그곳에 악기를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3절에서도 그곳에서 노래를 요구받습니다. 시인은 바벨론이라는 장소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같은 지시어를 되풀이합니다.

그들의 몸은 그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억은 시온에 머물러 있습니다.

포로 생활의 고통은 원하지 않는 장소에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몸이 있는 곳과 마음이 향하는 곳이 갈라졌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나무에 걸어 놓은 리라

2절의 장면은 더 구체적입니다. 리라는 현을 튕겨 소리를 내는 악기이며, 이스라엘의 찬양과 음악에 사용되었습니다. 시편 33:2-3과 150:3-5에서도 현악기와 여러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악기들은 단순히 사람들이 여가를 즐길 때 사용하던 물건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시온에서 부르던 노래와 공동체의 예배를 떠올리게 하는 악기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악기들은 연주되고 있지 않습니다. 나무에 걸려 있습니다.

이 장면은 악기가 부서졌거나 빼앗겼다는 말과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악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기로 노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더욱 슬픕니다. 노래할 수단은 남아 있지만, 노래할 수 있는 세계가 무너진 것입니다.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는 풍경은 평화로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노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리라가 걸려 있습니다.

왜 그들은 악기를 연주하지 않았을까요? 3절이 그 이유를 들려줍니다.

조금 더 깊이

기원전 597년 바빌로니아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여호야긴 왕과 많은 주민을 사로잡아 갔습니다(열왕기하 24:10-17). 이후 기원전 587/586년경 예루살렘은 다시 공격받아 성전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졌습니다(열왕기하 25:1-21; 예레미야 52장). 시편 137편은 예루살렘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하므로, 적어도 그 파괴를 기억하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부른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정확히 언제 작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포로 생활 중에 지어졌을 수도 있고, 그 이후에 당시의 경험을 회상하며 만들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바벨론의 강들」이 어떤 물길을 가리키는지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는 큰 강뿐 아니라 농경을 위해 마련된 여러 수로가 있었습니다. 에스겔 1:1-3에서도 포로 공동체가 그발 강가에 있었던 사실이 언급됩니다. 따라서 시편의 물가 역시 바빌로니아의 강이나 수로를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에스겔이 머물렀던 그발 강과 시편 137편의 장소가 동일하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2절의 「포플러나무들」은 물가에서 자라는 버드나무류나 포플러류로 이해되며, 정확한 현대 식물종을 특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복자가 요구한 기쁨

시편 137:3–4 본문 →

그곳에서 우리를 사로잡은 자들이 우리에게 노랫말을, 우리를 유린한 자들이 기쁨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시온의 노래 가운데 하나를 불러라.」시편 137:3 · 본디새김
우리가 어찌 낯선 땅에서 여호와야훼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시편 137:4 · 본디새김

여기서 처음으로 정복자들이 등장합니다.

이 요구가 지닌 잔혹함을 이해하려면 먼저 포로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시온은 그들의 고향이자 여호와야훼의 거처와 관계된 장소입니다. 그곳은 파괴되었고, 그들은 지금 정복자의 땅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그곳에서 데려온 사람들이 바로 그 시온의 노래를 요구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음악 감상의 요청일까요?

노래를 요구하는 사람과 노래를 빼앗긴 사람

3절에서 시인은 노래를 요구한 사람들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노래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포로들과 동등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지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관계가 노래 요청의 의미를 바꿉니다.

친구가 오래전 고향의 노래를 들려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고향을 파괴한 정복자가 포로에게 그 노래를 불러 보라고 요구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후자의 경우 포로들은 자신의 슬픔을 정복자들의 즐거움을 위해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더욱이 시인은 그들이 「기쁨」을 요구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노랫말만이 아닙니다. 즐거움도 요구됩니다.

이것은 그들의 현실과 충돌합니다. 포로들은 시온을 기억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복자들은 그들에게 시온의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해 달라고 합니다. 슬픔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 그 슬픔과 연결된 노래를 오락으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요청에는 조롱이나 굴욕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모든 정복자가 반드시 어떤 감정으로 이 요청을 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포로들과 정복자들의 권력 관계, 그리고 포로들이 그 요구를 고통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어찌 여호와야훼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었다고 이해해야 할까요? 그렇게 읽으면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시편 137편 자체가 바벨론에서 겪은 슬픔을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도록 만든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스겔 1장에서는 포로 가운데 있던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밖에서도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4절을 하나님께서 이방 땅에서는 찬양받으실 수 없다는 신학적 선언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맥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정복자들이 요구한 노래의 성격입니다. 그들은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요구했습니다. 포로들은 그 요구에 대답하며 그것을 「여호와야훼의 노래」라고 부릅니다.

정복자들에게는 시온의 노래가 정복한 민족의 음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로들에게 그 노래는 여호와야훼께 속한 노래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음악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의 예배와 기억, 하나님과의 관계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포로들의 질문은 노래를 부르는 기술적인 가능성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정복자들이 시온의 노래를 요구할 수는 있지만, 그 노래가 포로들에게 지닌 의미까지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나무에 걸린 리라도 새롭게 보입니다. 포로들이 악기를 내려놓은 것은 그들의 음악을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 노래를 정복자들의 즐거움을 위해 내놓지 않으려는 거부의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행동을 명시적으로 정치적 저항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노래할 수 없을 만큼 슬퍼했을 수도 있고, 그 슬픔과 거부가 함께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시온의 노래를 단순한 오락으로 바꿀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시편은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포로들은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이제 시인은 자기 손과 혀를 걸고 예루살렘을 잊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의 「우리를 유린한 자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톨랄레누는 의미가 완전히 확정되지 않은 낱말입니다. 괴롭히거나 조롱하는 자들, 황폐하게 한 자들로 이해하는 읽기들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우리를 유린한 자들」로 옮겼습니다. 정확한 어휘 의미에는 불확실성이 있지만, 앞의 「우리를 사로잡은 자들」과 병행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손과 혀를 걸고 지키려는 기억

시편 137:5–6 본문 →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제 재주를 잊어버리기를.시편 137:5 · 본디새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달라붙기를,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예루살렘을 내 기쁨의 맨 위에 올려놓지 않는다면.시편 137:6 · 본디새김

이 두 절은 시편의 중심적인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우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강가에 앉았고, 우리는 울었으며, 우리는 악기를 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5절부터는 「내가」라고 말합니다.

공동체 전체의 슬픔이 한 사람의 맹세로 모입니다.

왜 하필 오른손과 혀인가?

히브리어 원문은 더 간결합니다. 「내 오른손이 잊기를.」 여기에는 오른손이 무엇을 잊는지가 직접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디새김은 앞에서 등장한 악기 연주의 문맥을 고려하여 「제 재주를 잊어버리기를」이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읽기입니다. 현악기를 연주할 때 손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만약 손이 연주하는 능력을 잃는다면, 시인은 더 이상 이전처럼 노래를 연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문이 반드시 악기 연주 능력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른손은 인간의 힘이나 능숙한 활동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자신의 중요한 능력 하나를 걸고 맹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6절에서는 혀가 등장합니다.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달라붙기를.」 이것은 말을 하거나 노래할 수 없게 되는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 3:26에서도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말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시편의 맹세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자신은 노래할 능력을 잃어도 좋습니다.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말할 능력마저 잃어도 좋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자신에게 불행이 닥치기를 비는 자기 저주의 형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앞부분의 장면과 놀라운 연결이 이루어집니다.

2절에서는 리라가 나무에 걸려 있었습니다.

3절에서는 정복자들이 노래를 요구했습니다.

4절에서는 포로들이 노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5~6절에서는 손과 혀, 곧 음악과 말에 필요한 능력을 걸고 맹세합니다.

이 반복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정체성과 노래가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잊어버린 채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노래할 능력을 잃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시인에게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억하며 누구를 위해 노래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쁨의 맨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

6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을 기쁨의 가장 높은 자리에 두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예루살렘을 좋아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어떤 기쁨을 다른 기쁨보다 앞세울 것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3절의 상황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정복자들은 포로들에게 기쁨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포로들은 자신들의 기쁨을 정복자들의 뜻에 따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시인은 오히려 자신의 기쁨의 맨 위에 예루살렘을 두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예루살렘이 회복되기 전에는 평생 어떤 기쁨도 누리지 않겠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것은 모든 기쁨의 금지가 아니라 기쁨의 우선순위입니다. 자신의 가장 깊은 충성과 기쁨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닙니다.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길 것인지 결정하는 행동입니다.

기억은 왜 그렇게 중요할까?

바벨론에 사는 포로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먹고살아야 했고, 생활을 이어 가야 했습니다. 실제로 예레미야 29:4-7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사람들에게 집을 짓고, 밭을 일구며, 가족을 이루고, 자신들이 사는 도시의 평안을 구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므로 포로 생활을 견디는 일이 반드시 바벨론의 모든 일상생활을 거부하는 것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편 137편은 한 가지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새로운 땅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예루살렘을 잊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과, 자신들의 기억과 정체성을 지우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시인은 그 차이를 손과 혀를 걸고 지키려 합니다.

그런데 이 맹세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기억하는 일은 단지 그곳의 아름다움과 예배를 기억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도시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제 시인을 다른 방향으로 이끕니다. 그는 자신이 예루살렘을 잊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하나님께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도 그날을 기억해 주십시오

시편 137:7 본문 →

여호와야훼, 에돔 자손들을 두고 예루살렘의 날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들은 「벗겨 내라, 벗겨 내라, 그 기초까지.」라고 말했습니다.시편 137:7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시인은 처음으로 여호와야훼께 직접 간구합니다.

앞에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말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야훼를 부릅니다. 그런데 요청하는 것은 구체적인 구원이나 회복이 아닙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여기서 「예루살렘의 날」은 예루살렘이 파괴된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날과 관련하여 시인이 특별히 기억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바벨론 사람들이 아니라 에돔 자손들입니다.

에돔은 왜 등장하는가?

에돔은 이스라엘의 남동쪽에 위치했던 나라로, 성경에서는 에서의 후손들과 연결됩니다(창세기 36장). 에서와 야곱은 형제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에돔의 관계에는 단순한 이웃 나라 이상의 역사적·친족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에돔은 유다를 돕는 형제가 아니라, 그들의 재난을 기뻐하거나 적대적으로 행동한 민족으로 기억됩니다.

시인이 인용한 에돔 사람들의 말은 잔혹합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을 표면적으로 손상시키는 데 그치지 말고, 도시의 기초가 드러날 때까지 완전히 무너뜨리라는 외침입니다. 여기에는 철저한 파괴를 바라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 외침은 이미 재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깊은 상처를 남겼을 것입니다. 원수에게 공격당하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그 불행을 기뻐한다면 상처는 더욱 깊어집니다.

시인은 그날의 말을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도 잊지 말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내가 기억한다」에서 「하나님이 기억해 주십시오」로

1절에서 포로들은 시온을 기억했습니다.

5~6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제 7절에서 여호와야훼께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기억의 주체가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 갑니다.

시인은 자신들의 고통이 인간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고통을 아시고, 그날에 일어난 일을 외면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는 요청은 종종 그분이 정의로운 행동을 취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구와 연결됩니다. 시편 74:18에서도 시인은 원수들이 여호와야훼를 모욕한 일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시편 79:8에서는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구합니다.

기억해 달라는 요청은 단순히 정보를 보존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일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실 것인가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7절에서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날의 외침을 하나님 앞에 가져옵니다.

문제는 시인의 분노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 두 절에서는 바벨론을 향한 복수의 소망이 가장 극단적인 표현으로 터져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오바댜 10-14절에서는 에돔이 야곱에게 행한 폭력을 책망합니다. 특히 예루살렘이 재난을 당했을 때 그 불행을 기뻐하고, 도망하는 사람들을 가로막거나 넘겨주는 행동을 비판합니다. 예레미야애가 4:21-22에서도 에돔이 유다의 재난을 기뻐하는 상황과 에돔에게 닥칠 심판이 함께 언급됩니다. 시편 137:7은 이러한 기억과 맞닿아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에돔 사람들이 실제로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한 주된 군사력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그들의 행동으로 직접 제시되는 것은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날에 외쳤다는 말입니다.

바벨론을 향한 끔찍한 마지막 말

시편 137:8–9 본문 →

황폐해진 딸 바벨론아, 행복하다, 네가 우리에게 행한 일을 너에게 그대로 되갚는 이는.시편 137:8 · 본디새김
행복하다, 네 어린아이들을 움켜잡아 바위에 내리쳐 산산이 부수는 이는.시편 137:9 · 본디새김

이 두 절은 시편 137편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강한 말을 사용했다는 정도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향한 실제적인 살해 행위를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황폐해진 딸 바벨론」은 무엇을 뜻할까요?

8절에서 시인은 바벨론을 「딸 바벨론」이라고 부릅니다. 고대 예언서와 시가에서 도시는 종종 여성으로 의인화됩니다. 이사야 47:1에서도 바벨론이 여인의 모습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본디새김은 그 바벨론을 「황폐해진」이라고 옮깁니다. 문제는 이 상태를 시간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입니다. 이미 황폐해진 바벨론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황폐하게 될 바벨론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바벨론이 다른 나라들을 황폐하게 만든 존재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이 바벨론의 운명을 뒤집어 놓는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벨론 자신이 파괴의 대상이 됩니다.

「그대로 되갚는다」는 말

이것은 대응적인 보복의 언어입니다. 악을 행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정의와, 동일한 잔혹행위를 되풀이하는 보복은 자동으로 같은 것이 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바벨론도 겪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고통받은 사람의 분노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 바람이 곧바로 모든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정의의 원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9절에서는 복수의 대상이 어린아이들에게까지 확대됩니다.

왜 어린아이들인가요?

9절의 표현은 잔혹한 만큼 구체적입니다. 시인은 바벨론의 군대나 왕을 처벌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움켜잡아 바위에 내리쳐 죽이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고대 전쟁에서는 도시를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민간인과 어린아이들까지 죽임당하는 참혹한 일이 있었습니다. 시편 137:9은 이러한 전쟁의 잔혹한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의 말은 어린아이를 살해하는 행위에 대한 명시적인 축복처럼 들립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행복하다」라는 말의 불편함

8~9절에서 반복되는 「행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슈레이입니다. 이 말은 시편 1:1에서도 의로운 길을 걷는 사람의 복된 상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그런데 시편 137편에서는 바로 그 말이 복수하는 사람, 특히 어린아이들을 죽이는 사람에게 사용됩니다.

시편의 독자는 이 말 앞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이 사용하는 표현은 분명히 강한 긍정입니다. 단순히 그런 일을 당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복수를 실행하는 사람이 행복하리라고 선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단순히 바벨론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중립적인 예언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어린아이들을 악한 사상이나 죄의 씨앗을 상징하는 비유라고 설명하여, 그들의 실제 죽음에 대한 언급을 지워 버리는 것도 본문의 문면을 존중하는 읽기가 아닙니다.

시인은 어린아이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극단적인 폭력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를 죽이는 일을 명령하거나 승인하신다는 뜻일까요? 시편 137편 자체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고향이 파괴되고 포로가 된 공동체의 목소리를 담은 시인입니다. 8~9절은 그가 바벨론을 향해 내뱉는 말이지, 하나님이 직접 하신 명령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 요청에 응답하셨다는 장면도 없습니다. 따라서 시인의 분노가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 분노가 요구하는 모든 행동을 하나님이 옳다고 승인하셨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마지막 구절의 폭력을 명시적으로 비판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시편은 그곳에서 끝납니다. 시인의 말 뒤에 다른 화자가 나타나 그것을 꾸짖거나 바로잡지 않습니다.

이 침묵 역시 본문이 가진 어려움의 일부입니다.

복수의 소망을 숨기지 않는 기도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시인이 자기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고향을 잃고, 성전이 무너지고, 정복자들에게 조롱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다음 자신들에게 고통을 준 나라가 똑같은 고통을 겪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깊이 상처받은 사람이 자신을 파괴한 힘의 완전한 몰락을 바라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상처를 이해하는 것과 그 상처에서 나온 모든 욕망을 정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다릅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나라의 정치적·군사적 결정에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을 살해하는 일이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복수의 만족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정의로운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을 충실하게 읽는다는 것은 이 어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면서도, 그가 바라는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이미 정리된 신학적 결론만 담겨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겪는 두려움과 절망, 원망과 분노도 담겨 있습니다. 시편 137편의 마지막은 그 감정이 얼마나 파괴적인 소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시편을 부르는 사람이 그 폭력을 실행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복수의 행동을 지시하는 법률이나 규범이 아니라, 억압받고 파괴된 공동체가 자신들의 상실과 분노를 표현하는 노래입니다. 이 구별은 마지막 구절을 읽기 쉽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무엇이 실제로 기록되어 있고, 무엇을 그 기록에서 곧바로 끌어낼 수 없는지 분명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은 이 시편에서 어디에 계신가요?

시편 137편에서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4절에서 「여호와야훼의 노래」의 주인으로 언급되시고, 7절에서 기억해 달라는 기도의 대상으로 불리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직접 개입하여 상황을 바꾸시는 장면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다는 뜻일까요? 시편은 그렇게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언제나 평온한 언어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137편에서는 상실한 것을 잊지 않으려는 절박함과 정의를 갈망하는 분노 속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불립니다. 그렇다고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이 복수의 모든 내용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말하는 사람도 깊은 상처 속에서는 끔찍한 복수를 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은 그 목소리를 삭제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황폐해진」은 히브리어 핫셰두다를 옮긴 것으로, 파괴되거나 황폐하게 된 상태를 나타내는 수동형 표현입니다. 본디새김은 수동형의 문면을 살려 「황폐해진」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만으로 시편이 바벨론의 멸망 이후에 작성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앞으로 닥칠 파괴를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묘사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51:24에서도 여호와야훼는 바벨론이 시온에서 행한 악을 되갚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장 35~36절에서는 시온의 주민들이 바벨론이 저지른 폭력을 문제 삼고, 하나님이 그들의 송사를 맡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바벨론의 심판에 대한 기대가 시편 137편에만 등장하는 감정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13:16은 바벨론이 심판받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어린아이들이 죽임당하는 일을 언급합니다. 나훔 3:10에서도 정복된 도시에서 어린아이들이 살해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인이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의 어린아이들을 같은 방식으로 살해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8절의 「우리에게 행한 일」과 9절의 묘사는 그러한 폭력이 시인의 역사적 기억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본문만으로 시인이 실제로 목격한 사건을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의 다른 탄식들도 이 시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시편 74편에서는 원수들이 성소를 파괴한 일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시편 79편에서는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하나님의 종들의 피가 흘려진 일을 탄식하며, 그 피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시편 137편도 같은 상실을 배경으로 하지만,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간구에서 인간의 복수를 찬양하는 말로 더욱 거칠게 나아갑니다. 어떤 시편은 고통을 호소한 뒤 찬양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시편 88편처럼 끝까지 어둠에 머무는 노래도 있고, 시편 137편처럼 복수의 말로 끝나는 노래도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함께 읽으면 이 분노를 더 넓은 윤리적 문맥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18은 자기 백성 가운데 원한을 품거나 복수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잠언 24:17은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한편 예레미야 29:7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사는 도시의 평안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신약에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마태복음 5:44). 바울도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권합니다(로마서 12:19). 이것은 시편 137편에 대한 직접적인 인용이나 해설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윤리적 가르침 안에서 이 시편의 복수 소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하게 하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가르침을 사용하여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악을 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의를 구하는 일과 타인의 무고한 생명을 해치는 일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노래할 수 없다는 고백을 노래로 남기다

시편 137:1–9 본문 →

이제 처음에 제기했던 역설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포로들은 여호와야훼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137편은 그들의 슬픔과 분노를 노래로 남겼습니다.

정복자들이 요구했던 노래는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한 시온의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정복자들을 즐겁게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그들을 사로잡은 권력이 어떤 고통을 남겼는지 증언하는 노래입니다.

정복자들은 그들의 땅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성전을 무너뜨릴 수 있었고, 그들을 낯선 나라로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잊으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그 기억까지 마음대로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잊지 않겠다는 맹세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그 기억이 바벨론의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싶다는 소망으로 이어지는 순간, 기억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려는 욕망과 결합합니다. 시편은 기억이 언제나 아름다운 감정만을 낳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편 137편은 마지막에 끔찍한 말로 끝납니다. 어린아이들을 바위에 내리쳐 죽이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말의 잔혹함을 지우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고통받은 사람의 분노를 보여 주지만, 그 분노를 따라 다른 사람의 어린아이들을 해쳐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노래에는 하나님의 응답도, 예루살렘의 회복도, 포로들의 귀환도 나오지 않습니다. 복수의 갈망을 해소하는 마지막 선언도 없습니다. 시인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하지 않은 채 노래를 끝냅니다.

다만 노래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한 장면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벨론의 강가입니다.

강물은 흐르고, 나무들은 서 있습니다. 그 나뭇가지에는 포로들이 걸어 놓은 리라가 있습니다.

그 악기는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연주되지도 않습니다.

포로들은 시온을 기억하며 울고 있습니다. 정복자들은 노래를 요구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포로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시인은 마침내 그 슬픔과 분노를 하나의 노래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노래 속의 리라는 끝내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시편 137편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다는 노래가 아닙니다. 아직 되찾지 못한 것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노래입니다.

바벨론의 강가에서 그들은 여전히 시온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리라는 나무에 걸려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