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빗기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7–10장 · 사라와의 혼인

무덤을 파던 밤에 시작된 잔치

신랑과 신부가 첫날밤을 보내는 동안, 신부의 아버지는 무덤을 파고 있습니다.

라구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앞서 일곱 번이나 딸의 혼인이 신랑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여덟 번째 신랑이 같은 방에 들어갔습니다. 딸의 행복을 바라지만,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는 또 하나의 장례식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라구엘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귀신은 이미 달아났고, 라파엘에게 붙잡혔습니다. 신방 안에서 토비야와 사라는 하나님께 함께 늙어 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잠들었습니다.

밖에서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지만, 안에서는 생명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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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의 냄새와 천사의 결박 — 악의 위협은 어떻게 끝나는가

토빗기 8:1–3 본문 →

혼인 잔치의 첫 식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토비야를 안쪽 방으로 데려갑니다.

앞서 일곱 신랑이 죽었던 바로 그 상황이 다시 시작됩니다. 본문은 긴장감을 높이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식사를 마치고 토비야를 방으로 안내했다는 사실만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토비야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토비야는 라파엘의 말을 기억하고, 가지고 있던 주머니에서 물고기의 간과 심장을 꺼내 향을 태운 재 위에 올려놓았다.토빗기 8:2 · 본디새김

토비야는 지금 새로운 지시를 받지 않습니다. 여행 중에 들었던 말을 떠올리고 그대로 실행합니다. 그가 사용하는 물고기의 장기들은 이 순간 처음 등장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았을 때 따로 보관했던 것들입니다.

물고기의 냄새가 귀신을 막자, 귀신은 이집트의 상류 지방으로 달아났다. 라파엘은 그곳으로 가서 귀신의 발을 묶고 곧바로 결박했다.토빗기 8:3 · 본디새김

귀신은 일곱 번이나 혼인을 파괴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묶이는 처지가 됩니다.

물고기의 연기만으로 사건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이 사라의 방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라파엘의 행동이 이어집니다.

토비야와 사라는 아직 기도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독자는 이미 귀신이 달아나 결박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에 등장하는 기도는 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주문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기도는 자신들을 해치는 세력을 조종하려는 말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신들의 혼인과 미래를 맡기는 말입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귀신이 「이집트의 상류 지방」으로 달아났다고 말합니다. 그리스어의 표현은 이집트의 위쪽 지역을 가리키며, 지리적으로는 나일강 상류 방향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대의 유대교 문헌에서는 광야나 황폐한 지역이 악한 영과 관련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사야 13:21과 34:14의 황폐한 땅에 관한 묘사도 그러한 연상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토빗기 8장은 귀신이 특별히 이집트로 달아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연기와 냄새를 사용하여 악한 영향을 물리치는 행위가 알려져 있었습니다. 토빗기의 묘사 역시 그러한 치유와 악령 퇴치의 관념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오늘날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악령 퇴치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물고기의 냄새에 보편적인 초자연적 효력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라파엘이 두 사람의 구원을 이루는 특별한 사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자매여, 일어나 주오」 — 혼인의 첫 행동이 함께 드리는 기도가 되다

토빗기 8:4–5 본문 →

사람들이 방 밖으로 나가 문을 닫자 토비야는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방 문을 닫아걸었다. 토비야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에게 말했다. 「자매여, 일어나 주오.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푸시도록 우리의 주께 기도하고 간청합시다.」토빗기 8:4 · 본디새김

여기서 「자매」라는 호칭은 실제 남매 관계를 뜻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친족 관계에 있으며, 이제 혼인을 맺은 부부입니다. 본문의 호칭은 가까운 친족 관계를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그는 혼인한 남편으로서 자기 혼자 기도한 다음 사라에게 그 기도의 유익이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일어나 함께 기도하자고 합니다.

사라가 일어나자 두 사람은 자신들이 구원받도록 기도하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토비야가 말하기 시작했다. 「저희 조상들의 하나님, 당신은 찬송받으실 분이며, 당신의 이름도 세세토록 영원히 찬송받을 이름입니다. 하늘들과 당신의 모든 피조물이 영원토록 당신을 찬송하기를 빕니다.」토빗기 8:5 · 본디새김

귀신에게서 벗어나야 하는 사람은 사라였지만, 두 사람이 함께 구원을 구합니다. 토비야 역시 자신이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들은 각각 다른 이유로 두려움을 가지고 이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토비야가 기도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구하는 것은 자신의 안전이 아닙니다.

토비야는 당장 자신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열거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고백합니다.

그분은 「저희 조상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호칭은 혼인의 밤에 드리는 개인적인 기도를 이스라엘의 긴 신앙 전통 안으로 가져옵니다. 토비야와 사라는 자신들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조상들이 예배하고 의지했던 하나님께 지금 두 사람도 기도합니다.

작은 신방에서 드리는 기도가 온 피조물로 시선을 넓힙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이 밤에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지만, 토비야는 두 사람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창조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 혼인의 근거를 창조에서 찾다

토빗기 8:6–9 본문 →

토비야는 하나님께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아담을 만드셨고, 그를 돕는 이요 버팀목으로 그의 아내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 두 사람에게서 사람들의 후손이 생겨났습니다. 또 당신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그와 같은 돕는 이를 그에게 만들어 주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토빗기 8:6 · 본디새김

이것은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를 직접 떠올리는 기도입니다. 특히 토비야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다는 사실에서 멈추지 않고, 하와를 아담의 「돕는 이요 버팀목」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창세기 2:18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 뒤 마련하신 도움은, 인간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 주는 관계의 상대입니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 「도움」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우시는 일을 표현할 때도 쓰입니다(시편 121:1-2). 따라서 「돕는 이」라는 호칭 자체에 열등한 지위가 담겨 있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더욱이 토비야의 기도에는 「그와 같은 돕는 이」라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하와는 아담과 다른 종류의 존재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인간이며, 그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다는 하나님의 판단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졌습니다.

사라와의 혼인은 이제까지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일곱 신랑은 사라와 함께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토비야는 혼인이 본래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창조 이야기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갈 관계를 마련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음행 때문에 이 자매를 아내로 맞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맞습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받고 함께 늙어 가도록 명해 주십시오.」토빗기 8:7 · 본디새김

「음행 때문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라는 말의 뜻

그는 지금 자신의 혼인이 무엇을 추구하는 관계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라를 단순히 욕망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 아내로 맞는다는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의 외로움을 해소하는 수단이나 필요를 충족하는 물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갈 사람으로 주어졌습니다. 토비야도 사라를 그러한 관계의 상대로 맞아들이기를 바랍니다.

토비야는 왜 장수가 아니라 「함께 늙어 가는 것」을 구할까?

지금까지 사라의 혼인에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일곱 번 모두 첫날밤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혼인이 시작되자마자 끝났습니다.

그러나 토비야는 하루나 이틀의 생존을 넘어 오랜 세월을 바라봅니다.

함께 늙어 간다는 것은 함께 살면서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일입니다. 늙음은 보통 인간의 약함과 죽음의 가까움을 드러내지만, 지금 토비야와 사라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첫날밤에 죽을지도 모르는 두 사람에게 함께 늙어 갈 수 있다는 것은 생명이 오랫동안 허락된다는 뜻입니다.

일곱 번의 혼인이 첫날밤에서 멈췄기에, 여덟 번째 신랑의 가장 깊은 소원은 아내와 함께 늙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특징은 미래를 자신의 뜻대로 보장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 미래를 하나님의 자비에 맡기는 간구라는 데 있습니다. 그는 함께 늙는 일을 스스로 이루겠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두 사람은 함께 「아멘.」 하고 말했다.토빗기 8:8 · 본디새김

토비야가 기도의 문장을 시작했지만, 마지막은 두 사람의 목소리로 끝납니다. 「아멘」은 단순히 기도가 끝났다는 표시가 아니라, 기도의 내용에 동의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응답입니다.

토비야가 말한 「함께 늙어 가는 것」은 이제 두 사람의 공동 소원이 됩니다.

두 사람은 그 밤에 잠들었다. 라구엘은 일어나 집안 종들을 자기 곁으로 불렀다. 그들은 나가서 무덤을 팠다.토빗기 8:9 · 본디새김

지금까지 사라의 신방에서는 죽음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사람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 평범한 잠이 이 장에서는 놀라운 사건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토비야는 「음행」과 「진실한 마음」을 대조합니다. 따라서 토비야의 말을 성적 욕망 자체가 나쁘므로 혼인한 부부도 그것을 피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 밤에 두 사람이 부부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도한 뒤 성관계를 의도적으로 피했다거나, 어떤 특별한 금욕 기간을 지켰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무덤을 파는 아버지 — 믿음과 두려움이 같은 사람 안에 있을 때

토빗기 8:10–12 본문 →

신방의 두 사람이 잠든 뒤, 이야기는 갑자기 라구엘에게로 옮겨 갑니다.

라구엘이 「그가 죽어 우리가 웃음거리와 욕거리가 될까 걱정이다.」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토빗기 8:10 · 본디새김

이것은 단순히 체면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냉혹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앞서 일곱 사위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반복된 죽음이 딸과 가문의 평판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라구엘의 두려움이 순수하게 사위의 생명만을 향하지 않는다는 점도 숨기지 않습니다. 그는 또다시 죽음이 일어날 경우 자신과 가족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수치까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가족 중심 사회에서 혼인은 당사자들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두 가문이 관계를 맺는 사건이었으며, 명예와 수치 역시 가족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라구엘이 새벽 전에 아무도 모르게 시신을 묻으려 한다는 것은 이러한 걱정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정당하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비밀리에 시신을 묻으려는 계획은 책임 있는 처신이라기보다, 다시 닥칠지도 모르는 비극과 수치에서 벗어나려는 절박한 행동으로 읽힙니다.

그는 혼인이 하늘에서 결정되었다고 말했습니다(7:11). 하늘의 주께서 두 사람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 빌었습니다(7:11-12).

그런데 같은 밤에 무덤을 준비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라구엘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정하면 인물의 복잡함을 놓치게 됩니다. 라구엘은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바라면서도 과거의 경험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라구엘은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기를 바라지만, 자신의 손으로는 지난 일곱 번과 똑같은 결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라구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무덤을 파는 동안 토비야는 죽지 않았습니다. 사라도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났습니다.

라구엘이 준비하는 무덤은 실제로 필요하지 않은 무덤입니다.

신방과 무덤의 뜻밖의 대조

신방은 새로운 가정이 시작되는 장소입니다. 무덤은 생명이 끝난 사람을 묻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같은 밤에 두 공간이 준비됩니다.

토비야와 사라는 신방에서 살아갈 미래를 위해 기도합니다. 라구엘은 그 미래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걱정하며 무덤을 준비합니다.

본문은 생명과 죽음에 관한 긴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쪽에는 잠든 두 사람을, 다른 한쪽에는 파 놓은 무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제 누군가 그 방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잠들어 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죽음을 확인하러 갔다가 생명을 발견하다

토빗기 8:13–18 본문 →

라구엘과 아드나는 여종 하나를 보냅니다.

그들은 여종을 보내고 등불을 켜고 문을 열었다. 여종은 들어가서 두 사람이 함께 잠들어 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토빗기 8:13 · 본디새김

여종은 시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예상 속에서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발견한 것은 함께 자고 있는 두 사람입니다.

죽음의 가능성이 지배하던 방에서 평범한 잠이 가능해졌습니다.

여종은 밖으로 나와 그들에게 토비야가 살아 있고 아무런 나쁜 일도 없다고 알렸다.토빗기 8:14 · 본디새김

여종의 보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살아 있고」입니다. 그것은 이전 일곱 번의 첫날밤과 이번 밤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라구엘의 찬송 — 「제가 짐작하던 대로 되지 않았고」

이 소식을 들은 가족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당신은 저를 기쁘게 하셨으니 찬송받으실 분입니다. 제가 짐작하던 대로 되지 않았고, 당신은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셨습니다.」토빗기 8:16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의 예상과 실제로 이루어진 일을 대조하면서, 그 차이를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연결합니다. 라구엘에게 과거의 경험은 충분히 강력한 근거였습니다. 일곱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반복이 깨졌습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위가 살아 있다는 구체적인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토비야는 결과를 확인하기 전에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라구엘은 결과를 확인한 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토비야의 찬송은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미래를 맡기는 기도였습니다. 라구엘의 찬송은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구원을 경험하고 드리는 감사였습니다.

두 기도의 출발점은 다르지만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향합니다.

「외아들과 외딸」 — 두 가정의 미래가 보존되다

라구엘은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당신은 외아들과 외딸, 이 두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으니 찬송받으실 분입니다. 주인이시여, 이들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시고, 이들의 삶을 기쁨과 자비 속에서 마치게 해 주십시오.」토빗기 8:17 · 본디새김

토비야는 토빗과 안나의 외아들입니다. 사라는 라구엘과 아드나의 외딸입니다. 라구엘은 단순히 신랑과 신부가 살아남았다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두 가정의 하나뿐인 자녀들이 구원받았다고 고백합니다.

한 방에서 이루어진 구원이 서로 떨어진 두 가정의 미래를 보존합니다.

토비야와 사라가 함께 늙어 가기를 구했던 기도에 이어, 이번에는 라구엘이 두 사람의 삶 전체를 위해 기도합니다. 특히 그의 기도는 토비야와 사라가 단순히 살아남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기쁨 속에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때 라구엘은 자기 집안 종들에게 새벽이 되기 전에 무덤을 메우라고 했다.토빗기 8:18 · 본디새김

불과 얼마 전 종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무덤을 팠습니다. 이제 같은 종들이 같은 무덤을 메웁니다. 무덤이 메워지는 것은 단지 잘못된 준비를 되돌리는 일이 아닙니다. 라구엘이 예상했던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확인하는 장면입니다.

새벽이 밝기도 전에 무덤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준비가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본문은 두 사람이 자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표현합니다. 「잠들어 자고 있는 것」이라는 본디새김의 번역은 이 반복을 살립니다. 두 사람이 살아 있으며 함께 잠들었다는 사실을 독자가 확실히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무덤에서 잔치로 — 슬픔에 시달린 딸의 마음을 기쁘게 하다

토빗기 8:19–20 본문 →

라구엘은 아내에게 빵을 많이 만들라고 하고, 소 두 마리와 숫양 네 마리를 잡도록 준비합니다.

한쪽에서는 시신을 묻기 위해 땅을 팠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빵을 만들고 가축을 잡습니다.

죽음을 예상했던 집에서 혼인을 축하하는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앞서 라구엘은 손님들을 처음 맞이했을 때 숫양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7:9). 이제는 소 두 마리와 숫양 네 마리를 준비합니다. 혼인이 성립된 것 자체를 넘어, 두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기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라구엘은 토비야를 불러 말했다. 「열나흘 동안은 절대로 이곳을 떠나지 마라. 여기 머물며 나와 함께 먹고 마시고, 고통에 시달린 내 딸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어라.」토빗기 8:20 · 본디새김

사라는 일곱 남편을 잃었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며, 죽고 싶을 만큼 깊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번 혼인에서 남편이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동안의 모든 고통이 즉시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토비야는 하나님께 사라와 함께 늙어 가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이제 라구엘은 그 함께 살아갈 시간이 사라에게 기쁨을 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혼인 관계가 단순히 법적으로 성립되는 것과, 실제로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관계로 자라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왜 열나흘인가?

분명한 것은 라구엘이 두 사람이 서둘러 떠나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내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앞선 일곱 번의 혼인은 첫날밤에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첫날밤을 넘어 잔치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곱 번의 혼인이 하루도 이어지지 못했던 집에서, 이제 아버지는 열나흘 동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혼인한 다음 날 장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여러 날 동안 함께 먹고 마시며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라구엘은 딸이 그 시간을 통해 기쁨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는 여러 날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29:27에는 야곱의 혼인과 관련하여 일주일 동안의 혼인 기간이 등장합니다. 판관기 14:12에서도 삼손의 혼인 잔치가 이레 동안 계속됩니다. 토빗기의 열나흘은 이러한 여러 날에 걸친 혼인 잔치의 관습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토빗기 8장이 왜 정확히 열나흘을 정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31:13에서 하나님은 애곡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슬픔 대신 위로와 즐거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본문은 포로와 상실을 겪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합니다. 토빗기 8장은 그 약속을 직접 인용하거나 성취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모습을 한 가족의 경험 안에서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나는 네 아버지이고 아드나는 네 어머니다」 — 두 가정이 하나의 가족이 되다

토빗기 8:21 본문 →

라구엘은 마지막으로 토비야에게 재산을 약속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 가운데서 절반을 가지고 건강한 몸으로 네 아버지에게 가거라. 나머지 절반은 나와 내 아내가 죽으면 너희 것이다. 용기를 내라, 얘야. 나는 네 아버지이고 아드나는 네 어머니다. 이제 우리는 너와 네 자매에게 속한 사람들이다. 지금부터 영원히 그러하다. 용기를 내라, 얘야.」토빗기 8:21 · 본디새김

이 약속은 혼인에 따른 경제적 책임과 상속 관계를 보여 줍니다. 앞서 사라가 유일한 자녀라는 사실이 혼인과 상속에 관한 문제로 제시되었습니다. 이제 그 관계가 구체적인 재산의 이전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라구엘의 말은 재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니느웨에는 토비야의 아버지 토빗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토비야는 원래 아버지의 돈을 찾으러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아내를 맞이했고,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라구엘은 토비야가 자신의 집에만 머물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라구엘은 토비야를 단순히 딸과 혼인한 남자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라구엘은 단순히 토비야와 사라가 자신에게 속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아드나가 두 사람에게 속한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가족 관계가 일방적인 소유나 통제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속하고 서로를 책임지는 관계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라구엘은 밤중에 사위를 몰래 묻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사위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재산을 나누어 주고 함께할 미래를 약속합니다.

죽음에 대한 걱정이 가족의 확장에 대한 기쁨으로 바뀐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반복되는 「용기를 내라」

라구엘의 마지막 말은 「용기를 내라, 얘야」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나옵니다. 앞 장의 마지막에서 아드나가 딸 사라에게 두 번이나 「용기를 내라, 딸아」라고 말했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아드나의 말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밤에 주어진 격려였습니다. 라구엘의 말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주어지는 격려입니다.

이 장에서 용기는 단지 위험한 밤을 견디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뒤 새롭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사람들의 예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토빗기 8:1–21 본문 →

처음에는 신랑 한 사람을 어디에 묻을 것인가가 문제였지만,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가 문제로 바뀝니다. 이 장이 보여 주는 구원은 단지 죽음을 모면한 사건이 아닙니다. 죽음의 가능성 때문에 멈추어 있던 혼인과 가족의 삶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건입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라구엘은 토비야를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딸의 기쁨을 부탁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며, 건강하게 아버지에게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이제 그 집에는 밤중에 파 놓은 무덤을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

그 대신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라구엘은 새벽이 되기 전에 무덤을 메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을 맞이하는 집에서는 죽은 사위를 위한 장례가 아니라, 살아 있는 딸과 사위를 위한 잔치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