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27장

이 장의 자리 · 24–43장 · 지혜의 찬양

말은 마음을 드러내고, 악은 돌아옵니다

집회서 27장에는 흥미로운 움직임이 반복됩니다. 죄는 돌 틈에 끼어들고, 사람의 마음은 말 밖으로 드러나며, 진리는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돌아옵니다. 그러나 한번 잃어버린 친구는 손에서 놓아준 새처럼 날아가고, 남을 해치려고 던진 돌은 자기 머리로 돌아옵니다.

무엇은 사람에게 돌아오고, 무엇은 영영 떠나 버립니까?

앞 장 마지막에서는 상인이 죄를 피하기 어렵다는 경고가 나왔습니다. 27장은 그 위험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곧 장사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사람의 말과 마음, 우정과 배신, 속임수와 분노에 이르기까지, 일상 전체가 지혜를 시험하는 자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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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틈에 박힌 말뚝 — 작은 이익이 삶을 무너뜨릴 때

집회서 27:1–3 본문 →

첫 절은 큰 악행이나 엄청난 재물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찮은 것 때문에 많은 이가 죄를 지었고, 재물을 늘리려는 이는 눈을 돌릴 것이다.집회서 27:1 · 본디새김

「하찮은 것」은 중요하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은 이득을 가리킵니다. 화자는 반드시 거액의 재산이나 극심한 탐욕이 있어야만 죄를 짓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이익이 양심을 시험할 수 있습니다.

「눈을 돌릴 것이다」라는 표현은 무엇으로부터 눈을 돌리는지 목적어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이익을 얻기 위해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외면하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라서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알고 싶지 않아서 시선을 돌립니다. 공정하지 않은 거래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거나, 다른 사람이 입을 피해보다 자신이 얻을 이익만 바라보는 경우가 그 예입니다.

돌들의 이음새 사이에 말뚝이 박힐 것이고, 파는 일과 사는 일 사이에 죄가 눌려 끼일 것이다.집회서 27:2 · 본디새김

돌과 돌 사이에는 이음새가 있습니다. 그 틈에 말뚝이 박히는 것처럼, 물건을 팔고 사는 과정에도 죄가 끼어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고파는 행위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과 자원을 나누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파는 사람은 물건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있을 수 있고, 사는 사람은 그 정보를 믿고 값을 지불합니다. 그 사이에서 상대방의 무지를 이용하거나 사실을 감추고 싶은 유혹이 생깁니다.

3절에서는 돌의 이미지가 집 전체로 확대됩니다.

주를 경외함을 힘써 붙들지 않으면, 그의 집은 순식간에 뒤집힐 것이다.집회서 27:3 · 본디새김

2절의 말뚝이 곧바로 3절의 집을 무너뜨리는 원인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란히 읽으면 작은 틈과 큰 붕괴의 대조가 선명합니다. 하찮은 이익을 위해 양심을 조금씩 타협하는 일이 결국 삶 전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막연한 종교적 두려움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판단하는 일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더 높은 기준으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레위기 19:35–36에서 하나님은 공정한 저울과 추를 사용하라고 명령하시며,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야훼임을 밝히십니다. 공정한 거래는 단순한 사회적 예절이 아니라, 해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백성의 책임입니다. 집회서의 경고도 그 전통 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물을 늘리는 일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눈을 감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이 얻는 이익뿐 아니라 그것을 얻는 방식까지 살펴야 합니다.

체와 가마와 열매 — 말이 사람을 시험한다

집회서 27:4–7 본문 →

4–6절에는 세 가지 일상적인 작업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체로 거르는 일, 가마에서 굽는 일, 나무를 가꾸는 일입니다. 서로 다른 작업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알 수 없었던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체를 흔들면 찌꺼기가 남고, 그처럼 사람의 찌꺼기도 그가 따져 하는 말에서 드러난다.집회서 27:4 · 본디새김

평소에는 누구나 점잖고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거나 다른 사람의 주장에 대응해야 할 때, 마음속에 있던 태도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대목은 단순히 사람이 무심코 내뱉는 한마디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이유를 제시하고, 다른 사람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격을 살펴봅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매우 잘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합니다. 다른 사람은 말이 서툴러도 진실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집회서가 살피라는 것은 화려한 말솜씨가 아니라, 말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마음의 방향입니다.

가마가 토기장이의 그릇들을 시험하듯, 사람도 그가 따져 하는 말에서 시험을 받는다.집회서 27:5 · 본디새김

토기장이는 흙으로 그릇을 빚습니다. 그러나 모양을 완성했다고 해서 작업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릇은 가마의 열을 견뎌야 합니다.

아직 충분히 시험받지 않은 그릇의 겉모양만으로 완성도를 판단할 수 없듯이, 사람도 첫인상만으로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자신의 생각이 질문받거나 반박당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가 중요합니다.

나무를 어떻게 가꾸었는지는 그 열매가 드러내고, 사람 마음속의 생각은 그 말이 드러낸다.집회서 27:6 · 본디새김

앞의 두 비유에는 흔들고 가열하는 시험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무는 조금 다릅니다. 나무는 시간이 지나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그동안 나무가 어떻게 자라 왔는지 보여 줍니다.

사람의 말도 단순한 순간적 반응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래 품어 온 생각과 반복된 습관이 말 속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찰은 잠언 18:4의 깊은 물과 지혜의 샘에 관한 비유, 잠언 18:21의 혀가 지닌 생명과 죽음의 힘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약의 야고보서 3:1–12 역시 혀의 작은 움직임이 삶 전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비유로 설명합니다. 이는 집회서의 직접 인용이라기보다 말의 도덕적 책임이라는 지혜 전통을 공유하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그가 따져 하는 말을 듣기 전에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바로 그것이 사람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27:7 · 본디새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사람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지 말라는 신중함의 권고입니다. 체를 흔들기도 전에 곡식이 깨끗하다고 말하지 말고, 가마에 넣기도 전에 그릇이 튼튼하다고 장담하지 말며, 열매를 보기도 전에 나무가 잘 자랐다고 확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판단은 첫인상보다 시간을 신뢰하고, 겉모양보다 드러난 열매를 살핍니다.

의로움을 뒤쫓는 사람과 죄에게 쫓기는 사람

집회서 27:8–10 본문 →

네가 의로운 것을 뒤쫓으면 붙잡을 것이고, 그것을 발끝까지 내려오는 영광의 옷처럼 입을 것이다.집회서 27:8 · 본디새김

의로움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움직여 그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본문은 단순히 의로운 행동을 몇 번 했다는 사실보다, 의로움이 그 사람의 모습이 되는 상태를 그립니다. 의로움은 몸의 한 부분에 붙이는 작은 장식이 아니라, 사람 전체를 감싸는 옷으로 묘사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의로움을 뒤쫓지만, 마침내 의로움은 그 사람에게서 보이는 특징이 됩니다.

새들은 저와 비슷한 새들 곁에 깃들 것이고, 진리는 그것을 행하는 이들에게 돌아올 것이다.집회서 27:9 · 본디새김

본문은 진리를 단순히 알아야 할 지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행하는」 것입니다. 말로 진실을 주장하는 것과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 진리를 실천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이 걸려 있을 때에도 진실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진리 역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자기 자리를 찾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이 구절은 진실한 삶과 진리의 관계가 깊다는 지혜문학적 확신을 표현합니다.

10절에서는 갑자기 사자가 등장합니다.

사자가 사냥감을 숨어서 노리듯, 죄들이 불의를 행하는 이들을 숨어서 노린다.집회서 27:10 · 본디새김

앞에서는 사람이 의로움을 뒤쫓았습니다. 이제는 죄가 불의한 사람을 노립니다.

이 비유는 창세기 4:7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죄는 가인의 문 앞에 웅크리고 그를 지배하려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두 본문 모두 죄를 단순히 이미 저지른 잘못에 그치지 않고, 인간을 사로잡으려는 위험으로 표현합니다.

달처럼 달라지는 사람 — 어떤 말들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집회서 27:11–15 본문 →

경건한 이의 이야기는 언제나 지혜이고, 어리석은 이는 달처럼 달라진다.집회서 27:11 · 본디새김

달은 날마다 그 모양이 달라 보입니다.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커졌다가 다시 작아집니다. 본문은 이러한 변화를 어리석은 사람의 불안정성과 비교합니다.

그렇다고 생각을 바꾸는 일 자체를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판단을 수정하는 것은 오히려 지혜로운 행동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깊은 기준 없이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태도입니다.

경건한 사람의 지혜는 언제나 같은 문장만 되풀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양한 상황에서도 지혜로운 판단을 유지하는 일관성에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이들 가운데서는 때를 살펴라. 그러나 생각 깊은 이 곁에는 오래 머물러라.집회서 27:12 · 본디새김

지혜는 누구와 이야기하는가뿐 아니라, 어떤 대화에 얼마나 오래 머무는가와도 관련됩니다. 그렇다고 깨달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무조건 멀리해야 한다는 뜻으로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집회서가 이 문맥에서 염두에 두는 사람들은 다음 절에 묘사되는 파괴적인 언행을 일삼는 이들입니다.

처음에는 역겨운 이야기와 죄의 방탕 속에서 나오는 웃음이 등장합니다. 이어 맹세를 남발하는 말과 다툼이 나오고, 마지막에는 오만한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 피 흘림에 이릅니다.

오만한 이들의 다툼은 피 흘림이고, 그들이 서로 욕하는 소리는 듣기 고약하다.집회서 27:15 · 본디새김

오만한 사람은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려는 대화보다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는 논쟁을 택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의견 차이는 곧 모욕으로, 모욕은 적대감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맹세를 남발하는 말을 들으면 털이 곤두서고, 다투는 소리에는 귀를 막게 됩니다. 지혜롭지 못한 말은 듣는 사람에게까지 고통을 줍니다. 그것은 단지 말하는 사람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견뎌야 하는 환경이 됩니다.

좋은 대화는 정보를 얻는 자리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지혜를 배우고,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고, 더 깊은 이해에 이르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오래 어울리려면 서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어도 그것이 함부로 이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16절의 비밀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손에서 날아간 새 — 신뢰를 잃으면 무엇이 사라지는가

집회서 27:16–21 본문 →

비밀을 드러내는 이는 신뢰를 잃었고, 자기 마음에 맞는 친구를 결코 찾지 못할 것이다.집회서 27:16 · 본디새김

친구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알려 주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상대방이 그 정보를 악용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을 그 사람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밀을 드러내는 행동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닐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맡긴 신뢰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친구를 아끼고 그에게 신의를 지켜라. 그러나 그의 비밀을 드러냈다면, 그의 뒤를 결코 쫓아갈 수 없을 것이다.집회서 27:17 · 본디새김

친구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그가 맡긴 비밀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뢰를 저버리면 그 관계 자체가 손상됩니다.

사람이 자기 원수를 없애 버린 것처럼, 너도 이웃의 우정을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집회서 27:18 · 본디새김

친구를 직접 해쳤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과의 「우정」을 없애 버렸다고 말합니다. 우정은 두 사람이 살아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를 신뢰하고 아끼는 관계가 유지될 때 존재합니다.

19절에서 이 상실은 한 장면으로 바뀝니다.

또 네 손에서 새를 놓아준 것처럼, 너는 이웃을 놓아주었고 그를 붙잡지 못할 것이다.집회서 27:19 · 본디새김

다른 사람의 신뢰는 재산처럼 마음대로 소유하거나 회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다시 가까워지고 싶어도 상대방이 마음을 열어 주지 않으면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를 뒤쫓지 마라. 그는 멀리 떠났고, 올무에서 벗어난 가젤처럼 달아났기 때문이다.집회서 27:20 · 본디새김

비밀을 누설한 사람은 잃어버린 친구를 되찾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신당한 친구에게는 그 관계에서 벗어나는 일이 자신을 지키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의로움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지만, 자신이 배신하여 떠난 사람을 자기 뜻대로 다시 붙잡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상처는 싸맬 수 있고, 욕설 뒤에는 화해가 있지만, 비밀을 드러낸 이는 희망을 잃었기 때문이다.집회서 27:21 · 본디새김

욕설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 사람이 자신의 감정 때문에 일시적으로 잘못된 말을 했다고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반면 비밀을 드러낸 일은 상대방에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남깁니다.

앞으로도 이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맡길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확신을 잃으면 관계 전체가 흔들립니다.

물론 21절을 모든 신뢰의 배신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절대적인 선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집회서 22:22도 화해의 가능성을 말하지만 비밀 누설은 예외로 둡니다. 두 구절은 비밀 누설의 심각성과 관계 회복의 어려움을 강조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일을 막기 위해 적절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친구가 맡긴 사적인 이야기를 호기심이나 이익을 위해 퍼뜨리는 행동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단락이 직접 책망하는 것은 후자와 같은 신뢰의 배신입니다.

우정은 함께 시간을 보낸 길이만으로 깊어지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맡긴 것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는가에 따라 깊어집니다.

두 사람의 입 — 눈앞의 칭찬이 뒤에서 비난이 될 때

집회서 27:22–24 본문 →

16–21절에서는 비밀을 드러내는 사람을 다루었습니다. 이제는 처음부터 속임수를 품고 접근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눈짓하는 이는 악한 일들을 꾸미고, 아무도 그를 그 일에서 떼어 놓지 못할 것이다.집회서 27:22 · 본디새김

문맥상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신호를 보내며 악한 일을 꾸미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잠언 6:12–14에도 입으로 거짓을 말하고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며 악을 꾸미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두 본문은 은밀한 몸짓을 속임수의 표시로 사용하는 지혜문학의 표현을 공유합니다.

그는 네 눈앞에서 네 입을 달게 해 주고, 네 말에 몹시 감탄할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제 입을 비틀고, 네 말 속에 걸림돌을 놓을 것이다.집회서 27:23 · 본디새김

상대방은 자기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바로 그 이야기 속에서 걸림돌을 만들어 냅니다.

앞에서 들은 말을 나중에 상대방을 해치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첨은 단순히 듣기 좋은 말이 아닙니다. 신뢰를 얻어 내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많은 것을 미워했지만, 그 어떤 것도 그와 같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주도 그를 미워할 것이다.집회서 27:24 · 본디새김

정직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 어려워집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표현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기만적인 행동을 일삼는 사람입니다. 잠언 6:16–19에서도 거짓말하는 혀와 거짓 증언, 형제 사이에 다툼을 일으키는 행동이 여호와야훼께서 미워하시는 것들 가운데 등장합니다.

집회서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하나님 앞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고 봅니다.

사람을 속여 얻은 신뢰는 참된 우정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속임수가 아무리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22절 끝의 그리스어 대명사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본디새김은 그 사람을 악한 일에서 떼어 놓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그 악한 인물에게서 떼어 놓는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속임수가 쉽게 끊어지지 않는 위험을 강조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23절 앞부분은 「네 입」이고, 뒷부분은 「제 입」입니다. 이 구별은 원문에도 있습니다. 「네 입을 달게 한다」는 표현은 아첨으로 상대방을 즐겁게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달콤한 말로 상대방이 기분 좋게 이야기하도록 유도한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뒤에서는 분명히 속이는 사람 자신의 입이 등장합니다. 그는 그 입을 비틀어 상대방의 말을 문제 삼습니다.

하늘로 던진 돌 — 악이 돌아오는 방식

집회서 27:25–29 본문 →

25절부터 본문은 다시 구체적인 사물과 동물의 이미지로 가득해집니다.

돌을 높이 던지는 이는 제 머리에 돌을 던지는 것이고, 속임수로 가하는 타격은 상처를 벌려 놓을 것이다.집회서 27:25 · 본디새김

남을 향해 악을 꾸미는 사람은 자신이 던진 돌이 다른 사람에게만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돌이 자기 머리에 떨어지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이 비유는 인간이 악을 행한 뒤 그 결과까지 마음대로 통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구덩이를 파는 이는 그 안에 빠질 것이고, 올무를 놓는 이는 그 올무에 걸릴 것이다.집회서 27:26 · 본디새김

남을 해치려는 사람은 자신을 안전한 위치에 두고 상대방만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구분을 무너뜨립니다. 자신이 만든 위험에서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시편 7:15–16과 잠언 26:27에도 같은 주제가 등장합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판 구덩이가 결국 자신을 해치는 자리가 됩니다.

악한 짓을 하는 이에게는 그 악이 굴러 돌아올 것이고, 그는 그것이 어디서 자기에게 왔는지 결코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집회서 27:27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이 행한 일과 자신에게 벌어진 일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모습은 단순히 어리석어서 벌을 받는 사람보다 더 비극적입니다. 자기 행동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해서 신뢰를 잃었으면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모욕하여 관계를 망쳐 놓고도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본문의 원리를 오늘의 관계에 적용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현실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설명하는 공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 반드시 자신이 저지른 악 때문에 그 일을 당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욥기의 이야기는 의로운 사람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집회서 27장의 관심은 고난당하는 모든 사람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자기 행동의 결과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경고에 있습니다.

28절에서는 사자가 다시 등장합니다.

조롱과 모욕은 오만한 이들에게서 나오고, 보복은 사자처럼 그를 숨어서 노릴 것이다.집회서 27:28 · 본디새김

10절에서 죄는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노리는 사자였습니다. 여기서는 보복이 사자처럼 숨어서 기다립니다. 두 장면 모두 위험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경건한 이들이 넘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이들은 올무에 걸릴 것이고, 그들이 죽기 전에 고통이 그들을 삼킬 것이다.집회서 27:29 · 본디새김

여기서는 직접 남을 해치는 행동을 넘어, 다른 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까지 다룹니다. 불의한 권력이 무너지는 것을 기뻐하는 것과, 경건한 사람이 불행에 빠진 것을 악의적으로 즐기는 것은 다릅니다. 본문이 책망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앞에서 자신이 파 놓은 구덩이에 빠지는 사람이 등장했다면, 이제는 남이 넘어지는 것을 즐기던 사람이 스스로 넘어질 위험에 놓입니다. 집회서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기 기쁨으로 삼는 태도가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보여 줍니다. 인간은 본래 서로의 어려움을 돌보며 함께 살아가야 하지만, 죄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만족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속임수로 가한 타격에 관한 두 번째 문장은 구체적인 피해의 방향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상처가 벌어져 더욱 심해진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지만, 그 상처를 누가 입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가해자 자신에게 상처가 생긴다는 세부 묘사로 확정하기보다는, 기만적인 공격이 더 큰 상처를 낳는다는 경고로 이해하는 편이 신중합니다. 28절 첫 부분의 「오만한 이들」은 그리스어 속격으로 되어 있어, 조롱과 모욕을 가하는 사람들인지 그것을 당하는 사람들인지 문법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은 오만한 이들에게서 조롱과 모욕이 나온다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뒤의 「그」가 가리키는 대상 역시 명시되지 않습니다.

원한을 붙드는 사람 — 마지막에 남는 것

집회서 27:30 본문 →

원한과 분노, 이것들도 가증한 것들이고, 죄인은 그것들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집회서 27:30 · 본디새김

사람을 해치는 행동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자라 온 감정과 판단이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원한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원한 때문에 자신의 말과 행동이 지배받을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을 해치고 싶은 마음을 오래 품으면 그 사람에 관한 말을 왜곡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정의 가치를 잊고 복수할 기회만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만든 덫에 자신이 걸리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러한 읽기는 30절 하나에 직접 명시된 설명이라기보다, 앞서 등장한 여러 장면을 마지막 구절에 비추어 종합한 것입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사실은 원한과 분노를 붙들고 사는 태도가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노라는 감정이 생기는 순간마다 이미 죄를 지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단순한 감정의 발생보다 원한과 분노를 자기 안에 붙잡아 두는 죄인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분노는 부당한 일을 경험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욕망으로 자라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마지막에 움켜쥔 손

집회서 27:1–30 본문 →

진리는 진리를 행하는 사람에게 돌아옵니다. 신뢰를 깨뜨리면 친구는 떠납니다. 남을 해치려고 만든 덫에는 자신이 걸릴 수 있습니다. 떠나 버린 우정은 뜻대로 되찾을 수 없고, 자신이 시작한 악은 뜻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람은 여전히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습니다.

원한과 분노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을 놓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모두 떠나거나 돌아오는데, 그는 그것만은 굳게 움켜쥐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에 남아 있는 것은 원한과 분노를 움켜쥔 사람입니다. 집회서 27장은 그 손을 펼 것인지, 끝까지 쥐고 있을 것인지를 독자 앞에 남겨 놓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