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8장 · 엘리야에서 엘리사로
엘리야는 떠났지만, 여호와야훼는 어디에 계시는가?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은 성경에서 가장 신비로운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불로 된 병거와 불로 된 말들이 나타나고, 회오리바람이 엘리야를 하늘로 올립니다. 그러나 이 장을 자세히 읽으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하늘로 올라가는 엘리야만이 아니라 땅에 남겨지는 엘리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엘리사는 스승이 떠날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도 알고 있습니다. 엘리야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첫 절부터 독자 역시 그 사실을 압니다.
오히려 다른 질문을 기다리게 합니다.
엘리야가 떠난 뒤에도 그를 통해 일하시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 가운데 계실 것입니까?
떠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함께 가는 길
이야기는 목적지를 먼저 알려 주면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 속에서 하늘로 데려가려 하실 때였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길갈을 떠났습니다.열왕기하 2:1 · 두루새김
엘리야의 떠남은 우연한 사고나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하늘로 데려가려 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두 사람의 여행은 의외로 깁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강으로 이동합니다. 세 번의 이동마다 거의 같은 대화가 반복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여기 머물러라. 여호와야훼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셨다.」 엘리사가 대답했습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야훼와 스승님의 목숨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은 벧엘로 내려갔습니다.열왕기하 2:2 · 두루새김
엘리야가 왜 세 차례나 엘리사를 남겨 두려 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제자의 충성을 시험했다고 읽을 수도 있고, 마지막 여정을 홀로 가려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인지 확정할 만한 설명은 본문에 없습니다.
열왕기상 19:19–21에서 엘리야는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에게 자신의 겉옷을 던졌습니다. 엘리사는 소를 버리고 엘리야를 따라가 그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엘리사가 자신의 삶을 떠나 스승에게 갔지만, 마지막에는 스승이 떠나는 순간까지 그 곁을 지키려 합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일
벧엘에 있던 예언자 무리가 엘리사에게 나와 물었습니다. 「오늘 여호와야훼께서 당신의 스승을 곁에서 데려가실 것을 알아요?」 엘리사가 대답했습니다. 「나도 알아요. 조용히 해 주세요.」열왕기하 2:3 · 두루새김
여리고에서도 똑같은 대화가 반복됩니다. 원문에서 「예언자의 아들들」(בֵּן)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예언자에게 속한 사람들, 곧 예언자들의 집단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벧엘과 여리고에 이런 무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고립된 두 예언자만은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가 왜 조용히 해 달라고 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승과의 이별이 괴로워서였을 수도 있고, 이미 알고 있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응답은 엘리사가 자신의 앞에 놓인 일을 모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는 떠남을 알고도 함께 갑니다.
벧엘과 여리고에서는 예언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와 말을 건넵니다. 마지막 요단강에서는 예언자 무리 가운데 쉰 명이 멀찍이 떨어져 서서 지켜봅니다(2:7). 엘리야와 엘리사는 그들을 뒤에 남겨 두고 강을 건넙니다.
많은 사람이 떠날 일을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엘리야와 함께 건너가는 사람은 엘리사 한 명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며 묻는 마지막 소원
두 사람이 요단강에 이르자 엘리야는 자기 겉옷을 둘둘 말아 강물을 칩니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을 둘둘 말아 강물을 쳤습니다. 물이 양쪽으로 갈라지자 두 사람은 마른 땅을 밟고 건넜습니다.열왕기하 2:8 · 두루새김
출애굽기 14:21–22에서 이스라엘은 갈라진 바다 가운데 마른 땅을 밟고 지나갔습니다. 여호수아 3:14–17에서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서자 강물이 멈추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으로 건넜습니다.
그러나 세 사건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열 수 없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강을 건넌 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네 곁을 떠나게 되기 전에 네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 원하는 것을 말해 보아라.」 엘리사가 대답했습니다. 「스승님의 영 가운데 두 몫이 제게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열왕기하 2:9 · 두루새김
그는 엘리야의 재산이나 명성을 구하지 않습니다. 엘리야에게 임했던 영을 구합니다. 스승이 떠난 뒤에도 그가 예언자로서 하던 일이 자신을 통해 이어지기를 바라는 요청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처음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를 때에는 겉옷을 던졌고, 이제 엘리사는 영의 몫을 구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가 뒤를 잇는 관계로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선뜻 허락하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말했습니다. 「어려운 것을 부탁하는구나. 내가 네 곁에서 들려 올라가는 것을 네가 보면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열왕기하 2:10 · 두루새김
엘리야가 자신의 영을 물건처럼 나누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이 소유했다가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재산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떠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남은 질문은 엘리사가 그 떠남을 보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 이후 그에게 무엇이 주어질 것인가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 몫」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피 쉐나임입니다. 이 구절은 흔히 엘리사가 엘리야보다 두 배 큰 능력을 구했다고 이해됩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21:17에서 맏아들이 상속 재산 가운데 받는 두 몫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따라서 엘리사의 요청에는 재산을 물려받을 때 쓰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반드시 엘리야의 모든 능력보다 정확히 두 배 강해지는 요청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엘리사가 예언자 무리 사이에서 법적인 의미의 맏아들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고 확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는 지금 요단강을 건너 그 땅의 동쪽으로 향합니다. 이 길을 여호수아 시대의 여정을 되짚는 상징적인 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그 상징을 직접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불로 된 병거가 갈라놓은 두 사람
두 사람은 계속 길을 걸으며 이야기합니다.
두 사람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불로 된 병거와 불로 된 말들이 나타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열왕기하 2:11 · 두루새김
엘리사는 세 번이나 스승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끝까지 함께 왔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갈라지는 일은 엘리사의 선택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가 곁에 있고 싶어도 더는 함께 갈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엘리사는 스승이 떠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제시한 조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엘리사가 외친 말은 자신의 요청이 이루어졌다는 기쁨의 표현이 아닙니다.
엘리사가 그 모습을 보며 외쳤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와 기병이시여!」 엘리야가 더는 보이지 않자 엘리사는 자기 옷을 붙잡아 두 조각으로 찢었습니다.열왕기하 2:12 · 두루새김
먼저 「아버지, 아버지」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단순히 예언의 기술을 가르친 사람이 아니라, 그를 불러 세우고 이끌어 온 스승이었습니다.
고대 왕국에서 병거와 기병은 중요한 군사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가 엘리야를 이스라엘의 병거와 기병이라고 부른 것은 그의 사역이 나라를 지키는 군사력에 견줄 만큼 중요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국의 힘은 병거와 기병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일이 나라가 서 있는 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옷을 찢는 것은 구약에서 슬픔과 애도를 표현하는 행동으로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창세기 37:34; 사무엘하 1:11–12).
그런데 그의 옷이 찢긴 직후, 땅에 남겨진 또 하나의 옷이 등장합니다.
엘리야의 겉옷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은 종종 엘리야가 불로 된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본문은 조금 다르게 말합니다. 불로 된 병거와 불로 된 말들이 한 일은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간 방식은 「회오리바람 속에서」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기병이시여」라는 표현은 나중에 엘리사 자신이 죽음을 앞두었을 때 다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엘리사를 찾아와 같은 말로 외칩니다(열왕기하 13:14). 처음에는 제자가 스승을 향해, 나중에는 왕이 예언자를 향해 외치는 말이 됩니다.
떨어진 겉옷과 다시 갈라지는 요단강
엘리사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듭니다.
엘리사가 처음 부름받았을 때 엘리야가 그에게 던졌던 것이 겉옷이었습니다(열왕기상 19:19). 그리고 이 장에서 엘리야가 요단강을 가를 때 사용한 것도 겉옷이었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사라지고 겉옷만 땅에 남습니다.
겉옷은 뒤를 잇는 일을 보여 주는 상징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깃든 물건으로서 스스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는 그것을 가지고 요단강 가에 섭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으로 강물을 치며 말했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엘리사도 그렇게 물을 치자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고, 그는 강을 건넜습니다.열왕기하 2:14 · 두루새김
문맥에서 엘리사는 엘리야와 함께하시던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과도 함께하시는지를 확인하려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 장면은 앞서 엘리야가 요단강을 건넌 장면과 거의 대칭을 이룹니다.
| 엘리야가 떠나기 전 | 엘리야가 떠난 후 | | --- | --- | | 엘리야가 겉옷을 둘둘 만다 | 엘리사가 겉옷을 주워 든다 | | 엘리야가 물을 친다 | 엘리사가 물을 친다 | | 요단강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 요단강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 | 두 사람이 함께 건넌다 | 엘리사 혼자 건넌다 |
엘리야는 사라졌지만, 요단강을 가르셨던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건은 또한 앞서 엘리야가 제시했던 조건에 대한 응답입니다. 엘리사가 떠남을 보았고, 이제 그에게 엘리야의 영이 이어졌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리고의 예언자 무리가 맞은편에서 엘리사를 보고 서로 말했습니다.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 위에 머물렀어.」 그들은 엘리사를 맞으러 와서 그의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열왕기하 2:15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엘리사가 뒤를 이었다는 사실이 그 자신의 주장으로만 인정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특히 엘리사가 예언자 무리에게 자신을 새로운 지도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가 요단강을 건너오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판단합니다.
엘리야의 뒤를 이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직책을 알리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통해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모세의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그의 뒤를 잇도록 하셨습니다(민수기 27:18–23; 신명기 34:9). 여호수아는 모세와 똑같은 인물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와도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여호수아 1:5). 엘리사 역시 엘리야가 아닙니다. 그의 사역은 이후 다른 사건과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그러나 같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종을 통해 계속 일하십니다.
이미 떠난 사람을 찾으려는 사람들
그런데 엘리사가 뒤를 이었다고 인정한 예언자들이 뜻밖의 요청을 합니다.
그들이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종인 저희 가운데 힘센 사람 쉰 명이 있어요. 그들을 보내 당신의 스승을 찾아보게 해 주세요. 여호와야훼의 영께서 그분을 들어 올려 어느 산이나 골짜기에 내려놓으셨을지도 몰라요.」 엘리사가 대답했습니다. 「보내지 마세요.」열왕기하 2:16 · 두루새김
독자에게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이미 1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려 하신다는 설명을 들었고, 11절에서는 실제로 그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언자 무리는 강 맞은편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엘리야의 마지막 순간을 엘리사와 똑같이 보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열왕기상 18:12에서 오바댜도 여호와야훼의 영이 엘리야를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데려갈 수 있다고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릅니다.
예언자들은 계속 조릅니다. 결국 엘리사가 허락하자 쉰 명이 사흘 동안 찾지만 엘리야를 찾지 못합니다.
예언자들은 엘리사의 새로운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떠난 엘리야를 찾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새로운 사람을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보았지만, 엘리야의 떠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엘리야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독자의 시선도 떠난 엘리야에게서 남아 있는 엘리사에게로 옮겨갑니다.
좋은 자리에 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성읍
엘리사의 첫 사역은 전쟁이나 왕궁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리고의 물에서 시작됩니다.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성읍은 자리 잡은 곳이 좋아요. 하지만 물이 나쁘고 땅은 열매를 맺지 못해요.」열왕기하 2:19 · 두루새김
겉으로 보이는 땅의 조건과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형편이 다릅니다. 물이 나쁘고 그로 인해 생명과 열매 맺는 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오라고 합니다. 그는 그 소금을 물이 솟아나는 곳에 던집니다.
엘리사는 물이 솟아나는 곳으로 가서 소금을 던져 넣으며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이 물을 고쳤다. 더는 이 물 때문에 죽음이 생기거나 땅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열왕기하 2:21 · 두루새김
소금을 던지는 행동은 눈에 보이는 표징이지만, 물을 고치신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물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고침이 선언됩니다. 그 결과 성읍 사람들이 의지하는 물 전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엘리야의 사역에는 가뭄과 비, 하늘의 불, 왕을 향한 심판의 선언 같은 사건들이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여리고에서 나쁜 물을 고쳐 사람들의 생명과 열매 맺는 삶을 회복시킵니다.
그렇다고 엘리야는 심판의 예언자이고 엘리사는 치유의 예언자라고 단순히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엘리야도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열왕기상 17:17–24), 엘리사 역시 다음 장면에서 무서운 심판과 연결됩니다.
여리고에서 일어난 일이 특별한 이유
여호수아 6장에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 처음으로 정복한 성읍이 여리고였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다시 세우는 사람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여호수아 6:26). 열왕기상 16:34는 아합 시대에 히엘이 여리고를 다시 세우면서 그 저주에 해당하는 일을 겪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배경 때문에 엘리사가 물을 고친 일을 여리고에 관한 저주와 연결하여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한때 멸망과 저주의 장소였던 곳에서 이제 생명을 지키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왕기하 2장은 이 물의 문제가 여호수아의 저주 때문에 생겼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물을 고친 사건을 여호수아의 저주가 공식적으로 거두어졌다는 선언으로까지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두루새김이 「열매를 맺지 못해요」로 옮긴 히브리어는 메샤켈레트입니다. 이 말은 열매를 잃거나 유산하는 것과 관련된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농작물이 열매를 잘 맺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사람이나 가축의 유산과 관련된 문제까지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 피해의 구체적인 의학적·환경적 원인을 밝히지 않습니다. 소금은 일반적으로 물을 마실 수 있게 만드는 정화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엘리사가 특별한 정수 기술을 사용했다고 이해할 근거는 없습니다.
벧엘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
여리고에서 생명을 회복시키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집니다.
엘리사는 그곳을 떠나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어린 소년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했습니다. 「올라가라, 대머리야! 올라가라, 대머리야!」열왕기하 2:23 · 두루새김
엘리사는 뒤돌아 소년들을 보고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합니다. 그러자 숲에서 암곰 두 마리가 나와 그들 가운데 아이 마흔두 명을 물어뜯습니다.
앞 장면에서는 나쁜 물이 고쳐져 생명을 지켰는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어린 소년들이 끔찍한 피해를 입습니다.
같은 예언자의 사역에서 이토록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문은 그들이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흔두 명 전원이 죽었다고 분명히 밝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수만큼의 아이들이 야생동물의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은 매우 심각한 사건입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엘리사의 저주와 연결하여 서술합니다. 그러나 왜 마흔두 명이 공격당해야 했는지, 각 소년에게 얼마나 큰 책임이 있었는지, 왜 다른 방식의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들을 외면한 채 「예언자를 놀렸으니 당연히 죽어야 했다」고 말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해석입니다. 반대로 엘리사가 단순히 화를 참지 못해 개인적인 복수를 했고, 하나님은 이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으셨다고 확정하는 것도 본문에 없는 설명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호와야훼의 예언자를 조롱하는 일이 가볍지 않음을 보여 주지만, 그 사건이 남기는 도덕적 어려움까지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물을 고친 엘리사와 곰이 나타난 엘리사
여리고 사람들은 엘리사에게 자기 성읍의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없는 것을 인정했고, 도움을 구했습니다. 벧엘에서 나온 소년들은 엘리사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조롱했습니다.
이런 배치는 엘리사를 통해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사람들에게 이익만 가져다주는 힘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회복과 심판이라는 서로 다른 결과와 연결됩니다.
하지만 그 차이를 인간의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만으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정중하게 요청하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고, 무례하게 행동하면 반드시 재앙이 내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특히 벧엘 사건은 예언자나 종교 지도자가 자신을 비판하거나 모욕하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본문은 독자에게 엘리사처럼 저주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정확한 나이와 사회적 지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본문의 표현을 아무 근거 없이 성인 폭도 집단으로 바꾸어 읽어서도 안 됩니다. 원문에서 두 장면의 표현은 같은 「올라가다」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소년들의 말이 엘리야의 승천을 조롱하는 의미였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네 스승처럼 너도 올라가 버려라」라는 뜻으로 읽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간 직후 벌어진 사건이라는 문맥과 잘 맞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엘리야의 승천 사실을 알았는지, 실제로 그 사건을 생각하며 조롱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엘리사가 언덕길을 올라가는 중이었으므로, 단순히 그를 향해 계속 올라가라거나 떠나라는 조롱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대머리야」라는 말도 그의 외모를 조롱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벧엘은 이스라엘에게 오랜 종교적 기억이 있는 곳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 장소를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왕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백성들이 그곳에서 예배하도록 했습니다(열왕기상 12:26–33). 이런 배경에서 벧엘의 소년들이 엘리사를 조롱하는 것은 단순한 거리의 장난을 넘어 여호와야훼의 예언자를 거부하는 장면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 소년들이 금송아지 예배에 참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벧엘의 제사장들이 그들을 모아 엘리야의 뒤를 이은 사람을 공격하도록 보냈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이 장면을 이해할 때 레위기 26:21–22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계속 거역할 경우 들짐승이 그들을 해칠 것이라는 언약의 경고가 나옵니다. 따라서 열왕기하 2장의 곰 사건을 여호와야훼의 예언자를 업신여기는 일에 대한 언약의 심판과 연결하는 해석은 구약 전체의 문맥에서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열왕기하 2:23–24는 그 사건이 레위기 26장의 어느 조항을 직접 이루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여리고의 물을 고치는 장면에서는 엘리사가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지만, 벧엘에서는 그가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했다는 사실과 곰의 공격이 이어졌다는 사실이 기록됩니다. 저주 전에 하나님께서 별도의 명령을 주셨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떠난 사람의 겉옷을 들고 살아가는 사람
엘리사는 스승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스승에게서 받은 부르심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은 그들을 부르시고 보내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자신이 따르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슬픔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사명을 이어받기 때문에 슬퍼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남겨진 겉옷을 들고 자신이 건너왔던 강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한 질문을 던집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질문에 긴 설명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물이 갈라졌습니다.
그는 그 물 사이로 건너갔고, 예언자들은 그를 맞이했습니다. 곧이어 여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그에게 알렸습니다.
이것이 엘리사에게 주어진 새로운 사역의 시작이었습니다. 스승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머무는 대신, 살아 있는 사람들의 문제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로 가고, 벧엘로 올라가며, 갈멜산을 거쳐 사마리아로 돌아옵니다.
엘리야가 사라진 뒤에도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여정의 시작에는 요단강 가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에는 떨어진 겉옷이 들려 있었고, 맞은편에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땅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를 가로막던 강물은 이제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길은 여전히 그 앞에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