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흩어져 사는 이들에게

나그네이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

사람이 낯선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변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익히고 그들의 관습에 적응하더라도, 자신이 온전히 그곳에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익숙했던 관계와 생활방식에서 멀어지고, 새로운 곳에서도 좀처럼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삶입니다.

베드로전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런데 편지의 첫머리에는 뜻밖의 말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베드로는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베드로전서 1:1 · 두루새김

나그네라는 말과 선택받았다는 말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처지를 떠올리게 하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게 특별히 속해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세상에서는 낯선 사람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께는 이미 알려지고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동시에 참일 수 있을까요?

베드로전서 1장은 이 역설을 풀어 가는 편지입니다. 하지만 나그네들에게 세상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살아가는 자리에서 어떻게 기뻐하고, 거룩하게 살며, 서로 사랑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모든 설명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습니다.

이 장은 크게 두 흐름으로 전개됩니다. 1–12절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들에게 무엇을 하셨는지 밝히고, 13–25절에서는 그 사실에 근거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권합니다. 두 부분을 연결하는 말은 13절의 「그러므로」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먼저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일에 대한 응답입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81장 본문 읽기 →

흩어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이름

베드로전서 1:1–2 본문 →

편지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졌습니다. 모두 소아시아, 곧 오늘날 튀르키예 지역에 속하는 지명들입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4장 4절에서는 옛 동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달라진 생활을 이상하게 여기며 비방한다고 말하고, 4장 14절에서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욕당하는 상황을 언급합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사회적인 배척과 모욕을 경험하고 있었다고 이해할 근거가 있지만, 이들이 모두 국가의 조직적인 박해를 받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들을 「흩어져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나그네」는 자기 고장이 아닌 곳에 머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흩어져」에 해당하는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는 흩어짐을 뜻하며,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을 떠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아가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실제로 고향을 떠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반면 1장 14절의 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 18절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4장 3절의 이방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언급을 근거로, 상당수가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고 이들의 새로운 신앙적 처지를 이스라엘의 흩어짐에 빗대었다고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베드로가 독자들에게 알려 주려는 것은 단순히 어디에 사는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를 주변 사회의 인정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들의 나그네 됨을 설명하기 전에,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분명히 합니다.

여러분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대로,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통해 선택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더욱 넘치기를 빕니다.베드로전서 1:2 · 두루새김

아버지의 미리 아심,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일, 예수님의 피 뿌림이 하나의 구원 사건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의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에서, 왜 순종과 피 뿌림이 함께 나올까요?

출애굽기 24장 3–8절에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백성은 순종하겠다고 응답하고, 이어 모세는 제물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언약의 피라고 선언합니다. 순종과 피 뿌림이 함께 등장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정확히 이 장면을 염두에 두었다고 밝히지는 않지만, 두 표현의 결합은 출애굽기의 언약 체결 장면을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피로 세워진 언약의 백성이 되었듯, 이제 이들은 예수님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다만 시내산에서는 제물의 피가 뿌려졌지만, 이 편지에서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이제 이 흩어진 사람들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를 선택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사람들입니다.

나그네이지만 버려진 사람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편지의 저자는 자신을 사도 베드로라고 소개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편지는 베드로가 쓴 것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실제 저자와 작성 연대를 둘러싸고 학계에는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이 장의 독자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전의 사회적 관계와 긴장을 겪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 2절의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통해」는 원문의 표현을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일로 풀어 옮긴 것입니다. 이렇게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원문에서 영과 거룩함의 문법적 관계를 어떻게 세밀하게 설명할지에는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유산만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3–5 본문 →

편지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신 분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크게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일을 통해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고 살아 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베드로전서 1:3 · 두루새김

독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먼저 설명하거나 위로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미 하신 일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소망을 준다는 것은 기존의 사람이 새로운 기대를 품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와 소속 자체가 새로워졌다는 뜻입니다.

이 새로운 출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여기서 소망은 막연히 미래가 잘되리라는 낙관이 아닙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 곧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것을 「살아 있는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소망의 대상은 아직 미래에 있지만, 그 소망의 근거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 계십니다.

그렇다면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무엇을 물려받게 됩니까?

또한 썩지도 더럽혀지지도 시들지도 않는 몫을 물려받을 사람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몫은 여러분을 위해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베드로전서 1:4 · 두루새김

일반적인 유산은 이런 성질을 갖지 못합니다. 재산은 사라질 수 있고, 토지는 빼앗길 수 있으며, 한때 번성했던 가문도 쇠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물려받는 것은 아무리 귀해도 시간과 세상의 변화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여기서 물려받을 몫은 구약의 약속된 땅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땅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셨고 지파와 가문이 물려받는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몫을 특정한 토지의 소유로 한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마지막 때까지 간직하시는 구원의 몫으로 제시합니다.

그 몫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독자들이 마지막에 어디에서 살게 될지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그들이 받을 몫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통해 여러분을 그분의 능력으로 지켜 주십니다. 마지막 때에 드러나도록 준비된 구원에 여러분이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1:5 · 두루새김

4절에서는 물려받을 몫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5절에서는 그 몫을 받을 사람들 자신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물려받을 몫이 아무리 안전해도 그것을 받을 사람이 그곳에 이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반대로 받을 사람이 무사해도 그 몫이 사라진다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두 가지를 모두 말합니다. 하나님은 주실 것을 간직하시고, 그것을 받을 사람들도 지키십니다.

「지켜 주십니다」(φρουρέω)는 지키고 보호한다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표현으로, 경비와 수비의 상황에도 사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단순히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뜻보다 적극적인 보호를 나타냅니다.

물론 이것이 믿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어려움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이들이 여러 가지 시련으로 슬픔을 겪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고통이 전혀 없는 삶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구원에 이르도록 그들을 붙드시는 능력으로 제시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키시는 사람들은 왜 지금 슬픔을 겪고 있을까요?

슬퍼하면서도 기뻐하는 사람들

베드로전서 1:6–9 본문 →

여러분은 지금 필요하다면 여러 가지 시련으로 잠시 슬픔을 겪으면서도 이 일로 크게 기뻐합니다.베드로전서 1:6 · 두루새김

기쁨과 슬픔이 같은 문장 안에 놓여 있습니다.

베드로는 슬픔을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로 보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실제로 슬픔을 겪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들이 동시에 기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쁨은 슬픔이 사라진 다음에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느끼는가와, 누구를 믿고 무엇을 기다리는가는 서로 구별되면서도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면」이라는 표현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고난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 고난의 원인을 언제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획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시련의 필요성에 조건을 붙입니다.

다음 절에서는 시련과 믿음의 관계를 금에 빗댑니다.

여러분이 이런 시련을 겪는 것은, 시험을 거쳐 참되다고 드러난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이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불로 시험을 거친 금도 결국 없어지고 말지만, 여러분의 믿음은 그 금보다 훨씬 귀합니다.베드로전서 1:7 · 두루새김

금은 불로 시험하여 진짜인지 확인하거나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독자들의 믿음 역시 시련 가운데 참되다는 것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금과 믿음의 비슷한 점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금은 불의 시험을 거치더라도 결국 없어지는 물질입니다. 금의 가치는 지금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지만,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 진실한 가치가 드러납니다. 현재의 사회적 평가와 마지막에 드러날 하나님의 평가는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받는 것인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현재의 고난을 먼 미래의 보상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독자들이 지금 예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바라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지금도 그분을 보지 못하지만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영광으로 가득한 기쁨으로 크게 기뻐합니다.베드로전서 1:8 · 두루새김

이것은 믿음의 부족함을 변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예수님과 지금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그들의 실제 모습을 서술하는 말입니다. 그분을 보게 될 날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분을 사랑하고 믿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미래의 사건이지만, 예수님과의 관계는 현재의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인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베드로전서 1:9 · 두루새김

두루새김은 구원받는 대상을 「여러분 자신」으로 옮겼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원문의 프쉬케(ψυχή)는 문맥에 따라 생명, 사람 자신, 내적 생명 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편지 전체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고난, 몸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육체와 분리된 어떤 부분만을 구원한다는 뜻으로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구원은 마지막 때에 드러나도록 마련되어 있지만, 그들은 이미 그 구원의 현실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받고 있습니다」라는 현재형 표현은 이런 진행 중인 구원의 경험과 잘 어울립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나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음 문단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현재에서 먼 과거로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존귀하게 되는 것으로 읽을 수 있고, 그들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의미를 함께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문장의 흐름에서는 시험을 통과한 믿음이 마침내 인정받는다는 해석이 자연스럽지만, 그 인정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이 찾았고 천사들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것

베드로전서 1:10–12 본문 →

앞에서 설명한 구원은 어디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일까요? 베드로는 그것이 오래전부터 예언자들이 찾고 살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언자들은 이 구원에 관해 부지런히 찾고 깊이 살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에게 주어질 은혜를 미리 전한 사람들입니다.베드로전서 1:10 · 두루새김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들 역시 자신들이 전한 말씀의 의미와 시기를 알아보려고 찾고 살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신 말씀을 받은 사람이 그 말씀의 모든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는 그리스도가 겪으실 고난과 그 뒤에 누리실 영광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그 영께서 가리키신 때가 언제이며 어떤 때인지 살폈습니다.베드로전서 1:11 · 두루새김

핵심은 「그리스도가 겪으실 고난과 그 뒤에 누리실 영광」입니다. 이 순서는 베드로전서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셨고, 그 뒤에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편지의 독자들 역시 지금 고난을 겪고 있지만 마지막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경험을 예수님의 이야기에 비추어 읽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이 일을 전하며 자기들 자신이 아니라 여러분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제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통해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사람들이 이 일을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천사들도 이 일을 들여다보고 싶어 합니다.베드로전서 1:12 · 두루새김

독자들은 사회적으로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조롱받고, 그들의 삶은 불안정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오래전 예언자들이 한 일이 바로 이들을 섬기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삶은 우연히 역사의 뒤편에 놓인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증언되어 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제로 알려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천사들도 알고 싶어 하는 구원이 이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해졌습니다. 베드로는 천사들의 지식에 관한 자세한 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 독자들이 받은 은혜의 크기를 드러냅니다. 자신들의 믿음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해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받은 기쁜 소식은 예언자들이 살피고 천사들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독자들의 작은 삶이 하나님의 커다란 역사 안에 놓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예언자들이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 사건을 역사적으로 얼마나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이 예언자들의 증언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여러 본문 가운데 특히 이사야 52장 13절–53장 12절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본문은 고난을 겪는 하나님의 종과, 그 고난 이후에 이루어지는 그의 높아짐을 함께 말합니다. 이사야 본문 자체의 역사적 맥락과 그 종이 누구인지를 둘러싼 해석을 존중해야 하지만, 베드로전서가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을 이해하는 방식과 분명히 주제가 연결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25절에서는 이사야 53장의 표현들이 직접 사용됩니다.

소망을 품는 일은 생각의 허리를 동이는 일입니다

베드로전서 1:13–16 본문 →

그러므로 마음을 단단히 준비하고 정신을 차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에게 주어질 은혜에 모든 소망을 두십시오.베드로전서 1:13 · 두루새김

앞의 열두 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설명하던 베드로는 이제 처음으로 본격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그 명령은 뜻밖에도 「모든 소망을 두십시오」라는 것입니다. 기뻐하라는 것도, 참고 견디라는 것도, 다른 사람들을 이기라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다가올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소망을 품기 위해서는 「마음을 단단히 준비하고 정신을 차리십시오」라는 권면을 따라야 합니다. 원문에서는 생각의 허리를 동이라는 그림 같은 표현을 씁니다. 긴 옷을 입던 시대에는 일을 하거나 달릴 때 옷자락을 허리띠에 거두어 매었습니다. 베드로는 움직일 준비를 갖추는 이 익숙한 동작을 생각에 적용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흩어진 채로 내버려 두지 말고, 행동할 준비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아직 주어질 은혜를 기다리라고 했던 베드로는, 14절에서 이전의 욕심을 따라 살지 말라고 권합니다.

순종하는 자녀답게 사십시오. 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 품었던 욕심을 따라 살지 마십시오.베드로전서 1:14 · 두루새김

「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지 못하던 삶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지식이 부족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엇을 바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던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욕심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했지만, 이제는 자신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성품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생활에서 거룩하게 되십시오.베드로전서 1:15 · 두루새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거룩하여라.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베드로전서 1:16 · 두루새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도 거룩해야 합니다. 백성이 먼저 자신의 거룩함을 증명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인용한 레위기의 본래 맥락에서도 그렇습니다. 레위기 19장 2절의 거룩 명령은 이미 이집트에서 건져 내신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장은 부모 공경, 가난한 사람을 위한 배려, 정직한 거래, 이웃을 향한 사랑 등 일상적인 삶의 여러 문제로 이어집니다(레위기 19:3–18). 따라서 거룩함은 단지 세상과 거리를 두거나 종교적인 의식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모든 생활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함과 나그네 됨이 만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변 사회와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지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와 두려움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조금 더 깊이

생각의 허리를 동이는 그림에는 출애굽기의 분위기가 겹쳐집니다. 출애굽기 12장 1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허리에 띠를 띠고 유월절 음식을 먹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떠날 준비를 갖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나그네와 구원이라는 편지의 주제 속에서 이 이미지는 잘 어울립니다.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더욱 두려워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17–21 본문 →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 공평하게 심판하십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나그네로 사는 동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지내십시오.베드로전서 1:17 · 두루새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에게 두려워하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과 공평한 심판자라는 사실을 대립시키지 않고, 같은 분에 대한 두 가지 사실로 함께 붙들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한 일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분은 누구도 편애하지 않고 판단하십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두려움은 하나님께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라기보다, 자신을 부르시고 구원하신 분 앞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며 그분을 두려워하고 높이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 풀려났습니다. 여러분을 풀어 준 값은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것이 아니었습니다.베드로전서 1:18 · 두루새김

「여러분을 풀어 준 값」이라는 표현에는 대가를 치르고 사람을 풀어 주거나 되찾는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를 해방하거나 포로를 되찾는 상황에서 이러한 말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독자들이 문자 그대로 노예였다가 돈을 주고 풀려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전 삶에서 벗어난 일을 이 말로 설명합니다.

그들이 풀려난 것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입니다. 이 표현은 조상들이 남긴 모든 전통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물려받고 반복하던 삶의 방식이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삶을 지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행동이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고 해서 반드시 참되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익숙하다는 사실과 옳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그런데 그들을 그런 삶에서 풀어 주기 위해 치른 값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값은 흠도 티도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귀한 피였습니다.베드로전서 1:19 · 두루새김

금과 은은 세상에서 귀중한 물질이지만, 베드로는 그것들을 「없어질 것」이라고 부릅니다. 앞서 7절에서 금도 결국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던 표현이 다시 떠오릅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피는 귀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구원의 비용이 아주 비쌌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을 자유롭게 하신 분이 어떤 분인지 보여 줍니다.

「흠도 티도 없는 어린양」은 유월절 어린양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12장 5절은 유월절에 바칠 어린양이 흠 없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또한 이사야 53장 7절에서는 고난받는 종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에 비유됩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구원받는 사건과 연결되고, 이사야의 종은 죄와 고난을 짊어지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20절에서 베드로는 시간의 범위를 갑자기 넓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세워지기 전부터 그리스도를 미리 아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해 나타나셨습니다.베드로전서 1:20 · 두루새김

2절에서는 독자들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2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세상이 세워지기 전부터 미리 아셨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 구절 하나로 예수님의 영원한 존재 방식에 관한 모든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께서 언제부터 존재하셨는지의 철학적 설명보다, 예수님의 나타나심과 구원이 하나님의 오래된 뜻 안에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그분께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베드로전서 1:21 · 두루새김

여기서 「그래서」가 연결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영광은 단지 믿음의 대상이 되는 사건이 아니라, 독자들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을 향하게 된 이유입니다. 죽임당하신 예수님을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이 자신들도 마지막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믿음의 근거는 인간의 결심이 얼마나 굳센가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살라는 권면 역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피로 풀려난 사람들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새로운 삶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새로운 삶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밝혀집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베드로전서 1:22–25 본문 →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했고, 믿음의 형제자매를 거짓 없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깨끗한 마음에서 우러나 서로 힘껏 사랑하십시오.베드로전서 1:22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형제자매를 거짓 없이 사랑하게 된 것을 자신을 깨끗하게 한 목적과 연결합니다. 그들이 진리에 순종한 결과가 향해야 할 곳은 서로를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곁에 덧붙는 덕목이 아니라, 복음에 순종한 삶이 향하는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미 믿음의 형제자매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에게 다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왜 이미 일어난 일을 다시 명령할까요?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관계가 실제 생활 속에서 계속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가 되었다는 사실과 형제자매답게 살아가는 일은 구별됩니다. 앞의 사실이 뒤의 삶을 요구합니다.

「거짓 없이」라는 말도 그래서 붙습니다. 겉으로는 형제자매라고 부르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서로를 향한 사랑이 진실하고 힘써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명령의 근거는 다시 태어남입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씨가 아니라 썩지 않을 씨에서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곧 살아 있고 영원히 남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태어난 것입니다.베드로전서 1:23 · 두루새김

3절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제 23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고 설명합니다. 두 설명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새로운 생명의 근거가 되는 예수님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하나는 그 생명을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람은 보통 부모로부터 생명을 물려받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늙고 죽는 생명이며, 인간의 혈통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독자들이 그와 다른 근원, 곧 썩지 않을 씨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편지의 첫머리에서 시작된 소속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독자들은 서로 다른 지역 출신이고, 서로 다른 가문의 자녀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신분과 이전의 생활방식도 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동일한 복음을 통해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서로 형제자매가 된 이유는 같은 혈통을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단순히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요구보다 훨씬 깊은 근거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맺어 주신 새로운 가족 관계를 살아 내라는 것입니다.

이 설명 끝에서 베드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베드로전서 1:24 · 두루새김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는다.」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베드로전서 1:25 · 두루새김

이사야 40장은 오랜 포로 생활과 상실을 겪은 백성에게 하나님이 다시 위로를 전하시는 장입니다. 그들이 경험하는 세상에서는 강대한 나라가 역사의 주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인간의 힘과 영광이 풀과 꽃처럼 사라질 수 있지만,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이사야의 인용을 마친 뒤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라는 한 문장을 덧붙입니다. 먼 옛날 포로 된 백성을 위로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맺은 새로운 관계는 사람들의 호의나 이해관계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살아 있고 영원히 남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까지 깊어집니다.

나그네의 삶을 떠받치는 것

베드로전서 1:1–25 본문 →

베드로전서 1장은 독자들이 처한 현실을 바꾸어 주겠다는 약속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 것이라고도, 더 이상 고난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금 어떤 사람들인지 다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그들은 나그네이지만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시련으로 슬퍼하지만 살아 있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그분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전의 삶에서 풀려났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태어나 새로운 형제자매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슬픔을 실제 슬픔으로 인정합니다. 다만 그 슬픔이 한 사람이 누구인지와 그의 미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피로 풀려난 일, 그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삶을 떠받칩니다.

베드로는 이 장을 마치면서 독자들에게 영원히 지속되는 권력이나 재산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들판의 풀과 꽃을 보여 줍니다. 한때 무성하던 풀은 마르고, 아름답게 피었던 꽃은 떨어집니다. 사람이 가진 영광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전해진 말씀은 다릅니다.

흩어진 나그네들은 바로 그 말씀을 통해 다시 태어났습니다. 세상에서 그들의 자리가 흔들릴 수 있어도, 그들을 새로 태어나게 한 말씀은 시들지 않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말씀은 영원히 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