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여러 도시로 떠난 길

열린 감옥, 떠나지 않은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하게 매를 맞았고, 발은 나무로 만든 틀에 단단히 채워져 있습니다. 한밤중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문이 모두 열리고, 죄수들을 묶고 있던 사슬이 풀립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사도행전을 여기까지 읽어 온 독자라면 답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천사는 감옥 문을 열어 사도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12장에서도 천사는 베드로를 깨워 감옥에서 이끌어 냈습니다. 문이 열리면 사도들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장에서는 아무도 나가지 않습니다.

감옥 문이 열렸는데도 바울과 실라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간수가 죄수들이 달아났다고 생각하고 목숨을 끊으려 하자, 바울이 「자신을 해치지 마세요! 우리 모두 여기 있어요!」 하고 외칩니다. 문이 열리는 기적보다, 열린 문으로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큰 질문을 남깁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그 감옥의 문을 여셨을까요?

이 질문을 품고 16장을 처음부터 읽으면, 서로 무관해 보이던 이야기들이 하나로 이어지기 시작합니다. 한 제자에게 할례를 행하는 바울, 성령에게 길을 가로막힌 선교사들, 마음이 열린 루디아, 점치는 영에서 벗어난 여자 노예,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그리고 죽음 직전에서 돌아선 간수가 등장합니다.

이들에게는 공통된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의지와 힘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었던 경계가 하나씩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떤 길은 막히고, 다른 길은 열립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열리고, 감옥의 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변화는 문이나 길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일어납니다.

이 일을 이끄시는 분은 살아나신 예수님이십니다. 누가는 이번 장에서 특별히 「예수의 영」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의 인도를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자 노예를 얽매고 있던 영이 떠나가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에 한 집안이 구원의 기쁨을 얻습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916장 본문 읽기 →

할례를 의무로 삼지 않기로 한 직후에 할례를 행하는 바울

사도행전 16:1–5 본문 →

바울은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에 도착합니다. 앞서 14장에서 복음을 전했던 지역이고, 바울이 돌에 맞아 도시 밖으로 끌려 나간 곳이기도 합니다(14:19). 그런데 그곳에 이제 디모데라는 제자가 있습니다.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의 믿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있었고, 어머니는 유대 사람으로 예수님을 믿는 이였지만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를 함께 일할 사람으로 데려가려 하면서 뜻밖의 일을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함께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유대 사람들을 생각하여 그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디모데의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6:3 · 두루새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로 앞 장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 결정을 위해 논쟁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고, 곧이어 그 결정을 전합니다.

일행은 여러 도시를 지나가면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내린 결정을 그곳의 믿는 사람들에게 전하며 지키게 했습니다.사도행전 16:4 · 두루새김

누가는 이 두 행동을 나란히 기록하면서도 모순인지 아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바울이 할례를 행한 이유를 단 하나 제시합니다. 「그 지역의 유대 사람들을 생각하여」입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다루어진 문제는 이방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하느냐였습니다. 반면 디모데의 할례는 그가 선교 여행에 동참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누가는 그것을 구원받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지역의 유대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의 배경이 유대 사람들을 상대하는 선교 활동에서 문제가 될 수 있었다는 설명은 본문이 제시한 이유와 잘 맞습니다.

중요한 구별은 이것입니다.

복음을 믿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행동이 구원받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강요된다면 은혜의 복음을 훼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행동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위한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면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디모데의 할례를 둘러싼 모든 질문이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는 그 사건 직후에 교회들의 믿음이 굳세어지고 믿는 사람들의 수가 날마다 늘어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곧 전혀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길 자체를 성령께서 막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 디모데의 신분을 어떻게 판단했을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고, 후대 유대법에서 어머니의 혈통을 따르는 기준을 1세기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다른 상황에서 할례를 어떻게 대했는지 살피면 차이가 더 분명해집니다. 갈라디아서 2:3–5에서 바울은 그리스 사람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려는 움직임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 자리에서는 할례가 복음의 진리와 예수님 안의 자유를 위협하는 요구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고린도전서 9:19–23에서는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디모데의 할례를 선교를 위해 스스로 선택하여 사람들의 형편에 맞춘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사도행전 16장 자체가 그 신학적 이유를 모두 밝혀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성령

사도행전 16:6–10 본문 →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셨으므로, 일행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갔습니다.사도행전 16:6 · 두루새김

지금까지 성령께서는 복음이 더 넓은 곳으로 전해지도록 사람들을 보내고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일행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비두니아로 가려 하지만, 이번에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무시아 가까이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예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사도행전 16:7 · 두루새김

누가는 앞 절에서 「성령」이라고 말하고, 곧바로 「예수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두 표현의 정확한 관계를 이 절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선교의 방향을 결정하는 영의 활동이 예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1:8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땅끝까지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약속을 따라 선교하는 사람들의 길을 「예수의 영」이 직접 가로막고 있습니다.

살아나신 예수님께서는 단지 복음의 내용으로 전해지는 분만이 아니십니다. 그 복음이 어디로 향할지를 이끄시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누가는 왜 아시아와 비두니아로 가는 길이 막혔는지, 성령께서 어떤 방법으로 막으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이나 바울 일행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사도행전 19:10에서는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기록하므로, 이 장의 금지를 그 지역에 대한 영구적인 거절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 일행은 계속 움직여 에게해 연안의 항구 도시 드로아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밤에 환상을 봅니다.

밤에 바울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간청했습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우리를 도와주세요.」사도행전 16:9 · 두루새김

그는 복음을 전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르쳐 달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를 도와주세요」라고 간청합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본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길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6:10 · 두루새김

「도와주세요」라는 간청을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συμβιβάζω)로 옮긴 그리스어 낱말은 여러 사실을 맞추어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차례 길이 막힌 경험과 마케도니아로 건너오라는 환상을 함께 헤아려, 하나님이 자신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환상을 본 사람은 바울이지만,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판단하고 떠날 길을 찾는 주체는 「우리」입니다. 지금까지 누가는 바울 일행의 여정을 그들에 대한 이야기로 서술했는데, 10절에서 갑자기 「우리」라고 말하고 이후 빌립보 이야기 일부도 이 인칭을 유지합니다. 지금까지 독자의 눈앞에서 이동하던 선교 일행이, 이 순간부터 사건을 직접 겪으며 말하는 「우리」로 가까워집니다.

두 번이나 막혔던 길이 이제 바다를 건너는 길로 이어집니다.

바울의 환상에는 한 남자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에 도착한 뒤 누가가 이름을 처음 알려 주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아시아」는 오늘날의 아시아 대륙 전체가 아니라 소아시아 서부를 중심으로 한 로마의 아시아 속주를 가리킵니다. 「우리」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사도행전의 저자가 이 시점에 여행에 합류했음을 나타낸다고 읽어 왔습니다. 반면 서술자가 동행자의 여행 기록을 자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정확히 누구를 포함하는지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해석도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루디아 — 가장 먼저 열린 것은 성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이었다

사도행전 16:11–15 본문 →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트라케를 거쳐 네아폴리스에 도착하고, 내륙의 빌립보로 이동합니다. 누가는 빌립보를 「로마의 식민 도시」라고 소개합니다. 로마의 정치적·법적 제도와 시민 정체성이 강하게 자리 잡은 도시였고, 이 사실은 나중에 바울과 실라가 로마 시민이라는 이유로 행정관들에게 항의하는 장면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안식일이 되자 일행은 기도하는 곳이 있다고 여겨진 성문 밖 강가로 나갑니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회당을 찾아갔으므로, 이곳에는 정식 회당이 없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곳에 여자들이 모여 있었고, 바울 일행이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자가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아디라 출신으로 자주색 옷감을 팔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6:14 · 두루새김

루디아는 소아시아의 도시 두아디라 출신으로 빌립보에서 자주색 옷감을 팔고 있었습니다. 옷감을 파는 일을 했고 뒤에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경제적·사회적 활동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곧 이방 출신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두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루디아가 스스로 마음을 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뛰어난 말솜씨가 그녀의 마음을 열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바울은 말하고 있었고, 루디아는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 사이에서 결정적인 일을 하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귀를 통해 들리지만, 그 말씀이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예수님의 일이 함께합니다.

이어서 루디아와 그녀의 집안사람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집안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본문은 밝히지 않지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루디아 한 사람을 넘어 그녀의 집안에까지 이른 것은 분명합니다.

루디아는 자기 집안사람들과 함께 세례를 받은 뒤 우리에게 부탁했습니다. 「저를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 여기신다면 제 집에 와서 머물러 주세요.」 그는 우리에게 간곡히 권하여 자기 청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사도행전 16:15 · 두루새김

조금 전까지 루디아는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숙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자기 집에 와서 머물러 달라고 청합니다. 그녀가 새롭게 받아들인 믿음이 바울 일행을 받아들이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셨고, 그녀는 간곡히 권하며 적극적으로 자기 집의 문을 엽니다.

바울의 환상에서 마케도니아 남자는 「우리를 도와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처음 이름을 알게 된 사람은 소아시아 출신 여자 루디아이고, 복음이 전해진 뒤 오히려 루디아가 선교사들에게 자기 집을 열어 주고 도움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환상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부르심이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할지는 길을 걸어가면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길에서 루디아와는 전혀 다른 처지에 있는 또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회당을 세우는 데 필요한 인원 규정이 빌립보의 상황에 정확히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본문도 회당이 없었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자주색으로 물들인 옷감은 고대 세계에서 신분과 부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지만, 모든 자주색 옷감이 같은 재료와 가격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루디아가 대단한 부자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을 열어」라는 표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여신 누가복음 24:45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장면을 동일한 사건으로 볼 수는 없지만, 같은 신학적 주제가 나타납니다. 또 바울과 실라가 감옥을 나온 뒤 루디아의 집으로 가는 장면(16:40)으로 보아 그 집이 빌립보의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정기적인 모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까지 이 장이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이름 없는 여자 노예 — 구원받는 길을 외치면서도 구원이 필요한 사람

사도행전 16:16–18 본문 →

이번에도 바울 일행은 기도하는 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점치는 영이 들린 여자 노예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점을 쳐서 자기 주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 주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6:16 · 두루새김

루디아는 자신의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이 여자는 다른 사람의 소유인 노예였습니다. 루디아에게는 이름이 있었지만, 이 여자의 이름은 끝까지 알려지지 않습니다. 누가는 그녀에게 점치는 영이 들렸다는 사실과, 그 능력을 통해 주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 주었다는 사실을 나란히 놓습니다.

그 여자는 바울과 우리를 따라오며 외쳤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여러분에게 구원받는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6:17 · 두루새김

이 말은 완전히 거짓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바울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며 구원받는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높으신 하나님」은 유대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여러 신 가운데 최고의 신적 존재로 들릴 수 있었으므로, 빌립보 사람들이 이 외침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을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 외침이 누구에게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점치는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증언을 통해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주인들이 그 능력을 이용해 돈을 벌고 있는 상황에서입니다.

그 여자는 여러 날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은 몹시 괴로워하다가 돌아서서 그 영에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령한다.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그 영이 바로 그때 나갔습니다.사도행전 16:18 · 두루새김

바울은 여러 날이 지나서야 행동하고, 누가가 분명히 밝힌 이유는 그가 「몹시 괴로워하다가」 돌아섰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처음부터 그 여자를 불쌍히 여겨 해방하려 했다고 설명하면 본문에 없는 동기를 덧붙이게 됩니다. 바울이 명령하는 대상은 여자 자신이 아니라 그 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자 영이 곧바로 나갑니다.

앞에서 「예수의 영」은 선교사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결정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이름은 사람을 얽매고 있는 영에 대한 권위를 드러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셨고 그들이 거역할 수 없었던 것처럼(누가복음 4:33–36; 8:26–39),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독자적인 영적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완전히 자유로워졌을까요?

본문은 그 영이 떠났다고 말하지만, 그녀가 노예 신분에서도 해방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았는지,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해방과 사회적 자유가 같은 순간에 모두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변화는 분명합니다. 그동안 주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던 힘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뜻밖에도 바울과 실라를 감옥으로 보내는 계기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점치는 영」은 직역하면 ‘퓌톤 영’입니다. 퓌톤은 그리스의 델포이 신탁 전통과 연결된 이름으로, 점을 치거나 신의 뜻을 전하는 능력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여자의 활동은 당시 사람들이 신적인 능력이나 초자연적인 지식과 연결하여 이해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어 원문에서 「구원받는 길」에 해당하는 표현에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이를 반드시 ‘여러 구원의 길 가운데 하나’라는 뜻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표현만으로 그녀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고유한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누군가의 해방이 다른 사람에게는 손해가 될 때

사도행전 16:19–24 본문 →

그 여자의 주인들은 더는 그를 통해 돈을 벌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광장에 있는 관리들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사도행전 16:19 · 두루새김

그들은 여자가 더 이상 점치는 영에게 지배받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자신들의 수입이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돈을 벌 가망」(ἐλπίς)에서 「가망」으로 옮긴 그리스어 낱말은 기대나 희망을 뜻합니다. 주인들이 기대하던 미래는 그 여자가 점치는 능력으로 계속 돈을 버는 것이었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영이 떠나면서 그 미래가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폭력을 행사합니다. 복음이 한 사람을 얽매던 힘과 충돌했는데, 그 얽매임으로부터 이익을 얻던 사람들이 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을 도시의 행정관들 앞에 세워 놓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 사람으로서 우리 도시를 몹시 어지럽히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6:20 · 두루새김
「로마 시민인 우리가 받아들여서도, 따라서도 안 되는 관습을 전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6:21 · 두루새김

조금 전까지 이야기의 중심에 있었던 돈은 고발장에서 사라졌습니다.

주인들은 자신들의 수입이 줄었다고 고발하지 않고, 도시의 질서와 로마의 관습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울과 실라를 「유대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은 「로마 시민」이라고 말합니다. 로마 식민 도시인 빌립보에서 로마 시민이라는 정체성은 자부심과 권위를 지니고 있었고, 주인들은 그 정체성을 자신들의 주장에 유리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미 그들이 왜 분노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경제적 이익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손해를 도시 전체의 문제로 바꾸어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직접 부르지 않고 사건의 순서만 기록하지만, 그 순서만으로도 고발의 겉으로 드러난 이유와 실제 계기가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무리도 함께 들고일어나고, 행정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몽둥이로 때리라고 명령합니다.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두 사람은 심하게 맞고, 간수는 그들을 탈출이 더욱 어려운 감옥 안쪽에 가두고 발을 나무로 만든 틀에 단단히 채웁니다.

여기서 이야기의 방향이 완전히 바뀝니다.

처음에 바울과 실라는 한 여자가 자신을 얽매고 있던 영으로부터 벗어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이제 그들 자신이 묶입니다.

한 사람을 속박하던 영은 떠났고, 그 영을 쫓아낸 사람들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해방이 언제나 즉각적인 환영과 성공을 가져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해방이 기존의 이익과 질서를 건드릴 때 얼마나 강한 반발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날 밤, 바울과 실라가 있는 감옥에서 또 다른 일이 시작됩니다.

감옥 문이 열렸는데, 왜 아무도 나가지 않았을까?

사도행전 16:25–28 본문 →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며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죄수들은 두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사도행전 16:25 · 두루새김

두 사람은 재판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공개적으로 매를 맞았습니다. 몸에는 상처가 남아 있고 발은 나무로 만든 틀에 채워져 있어, 밤이 깊었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이 장면을 단순히 고난 중에도 기뻐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읽으면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죄수들이 두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무엇을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기도와 찬양은 감옥의 닫힌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흔들렸습니다. 곧바로 감옥 문이 모두 열리고, 모든 죄수의 사슬이 풀렸습니다.사도행전 16:26 · 두루새김

바울과 실라의 사슬만 풀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수의 사슬」이 풀렸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났던 장면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바울과 실라 역시 이 기회를 이용해 밖으로 나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들의 탈출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간수를 등장시킵니다.

간수는 잠에서 깨어 감옥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달아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칼을 뽑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합니다. 그 순간, 바울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바울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자신을 해치지 마세요! 우리 모두 여기 있어요!」사도행전 16:28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을 때리고 감옥에 가둔 체제의 일부인 간수를 구하려 합니다. 직접 매질을 명한 것은 행정관들이지만, 두 사람을 감옥 안쪽에 넣고 발을 나무 틀에 채운 것은 간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가 죽지 않도록 막습니다.

열린 감옥에서 아무도 달아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는 주님의 천사가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고, 12장에서는 베드로의 사슬이 풀리고 쇠문이 열려 그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앞선 이야기에서는 감옥의 문이 열려 사도가 살아났습니다. 여기서는 감옥의 문이 열렸는데도 사도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간수가 살아납니다.

누가는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키신 목적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과는 분명합니다. 문이 열리는 사건은 바울과 실라의 탈출보다 간수의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감옥을 지키던 사람은 이제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살리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등불을 가져오게 하고 안으로 뛰어들어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집니다.

조금 더 깊이

로마의 감옥 제도에서 간수에게는 죄수들을 지킬 책임이 있었고, 죄수가 도망치면 심각한 처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수가 자신의 실패와 그 결과를 두려워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본문은 그가 어떤 구체적인 처벌을 예상했는지까지 밝히지 않습니다. 또 누가는 다른 죄수들이 왜 남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들을 설득했는지, 지진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는지 알려 주지 않으므로, 모든 죄수가 스스로 복음의 능력에 감동하여 남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간수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진이 일어났다고 모든 과정을 단정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자유와 권위를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하셨고, 마침내 자신을 위해 능력을 쓰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향해 가셨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행동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직접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자신의 안전만을 앞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과 주제 면에서 이어집니다.

「제가 구원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도행전 16:29–34 본문 →

간수는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린 뒤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물었습니다. 「선생님들, 제가 구원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사도행전 16:30 · 두루새김

오순절에 베드로의 말을 듣고 마음이 찔린 사람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2:37). 그런데 간수가 말하는 「구원」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조금 전까지 그는 죄수들이 달아난 줄 알고 자신을 죽이려 했으므로, 이 질문이 당장의 죽음과 처벌에서 벗어나는 문제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죄수들이 모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법적 책임을 면할 방법만 물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본문은 그가 이 순간 구원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질문에는 당장의 위기에서 살아난 충격과, 자신이 경험한 사건의 더 깊은 의미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함께 있었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세요.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집안사람들이 구원받을 거예요.」사도행전 16:31 · 두루새김

간수에게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한 의식을 먼저 행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관습을 받아들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날 간수를 움직이게 했던 사람들은 빌립보의 행정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행정관들이 통제할 수 없었던 일을 경험했고, 자신을 살린 것은 로마의 권력이 아니라 그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주」라는 호칭은 하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게 하시고 높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나타냅니다(사도행전 2:36). 간수가 로마의 권력과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의식적으로 비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는 빌립보의 권력자들이 할 수 없었던 구원의 일이 주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31절의 「당신과 당신의 집안사람들이 구원받을 거예요」를 간수가 믿기만 하면 그의 집안사람들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다음 절이 그 이유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간수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사도행전 16:32 · 두루새김

집안에 속한 각 사람이 어떻게 믿음을 표현했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으므로, 이 본문만으로 어린아이에게도 세례를 주었는지나 각 사람이 신앙을 얼마나 이해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집안 전체를 향해 전해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상처를 씻어 주는 손과 세례를 받는 사람들

간수는 그 밤, 바로 그 시각에 두 사람을 데려다가 매 맞은 상처를 씻어 주었습니다. 곧바로 그와 온 집안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사도행전 16:33 · 두루새김

매질을 명한 것은 행정관들이었지만, 간수는 두 사람을 감옥 안쪽에 가두고 발을 나무 틀에 채운 사람이었습니다. 몇 시간 전에는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이제 그는 그들의 아픔을 돌봅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의 상처를 씻어 주고, 자신은 세례를 받습니다.

본문이 이 두 가지 씻음을 서로 짝을 이루는 상징이라고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연이어 기록되면서, 한 사람에게 일어난 변화가 몸을 돌보는 행동과 신앙을 고백하는 행동 모두에 나타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을 앞두고 있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씻고 있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올라가 음식을 차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사람들과 함께 크게 기뻐했습니다.사도행전 16:34 · 두루새김

이 장에서 두 번째로 집의 문이 열립니다.

앞에서는 강가에서 말씀을 들은 루디아가 바울 일행에게 자기 집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제는 로마 식민 도시의 감옥 제도 안에서 일하던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음식을 차려 줍니다. 두 사람의 처지는 다르지만 흐름은 같습니다. 말씀이 전해지고,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고, 그 믿음은 자기 집을 열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여자 노예는 바울 일행이 「구원받는 길」을 전한다고 외쳤지만(16:17), 그 외침이 어떤 의미로 들렸는지는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간수가 직접 구원받을 길을 묻고,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님을 믿으라고 답하며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점치는 영이 들린 여자가 외쳤던 「구원」이라는 말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으며 기뻐하는 한 집안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한밤중에 시작된 이야기는 한 집의 식탁에서 끝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 바울은 왜 조용히 떠나기를 거부했을까?

사도행전 16:35–40 본문 →

날이 밝자 행정관들이 명령을 집행하는 관리들을 보내 바울과 실라를 풀어 주라고 명합니다.

간수가 바울에게 이 말을 알렸습니다. 「행정관들이 두 분을 풀어 주라고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오셔서 평안히 가십시오.」사도행전 16:36 · 두루새김

아무런 판결도 받지 못한 채 심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던 두 사람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절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행정관들이 보낸 관리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로마 시민인데도, 행정관들은 유죄 판결도 없이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를 몰래 내쫓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사도행전 16:37 · 두루새김

여기서 처음으로 바울과 실라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여자 노예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유대 사람」이라고 부르고, 자신들은 「로마 시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바울과 실라도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로마 제국 안에서는 유대 사람도 로마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고, 고발자들이 로마의 질서를 위협하는 외부인처럼 묘사한 두 사람은 로마법이 시민으로서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에게는 함부로 몸에 가하는 벌과 법적 절차 없는 처벌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특히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공개적으로 몽둥이로 때리는 일은 중요한 법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의 시민권을 알게 된 행정관들이 두려워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 사실을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을까요? 누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말할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고 상황이 너무 급하게 진행되었을 수도 있지만, 본문은 어느 쪽인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일부러 매를 맞으려고 시민권을 숨겼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가 왜 조용히 떠나기를 거부하는지는 그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행정관들은 여러 사람 앞에서 그들을 때리고 감옥에 넣었으면서, 이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몰래 내쫓으려 합니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부당한 대우를 조용히 풀어 주는 것만으로 덮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직접 와서 두 사람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감옥 밖으로 데리고 나와 도시를 떠나 달라고 부탁했습니다.사도행전 16:39 · 두루새김

조금 전까지 옷을 벗기고 매질을 명령하던 행정관들이 직접 찾아와 간청합니다. 그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인정했다거나, 사과하고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강제로 가두었던 사람들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바울이 이토록 공개적인 대응을 요구한 이유로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빌립보에 남게 될 믿는 사람들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도시의 질서를 어지럽힌 범죄자처럼 쫓겨난다면, 남은 믿는 사람들도 같은 혐의를 뒤집어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가가 바울의 동기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으므로, 이것을 확정된 이유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신앙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있는 법적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기도하며 찬양한 사람이지만, 부당하게 권력을 쓰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부당한 대우를 무조건 침묵하며 받아들이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집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믿는 사람들을 만나 격려한 뒤에 떠났습니다.사도행전 16:40 · 두루새김

빌립보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문이 열렸던 그 집에, 이제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감옥에 갇혀 매를 맞은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였습니다. 격려가 필요하다면 그들 자신도 필요했을 것이고, 누가는 그들의 상처가 완전히 나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은 믿는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맺으며 — 빌립보에 남은 집

사도행전 16:1–40 본문 →

빌립보에 남은 그 집에 이르기까지, 이 장에서 구원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루디아의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여셨고, 여자 노예의 장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람을 얽매던 영에 대한 권위를 드러냈으며, 감옥의 장면에서는 주 예수님을 믿으라는 복음이 죽음을 두려워하던 간수에게 전해졌습니다. 다만 이 사건들을 모두 똑같은 종류의 구원 경험으로 묶어서는 안 됩니다. 여자 노예에 대해서는 영이 떠났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그 감옥의 문을 여셨을까요? 누가는 그 목적을 직접 말하지 않지만, 이야기는 한쪽을 가리킵니다. 여자 노예의 주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가두었고, 바울과 실라는 자신이 나갈 수 있는 문이 열렸는데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남았습니다. 그 결과 간수가 살아나고, 그의 집안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본문에서 그 구원은 상처를 씻는 손과 함께 차려진 식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모든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기적의 현장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루디아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오라는 환상은 한 남자의 간청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을 따라 도착한 빌립보에서 마지막으로 독자의 눈에 남는 것은, 집 안에 모여 있는 믿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길을 떠나는 바울과 실라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도시를 떠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음을 열어 주셨던 루디아의 집에는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