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12–20장 · 용과 짐승과 바벨론
짐승에게 파괴되는 여자
요한계시록 17장에는 매우 기묘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한 여자가 진홍빛 짐승 위에 앉아 있습니다. 여자는 자줏빛과 진홍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몸을 꾸몄습니다. 손에는 금잔을 들고 있습니다. 그녀와 땅의 왕들은 음행을 하고, 온 세상 사람들은 그녀의 포도주에 취합니다.
여자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가 올라탄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왕이 그 짐승에게 자신의 권위를 넘겨줍니다.
그런데 이 장의 끝에 이르면 반전이 일어납니다.
여자를 등에 태우고 있던 바로 그 짐승이 여자를 미워하여 파괴합니다. 여자의 화려한 옷은 벗겨지고, 그녀의 살은 먹히며, 그녀는 불에 태워집니다.
이것이 17장을 관통하는 역설입니다.
여자는 짐승의 힘을 이용해 세상을 지배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 힘은 그녀를 끝까지 지켜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몰락을 가져오는 도구가 됩니다.
요한계시록 16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큰 바벨론은 이제 17장에서 한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앞 장이 바벨론의 심판을 선언했다면, 이 장은 바벨론이 어떤 힘에 의지하고 있었으며, 그 힘이 어떻게 그녀를 무너뜨리는지 보여 줍니다.
이 이야기는 네 단계로 전개됩니다. 먼저 천사는 요한에게 큰 창녀의 심판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합니다(1–2절). 이어서 요한은 여자의 화려한 모습과 그녀가 흘린 피를 발견합니다(3–6절). 천사는 여자가 올라탄 짐승의 정체와 그 권력의 한계를 설명합니다(7–14절). 마지막에는 그 짐승과 왕들이 오히려 여자를 파괴하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15–18절).
이렇게 보면 17장은 단순히 신비한 숫자와 상징을 풀어야 하는 암호문이 아닙니다. 세상을 매혹하는 권력이 무엇으로 유지되고, 왜 결국 자신이 의지하던 힘에 의해 무너지는지를 드러내는 환상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한가운데에는 짐승과 정면으로 대비되는 한 분이 계십니다.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이십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여자 — 세상을 취하게 하는 권력
그리고 대접 일곱을 든 천사 일곱 가운데 하나가 와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이리 오시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창녀가 받을 심판을 그대에게 보이겠소.」요한계시록 17:1 · 본디새김
요한에게 말을 건네는 천사는 일곱 대접을 든 천사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펼쳐질 환상은 앞서 보았던 심판과 관계없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천사는 이미 선언된 심판의 대상이 누구인지, 그 대상이 왜 심판을 받는지를 자세히 보여 주려 합니다.
천사는 여자의 힘이나 영광을 보여 주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받을 심판을 보여 주겠다고 합니다. 독자는 이 말을 먼저 들은 뒤에야 여자의 화려한 모습을 보게 되므로, 뒤이어 등장하는 금과 보석, 진주와 진홍빛 옷은 처음부터 심판의 전망 아래 놓여 있습니다.
화려함에 눈을 빼앗기기 전에 그 화려함의 결말을 먼저 들은 것입니다.
바벨론이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는 뜻
「많은 물 위에 앉은」이라는 표현은 예레미야 51:13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예레미야는 옛 바벨론을 많은 물가에 살며 보물이 풍부한 도성으로 묘사합니다. 실제 고대 바벨론은 유프라테스강과 관개수로를 이용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풍부한 물과 재물을 가진 그 도성에도 끝이 올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요한은 이 이미지를 가져오지만, 단순히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고대 바벨론의 지리적 위치를 다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17:15에서 천사는 이 물이 「백성들과 무리와 민족들과 언어들」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물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녀의 영향력이 여러 백성과 민족에 걸쳐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자는 많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습니다. 그 위에 앉아 있습니다. 여자의 지위가 여러 민족과 백성 위에 놓여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그녀를 「큰 창녀」라고 부릅니다.
왜 도성을 창녀로 묘사하는가?
「땅의 왕들이 그 여자와 음행했고, 땅에 사는 이들이 그 여자의 음행의 포도주에 취했소.」요한계시록 17:2 · 본디새김
성경의 예언서에서 창녀와 음행이라는 이미지는 실제 성적 행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상 숭배와 정치적 배신, 하나님 대신 다른 권력에 의지하는 일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에스겔 16장과 23장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가 다른 나라들과 맺은 관계와 우상 숭배를 음행에 비유합니다. 호세아서에서도 결혼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이미지가 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7장의 여자를 그대로 불충실한 이스라엘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 절은 여자가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나라를 가진 큰 도성」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창녀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여러 왕과 민족을 거짓된 경배와 불의한 관계로 끌어들이는 도성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여자의 죄는 그녀 혼자 저지르는 죄가 아닙니다. 땅의 왕들이 그녀와 음행하고, 땅에 사는 사람들도 그녀의 포도주에 취합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행위에 참여하게 만듭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판단이 흐려지고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요한은 이 이미지를 통해 바벨론이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을 표현합니다.
바벨론은 사람들을 억압하기만 하는 권력이 아닙니다.
그녀는 사람들을 매혹합니다.
그녀와 관계를 맺으면 부와 권력과 번영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바벨론의 위험은 사람들이 그녀를 두려워한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녀를 원하게 된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짐승은 사람들에게 경배를 강요하는 권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벨론은 매혹하고 취하게 하는 권력으로 나타납니다. 두 방식은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한 장면 안에서 결합됩니다.
요한은 여자가 짐승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광야에서 만난 화려한 여자 — 아름다운 겉모습과 잔 속의 더러움
그리고 그가 영 안에서 나를 광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진홍빛 짐승 위에 앉은 여자를 보았습니다. 그 짐승은 모독의 이름들로 가득했고 머리 일곱과 뿔 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17:3 · 본디새김
그런데 광야에서 만나는 광경은 매우 화려합니다.
광야라는 배경은 요한계시록 안에서 또 다른 여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12:6에서 용에게 위협받던 여자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곳으로 피하기 위해 광야로 달아났고, 12:14에서도 그 여자는 광야에서 보호받습니다.
앞의 여자는 용에게 박해받으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여기의 여자는 용에게서 권세를 받은 짐승 위에 앉아 있습니다. 이 둘을 같은 여자라고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요한은 광야라는 장소를 통해 서로 다른 두 여자의 처지를 대조하여 보게 합니다.
눈앞의 모습만 보면 짐승 위에 올라탄 여자가 훨씬 안전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장의 마지막까지 읽으면 그 판단이 뒤집힙니다.
짐승 위에 앉았다는 것
여자는 앞서 많은 물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짐승 위에 앉아 있습니다. 17:15는 물이 여러 민족과 백성을 뜻한다고 설명하고, 17:7 이하에서는 짐승이 여러 왕과 관련된 권력임을 밝힙니다. 따라서 두 이미지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같은 여자의 권세를 드러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짐승을 타고 있다는 모습만으로 누가 누구를 완전히 지배하는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자는 짐승의 힘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짐승이 나중에 그녀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이 불안정한 관계는 장의 끝에서 드러날 반전을 미리 준비합니다.
손에 든 금잔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그 여자는 자줏빛과 진홍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금잔을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역겨운 것들과 그 여자의 음행에 딸린 더러운 것들이 가득했습니다.요한계시록 17:4 · 본디새김
자줏빛과 진홍빛은 값비싼 염료와 관련된 색이었고, 금과 보석과 진주는 부와 지위를 나타냅니다. 그녀는 자신의 부를 감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러나 요한은 곧바로 그녀의 손에 들린 잔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잔도 금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역겨운 것들과 더러운 것들입니다. 여자의 본질을 보여 주는 것은 잔의 재질이 아니라 그 내용물입니다.
이 장면은 예레미야 51:7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온 땅을 취하게 하는 금잔으로 묘사했습니다. 민족들이 그 잔의 포도주를 마시고 정신을 잃듯 행동합니다. 요한은 그 오래된 이미지를 여자의 손에 실제로 금잔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시각화하고, 잔 속의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행위들과 더러움이 담겨 있습니다.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것이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해서 그것을 입은 존재의 행위가 아름다운 것도 아닙니다. 바벨론의 화려함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그녀가 실제로 행하고 있는 일들을 감춥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제 그 여자의 이마에 적힌 이름을 읽습니다.
「비밀. 큰 바벨론.」
그리고 그 여자의 이마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비밀. 큰 바벨론. 창녀들과 땅의 역겨운 것들의 어머니.요한계시록 17:5 · 본디새김
「비밀」(μυστήριον)이라는 낱말은 단순히 아무도 알아낼 수 없는 수수께끼를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감추어져 있던 의미가 드러나는 일과도 관련됩니다. 다만 여기서 「비밀」이 여자의 이름 자체에 포함된 낱말인지, 아니면 그 이름의 감추어진 의미를 알려 주는 표시인지는 문법적으로 논의가 있고, 본문은 이를 명시적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다음 장면에서 천사가 「그 여자와 ... 짐승의 비밀을 말해 주겠소」라고 하므로, 독자는 이 이름이 보이는 그대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여자는 역사 속의 바벨론 그 자체가 아닙니다. 「큰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통해 구약의 바벨론을 떠올리게 하면서, 요한 시대의 현실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이마에 이름이 적혀 있다는 점도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에게 속한 사람들이 그의 표를 받고, 어린양에게 속한 사람들은 그분과 아버지의 이름을 이마에 지닙니다(13:16–17; 14:1). 이름과 표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누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지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대표하는지 감추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름의 실제 의미를 이해하려면 천사의 해설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어머니」로 불립니다. 이것을 다른 모든 악이 문자 그대로 이 여자에게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가 땅의 여러 창녀와 역겨운 것들을 대표하며, 그러한 행위들을 널리 퍼뜨리는 중심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낳고 돌보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뒤집혀, 바벨론은 생명 대신 더러움과 불의를 퍼뜨리는 어머니로 묘사됩니다.
이제 그 여자가 무엇을 즐기고 있는지 밝혀집니다.
피에 취한 여자
그리고 나는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여자를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요한계시록 17:6 · 본디새김
이 구절에 이르면 여자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앞서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녀의 음행의 포도주에 취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녀 자신은 성도들의 피에 취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벨론이 내미는 포도주에 취합니다.
바벨론은 예수님의 증인들이 흘린 피에 취합니다.
바벨론의 매혹과 폭력은 서로 분리된 현상이 아닙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부와 권세의 매력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피를 흘립니다. 이것은 13장에서 짐승이 경배를 강요하고 이를 거절하는 이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했던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바벨론의 화려함은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리는 평화로운 번영이 아닙니다. 그 화려함 뒤에는 희생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라는 표현은 그들이 단순히 바벨론의 정치적 경쟁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언을 지닌 사람들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충성은 바벨론의 경배 요구와 충돌했습니다.
요한의 놀람을 정확히 어떤 감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자의 화려함과 잔혹함이 함께 나타나는 광경, 그리고 짐승과 결합한 그녀의 모습이 모두 그 놀람의 배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왜 놀랐소?」라고 물을 뿐, 그 여자를 더욱 찬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여자의 비밀을 설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이제 독자는 바벨론이 어떻게 이런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힘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는지를 듣게 됩니다.
있었다가 지금은 없는 짐승 — 영원을 흉내 내는 권력
그러자 그 천사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왜 놀랐소? 내가 그대에게 그 여자와, 그 여자를 등에 태우고 있는 머리 일곱과 뿔 열을 가진 짐승의 비밀을 말해 주겠소.」요한계시록 17:7 · 본디새김
천사는 여자의 비밀을 설명하겠다고 하면서 먼저 짐승에 관해 말합니다. 여자를 이해하려면 그녀가 타고 있는 짐승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녀의 권력은 짐승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짐승에 대한 첫 설명은 머리나 뿔의 숫자가 아닙니다. 짐승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대가 본 그 짐승은 있었다가 지금은 없고, 끝없이 깊은 구덩이에서 올라오려 하며, 멸망으로 가오. 그리고 땅에 사는 이들 가운데 세상이 세워질 때부터 생명의 두루마리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이들은, 그 짐승이 있었다가 지금은 없고 다시 나타날 것을 볼 때에 놀랄 것이오.」요한계시록 17:8 · 본디새김
짐승은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올라오려 합니다.
그리고 멸망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흉내 내는 짐승
요한계시록 첫머리에서 하나님은 지금 계시고 전에 계셨으며 오실 분으로 소개됩니다(1:4, 8). 4:8에서도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찬양하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짐승에게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닮은 듯한 말이 사용되지만, 그 가운데에 「지금은 없다」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은 하나님의 권위를 모방하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13장에서 짐승의 머리 하나가 죽임당한 것처럼 상처를 입었다가 그 상처가 낫자 온 땅이 놀라며 짐승을 따랐습니다(13:3–4). 그 사건은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분과 짐승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어린양은 자신의 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 속량하셨습니다(5:9). 반면 짐승은 자신의 놀라운 회복을 통해 사람들의 경탄과 경배를 얻습니다.
8절의 「놀랄 것이오」는 앞서 요한이 여자를 보고 놀랐다는 서술과 연결됩니다. 짐승의 권세뿐 아니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듯한 존재 방식이 사람들의 경탄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천사는 짐승의 재등장을 이야기하면서 처음부터 그의 마지막도 알려 줍니다.
「멸망으로 가오.」
짐승의 이야기는 돌아오는 힘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멸망으로 향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성과 짐승의 모방된 영원성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짐승은 자신이 사라져도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존재처럼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만, 그 끝은 멸망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표현의 역사적 배경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로마 황제 네로의 귀환에 관한 전설입니다. 네로가 죽은 뒤에도 그가 실제로 죽지 않았거나 다시 돌아와 권력을 차지할 것이라는 소문과 기대가 고대 로마 세계에 존재했습니다. 이 전설은 13장의 치명적인 상처와 17장의 「있었다가 지금은 없고」, 그리고 짐승이 여덟째 왕이면서 일곱에 속한다는 11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배경으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네로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으며, 이 전설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해서 요한이 네로가 실제로 부활하여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네로의 귀환을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짐승의 권력과 성격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해석과, 짐승이 곧 돌아올 네로 자신이라는 해석은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의 중심은 특정 황제의 재등장 여부가 아니라,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짐승의 권력도 결국 멸망한다는 사실입니다.
산 일곱과 왕 일곱 — 로마를 가리키면서 로마를 넘어서는 환상
「지혜를 지닌 지성이 여기에 있소. 머리 일곱은 그 여자가 앉아 있는 산 일곱이오. 그리고 그 머리들은 왕 일곱이오.」요한계시록 17:9 · 본디새김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은 13:18에서 짐승의 수를 이해하려면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던 말씀과 닮았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독자에게 일곱이라는 숫자를 계산하라고 하지 않고, 그 숫자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직접 설명합니다. 하나의 상징이 지리적인 이미지와 정치적인 이미지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 산은 로마를 가리키는가?
로마는 고대에 일곱 언덕의 도성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18절에서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도성으로 설명됩니다. 로마 제국 시대의 독자들에게 이 두 단서를 함께 제시하면 제국의 중심 도시인 로마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예루살렘 등을 가리킨다는 소수의 해석도 있지만, 일곱 언덕과 땅의 왕들에 대한 통치라는 단서를 함께 고려할 때 로마 해석이 강한 지지를 받습니다.
하지만 이 지리적 단서를 발견했다고 해서 환상 전체의 의미가 모두 풀린 것은 아닙니다. 천사는 산 일곱이 동시에 왕 일곱이라고 말합니다. 도시의 위치만이 아니라, 그 도시가 행사하는 정치적 지배를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이 그리는 바벨론은 거리와 건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왕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여러 민족을 지배하는 권력의 중심입니다.
다섯은 넘어졌고, 하나는 지금 있으며
「다섯은 넘어졌고 하나는 지금 있으며 다른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소. 그리고 그가 오면 잠시 머물러야 하오.」요한계시록 17:1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숫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장 자체는 비교적 분명하지만, 이 왕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일곱 왕을 로마 황제들의 연속으로 보는 해석과, 연속되는 제국이나 지배 권력의 단계로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어느 해석이든 본문만으로 왕들의 명단을 확정하거나 요한계시록의 집필 연대를 정확히 산출하기는 어렵습니다.
천사의 설명은 왕들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존속 기간을 강조합니다.
다섯은 이미 넘어졌습니다.
지금 있는 왕도 영원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뒤에 오는 왕도 「잠시」 머물러야 합니다.
짐승에게 속한 통치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권력들입니다. 어떤 목록을 택하더라도, 천사가 보여 주는 것은 지배 권력의 유한성입니다.
여덟째 왕이면서 일곱에 속한 짐승
「그리고 있었다가 지금은 없는 그 짐승, 그 자신이 여덟째이면서 일곱에 속하고, 멸망으로 가오.」요한계시록 17:11 · 본디새김
짐승은 여덟째이면서 동시에 일곱에 속하므로, 그를 단순히 일곱 왕 다음에 등장하는 전혀 새로운 왕 하나로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네로와 같은 지배자의 재등장 또는 그를 닮은 폭력적 통치의 반복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면 일곱으로 표현된 지배 권력의 역사가 짐승에게서 마지막으로 집중된다고 보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숫자들의 정확한 역사적 대응은 논쟁적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한 가지를 다시 분명하게 말합니다.
「멸망으로 가오.」
8절에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11절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짐승이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에 놀라지만, 천사는 그 짐승이 멸망으로 간다는 사실을 보게 합니다. 짐승의 마지막은 불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열 뿔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이 장의 중심인 어린양이 등장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일곱 왕을 로마 황제들로 읽을 경우, 어느 인물부터 세기 시작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부터 시작할 수도 있고, 아우구스투스부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네로가 죽은 뒤 짧은 기간 동안 제위를 차지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를 계산에 포함할 것인지도 문제입니다. 이 때문에 여섯째 왕을 네로, 갈바, 베스파시아누스 등 서로 다른 인물과 연결하는 해석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일곱 왕을 연속되는 제국이나 지배 권력의 단계로 보는 읽기는, 다니엘서에서 짐승과 왕이 나라와 통치를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된다는 점을 배경으로 합니다.
한 시간 동안 권위를 받는 왕들 — 어린양 앞에서 드러나는 힘의 한계
「그리고 그대가 본 뿔 열은 왕 열이오. 그들은 아직 나라를 받지 않았소. 그러나 짐승과 함께 왕으로서 한 시간 동안 권위를 받소.」요한계시록 17:12 · 본디새김
열 뿔이 열 왕을 나타낸다는 설명은 다니엘서 7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니엘 7:7–8에서는 무서운 넷째 짐승에게 열 뿔이 있고, 7:24에서는 그 뿔들이 나라에서 일어날 왕들로 해석됩니다. 다니엘서에서 이 짐승들은 인간 세계의 지배 권력을 상징하며, 그 권력들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통치 앞에 서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상징 언어를 사용하지만, 두 본문의 열 뿔을 기계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열 왕들에게는 장차 권위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권위는 「한 시간 동안」입니다. 문자 그대로 육십 분이라기보다, 환상 속에서 주어지는 권력이 매우 제한적이고 짧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들은 한 뜻을 가지고 있고, 자기들의 힘과 권위를 짐승에게 주오.」요한계시록 17:13 · 본디새김
짐승의 권력은 다른 왕들과 아무 관계 없이 홀로 존재하는 권력이 아닙니다. 여러 왕이 자신의 힘과 권위를 짐승에게 넘겨줌으로써 그 권력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짐승에게 억눌린 피해자들로만 등장하지 않고, 자기 권위를 내어 주는 협력자들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앞서 바벨론과 땅의 왕들이 음행했다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악한 권력은 언제나 한 명의 지배자가 모든 것을 강제로 빼앗는 방식으로만 작동하지 않습니다. 여러 지배자가 공통의 이해관계를 따라 자신의 권한을 더 큰 권력에 넘겨주면서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결합된 권력은 매우 강력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하려는 일이 밝혀지는 순간, 권력의 한계도 드러납니다.
어린양과 싸우는 왕들
「이들이 어린양과 싸울 것이지만 어린양이 그들을 이길 것이오. 그가 주들의 주이며 왕들의 왕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이들은 부름받은 이들이요, 뽑힌 이들이요, 신실한 이들이오.」요한계시록 17:1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17장의 중심입니다.
바벨론의 화려함과 짐승의 머리와 뿔, 왕들의 숫자와 권력의 이동에 관한 모든 설명이 결국 왕들과 어린양의 대결로 향합니다. 한쪽에는 자신의 힘과 권위를 모아 짐승에게 넘겨준 여러 왕이 있습니다. 다른 쪽에는 요한계시록 5장에서 죽임당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바로 그 어린양이 계십니다.
어린양이 이기시는 이유는 더 큰 군대를 보유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지 않습니다. 「왕들의 왕」이라는 호칭은 앞서 등장한 왕들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상대화합니다. 그들이 한뜻으로 힘을 모아도, 어린양의 권위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왕들의 왕이 되시는 것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신 뒤가 아닙니다. 이미 왕들의 왕이시기 때문에 이기십니다. 이 싸움은 왕권을 획득하시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그분의 왕권을 거부하는 권력들이 결국 그 왕권 앞에서 패배하는 싸움입니다.
어린양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천사는 어린양의 승리를 선언한 뒤 「그와 함께 있는 이들」을 부름받은 이들, 뽑힌 이들, 신실한 이들이라는 세 가지 표현으로 부릅니다. 그들은 먼저 어린양과의 관계 안에서 설명됩니다. 스스로 힘을 모아 어린양을 승리하시게 하는 독립적인 집단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13장에서 짐승에게 속한 사람들은 그의 형상에 절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에게 속한 사람들은 그분에 대한 신실함으로 구별됩니다.
왕들은 짐승에게 힘과 권위를 넘겨줍니다.
어린양에게 속한 사람들은 그분께 대한 충성을 지킵니다.
두 집단의 차이는 어느 편이 더 강력한가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속해 있으며, 누구를 참된 왕으로 인정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화려한 여자에서 그 여자를 떠받치는 짐승으로, 다시 짐승에게 권위를 넘겨주는 왕들로 권력의 연결망을 따라가자, 결국 어린양 앞에 도착합니다.
짐승이 여자를 미워하다 — 바벨론을 지탱하던 힘의 배신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본 물, 곧 창녀가 앉아 있는 그 물은 백성들과 무리와 민족들과 언어들이오.」요한계시록 17:15 · 본디새김
천사는 이제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던 처음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러한 나열은 특정 지역이나 민족을 넘어서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5:9; 7:9; 13:7). 바벨론의 지배가 얼마나 넓게 미치는지 다시 확인됩니다.
그런데 천사는 이 설명을 마친 뒤 독자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그대가 본 뿔 열과 그 짐승, 이들이 창녀를 미워할 것이오. 그리고 그 여자를 황폐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며, 그 여자의 살을 먹고 그 여자를 불로 태워 버릴 것이오.」요한계시록 17:16 · 본디새김
짐승은 여자를 등에 태우고 있었고, 왕들은 그녀와 음행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짐승과 왕들이 그녀를 미워합니다. 여자를 지탱하던 권력이 여자를 파괴하는 권력으로 바뀝니다.
처음에 여자는 금과 보석과 진주로 자신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벌거벗겨집니다.
처음에 그녀는 금잔을 들고 다른 사람들을 취하게 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살이 먹히는 존재가 됩니다.
처음에 그녀는 짐승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짐승에게 파괴됩니다.
그녀가 의지했던 힘이 그녀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끔찍한 방식으로 묘사하는가?
이 장면은 에스겔 16장에서 예루살렘이 의지하던 자들이 그녀를 공격하는 장면과 뚜렷하게 닮았습니다. 이 이미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도성의 심판을 의인화한 묵시적·예언적 표현입니다. 그 이미지가 고대 사회의 성별 권력관계와 공개적 수치심을 형벌로 사용하는 관습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본문은 여성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요구하지 않고, 짐승의 권력과 결합한 도성이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짐승은 왜 여자를 파괴합니까?
본문은 그들이 그녀를 미워하게 된 구체적인 정치적 사건이나 이해관계의 변화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특정 시대의 반란이나 전쟁으로 곧바로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차원에서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바벨론이 영원한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었던 관계는 결코 영원하지 않고,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하던 부와 권력의 매혹도 그녀 자신을 끝까지 보호하지 못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악한 세력이 언제나 완벽한 연대를 유지하는 것처럼 그리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바벨론과 짐승 사이의 관계가 애초부터 신실한 사랑이나 참된 정의 위에 세워진 관계가 아니었음을 드러냅니다. 그 관계를 지탱하는 것은 힘과 이익과 지배입니다.
그러므로 그 힘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때, 바벨론은 자신을 지켜 줄 근거를 잃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넣어 주셨다고?
「하나님이 자기 뜻을 이루려는 생각을 그들의 마음에 넣어 주셨기 때문이오. 곧 그들이 뜻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의 말씀들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자기들의 나라를 짐승에게 주게 하신 것이오.」요한계시록 17:17 · 본디새김
이 문장을 읽으면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악한 왕들의 행동을 직접 일으키셨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그들의 악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철학적으로 어떻게 양립하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첫째, 왕들은 실제로 자신의 힘과 권위를 짐승에게 넘겨줍니다. 13절은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행동한다고 말합니다. 둘째,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독립적인 최종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셋째,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권력에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라는 끝이 있습니다.
천사는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이 선하다고 승인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력들조차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궁극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사야 10:5–15에서 아시리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도구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왕 자신은 자신의 힘과 지혜를 자랑하며, 하나님은 그의 교만과 악을 심판하십니다. 아시리아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아시리아의 폭력과 교만을 의로운 것으로 바꾸지는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서도 짐승과 왕들은 자신들의 뜻을 행하며 바벨론을 파괴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이 선언하신 바벨론의 심판과 연결됩니다.
한뜻으로 모였지만 영원히 함께하지 못한다
17:13과 17:17에서 왕들은 뜻을 하나로 모읍니다. 그러나 그 결합이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결합 속에서 바벨론의 파멸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악한 세력끼리도 싸운다는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력들의 단결이 하나님의 목적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짐승에게 나라를 줍니다.
하지만 그 짐승은 멸망으로 갑니다.
그들은 바벨론을 파괴합니다.
하지만 어린양과의 싸움에서는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건의 표면에 직접 등장하지 않으셔도, 그분의 뜻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뜻은 짐승의 힘보다 오래가고, 왕들의 계획보다 깊으며, 바벨론의 화려함보다 확고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자를 벌거벗기고 불로 태우는 이미지는 에스겔 16:37–41과 깊이 연결됩니다. 에스겔 16장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다른 나라들과 맺은 불충실한 관계와 우상 숭배를 음행에 비유하시고, 심판의 장면에서 예루살렘이 의지하던 자들이 그녀를 벌거벗기고 장신구를 빼앗으며 집을 불태웁니다. 두 본문의 대상이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라, 의지했던 관계가 심판의 도구로 바뀐다는 이야기의 구조가 닮은 것입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버리고 의지했던 세력들이 결국 그녀를 파괴하는 장면을 보여 주고, 요한은 바벨론이 짐승의 권력에 의지하다가 그 짐승에게 파괴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 여자는 큰 도성이다 — 화려한 여자의 정체가 밝혀지다
「그리고 그대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나라를 가진 큰 도성이오.」요한계시록 17:18 · 본디새김
마지막 절에 이르러 천사는 처음부터 등장했던 여자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자는 음행하고 피에 취하며 짐승을 타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그 모든 묘사는 문자 그대로 한 여인의 행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민족을 다스리고, 왕들과 관계를 맺고, 부와 화려함을 과시하고, 사람들을 취하게 하며, 성도들과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를 흘리다가, 자신이 의지하던 권력에 의해 파괴되는 도성의 성격을 드러내는 상징이었습니다.
로마라는 역사적 현실과 바벨론이라는 상징
요한의 시대에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권력을 가진 큰 도성으로 로마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고, 일곱 산이라는 단서까지 고려하면 이러한 연결은 더욱 강해집니다. 그러나 요한은 「로마」라고 부르지 않고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그 이름은 로마의 현실을 구약의 이야기 속에서 다시 보게 합니다.
고대 바벨론은 유다를 정복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며 많은 사람을 포로로 끌고 간 제국이었습니다. 예레미야 50–51장에서 바벨론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교만한 권력으로 나타납니다. 요한이 그 이름을 자신의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로마가 고대 바벨론과 완전히 동일한 역사를 반복한다는 말이 아니라, 고대 바벨론의 이야기를 통해 로마 제국의 지배가 지닌 종교적·도덕적 성격을 드러내는 예언적 해석입니다.
그래서 17장의 바벨론은 우선 로마의 권력을 강하게 가리키면서도, 고대 로마에 관한 역사적 암호로만 남지는 않습니다. 그 이름은 권력이 스스로를 절대화하고, 여러 민족을 매혹하며, 자신의 번영을 위해 사람들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방식에 대한 신학적 판단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후 시대의 독자들도 바벨론의 모습을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와 연결하여 성찰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오늘의 특정 국가나 도시를 근거 없이 바벨론이라고 지목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바벨론을 알아볼 수 있는 기준은 크거나 부유한 도성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여러 민족을 지배하는 권력, 거짓 경배와 불의, 그리고 성도들의 피를 흘리는 폭력이 함께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바벨론이라는 상징은 아무 도시나 가리키는 말이 되지 않으면서도, 역사 속 한 도시의 이름에만 갇히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계시록 전체의 구성을 생각하면 이 마지막 절은 또 하나의 대비를 준비합니다. 21:9–10에서는 일곱 대접을 든 천사들 가운데 하나가 다시 요한에게 다가와, 이번에는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를 보여 주겠다고 말합니다. 17장에서 천사는 요한을 광야로 데려갔고, 21장에서는 높고 큰 산으로 데려갑니다. 17장에서는 큰 창녀가, 21장에서는 어린양의 신부가 등장합니다. 17장의 여자는 큰 도성이고, 21장의 신부도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나타납니다. 두 환상의 도입 방식이 의도적으로 닮아 있다는 점은 요한계시록의 두 도성을 서로 대비하여 읽도록 합니다.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 바벨론의 몰락이 드러내는 통치의 본질
17장은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이 무너지는 이야기이지만, 단지 강력한 제국이 언젠가는 멸망한다는 일반적인 역사 법칙이 아닙니다. 요한은 바벨론의 멸망을 통해 서로 다른 두 통치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짐승은 여자를 등에 태우지만 결국 그녀를 파괴하고, 왕들이 힘을 넘겨준 짐승은 멸망으로 갑니다. 반면 어린양은 다른 존재들의 힘을 빼앗아 비로소 왕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주들의 주이시며 왕들의 왕이십니다. 5장에서 그분은 죽임당하셨기 때문에 두루마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찬양받으셨습니다.
바벨론은 자신의 번영을 위해 사람들의 피를 흘립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 속량하십니다.
바벨론은 사람들을 자신에게 취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을 신실한 이들로 부르십니다.
두 통치는 권력의 크기에서가 아니라, 그 권력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점에서 다릅니다.
바벨론은 처음부터 추악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녀의 편에 서는 것이 현실적이고 유익한 선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잔 안에는 더러운 것이 들어 있고, 그녀의 화려함 뒤에는 예수님의 증인들이 흘린 피가 있습니다. 요한은 독자에게 모든 화려한 것을 의심하라고 명령하지 않고, 아름다움이나 부 자체를 악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화려함이 불의를 감추고, 번영이 거짓 경배를 요구하며, 권력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순간에 있습니다.
그런 세계에서 어린양에게 속한 사람들의 정체성은 짐승이 인정해 주는 지위나 바벨론이 제공하는 번영에서 오지 않고, 어린양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서 옵니다. 신실함이 언제나 눈에 보이는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17장에서 신실한 사람들은 이미 피를 흘린 사람들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를 흘린 바벨론은 멸망할 권력이고, 그들이 증언한 예수님은 왕들의 왕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은 헛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눈앞의 힘만 보지 않고 그 힘의 결말을 보게 합니다. 여자가 보는 세계는 자신의 권력이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그녀가 보지 못하는 것이 보입니다. 짐승의 끝은 멸망이고, 왕들의 권위는 한정되어 있으며, 어린양이 그들을 이기실 것입니다.
그녀의 몸에는 여전히 자줏빛과 진홍빛 옷이 있고, 금과 보석과 진주가 빛나고 있습니다. 손에는 금잔이 들려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짐승이 그녀를 끝까지 지켜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녀의 화려한 옷을 벗기고, 그 몸을 파괴할 자들이 바로 그 짐승과 왕들이라는 것을.
여자는 아직 짐승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짐승은 이미 멸망으로 가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