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24장

이 장의 자리 · 24–43장 · 지혜의 찬양

한곳에 뿌리내린 지혜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하늘의 가장 높은 곳과 바다의 가장 깊은 곳까지 살펴본 존재가 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과 민족 가운데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 가지를 찾지 못했습니다.

쉴 곳입니다.

이 질문을 던지는 존재는 지혜입니다.

집회서 24장에서 지혜는 하늘과 땅 어디에도 이를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지는 스스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만물의 창조자가 지혜에게 거처를 정해 주십니다.

집회서 24장은 지혜가 어디에서 왔는지뿐 아니라, 어디에 머물며 어떻게 세상에 흘러가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앞 장의 마지막에서 교사는 주의 계명에 마음을 두는 것이 가장 달콤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바로 그 달콤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왜 하나님의 계명이 인간에게 그토록 귀한 것인지를 지혜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824장 본문 읽기 →

지혜가 스스로를 찬양하는 이유

집회서 24:1–2 본문 →

지혜는 자신을 찬양하고, 자기 백성 가운데서 자랑할 것이다.집회서 24:1 · 본디새김

성경에서 자신을 찬양하는 모습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교만을 경계하는 지혜문학에서 지혜 자신이 스스로를 자랑한다니, 모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장의 자기 찬양은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자랑과 다릅니다.

지혜가 자신을 높이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능력과 영광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지혜는 곧바로 자신의 출처가 지극히 높은 이에게 있다고 선언하고, 자신이 머무는 자리도 창조자의 명령으로 정해졌다고 밝힙니다.

2절에서는 무대가 더욱 커집니다.

지극히 높은 이의 회중에서 자기 입을 열고, 그의 군대 앞에서 자랑할 것이다.집회서 24:2 · 본디새김

‘지극히 높은 이의 회중’과 ‘그의 군대’는 하나님의 위엄 있는 천상 회중을 떠올리게 합니다. 문맥상 지혜는 단순히 인간의 모임에서 연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1절에서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회중과 땅의 백성이 한 장면에 놓입니다.

지혜의 인격적인 발언은 하나님의 지혜가 어떻게 세상에 나타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지 드러내는 시적인 방식입니다. 잠언 8–9장에서도 지혜가 길거리와 성문에서 사람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 지혜가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늘과 심연을 거닐던 지혜가 쉴 곳을 찾다

집회서 24:3–9 본문 →

지극히 높은 이의 입에서 나온 지혜

「나는 지극히 높은 이의 입에서 나왔고, 안개처럼 땅을 덮었다.」집회서 24:3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성경의 창조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시편 33:6도 여호와야훼의 말씀으로 하늘이 만들어졌다고 노래합니다.

집회서의 표현을 이 본문들의 직접적인 인용이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창조와 질서를 이루신다는 공통된 사상이 그 바탕에 있습니다.

지혜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지혜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기술이나 처세술만이 아니라, 창조주의 뜻과 질서에서 비롯된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곧이어 등장하는 모습은 안개입니다.

안개는 정해진 한곳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땅을 넓게 덮고, 멀리까지 퍼집니다.

지혜는 높은 곳에 장막을 치고, 구름 기둥 안에 왕좌를 두며, 하늘의 둘레를 돌고, 깊은 물의 밑바닥을 거닙니다. 여기서 하늘과 깊은 물은 우주적 공간의 양극을 이룹니다. 인간에게 가장 높은 곳과 가장 깊은 곳까지 지혜의 활동이 미친다는 뜻입니다.

「나는 높은 곳에 장막을 쳤고, 내 왕좌는 구름 기둥 안에 있었다.」집회서 24:4 · 본디새김

왕좌는 다스리는 권위를 나타내고, 구름 기둥은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굽기 13:21–22).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드러냅니다.

「바다의 물결과 온 땅에서, 모든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나는 내 몫을 얻었다.」집회서 24:6 · 본디새김

이 말은 뒤에서 지혜가 이스라엘에 거처를 정한다는 사실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집회서의 지혜는 처음부터 이스라엘만 알고 이스라엘 밖에서는 활동하지 않는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처럼 넓은 세계를 거닐던 지혜가 특정한 백성 가운데 머물게 되었을까요?

지혜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거처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는 쉴 곳을 찾았다. 나는 누구의 유산 안에서 머물 것인가?」집회서 24:7 · 본디새김

모든 곳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과,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고 머문다는 것은 다릅니다.

지혜는 세상 어디에서나 활동할 수 있지만, 자신이 지속적으로 머물며 열매를 맺을 자리를 찾습니다.

그때 창조자가 말씀하십니다.

「그때 만물의 창조자가 내게 명했고, 나를 창조한 이가 내 장막을 자리 잡게 하고 말했다. 『야곱 안에 장막을 쳐라. 이스라엘 안에서 유산으로 주어져라.』」집회서 24:8 · 본디새김

거처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창조되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지혜

「시대가 시작되기 전, 맨 처음부터 그는 나를 창조했고, 나는 영원히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24:9 · 본디새김

지혜는 자신이 창조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자신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시대가 시작되기 전’이라는 표현은 인간 역사 이전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지혜가 특정한 문화나 시대의 산물보다 근원적인 차원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집회서 1:4와도 통합니다. 그곳에서도 지혜는 모든 것보다 앞서 창조된 것으로 묘사됩니다.

다만 이러한 시적 의인화를 근거로 하나님 안의 본질이나 신적 존재의 생성 과정을 직접 설명한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창조주와 지혜의 관계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면서, 지혜의 권위와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이제 지혜는 그 자리에 실제로 들어가 거주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유산으로 주어져라’라는 표현에는 문법적 여지가 있습니다. 지혜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유산이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지혜가 이스라엘 안에서 자기 몫을 상속받아 자리 잡는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 전체에서는 두 이미지가 서로 이어집니다. 지혜는 이스라엘 가운데 자리를 얻고, 이스라엘은 그 지혜를 자신에게 주어진 유산으로 받습니다. 신명기 7:7–8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택의 근거는 이스라엘의 우월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에 있습니다. 잠언 8:22–31에서는 지혜가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요한복음 1:1–14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 거하심이 연결됩니다. 특히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표현은 집회서 24장의 장막 이미지와 주제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집회서 24장을 직접 인용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집회서의 지혜가 본래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가리키는 인물로 설정되었다고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집회서의 본래 문맥에서 지혜는 창조주에게서 비롯되어 이스라엘에 머물고, 모세의 율법과 연결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에 관한 표현은 이러한 지혜 전통과 연결해 읽을 수 있지만, 각 본문이 말하는 고유한 내용은 구별해야 합니다.

장막을 친 지혜가 나무로 자라나다

집회서 24:10–17 본문 →

거룩한 장막에서 사랑받는 도시로

「거룩한 장막에서 나는 그의 앞에서 섬겼고, 그렇게 시온에 굳게 자리 잡았다.」집회서 24:10 · 본디새김

앞에서는 구름 기둥 안에 왕좌를 둔 존재였습니다. 이제는 거룩한 장막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섬기는 존재입니다.

이 장면에는 출애굽기의 성막 전통이 배경으로 놓여 있습니다. 출애굽기 40:34–38에서는 구름이 회막을 덮고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찹니다. 집회서에서 지혜가 장막에 자리 잡는 모습은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전통과 맞닿아 있습니다.

「사랑받는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는 나를 쉬게 했고, 예루살렘에 내 권위가 있었다.」집회서 24:11 · 본디새김

여기서 다시 7절의 질문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지혜는 쉴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11절에서 마침내 그 쉼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지혜의 쉼은 활동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절에서 지혜는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립니다.

「나는 영광을 얻은 백성 가운데, 주의 몫, 곧 그의 유산 안에 뿌리를 내렸다.」집회서 24:12 · 본디새김

앞에서 지혜는 안개처럼 땅을 덮고 하늘과 심연을 자유롭게 돌아다녔습니다. 이제 그 지혜가 움직이지 않는 나무처럼 한곳에 뿌리를 내립니다.

지혜가 이스라엘 가운데 머문다는 것은 온 세상에 미치는 지혜가 좁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지혜를 구체적인 삶 속에서 만나고 배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뜻입니다.

레바논에서 여리고까지, 온 땅의 아름다움을 입은 지혜

이제 지혜는 자신을 여러 종류의 나무와 꽃에 비유합니다.

「나는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이 자랐고, 헤르몬 산들의 사이프러스나무처럼 높이 자랐다.」집회서 24:13 · 본디새김

백향목은 크고 오래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으며, 고대 근동에서 귀한 건축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열왕기상 5장에서도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레바논의 백향목을 확보합니다. 따라서 백향목은 단순히 큰 나무라는 의미를 넘어 장엄함과 귀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14절에서는 풍경이 달라집니다.

「나는 바닷가의 종려나무처럼 높이 자랐고, 여리고의 장미들처럼 자랐다. 평야의 아름다운 올리브나무와 같았고, 플라타너스나무처럼 높이 자랐다.」집회서 24:14 · 본디새김

레바논과 헤르몬의 산지에서 사해 부근과 여리고의 낮은 지역으로 시선이 이동합니다. 이어서 평야의 올리브나무와 넓게 자라는 플라타너스나무가 등장합니다.

백향목은 높이와 장엄함을, 종려나무는 성장과 풍성함을, 올리브나무는 유익한 열매를, 장미와 플라타너스나무는 아름다움과 풍요를 떠올리게 합니다. 지혜는 한 가지 나무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러 나무의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빌려 자신을 드러냅니다.

지혜가 뿌리를 내린 땅은 메마른 땅이 아니라 다양한 생명이 자라는 정원처럼 변합니다.

정원에서 성소로 번져 가는 향기

15절에서는 시각적인 이미지가 후각적인 이미지로 바뀝니다.

「나는 계피와 낙타가시나무처럼 향품의 냄새를 풍겼고, 좋은 몰약처럼 향기를 퍼뜨렸다. 헬브나 향과 셰헬렛 향과 나타프 향처럼, 장막 안의 유향 연기처럼 향기를 퍼뜨렸다.」집회서 24:15 · 본디새김

향기는 나무가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지만, 그 주변으로 퍼져 나갑니다. 지혜가 한곳에 뿌리를 내렸으면서도 그 영향력이 그곳에만 갇혀 있지 않다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헬브나 향과 셰헬렛 향과 나타프 향은 출애굽기 30:34에서 거룩한 향을 만드는 재료로 언급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단순히 좋은 향수나 아름다운 정원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피어오르는 향을 떠올리게 합니다.

정원의 아름다움과 성소의 거룩함이 한 장면에 겹쳐집니다.

「나는 포도나무처럼 아름다움을 싹틔웠고, 내 꽃들은 영광과 풍성함의 열매다.」집회서 24:17 · 본디새김

이 변화는 다음 단락을 위한 준비입니다. 지혜가 열매를 맺는 이유는 그 열매를 사람들이 먹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혜는 자신만을 위해 아름답게 자라는 나무로 남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먹이는 나무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일부 그리스어 사본에는 ‘바닷가’ 대신 엔게디라는 지명이 등장합니다. 엔게디는 사해 서쪽 기슭의 오아시스 지역으로, 여리고와 함께 종려나무와 식물이 자라는 풍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먹어도 다시 배고프고, 마셔도 다시 목마른 까닭

집회서 24:19–22 본문 →

지혜는 사람을 자신에게 초대한다

「나를 갈망하는 이들아, 내게 다가와라. 내 열매로 배를 채워라.」집회서 24:19 · 본디새김

앞에서는 인간이 지혜를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지혜의 높이와 아름다움, 향기를 감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지혜는 바라보기만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됩니다.

잠언 9:1–6에서도 지혜는 자기 집을 세우고 식탁을 차린 뒤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두 본문에서 지혜는 사람들이 어렵게 찾아가 허락을 구해야 하는 비밀스러운 지식이 아닙니다. 스스로 사람들을 부르고 먹을 것을 내어 주는 존재입니다.

20절에서는 그 열매의 맛을 설명합니다.

「나에 대한 기억은 꿀보다 달고, 내 유산은 벌집의 꿀보다 달기 때문이다.」집회서 24:20 · 본디새김

지혜를 누리는 것은 한 번 어떤 지식을 배우고 잊어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배운 지혜를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하여 다시 떠올리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또한 ‘내 유산’이라는 표현은 앞의 8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에게 이스라엘 안에서 유산으로 주어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제 그 유산은 사람들에게 꿀보다 달콤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 지혜를 삶 속에서 배우고 실천할 때, 사람은 그 유산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아 갑니다.

만족하면서도 더 갈망하는 역설

「나를 먹는 이들은 여전히 배고플 것이고, 나를 마시는 이들은 여전히 목마를 것이다.」집회서 24:21 · 본디새김

지혜의 열매가 충분하지 않다는 뜻일까요?

문맥은 정반대의 의미를 가리킵니다.

오히려 지혜를 경험한 사람이 그 가치를 알게 되어 더욱 깊이 갈망하게 된다는 역설입니다.

어떤 책을 읽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면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진리를 이해하면 그것이 자신이 알던 것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배움이 깊어질수록 모르는 것이 더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 장의 23:17과 의미 있는 대조를 이룹니다.

거기서는 음행하는 사람에게 모든 빵이 달콤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욕망을 따라 계속 먹으려 하지만, 그 욕망이 스스로 멈추지 못하는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지혜를 먹는 사람이 계속 배고파합니다.

앞의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가리지 못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반면 지혜를 갈망하는 사람은 좋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더 깊이 알고 싶어 합니다.

지혜가 주는 만족은 더 이상 배우고 싶지 않게 만드는 포만감이 아니라, 배움 자체를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만족입니다.

지혜에 순종한다는 것

「내게 순종하는 이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고, 내 안에서 일하는 이들은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24:22 · 본디새김

여기서는 지혜의 열매를 먹는다는 비유가 순종과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지혜를 배우는 사람은 단순히 지혜를 소유하거나 지혜로운 말을 기억하는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지혜 안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22절을 지혜롭게 살기만 하면 평생 어떤 죄도 범하지 않는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보증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지혜에 순종하여 행동하는 삶이 죄의 길과 반대되는 방향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우주적인 기원을 가지고, 이스라엘 안에 뿌리내리며, 사람을 살리는 열매를 맺는 지혜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지혜의 정체가 드러나다 — 모세의 율법

집회서 24:23 본문 →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언약의 책, 모세가 야곱의 회중들에게 유산으로 명한 율법이다.집회서 24:23 · 본디새김

‘이 모든 것은’이라는 표현이 앞의 긴 찬양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우주적인 기원과 이스라엘에서의 거처, 성소에서의 봉사와 생명을 주는 열매가 이제 하나님의 언약의 책과 연결됩니다.

신명기의 한 문장이 열어 주는 의미

23절의 둘째 부분은 신명기 33:4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표현입니다.

신명기 33:4의 그리스어 본문에도 모세가 우리에게 명한 율법과 야곱 회중의 유산이라는 표현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한 주제적 유사성이 아니라 문구가 직접 대응하는 인용입니다.

신명기 33장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장입니다. 그 자리에서 율법은 백성에게 주어진 유산으로 언급됩니다. 유산은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한 세대가 사라져도 다음 세대에 남아 있어야 할 귀한 몫입니다.

모세오경에는 실제로 지켜야 할 명령과 법규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창조 이야기,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 이집트에서의 구원, 광야에서의 인도하심,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집회서가 지혜를 모세의 율법과 연결한다고 해서 지혜를 단순한 규칙의 암기로 축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세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가르침 전체를 창조주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룩서 3:9–4:4에도 하나님의 지혜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과 연결하는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특히 바룩서 4:1에서는 지혜를 하나님의 계명의 책과 연결합니다. 두 본문은 지혜를 순전히 인간이 발견하는 철학적 지식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이 백성에게 주시는 가르침과 연결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이 왜 온 세상의 지혜와 연결되는가

여기에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긴장이 있습니다.

앞에서 지혜는 모든 백성과 민족 가운데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24:6). 그런데 이제 그 지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과 연결됩니다.

이 긴장을 이해하는 데 신명기 4:6–8이 도움이 됩니다. 거기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모습을 보고 민족들이 그들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자랑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질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온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가르침을 주셔서 그 지혜를 특별히 배우고 살아 낼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율법은 추상적인 지혜를 대신하는 별개의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언약의 백성에게 삶의 가르침으로 주어진 자리입니다.

이제 교사는 그 율법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강물에 비유합니다.

에덴의 강들이 다시 흐르는 곳

집회서 24:25–29 본문 →

다섯 강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

율법은 피숀강처럼 지혜를 가득 채우고, 햇곡식 철의 티그리스강처럼 채운다.집회서 24:25 · 본디새김
율법은 유프라테스강처럼 깨달음을 가득 채우고, 추수철의 요단강처럼 채운다.집회서 24:26 · 본디새김
율법은 빛처럼 교훈을 드러내고, 포도 수확철의 기혼강처럼 드러낸다.집회서 24:27 · 본디새김

지혜는 앞에서 나무가 되었고, 열매가 되었으며,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양식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강물이 됩니다.

피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기혼은 창세기 2:10–14에 등장하는 에덴의 네 강입니다. 그런데 집회서는 이 네 강 사이에 요단강을 함께 놓습니다.

창세기의 에덴과 이스라엘의 땅이 한 풍경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요단강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건넜던 강입니다(여호수아 3–4장). 창조 세계의 풍요를 상징하는 에덴의 강들과 이스라엘의 역사에 깊이 연결된 요단강이 함께 등장하여, 율법이 창조주의 지혜와 이스라엘의 삶을 연결한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보여 줍니다.

햇곡식 철과 추수철, 포도 수확철이 등장합니다. 강물은 한 해 동안 언제나 같은 수량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계절에 따라 수위와 흐름이 달라집니다. 교사는 물이 풍성하게 흐르는 계절의 모습을 불러와 율법의 지혜가 얼마나 충만한지를 보여 줍니다.

물은 땅을 적시고 식물을 자라게 합니다. 율법은 사람의 마음과 삶을 가르치고 자라게 합니다. 이렇게 앞에서 등장한 나무와 열매의 이미지가 강물의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율법을 받았다고 지혜를 다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교사는 갑자기 인간 지식의 한계를 말합니다.

첫 사람도 그것을 끝까지 알지 못했고, 마지막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헤아리지 못했다.집회서 24:28 · 본디새김

여기서 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은 인간 역사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포괄하는 표현입니다. 어느 시대의 인간도 지혜 전체를 완전히 파악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지혜의 생각은 바다보다 더 풍성해졌고, 지혜의 뜻은 크나큰 심연보다 더 풍성해졌기 때문이다.집회서 24:29 · 본디새김

특히 5절을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지혜는 깊은 물의 밑바닥을 거닐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지혜가 심연을 걸었습니다. 이제는 지혜의 뜻 자체가 심연보다 더 풍성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인간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혜 전체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율법을 받은 사람도 계속 배워야 합니다.

그렇기에 21절에서 지혜를 먹는 사람이 여전히 배고프고, 마시는 사람이 여전히 목마르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지혜의 부족이 아니라 풍성함에서 비롯되는 갈망입니다.

작은 수로가 어떻게 바다가 되었는가

집회서 24:30–34 본문 →

이제 지혜가 아니라 스승이 말한다

나도 강에서 나온 수로처럼, 물을 대는 도랑처럼 정원으로 나아갔다.집회서 24:30 · 본디새김

30절의 ‘나’는 앞에서 자신을 찬양하던 지혜가 아니라, 지혜를 배우고 가르치는 스승 자신의 목소리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지혜의 근원이 아닙니다. 이미 흐르고 있는 강에서 물을 받아 다른 곳으로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지혜 찬양을 실제 교육의 현장으로 옮겨 놓습니다.

자기 정원에 물을 주려던 사람

나는 말했다. 「내 뜰에 물을 주고, 내 채소밭을 흠뻑 적시겠다.」 그런데 보아라, 내 수로가 강이 되었고, 내 강이 바다가 되었다.집회서 24:31 · 본디새김

그의 관심은 자신에게 맡겨진 정원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30절에서 수로의 물은 이미 존재하는 강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스승이 물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을 정원에 흘려보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물길이 자신이 처음 생각했던 범위를 훨씬 넘어섰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배우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게 됩니다. 그 설명이 다시 다른 사람의 배움에 도움이 되고, 그 지식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확장은 반드시 처음부터 계획했던 결과가 아닐 수 있습니다.

새벽빛과 예언처럼 다음 세대로

또 나는 교훈을 새벽처럼 밝히고, 그것들을 멀리까지 드러낼 것이다.집회서 24:32 · 본디새김

물의 이미지가 이번에는 빛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새벽빛은 어둠 속에서 시작하여 점차 넓은 곳을 밝힙니다. 스승은 자신이 배운 교훈을 그렇게 전하고 싶어 합니다.

또 나는 가르침을 예언처럼 쏟아 내고, 그것을 영원한 세대들을 위해 남길 것이다.집회서 24:33 · 본디새김

그러나 ‘예언처럼’이라는 비교는 가볍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단순한 개인적 경험담이나 일시적인 충고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앞에서 스승은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으며, 그 지혜가 언약의 책과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지혜를 전하는 일에 참여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의 모든 판단과 문장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와 동일한 권위를 가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자신의 가르침을 ‘예언처럼’ 전하겠다고 말합니다. 비교의 표현은 존중해야 합니다.

보아라, 나는 나 자신만을 위해 수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는 모든 이를 위해 수고했다.집회서 24:34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처음의 우주적인 범위와 마지막의 교육 활동을 연결합니다. 지혜는 이스라엘 안에 뿌리를 내렸지만, 지혜를 가르치는 수고는 그것을 찾는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언약이 가진 특별한 의미가 사라졌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혜를 배우고 전하는 일이 어떻게 더 넓은 사람들을 위한 유익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정원에 물을 대려던 사람

집회서 24:1–34 본문 →

이 장은 지혜의 거처를 특정한 곳에 정하면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지혜를 찾는 모든 사람을 향해 문을 엽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받은 지혜를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이 받은 작은 몫을 하찮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강에서 물을 받아 흘려보내는 사람입니다. 물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물길이 다른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물길이 얼마나 멀리 흘러갈지는 처음부터 알 수 없습니다. 집회서 24장의 스승도 몰랐습니다. 그는 정원에 물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작은 수로가 강이 되었고, 그 강이 바다가 되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