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23장 · 지혜의 시작
선행에도 필요한 분별
누군가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그 사람에게 먼저 묻습니다. 누구에게 주려는지 알고 있습니까?
집회서 12장은 선행을 권하는 말로 시작하지만, 곧 예상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립니다. 경건한 사람에게는 선을 베풀되 죄인은 돕지 말고, 그에게 돌아갈 빵까지 막으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죄인들을 미워하셨다고 말합니다.
선행과 자비를 강조하는 성경에서 왜 이런 가르침이 나오는 것일까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 전에 그가 도울 만한 사람인지 먼저 판단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집회서 12장이 두려워하는 것은 선행의 손해 자체가 아니라, 선행을 통해 악이 더 강해지는 상황입니다.
지혜자는 실제로 죄인에게 선을 베풀지 말라는 강한 명령을 내리며, 그 명령은 구약의 다른 가르침과 긴장을 이룹니다. 그 긴장을 없애 버리지 않고 읽어야 이 장이 가르치는 분별의 지혜와 그 한계를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행은 받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다
첫 구절은 선행을 시작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선을 베풀 때에는 누구에게 베푸는지 알아라. 그러면 네 선행에 감사가 따를 것이다.집회서 12:1 · 본디새김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누구에게’라는 말입니다. 선행은 베푸는 사람의 의도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 선행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도움을 감사하게 받을 수도 있고,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도 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나쁜 목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선을 베풀라는 뜻일까요?
경건한 이에게 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보답을 받을 것이다. 그에게서 받지 못하더라도 지극히 높은 이에게서 받을 것이다.집회서 12:2 · 본디새김
첫 구절에는 사람에게서 돌아오는 감사가 있었지만, 이제 보답의 주체가 달라집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갚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혜자는 그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선행이 헛되지 않다고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이께서 그 선행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가르침을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바꾸어 읽을 수도 없습니다. 지혜자는 실제로 보답을 선행의 동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보답을 인간 사이의 교환에만 가두지 않습니다.
악한 일을 계속하는 이에게는 좋은 것이 없고, 자선을 베풀지 않는 이에게도 좋은 것이 없다.집회서 12:3 · 본디새김
지혜자는 곧 죄인에게 도움을 주지 말라고 명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자선을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도 좋은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이 모두 비판받습니다.
따라서 이 장은 자선을 중단하라는 가르침으로 출발하지 않습니다.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그 선행이 누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분별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분별의 요구가 다음 단락에서 매우 엄격한 명령으로 발전합니다.
빵이 어떻게 사람을 억누르는 도구가 되는가
4절은 앞의 신중한 권고보다 훨씬 강경합니다.
경건한 이에게 주고, 죄인을 돕지 마라.집회서 12:4 · 본디새김
여기서는 사람을 경건한 이와 죄인으로 구분하고, 선행의 대상을 제한합니다. 5절은 같은 명령을 반복하면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낮은 이에게 선을 베풀고, 경건하지 않은 이에게는 주지 마라. 그가 그 빵으로 너를 억누르지 못하도록 그에게 돌아갈 빵을 막고 그에게 주지 마라. 네가 그에게 베푸는 모든 선행에 대해 두 배의 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12:5 · 본디새김
빵은 원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준다면 그것은 자비의 행동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빵이 전혀 다른 기능을 합니다. 도움받은 사람이 그것을 이용해 도움을 준 사람을 억누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도움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 정도가 아닙니다. 도움으로 얻은 힘을 상대방을 제압하는 데 사용하는 상황입니다.
첫째, 본문은 가난한 사람을 돕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5절의 첫 문장은 낮은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거나 사회적으로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경건하지 않은 사람에 포함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그렇다고 이 구절을 단순히 범죄에 직접 사용될 물건을 주지 말라는 정도로 축소할 수도 없습니다. 지혜자는 분명히 빵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음식까지 언급하면서 악한 사람에 대한 지원을 제한합니다.
실상 지극히 높은 이도 죄인들을 미워했고, 경건하지 않은 이들에게 벌로 갚을 것이다.집회서 12:6 · 본디새김
앞에서는 선행에 대한 보답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악행에 대한 벌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합니다. 두 구절 모두 하나님을 ‘지극히 높은 이’라고 부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신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죄인들을 미워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단순히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언제나 사랑하신다는 일반적인 문장으로 바꾸면 본문의 강한 어조가 사라집니다.
구약에는 이와 비슷한 표현도 있습니다. 시편 5:5–6은 하나님이 악을 행하는 자들을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하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반대가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한 심판으로 표현되는 것은 집회서에만 나타나는 특징이 아닙니다.
그런데 집회서 12장의 특별한 점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의 자선 행위에 대한 제한과 연결한다는 데 있습니다.
출애굽기 23:4–5는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었을 때 돌려주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졌을 때에도 도와주라고 명령합니다. 잠언 25:21은 원수가 배고프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면 마실 것을 주라고 가르칩니다.
두 가르침을 완전히 같은 뜻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각각이 주목하는 위험은 다릅니다. 집회서는 자비가 악행을 도와주는 결과를 염려합니다. 잠언은 원수라는 이유로 그의 굶주림을 외면하는 태도를 넘어서라고 가르칩니다.
집회서 자체에서도 4:1–6은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거나 굶주린 사람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강하게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12장의 엄격한 제한이 이 책에 나타나는 자선의 가르침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장을 최대한 호의적으로 읽으면, 지혜자는 자선을 악용하는 사람 때문에 선행이 오히려 해를 낳는 상황을 경고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뒤따르는 원수의 묘사도 그러한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하지만 4–7절의 문장은 실제로 그보다 넓게 죄인 일반에 대한 지원을 금합니다. 이것이 오직 악의적인 가해자에게만 적용된다는 명시적인 제한은 없습니다.
따라서 악을 돕지 말라는 경고는 본문에서 분명히 확인되지만, 그것을 모든 죄인에게 자비를 거부해야 한다는 보편적 원칙으로 받아들일지는 구약의 다른 가르침과 함께 판단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44–45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집회서 12장의 제한적인 자선 원칙을 그대로 반복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원수에 대한 사랑을 더욱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두 본문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각각의 메시지를 정확히 읽는 길입니다.
7절은 다시 한번 선한 사람에게 주고 죄인을 돕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 단락을 닫습니다.
이제 그는 왜 그런 경계가 필요한지를 인간관계의 경험 속에서 보여 줍니다.
어려운 날에 드러나는 관계의 진실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친구가 판가름 나지 않고, 나쁜 일이 있을 때에는 원수가 숨지 못할 것이다.집회서 12:8 · 본디새김
형편이 좋을 때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같은 이유로 곁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진심으로 친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하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가까이합니다. 형편이 좋을 때는 두 부류가 비슷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찾아오면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그의 원수들이 슬퍼하고, 그에게 나쁜 일이 있으면 친구마저 떨어져 나갈 것이다.집회서 12:9 · 본디새김
원수는 상대방이 잘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성공이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더라도 그것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지혜자는 모든 친구가 어려움이 닥치면 반드시 떠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집회서 6:14–16에서는 오히려 신실한 친구를 귀중한 보물에 비유합니다. 6:8–10에서는 형편이 좋을 때만 함께하는 친구가 어려운 날에 떠난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친구와 원수의 진실은 그들이 자신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자신의 형편이 바뀌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모든 관계가 단순히 형편이 바뀌면 드러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의를 적극적으로 감춥니다. 그래서 다음 단락에서는 겉으로는 순종적이고 겸손하게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목적을 가진 원수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친구가 판가름 나지 않는다’는 표현에는 원문상의 쟁점이 있습니다. 그리스어 사본들이 전하는 동사 에크디케테세타이(ἐκδικέω)는 일반적으로 ‘벌을 받다’, ‘정당함이 입증되다’와 관련된 뜻을 가집니다. 이를 그대로 읽으면 좋은 형편에서 친구가 보복받거나 정당함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됩니다. 반면 다른 고대 전승에는 ‘알려지다’에 해당하는 읽기가 나타납니다. 이 읽기는 본문의 두 번째 행인 ‘원수가 숨지 못한다’와 병렬을 이루고, 9절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처럼 형편이 좋을 때에는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을 근거가 충분합니다. 다만 이것은 모든 그리스어 사본의 동사를 그대로 옮긴 결과는 아닙니다.
닦아 낸 거울과 녹슨 구리 — 겸손한 태도가 진심을 증명하는가
네 원수를 결코 믿지 마라. 구리가 녹슬듯 그의 악의도 그러하기 때문이다.집회서 12:10 · 본디새김
지혜자는 악의를 구리에 생기는 부식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구리는 철처럼 붉은 녹이 스는 금속이라기보다 표면이 산화되어 변색될 수 있는 구리나 청동을 가리킵니다. 고대에는 청동을 매끄럽게 갈고 닦아 거울로 사용했습니다.
그가 낮아져 몸을 굽히고 다니더라도, 마음을 기울이고 그를 경계해라. 너는 그를 대할 때 거울을 닦아 낸 사람과 같을 것이며, 완전히 녹슬지는 않았음을 알 것이다.집회서 12:11 · 본디새김
몸을 굽히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 태도만으로 상대방의 마음이 달라졌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지혜자는 거울을 닦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살펴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 번 원수였던 사람은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변화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변화가 실제로 일어났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 신뢰하는 일의 위험입니다.
12절에서는 이 위험이 매우 구체적인 공간으로 옮겨집니다.
그를 네 곁에 세우지 마라. 그가 너를 쓰러뜨리고 네 자리에 설지 모른다. 그를 네 오른쪽에 앉히지 마라. 그가 네 앉을 자리를 노릴지 모른다. 그러면 너는 마지막에야 내 말을 깨닫고, 내 말에 마음이 찔릴 것이다.집회서 12:12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오른쪽 자리는 명예와 가까운 관계를 나타낼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시편 110:1에서도 오른쪽에 앉는 모습은 특별한 지위와 권위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12절은 단순히 위험한 사람과 물리적인 거리를 유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권한과 지위에 접근할 수 있는 특별한 신뢰의 자리를 함부로 내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지혜자는 친절함과 신뢰를 구별합니다.
누군가를 친절하게 대하는 것과 그에게 자신의 중요한 일을 맡기는 것은 같은 행동이 아닙니다. 그를 용서하는 것과 아무런 확인 없이 이전과 동일한 권한을 되돌려 주는 것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12절 끝의 ‘마음이 찔릴 것이다’는 바로 그 뒤늦은 깨달음을 나타냅니다. 자신이 믿었던 사람에게 밀려난 다음에야, 그가 왜 그 자리를 원했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거울 비유에는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스어 마지막 문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완전히 부식되지 않았다는 뜻이 되지만, 그것이 거울의 상태를 가리키는지, 원수의 악의가 아직 남아 있는 상태를 비유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거울을 계속 닦아야 제대로 볼 수 있듯 원수를 계속 경계해야 한다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겉을 닦아 낸 듯해도 그의 악한 성향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읽기입니다. 두 읽기 모두 경계의 필요성을 보여 주지만, 비유의 세부 대응을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뱀을 다루는 사람이 물린다면
이제 지혜자는 인간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전혀 다른 장면을 제시합니다.
뱀에 물린 뱀 부리는 이를 누가 불쌍히 여기겠느냐? 들짐승에게 다가가는 모든 이를 누가 불쌍히 여기겠느냐?집회서 12:13 · 본디새김
뱀 부리는 사람은 뱀을 다루는 기술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뱀의 행동을 잘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뱀을 잘 다룬다는 것이 물릴 가능성 자체를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들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생의 위험한 동물에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 동물이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죄인에게 다가가 그의 죄에 함께 뒤섞이는 이도 마찬가지다.집회서 12:14 · 본디새김
1–7절에서는 죄인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14절에서는 죄인에게 다가가는 것뿐 아니라 그의 죄에 ‘함께 뒤섞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단순히 죄인과 인사를 나누거나 그를 도와주는 행동보다 깊은 연루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위험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 자체가 아닙니다. 악한 행동에 참여하면서 그 결과로부터 자신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누가 불쌍히 여기겠느냐’라는 표현은 위험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의 판단이 어리석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수사적 질문입니다. 실제로 위험한 사람에게 속아 피해를 입은 사람은 동정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보편적 원칙을 선언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한동안 너와 함께 머물겠지만, 네가 비틀거리면 결코 버티며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12:15 · 본디새김
악한 사람도 곁에 머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오랜 친구처럼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곁에 머문다는 사실만으로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친구의 짐을 함께 지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동안만 가까이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음 단락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단순히 떠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넘어지도록 적극적으로 움직입니다.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 손뼉을 치기까지
이 장의 마지막 세 절은 마치 하나의 짧은 이야기처럼 전개됩니다.
원수는 입술로는 달콤하게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너를 구덩이에 처넣을 궁리를 할 것이다. 원수는 눈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기회를 잡으면 피로도 배부르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12:16 · 본디새김
눈물은 보통 슬픔이나 동정의 표시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숨기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원수는 단순히 자신의 악의를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신뢰의 근거로 삼는 것들을 이용합니다. 친절한 말과 겸손한 몸짓, 눈물과 도움을 약속하는 행동을 이용해 상대방이 자신을 믿도록 만듭니다.
17절에서는 마침내 위기가 찾아옵니다.
나쁜 일이 네게 닥치면, 그가 너보다 먼저 거기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도와주는 체하면서 네 발꿈치를 걸어 넘어뜨릴 것이다.집회서 12:17 · 본디새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누군가 자신보다 먼저 달려와 있다면, 우리는 그가 걱정해서 찾아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목적은 다릅니다.
도움처럼 보이는 행동이 실제로는 공격입니다.
구덩이에 빠뜨릴 궁리를 하던 사람이 이제 넘어뜨리기 위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그는 상대방이 무너질 기회를 단순히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위기를 이용해 몰락을 완성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18절에서는 모든 가면이 벗겨집니다.
그는 머리를 흔들고 손뼉을 치며, 많은 말을 수군거리고 얼굴빛을 바꿀 것이다.집회서 12:18 · 본디새김
여기서 손뼉을 치는 행동은 칭찬이나 축하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몰락을 보고 조롱하거나 기뻐하는 몸짓입니다. 많은 말을 수군거린다는 표현은 그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화젯거리로 삼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집회서 12장은 원수의 정체를 그가 처음 다가올 때가 아니라, 상대방이 무너진 뒤에 드러나는 얼굴로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애가 2:15에서도 예루살렘의 몰락을 본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조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집회서 역시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사람을 이러한 몸짓으로 묘사합니다.
마지막 장면에 남겨진 두 사람
집회서 12장은 처음에 선을 베푸는 사람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합니다. 지혜자는 그에게 자신이 베푸는 것이 누구에게 어떤 힘을 주는지 살펴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위험을 없앨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면서도 악을 분별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 가치가 있는지 인간이 최종적으로 판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또 다른 위험이 생깁니다. 가난하거나 연약한 사람을 경건하지 않다고 잘못 판단할 수 있고, 도움을 받는 사람이 언젠가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자비를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는 악에 힘을 보태지 않는 책임입니다. 다른 하나는 타인에 대한 불신을 이유로 마땅히 베풀어야 할 자비를 거두지 않는 책임입니다. 이 두 책임은 언제나 쉽게 조화를 이루지는 않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선행에도 분별이 필요합니다.
집회서 12장의 마지막에는 한 사람이 쓰러져 있고, 그를 도우러 온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손뼉을 치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눈물을 흘렸지만, 이제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며 얼굴빛을 바꿉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