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6–11장 · 봉인과 나팔의 심판

살아남았지만 돌이키지 않은 사람들

요한계시록 9장에는 기괴한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사람의 얼굴과 사자의 이를 가진 메뚜기, 전갈처럼 독침이 달린 꼬리, 입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을 내뿜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이 장을 끝까지 읽고 나면 더욱 두려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토록 끔찍한 재앙을 겪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재앙들로 죽임을 당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한 일에서 돌이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9:20).

우리는 자연스럽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괴물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 환상이 어떤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마침내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왜 돌이키지 않았을까요? 고난은 언제나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일까요?

앞 장의 네 나팔이 땅과 바다와 물과 빛을 흔들었다면, 이제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고통과 죽음을 가져옵니다. 처음에는 죽을 수 없을 만큼 괴롭히고, 다음에는 실제로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한 문장입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79장 본문 읽기 →

하늘에서 떨어져 있는 별과 열리는 구덩이

요한계시록 9:1–2 본문 →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별 하나가 하늘에서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끝없이 깊은 구덩이로 통하는 우물의 열쇠가 주어졌습니다.요한계시록 9:1 · 본디새김

요한이 본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이 아닙니다. 이미 땅에 떨어져 있는 별입니다.

8:10의 셋째 나팔에서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건을 보았지만, 여기서는 별이 이미 떨어져 있습니다. 본문은 언제, 왜 떨어졌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곧바로 사탄의 최초 타락에 관한 장면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별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별에게 열쇠가 주어지고, 그가 우물을 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20에서 별이 천사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여기서도 천사 같은 영적 존재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별이 열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열쇠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져 있는 별조차 구덩이의 문을 마음대로 열지 못합니다. 그 문은 열쇠가 주어졌을 때 비로소 열립니다.

구덩이에서 올라온 것은 먼저 연기였다

별이 열쇠로 여는 것은 「끝없이 깊은 구덩이로 통하는 우물」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심연은 악한 영적 세력과 연결되는 영역입니다. 11:7에서는 짐승이 그곳에서 올라오고, 20:1–3에서는 사탄이 그곳에 갇힙니다.

그가 끝없이 깊은 구덩이로 통하는 우물을 열자 큰 화로의 연기 같은 연기가 그 우물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 우물의 연기 때문에 해와 공기가 어두워졌습니다.요한계시록 9:2 · 본디새김

이 장면은 하나님이 시나이산에 나타나실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19:18에서 여호와야훼께서 불 가운데 내려오시자, 연기가 가마의 연기처럼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시나이산의 연기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동반하지만, 이곳의 연기는 심연의 문에서 올라와 곧 끔찍한 메뚜기 떼를 내보냅니다.

같은 연기라도 그 근원이 다릅니다.

연기는 해뿐 아니라 공기까지 어둡게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와 생명이 호흡하는 공간이 함께 흐려집니다.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메뚜기들이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떨어져 있는」(πίπτω)으로 옮긴 그리스어는 떨어지는 동작 자체가 아니라, 떨어진 결과로 그곳에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완료 분사입니다. 「끝없이 깊은 구덩이」(ἄβυσσος)의 원어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이라는 뜻의 낱말로, 단순한 지하 동굴이 아닙니다. 본문의 영상에서 이 심연은 잠겨 있는 공간이며, 열쇠가 있어야 접근할 수 있습니다.

풀을 먹지 않는 메뚜기

요한계시록 9:3–6 본문 →

그리고 그 연기에서 메뚜기들이 땅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에게 땅의 전갈이 가진 것과 같은 권위가 주어졌습니다.요한계시록 9:3 · 본디새김

메뚜기는 구약의 재앙 이야기에서 익숙한 존재입니다. 출애굽기 10:12–15에서 메뚜기 떼는 우박이 남겨 놓은 식물을 먹어 치워, 이집트 땅에서 푸른 것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엘 1장에서는 메뚜기들이 곡식과 포도나무를 파괴하고, 2장에서는 그들의 움직임이 돌격하는 군대에 비유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메뚜기는 이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결정적으로 뒤집습니다.

그리고 땅의 풀도 어떤 푸른 것도 어떤 나무도 해치지 말고, 이마에 하나님의 인장이 없는 사람들만 해치라는 말이 그들에게 전해졌습니다.요한계시록 9:4 · 본디새김

메뚜기는 본래 식물을 먹고 살아가는 곤충입니다. 앞 장에서 푸른 풀이 불타 버리는 재앙을 읽은 독자라면, 메뚜기들이 다시 식물을 공격하리라고 예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반대입니다.

메뚜기가 해칠 대상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이마에 하나님의 인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7장에서 네 천사는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과 바다를 해치지 말고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7:3). 이제 그 인장을 받은 사람들이 메뚜기 재앙으로부터 구별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장이 성도들을 모든 종류의 고난이나 죽음에서 면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당한 성도들을 보여 주었고(6:9), 앞으로도 성도들의 인내와 고난을 이야기합니다. 이마의 인장은 초자연적 방탄 장치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표식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고통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섯 달 동안 괴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는 괴로움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의 괴로움 같았습니다.요한계시록 9:5 · 본디새김

메뚜기는 사람을 괴롭힐 권한을 받았지만, 죽일 권한까지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 권한은 무한히 지속되지도 않습니다. 고통에는 끝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한 아래서 벌어지는 일이 더욱 끔찍합니다.

그날들에 사람들은 죽음을 찾아도 결코 찾지 못할 것이고, 죽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죽음이 그들에게서 달아납니다.요한계시록 9:6 · 본디새김

죽음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끈질기게 뒤쫓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죽음이 인간에게서 도망칩니다. 본문은 이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찾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고통이 너무나 심해 죽음마저 고통에서 벗어날 길처럼 보이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 길도 열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통에 관한 환상인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극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섯 달」을 메뚜기가 주로 활동하는 계절적 기간과 연결하는 오래된 해석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환상 속의 메뚜기는 자연적인 메뚜기가 아니므로, 이 기간이 실제 역사에서 정확히 5개월을 뜻하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메뚜기의 모습에 왜 이렇게 많은 비유가 사용될까?

요한계시록 9:7–11 본문 →

이제 요한은 메뚜기들의 모습을 하나씩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설명할수록 오히려 그 모습을 정확히 상상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들은 말 같고, 사람 같고, 여자 같고, 사자 같고, 전갈 같습니다. 관과 가슴막이를 지녔으며, 날개는 전쟁터로 달려가는 병거처럼 소리를 냅니다.

요한은 특정한 동물을 묘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동물과 인간의 특징을 결합하여 자연 세계의 어떤 존재로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위협을 그리고 있습니다.

정복자의 모습과 포식자의 모습

메뚜기들의 모습은 싸움에 나가려고 채비를 갖춘 말 같았습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금을 닮은 관 같은 것이 있었고, 그들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았습니다.요한계시록 9:7 · 본디새김

메뚜기는 군대처럼 나타납니다.

이 모습의 구약 배경은 요엘 2:4–5입니다. 그곳에서 메뚜기 떼의 모습은 말과 같고, 움직임은 병거 소리와 같습니다. 요엘은 메뚜기 재앙을 통해 다가오는 여호와야훼의 날을 선포했고, 요한은 이 영상을 가져와 더욱 기괴한 군대로 확장합니다.

요한은 금관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금을 닮은 관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 금관이라기보다 그들이 정복자나 승리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과 여자의 머리털을 특정 민족의 외모나 어떤 역사적 군대에 대응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본문은 그와 같은 식별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비유들은 위협의 성격을 누적해서 보여 줍니다. 말처럼 전쟁에 준비되어 있고, 사자처럼 물어뜯는 이가 있으며, 쇠 가슴막이처럼 단단합니다. 날개 소리는 수많은 병거가 달려드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을 해치는 무기는 앞이 아니라 뒤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갈 같은 꼬리와 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다섯 달 동안 해칠 그들의 권위가 그 꼬리에 있습니다.요한계시록 9:10 · 본디새김

거대한 군대처럼 묘사되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은 결국 꼬리의 독침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무서운 외양과 실제로 허락된 권한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메뚜기들에게는 왕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 위에 왕을 두고 있습니다. 그 왕은 끝없이 깊은 구덩이의 천사입니다. 그는 히브리 말로 아바돈이라는 이름을, 그리스 말로는 아폴뤼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요한계시록 9:11 · 본디새김

잠언 30:27은 메뚜기들에게 왕이 없지만 모두 떼를 지어 질서 있게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메뚜기들에게는 왕이 있습니다.

아바돈은 파멸, 멸망을 뜻하고, 아폴뤼온은 파괴하는 자, 멸망시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두 이름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존재의 파괴적인 성격을 두 언어로 나타냅니다.

이 왕이 사탄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 심연의 열쇠, 파괴자의 이름이 사탄의 활동과 연결된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면 본문은 그를 「끝없이 깊은 구덩이의 천사」라고 부를 뿐 사탄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9:1의 별과 같은 존재인지도 밝히지 않으므로, 사탄과 구별되는 심연의 천사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의 정체를 확정하는 것보다 그가 어떤 왕인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의 이름은 파괴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자신의 피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속하게 하셨습니다(5:9). 반면 메뚜기들의 왕은 파괴와 멸망을 자신의 이름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두 왕의 성격이 그들이 하는 일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런데 파괴자라는 이름을 지닌 왕의 군대조차 사람들을 마음대로 죽이지 못합니다.

파괴의 세력은 무섭지만 전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첫째 화가 지나갑니다. 그러나 다음 나팔에서는 그 한계 가운데 하나가 달라집니다. 사람을 죽이지 못하던 재앙 뒤에,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재앙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아바돈은 욥기 26:6과 잠언 15:11처럼 죽음의 세계나 멸망의 영역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제단에서 들려오는 명령과 유프라테스강

요한계시록 9:12–16 본문 →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하나님 앞에 있는 금 제단의 네 뿔에서 나오는 소리 하나를 들었습니다.요한계시록 9:13 · 본디새김

여섯째 나팔은 뜻밖에도 금 제단에서 시작됩니다.

이 제단은 바로 앞 장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던 장소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향로나 연기가 아니라 제단의 뿔에서 소리가 나옵니다. 제단의 뿔은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제사와 속죄의 예식에 속한 부분입니다(출애굽기 30:2, 레위기 4:7).

누가 말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 제단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이어지는 명령이 악한 세력 내부의 작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환상 안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소리가 나팔을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했습니다. 「큰 강 유프라테스에 묶여 있는 천사 넷을 풀어 주어라.」요한계시록 9:14 · 본디새김

유프라테스는 어떤 강이었을까?

유프라테스는 창세기 15:18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실 땅의 경계로 언급됩니다. 그러나 이 강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협했던 동쪽과 북동쪽의 강대한 제국들을 떠올리게 하는 표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아시리아와 바벨론은 정복과 포로 생활이라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요한이 살던 시대에도 유프라테스는 로마와 파르티아 세력권을 가르는 주요 경계 지역이었고, 파르티아는 강력한 기병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유프라테스에서 대규모 기병 군대가 나타난다는 환상은 당시 독자들에게 동쪽으로부터 닥치는 군사적 위협을 연상시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것을 실제 파르티아군의 침공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이 보여 주는 군대는 현실의 기병과는 전혀 다른 괴이한 모습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유프라테스는 독자들이 알고 있던 침략의 공포를 환상 속으로 불러오는 배경입니다.

날짜를 계산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자 그해 그달 그날 그 시각에 맞추어 채비되어 있던 천사 넷이 풀려났습니다.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9:15 · 본디새김

해, 달, 날, 시각이 차례로 등장해 날짜를 계산할 수 있는 암호처럼 보이지만, 문장의 핵심은 기간을 더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천사들이 아무 때나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한 시점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1년과 1개월과 1일과 1시간을 더하여 역사적 날짜를 계산하려는 시도는 문맥상 근거가 약합니다.

다섯째 나팔에서는 고통의 지속이 제한되었습니다.

여섯째 나팔에서는 심판의 개시가 정해져 있습니다.

두 나팔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파괴의 권세가 무제한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억이라는 숫자를 들었다

그리고 기병 군대의 수는 이억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수를 들었습니다.요한계시록 9:16 · 본디새김

이 숫자는 환상 속의 군대가 인간의 통상적인 군사 규모를 넘어서는 압도적인 세력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요한은 그들을 직접 세지 않고 수를 들었습니다. 7:4에서 인장을 받은 사람들의 수를 들었던 것처럼, 먼저 숫자를 듣고 이어서 군대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억은 군사 통계가 아니라 환상 속의 압도적인 공포를 나타내는 숫자로 느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이억」은 그리스어로 2만 곱하기 1만에 해당합니다. 9:15의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정관사가 붙은 시각을 중심으로 날과 달과 해가 연결되어, 정해진 한 시점을 강조합니다. 유프라테스의 천사 넷을 7장에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던 천사 넷과 반드시 동일한 존재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7장의 천사들은 땅의 네 모퉁이에 서 있었고, 여기서는 유프라테스에 묶여 있으며, 하는 일도 다릅니다.

입에서 죽음이 나오는 말들

요한계시록 9:17–19 본문 →

그리고 나는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앉은 이들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그들은 불꽃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가슴막이를 가지고 있었고, 말들의 머리는 사자의 머리 같았습니다. 그리고 말들의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옵니다.요한계시록 9:17 · 본디새김

보통 기병 군대라면 말을 탄 군인이 무기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군대에서는 기병이 어떤 무기를 들었는지 설명이 없고, 말 자체가 공격의 중심입니다. 실제 전쟁터를 그대로 그린 장면이라기보다, 전쟁의 공포를 괴이한 존재들로 나타내는 환상입니다.

불과 연기와 유황은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 심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이 말들의 입에서 나옵니다. 심판의 재료처럼 보이는 것들이 괴물의 몸에 결합되어, 생명을 파괴하는 무기로 나타납니다.

이 세 재앙으로, 곧 말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사람들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했습니다.요한계시록 9:18 · 본디새김

첫 번째 군대는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죽일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군대는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것도 인간의 삼분의 일입니다.

말들의 권위는 그 입과 그 꼬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꼬리는 뱀 같고 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해치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9:19 · 본디새김

첫 번째 군대의 무기가 전갈 같은 꼬리에 있었다면, 두 번째 군대는 입과 꼬리를 모두 무기로 씁니다. 사자의 머리, 뱀의 꼬리, 불을 뿜는 입이 하나의 말에 모여, 자연 세계의 어떤 존재도 온전히 닮지 않은 괴물이 됩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을 목격하거나 그 결과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왜 살아남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을까?

요한계시록 9:20–21 본문 →

9장의 마지막 두 절은 앞선 모든 환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재앙들로 죽임을 당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한 일에서 돌이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귀신들과, 보지도 듣지도 걷지도 못하는 금과 은과 놋과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들에게 절하기를 그만두지 않았습니다.요한계시록 9:20 · 본디새김

나팔 재앙에서 「회개」가 처음 등장합니다. 본문은 앞선 재앙들이 모두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재앙 이후의 반응을 「회개하지 않았다」는 말로 평가합니다. 요한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길을 바꾸었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섬겼다

이 구절은 구약의 우상 비판을 깊이 반영합니다. 시편 115:4–7에서 금과 은으로 만든 우상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합니다. 다니엘 5:23에서는 벨사살 왕이 금과 은과 놋과 쇠와 나무와 돌로 만든,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신들을 찬양한 일이 책망을 받습니다.

우상이 보지도 듣지도 걷지도 못한다는 말은 기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상이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우상은 신의 임재나 권능을 나타내는 형상으로 숭배되었고, 사람들은 그 형상을 통해 보호와 번영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그것이 인간이 만든 것을 신처럼 떠받드는 행위라고 비판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들이 만든 것 앞에 절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든 사람이 만든 것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물론 9:20은 귀신들과 우상들을 함께 언급합니다. 신명기 32:17이나 고린도전서 10:20처럼, 형상 자체에는 생명이 없지만 우상숭배는 하나님 아닌 영적 권세에 대한 충성과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재앙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가?

이 장은 사람들의 내면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았는지, 재앙을 다른 원인으로 이해했는지 알 수 없으며, 그런 심리적 이유를 임의로 채워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명백합니다.

심각한 고난을 경험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파라오를 떠올리게 합니다. 파라오는 재앙이 내릴 때마다 잠시 물러서는 듯했지만, 다시 마음을 완고하게 하며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출애굽기 8–10장).

그렇다고 하나님이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더 강한 고통을 주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섯째 나팔에서는 극심한 고통이, 여섯째 나팔에서는 대규모의 죽음이 있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강해지면 사람도 반드시 변화한다는 생각은 이 본문에서 지지를 얻지 못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충분히 무서운 사건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을 놓으려 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우상숭배에서 살인과 도둑질까지

그리고 그들은 살인에서도, 주술에서도, 음행에서도, 도둑질에서도 돌이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요한계시록 9:21 · 본디새김

이것은 잘못된 종교 의식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해로운 영적 행위에 참여하며, 성적 관계를 왜곡하고,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는 삶까지 언급됩니다. 예레미야 7:9–10에서도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거짓 맹세와 바알에게 분향하는 일이 함께 책망받습니다. 누구를 경배하는가와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기괴한 메뚜기와 말들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평범한 인간의 행동들이 등장합니다. 괴물들은 현실에서 보기 어렵지만, 마지막에 묘사되는 인간의 행동은 낯설지 않습니다. 독자는 괴물들의 모습에 놀라다가, 마침내 자신이 사는 세상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다니엘 5장의 금속과 나무와 돌의 나열,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는 표현은 9:20의 직접적인 배경이 됩니다. 9:21에서 주술을 뜻하는 표현은 문맥상 주술적 행위를 가리키며, 오늘날의 의학이나 정상적인 의약품 사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들

요한계시록 9:1–21 본문 →

9장의 두 군대는 모두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메뚜기들에게는 공격할 대상과 기간이, 유프라테스의 천사들에게는 풀려날 시점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왜 이런 파괴적인 세력의 활동을 허락하시는지, 개별적인 고통과 죽음이 왜 허락되었는지 이 장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이 모든 고통의 구체적인 이유를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심연의 왕은 최종적인 왕이 아닙니다. 이 책의 중심은 파괴자가 아니라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남겨진 문제는 사람들이 어떤 권세를 두려워하는가가 아니라, 누구에게 속하고 누구를 경배하는가입니다.

본문은 살아남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나머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기쁜 결말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커다란 위기를 겪으면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질 것이라 여기지만, 사람은 자신을 구할 수 없는 것이 드러나도 거기서 돌이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보지도 못합니다.

듣지도 못합니다.

걷지도 못합니다.

하늘에서 무서운 별이 나타나고, 심연에서 메뚜기들이 올라오고, 유프라테스에서 거대한 군대가 풀려났습니다. 말들의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 모든 격렬한 움직임 끝에 요한이 보여 주는 것은 움직이지 못하는 우상들입니다.

그리고 그 앞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상은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우상에게서 돌이켜 걸어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은 그 장면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