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풀어 읽기 · 32장
이 장의 자리 · 31–34장 · 모세의 마지막 말
자신을 낳으신 반석을 잊은 백성
신명기 32장에는 독특한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만나 자기 눈동자처럼 지키셨습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날개 위에 싣듯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거친 땅에서 먹을 것을 주셨고, 마침내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풍요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보지 않으셔서 그분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충분히 받고 배부르게 된 뒤에 그분을 떠났습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을 여러 차례 「반석」이라고 부릅니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반석이 이스라엘을 낳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백성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앞 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훗날 언약을 저버릴 때 그들의 잘못을 증언하도록 노래를 가르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신명기 32:1–43은 바로 그 노래입니다.
모세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합니다.
하늘과 땅을 부르고, 비처럼 말씀을 내리다
심판의 노래가 비와 이슬로 시작되는 이유 (1–3절)
모세는 노래를 시작하면서 하늘과 땅을 부릅니다.
「하늘아, 귀를 기울여라. 내가 말하겠다. 땅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라.」신명기 32:1 · 두루새김
하늘과 땅은 언약의 증인으로 이미 등장한 바 있습니다(신명기 30:19; 31:28). 하지만 여기서 그들은 단순히 증언을 듣는 존재가 아닙니다. 노래 전체의 청중으로 불려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제 온 창조 세계 앞에서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곧바로 심판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내 가르침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기를 바란다. 돋아나는 풀 위의 빗방울처럼, 푸른 풀 위의 소나기처럼 되기를 바란다.」신명기 32:2 · 두루새김
이 표현에서 말씀은 생명을 자라게 하는 물에 비유됩니다. 땅 위의 풀은 스스로 필요한 물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위에서 내리는 비와 이슬을 받아야 자랍니다. 모세는 자신의 가르침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말씀이라고 해서 그 목적까지 파괴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노래는 백성이 자신들의 역사를 바르게 알고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도록 주어진 가르침입니다.
「내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널리 알리니,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인정하여라.」신명기 32:3 · 두루새김
노래의 중심은 이스라엘의 실패 자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앞에서도 의로우시고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흠이 없는 반석과 흠이 있는 백성 (4–6절)
모세는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반석이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완전하다. 그분의 모든 길이 공정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믿을 수 있고 불공정한 일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의롭고 올곧으신 분이다.」신명기 32:4 · 두루새김
이 선언은 앞으로 등장할 심판을 이해하는 기준이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닥친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공정하게 행동하신 것은 아닙니다. 노래는 먼저 하나님의 의로움을 선포한 뒤, 그에 비추어 인간의 행동을 평가합니다.
「그들은 그분께 악한 짓을 했다. 흠이 있는 그들은 그분의 자녀가 아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세대다.」신명기 32:5 · 두루새김
4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완전했습니다. 5절에서는 백성에게 흠이 있습니다.
4절에서 하나님은 올곧으신 분이셨습니다. 5절에서는 백성이 비뚤어지고 뒤틀렸다고 합니다.
다만 5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매우 압축되어 있어 해석이 갈립니다. 원문에는 「타락한 짓을 하다」, 「그분께」, 「아니다」, 「그분의 자녀들」, 「그들의 흠」이라는 말들이 짧게 이어집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흠이 있는 그들은 그분의 자녀가 아니다」라고 옮겼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그 자녀들에게 흠이 있다는 뜻으로 문장을 연결합니다. 이 경우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그들이 타락했다는 사실이 동시에 강조됩니다.
어느 쪽이든 뒤따르는 6절과 20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부모·자녀 관계가 계속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5절의 부정을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적조차 없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노래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백성의 타락이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백성아, 너희는 여호와야훼께 이렇게 보답하느냐? 그분은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아버지가 아니시냐? 그분께서 너희를 만드시고 세우셨다.」신명기 32:6 · 두루새김
여기서 이스라엘의 행동은 단순히 잘못된 판단이 아니라, 자신들이 받은 것에 대한 잘못된 응답으로 묘사됩니다.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이라는 자리에 쓰인 히브리어 카나(קָנָה)는 「얻다」, 「획득하다」, 「소유하게 되다」라는 뜻을 가질 수 있으며, 문맥에 따라 창조와 관련된 의미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뒤에 「만드시고 세우셨다」가 이어집니다. 따라서 세 동사를 모두 똑같은 뜻으로 이해하기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형성하시고 굳게 세우신 여러 측면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과 이스라엘의 타락을 나란히 놓은 모세는 이제 백성에게 과거를 돌아보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가 되돌아보게 하는 과거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저지른 잘못의 역사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세심하게 그들을 돌보셨는지를 먼저 기억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발견하여 자기 눈동자처럼 지키시다
역사를 모르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7–9절)
모세는 백성에게 명령합니다.
「옛날을 기억하여라. 대대로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 보아라. 너희 아버지에게 물어보아라. 너희에게 알려 줄 것이다. 너희 장로들에게 물어보아라. 너희에게 말해 줄 것이다.」신명기 32:7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과거는 개인이 혼자 떠올리는 기억만으로 보존되지 않습니다. 앞선 세대가 경험한 일을 다음 세대에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단순히 옛이야기를 많이 알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께서 민족들에게 땅을 몫으로 나누어 주시고 사람들을 갈라놓으실 때,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맞추어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다.」신명기 32:8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의 몫은 그분의 백성이며, 야곱은 그분의 소유로 정해진 몫이기 때문이다.」신명기 32:9 · 두루새김
가장 높으신 분이 민족들에게 땅을 몫으로 나누어 주셨다는 표현은 여러 민족의 존재와 경계가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몫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는 보통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땅을 물려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로 정해진 몫」이라고 합니다. 백성이 땅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자신의 백성을 자신의 몫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인가, 「하나님의 아들들의 수」인가?
8절에는 실제로 중요한 사본 차이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마소라 본문을 따라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맞추어」라고 옮겼습니다. 이 읽기에서는 하나님이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실 때 이스라엘을 특별히 염두에 두셨다는 의미가 강조됩니다.
그런데 사해사본 가운데 4QDeutʲ(4Q37)는 이 자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로 전합니다. 칠십인역 전승에도 「하나님의 아들들」 또는 「하나님의 천사들」이라는 읽기가 나타납니다. 이 읽기에 따르면 8절은 하나님이 여러 민족의 경계를 정하시고 그들을 하늘의 존재들과 관련하여 배치하시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가 최초의 형태인지는 여기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차이만으로 신명기 32장이 여호와야훼와 「가장 높으신 분」을 반드시 서로 다른 두 신으로 구별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어느 전승을 따르든 노래의 흐름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스라엘이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낸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특별히 속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무엇처럼 돌보셨는가? (10–12절)
「그분께서는 광야 땅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나는 황량한 곳에서 그 백성을 만나셨다. 그들을 감싸고 돌보시며 자기 눈동자처럼 지키셨다.」신명기 32:10 · 두루새김
그들은 광야에서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갖춘 강력한 민족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울부짖는 소리」가 정확히 어떤 소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광야의 거친 자연과 위험한 환경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의 눈동자는 매우 연약하고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무언가가 눈에 닿으려 하면 거의 즉각적으로 눈을 감거나 피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런 눈동자처럼 보호하셨다고 노래합니다.
「독수리가 둥지의 새끼들을 깨우고 그 위를 맴돌듯이, 그분께서는 날개를 펴서 백성을 받아 자기 날개깃 위에 실어 나르셨다.」신명기 32:11 · 두루새김
이 표현을 독수리가 새끼를 둥지 밖으로 떨어뜨려 비행을 훈련시킨다는 특정한 행동의 기록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노래가 분명히 보여 주는 모습은 날개를 펼쳐 새끼를 돌보며 받쳐 주는 부모 새입니다.
눈동자 이미지는 백성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보여 주고, 독수리 이미지는 그들을 어떻게 안전하게 이끄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출애굽기 19:4와의 분명한 연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을 향해 독수리 날개로 그들을 업어 자신에게로 데려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홀로 그들을 이끄셨다. 그분과 함께한 낯선 신은 없었다.」신명기 32:12 · 두루새김
그런데 이스라엘은 훗날 바로 그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의 형태가 바뀌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구원하신 분과 자신들이 섬기는 대상을 뒤바꾸는 일입니다.
바위에서 꿀을, 부싯돌에서 기름을 (13–14절)
모세는 이제 광야의 황량한 곳에서 풍요로운 땅으로 장면을 옮깁니다.
「그분께서 그들이 땅의 높은 곳들을 타고 다니게 하셨고, 그들은 들에서 거둔 것을 먹었다. 그분께서 바위에서 꿀을, 단단한 바위에서 기름을 빨아 먹게 하셨으며,」신명기 32:13 · 두루새김
높은 곳을 타고 다닌다는 표현은 신명기 33:29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며, 땅을 차지하고 그 위에서 승리를 누리는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위와 단단한 바위는 본래 먹을 것을 풍성하게 생산하는 장소로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의 「단단한 바위」(חַלָּמִישׁ)는 원문에서 부싯돌을 가리키는 표현을 옮긴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친 땅에서도 풍성한 공급을 누리게 하셨다는 시적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연환경의 어려움과 그곳에서 누리는 풍성함을 극적으로 대비합니다.
14절에서는 음식이 쏟아지듯 등장합니다.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 숫양과 숫염소, 알차고 기름진 밀알, 포도주입니다.
광야에서 살아남은 백성이 이제 풍요로운 식탁을 누립니다.
10절에서 시작된 주어는 계속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만나시고, 돌보시고, 지키시고, 이끄시며, 마침내 먹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그 모든 것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14절 끝에서는 「너희는 포도의 피인 포도주를 마셨다」라고 직접 백성을 향해 말합니다. 노래는 하나님이 베푸신 풍요를 한껏 보여 준 뒤, 그 풍요를 누리는 이스라엘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장면이 뒤집힙니다.
배부르게 된 이스라엘이 생명의 근원을 버리다
여수룬은 누구인가? (15절)
「여수룬은 살이 찌자 발길질했다. 너희는 살이 찌고 몸이 불어나 기름기로 뒤덮였다. 이 백성은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다.」신명기 32:15 · 두루새김
여수룬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특별한 명칭입니다.
「올곧은 자」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을 가진 이스라엘이 정작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발길질했다」라는 표현은 살이 찌고 힘이 넘치는 가축이 통제를 거부하며 발길질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독수리 날개 위에 실려 보호받던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배부르고 강해지자 자신들을 돌보신 하나님을 향해 반항합니다.
이 구절은 풍요 자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풍요는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선물을 누리는 사람이 자신의 생명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신들과 오래된 은혜 (16–17절)
이스라엘은 낯선 신들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낯선 신들을 섬겨 그분의 질투를 일으키고, 역겨운 것들로 그분을 노하게 했다.」신명기 32:16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를 저버리고 다른 대상들에게 충성을 바칩니다. 그 배신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질투라는 언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악한 영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자기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최근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않던 신들에게 바쳤다.」신명기 32:17 · 두루새김
「악한 영들」이라는 표현을 후대 기독교에서 발전한 악령에 관한 모든 세부 개념과 곧바로 같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존재들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과, 그 대상들이 참으로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이 제물을 바치는 대상들은 그 역사와 무관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지키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경험한 구원의 역사를 뒤로하고, 새롭게 등장한 신들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상숭배는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잘못 아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역사를 거짓되게 읽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반석이 아이를 낳았다는 말 (18절)
모세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부릅니다.
「너희는 너희를 낳으신 반석을 소홀히 대했다. 고통을 겪으며 너희를 낳으신 하나님을 잊었다.」신명기 32:18 · 두루새김
단단한 바위와 아이를 낳는 부모의 모습이 하나의 하나님 안에 겹쳐집니다.
하나님은 6절에서 아버지라고 불리셨습니다. 그러나 18절에서는 출산의 이미지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주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반석은 단단하고 변함없는 것을 나타냅니다. 출산은 생명이 시작되는 사건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들을 지탱하시는 분이면서, 그들이 존재하게 된 근원이십니다.
자신을 도와준 은인을 잊은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을 낳아 주신 부모를 잊은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관계를 저버렸습니다.
이제 노래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는 출산과 관련된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두루새김은 앞부분을 「너희를 낳으신 반석」으로, 뒷부분을 「고통을 겪으며 너희를 낳으신 하나님」으로 옮겼습니다. 특히 뒷부분에서는 출산의 과정과 관련된 동사의 뜻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남성이나 여성의 생물학적 범주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언어로 표현하면서,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왜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는가
신실하지 못한 자녀에게서 얼굴을 숨기다 (19–21절)
「여호와야훼께서 이를 보시고 그들을 내치셨다. 그분의 아들딸들이 그분을 노하게 했기 때문이다.」신명기 32:19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낳으신 하나님을 잊었지만, 노래에서는 「그분의 아들딸들」로 불립니다.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그분의 백성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에게서 얼굴을 숨기고 그들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보겠다. 그들은 뒤틀린 세대, 믿을 수 없는 자녀들이기 때문이다.』」신명기 32:20 · 두루새김
앞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눈동자처럼 보호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숨기십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가까이 두고 지키셨지만, 백성은 그분을 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자신의 보호와 호의를 거두시는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신도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고, 헛된 우상들로 나를 노하게 했다. 나 또한 백성이라 할 수 없는 자들로 그들의 질투를 일으키고,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을 노하게 하겠다.』」신명기 32:21 · 두루새김
이스라엘이 「신도 아닌 것」으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자, 하나님은 「백성이라 할 수 없는 자들」로 이스라엘의 질투를 일으키십니다. 이 표현은 의도적으로 서로 대응합니다.
다만 「백성이라 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말을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으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문맥에서는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지위와 대비되는 민족을 가리키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특별한 지위가 하나님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땅의 기초까지 타오르다 (22–25절)
22절부터는 하나님의 심판이 강렬한 시적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내 분노에서 불이 붙어 가장 깊은 스올까지 타들어 갔기 때문이다. 그 불은 땅과 그 수확물을 삼키고, 산의 밑바닥까지 불태웠다.』」신명기 32:22 · 두루새김
스올(שְׁאוֹל)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가장 깊은 곳까지 불이 타들어 간다는 극단적인 이미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래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렵고 피할 수 없는 것인지를 온 세계에 미치는 이미지로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23–25절에서는 재앙들이 화살처럼 쌓입니다. 굶주림, 불길, 모진 재앙, 짐승의 이빨, 독, 칼과 공포가 등장합니다.
「『밖에서는 칼이, 방 안에서는 공포가 가족의 목숨을 앗아 갈 것이다. 젊은 남자도 처녀도, 젖먹이도 백발의 노인도 그렇게 될 것이다.』」신명기 32:25 · 두루새김
집은 바깥의 위험을 피해 들어가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제 집 안에서도 안전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회적 역할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재앙이 공동체 전체를 휩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28장에서 제시된 전쟁과 기근과 멸망의 경고를 시적인 언어로 압축한 장면입니다.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해 현대 독자가 기대할 법한 완전한 도덕철학적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언약에 따른 심판을 공동체 전체의 재앙으로 묘사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 시적 표현을 모든 시대의 전쟁과 재난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행동 방식으로 확대하거나, 무고한 사람의 고통을 쉽게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심판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이야기의 방향이 바뀝니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는 뜻밖의 이유 (26–27절)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을 산산이 부수고,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을 없애 버리겠다고 했다.』」신명기 32:26 · 두루새김
이스라엘이라는 백성 자체가 역사에서 사라질 만큼 철저한 심판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27절에서 그 일을 그대로 실행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원수들이 나를 도발할까 염려하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의 적들이 이 일을 잘못 생각하여, 자기들이 힘을 떨친 것이며 이 모든 일은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고 말할까 염려했다.』」신명기 32:27 · 두루새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미 충분히 선해졌기 때문에 심판을 멈추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데 사용된 원수들이 그 승리를 자신들의 능력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염려했다」는 표현을 하나님이 실제로 적들에게 위협을 느끼신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행동이 잘못 해석되는 일을 고려하신다는 뜻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32:12와 민수기 14:13–16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드렸던 간청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면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오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32장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그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단지 백성의 성품이나 업적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자신의 이름과 행하신 일의 참된 의미가 왜곡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는 역사입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의 「불길과 모진 재앙」에서, 이 표현들은 불타는 재앙이나 심한 전염병과 연결되어 이해되며, 고대에는 재앙을 일으키는 존재들의 이름과 관련하여 읽힐 여지도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 질병이나 특정 신의 이름으로 하나의 해석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26절의 「산산이 부수고」는 「조각내어 부수다」 또는 「흩어 버리다」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지만,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이 앞부분의 뜻을 밝혀 줍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을 없애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패배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누가 분별을 잃었는가?
모세는 이제 말합니다.
「그들은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신명기 32:28 · 두루새김
「그들이 지혜로워서 이 일을 깨닫고 자기들의 끝이 어떨지 헤아렸다면 좋았을 것이다.」신명기 32:29 · 두루새김
그런데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원수들입니까?
28–29절을 이스라엘에 관한 말씀으로 읽으면, 백성이 자신들에게 일어난 재앙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앞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고 어리석게 행동했다는 비판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반면 바로 앞의 27절에서는 원수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기들의 공로로 오해할 위험을 말합니다. 따라서 28–29절을 그 원수들의 무지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 모두 문맥상의 근거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28절에서 대상을 새로운 명사로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쪽이 맞는지 문법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패배한 사람도 승리한 사람도 하나님의 행동을 잘못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노래가 요구하는 지혜는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아는 능력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한 사람이 천 명을 쫓는 이유
모세는 질문합니다.
「그들의 반석께서 그들을 팔아넘기시고 여호와야훼께서 적에게 내주신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천 명을 뒤쫓고 두 사람이 만 명을 달아나게 하겠느냐?」신명기 32:30 · 두루새김
「팔아넘기시고」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백성을 적의 손에 넘겨주시는 일을 강렬하게 나타냅니다. 그들을 보호하시던 분이 심판 가운데 그들을 적의 손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4절에서는 반석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완전하다고 했습니다. 15절에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반석이셨습니다. 18절에서는 그들을 낳으신 반석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반석이 그들을 적에게 넘겨주십니다.
「그들의 반석은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않다. 우리 원수들도 그렇게 판단한다.」신명기 32:31 · 두루새김
여기서 「그들의 반석」은 원수들이 의지하는 신을, 「우리의 반석」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 원수들도 그렇게 판단한다」로 옮긴 원문 표현은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는 원수들조차 두 반석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원수들이 현재 이스라엘을 지배하거나 심판하는 위치에 있다는 뜻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 경우 약한 신을 의지하는 자들이 오히려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다는 역설이 강조됩니다.
히브리어에는 ‘원수들’과 ‘판단하는 자들’이라는 말이 이어지지만,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판단하는지 설명하는 동사가 따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원문에서 어느 해석이 유일하게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30–31절에서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패배를 원수들의 신이 하나님보다 강해졌다는 증거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적에게 넘겨진 것은 그들을 지키시던 하나님께서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소돔의 포도나무와 독이 든 포도주
이어서 모세는 또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에서, 고모라의 밭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포도에는 독이 들었고, 포도송이는 쓰디쓰다.」신명기 32:32 · 두루새김
「그들의 포도주는 큰 뱀의 독이며 독사의 지독한 독이다.」신명기 32:33 · 두루새김
앞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포도주를 마셨습니다(14절). 그런데 여기서는 포도주가 독이 되었습니다. 풍성한 땅에서 맺히는 열매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가져옵니다.
원수들의 악함을 묘사한다고 읽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사용하신 민족들 역시 스스로 악하고 심판받아야 할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앞의 27절에서 원수들의 오만을 경고하고 뒤의 35절에서 갚아 주겠다고 선언한다는 점은 첫 번째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이스라엘의 타락을 계속 묘사한다고 읽으면, 하나님이 주신 좋은 땅에서 자라난 백성의 행위가 독한 열매를 맺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반면 이 노래가 계속 이스라엘의 배반을 다루고 있다는 점과 포도주 이미지의 대조는 두 번째 읽기에도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나타나는 폭력과 악함을 단순히 승리의 결과로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잘못인 것처럼, 그들을 공격하는 원수들의 오만과 악함도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보응은 하나님께 속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것을 내가 간직하고, 내 창고에 봉해 두지 않았느냐?』」신명기 32:34 · 두루새김
바로 앞의 악한 열매와 뒤의 갚아 주겠다는 말씀을 고려하면, 하나님이 악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그에 대한 심판을 간직하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본문이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으므로, 특정한 민족의 죄나 특정한 재앙 하나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발이 미끄러질 때, 복수하고 갚아 주는 것은 내 몫이다. 그들에게 재난이 닥칠 날이 가깝고, 그들이 겪을 일이 빠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신명기 32:35 · 두루새김
악에 대해 최종적으로 갚아 주는 일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원수들이 악하다고 해서 보복을 자신의 뜻대로 행사할 권한을 자동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구절을 모든 개인적 갈등에 적용할 수 있는 단순한 보복 금지 명령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래 문맥에서는 민족들의 폭력과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히 힘을 잃은 이스라엘에게는 어떤 일이 남아 있습니까?
힘이 다한 백성을 가엾게 여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언제 자신의 백성을 가엾게 여기시는가?
「여호와야훼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판결하시고 자기 종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그들의 힘이 다하고, 갇힌 사람도 풀려난 사람도 남지 않은 것을 보실 때 그렇게 하실 것이다.」신명기 32:36 · 두루새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가엾게 여기시는 때는 그들이 다시 강해져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때가 아닙니다.
그들의 힘이 다한 때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전처럼 자신들의 군사력과 풍요를 의지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무력함을 좋아하시거나 고난 자체를 선한 것으로 여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백성의 힘이 다한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을 처음 선택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은 그들의 강함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완전히 약해진 뒤에도 그분의 불쌍히 여기심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신들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이 섬겼던 다른 신들을 향해 질문하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실 것이다. 『그들의 신들, 그들이 피할 곳으로 삼던 반석은 어디 있느냐?』」신명기 32:37 · 두루새김
「『그들이 바친 제물의 기름을 먹고 부어 바친 포도주를 마시던 그 신들 말이다. 그 신들이 일어나 너희를 돕게 해 보아라. 너희를 숨겨 주는 곳이 되게 해 보아라.』」신명기 32:38 · 두루새김
그들이 의지하던 대상들의 무력함을 드러내기 위해 거꾸로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반석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른 대상들을 자신들이 피할 곳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참된 반석을 버리고, 자신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반석을 의지했습니다.
「나, 바로 내가 하나님이다」
노래는 이제 절정에 이릅니다.
「『이제 보아라. 나, 바로 내가 하나님이다. 나와 함께 다른 신은 없다. 내가 죽이고 살린다. 내가 상처를 입혔고 내가 고친다. 내 손에서 건져 낼 자는 없다.』」신명기 32:39 · 두루새김
이 선언은 12절의 「여호와야훼께서 홀로 그들을 이끄셨다. 그분과 함께한 낯선 신은 없었다」와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도 다른 신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심판하실 때도 다른 신에게 힘을 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실 때도 다른 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죽음과 생명, 상처와 치유가 나란히 놓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모든 개별적인 죽음과 질병을 특정한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로 일으키신다는 뜻으로 넓혀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노래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권한뿐 아니라 그들을 다시 살리고 고치실 권한까지 가지고 계시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희망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달아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심판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다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칼을 드시는 이유
39절의 자기 선언에 이어 하나님은 맹세하십니다.
「『내가 하늘로 손을 들고, 영원히 살아 있는 나를 두고 맹세한다.』」신명기 32:40 · 두루새김
인간은 자신보다 높은 권위를 두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그분의 맹세는 다른 권위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내가 번쩍이는 칼을 갈고 내 손으로 심판을 행할 때, 내 적들에게 복수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갚아 주겠다.』」신명기 32:41 · 두루새김
42절에서는 칼과 화살이 피와 살을 먹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이것은 매우 거친 전쟁의 시적 언어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은 원수들에 대한 끝없는 민족적 증오를 정당화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칼과 화살을 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에게 모든 적을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데 사용된 폭력을 행한 자들조차 하나님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민족들이 노래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유
노래의 마지막은 민족들을 향한 부름입니다.
「민족들아, 그분의 백성을 소리 높여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자기 종들이 흘린 피에 대해 복수하시고, 자기 적들에게 갚아 주시며,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해 속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신명기 32:43 · 두루새김
노래는 처음에 하늘과 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민족들을 부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넘어 온 세계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문맥상으로는 흘린 피에 대한 심판과 더럽혀진 땅과 공동체의 관계를 바로잡는 행위가 함께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단지 개인의 마음속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의 삶과 그들이 받은 땅 전체가 심판을 경험했습니다.
회복에는 언약을 깨뜨린 죄와 흘린 피, 땅과 공동체가 입은 상처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다시 살리시는 분일 뿐 아니라, 그들의 역사를 바로잡으시는 분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36절의 「판결하시고」는 문맥에 따라 백성을 심판한다는 뜻으로도, 백성을 위해 판결하여 그들의 권리를 회복시킨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뒤에 나오는 불쌍히 여기심과 원수들에 대한 심판을 고려하여 「자기 백성을 위해 판결하시고」로 옮겼습니다. 또한 「갇힌 사람도 풀려난 사람도 남지 않은 것」이라는 표현은 서로 반대되는 처지를 나타내는 말들의 결합입니다. 공동체가 더 이상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남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39절의 원문에서는 ‘나, 내가 바로 그다’라는 반복이 강조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나, 바로 내가 하나님이다」로 옮겼습니다. 또한 42절의 「원수의 지도자들의 머리」라는 표현에는 원어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파르오트는 지도자나 우두머리와 관련된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풀어헤친 머리털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근거로 특정한 군사적 계급이나 처형 방식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43절의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민족들이여’와 ‘그분의 백성’이라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이를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찬양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기뻐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찬양과 기쁨의 대상은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과 심판이 됩니다. 사해사본 4QDeutᑫ(4Q44)와 칠십인역에는 마소라 본문보다 긴 형태의 노래 결말이 전해집니다. 그 전승에는 하늘과 하늘의 존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그분께 경배하도록 부르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어느 형태가 반드시 원래 모습이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명기 32:43에는 구체적인 제물이나 제사 절차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속죄가 정확히 어떤 의식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의 노래는 백성의 생명을 위한 말씀이다
호세아와 함께 노래를 들려주다
43절에서 노래 자체는 끝납니다.
이제 다시 이야기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모세는 와서 눈의 아들 호세아와 함께 백성에게 이 노래의 모든 말을 들려주었습니다.신명기 32:44 · 두루새김
여기서는 여호수아가 아니라 「호세아」라는 이름이 사용됩니다. 민수기 13:8에서는 눈의 아들이 호세아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민수기 13:16에서는 모세가 그의 이름을 여호수아라고 불렀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왜 이 자리에서 옛 이름이 사용되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마지막 가르침을 새 지도자가 함께 듣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래가 모세 개인의 생애에만 속한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 말은 앞으로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따라가야 합니다.
「헛된 말이 아니다. 바로 너희의 생명이다」
모세는 노래를 다 들려준 뒤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하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어라. 너희 자녀에게도 이 가르침의 모든 말씀을 잘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여라.」신명기 32:46 · 두루새김
「이것은 너희에게 헛된 말이 아니다. 바로 너희의 생명이다. 너희는 이 말씀으로, 요단강을 건너가 차지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신명기 32:47 · 두루새김
노래에는 비와 이슬, 독수리와 반석, 포도주와 독, 칼과 화살, 하나님의 분노와 불쌍히 여기심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말을 단지 감상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노래의 내용을 행하는 일이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30:20에서 하나님께 붙어 있는 삶을 생명과 오래 사는 날들의 근거로 제시한 내용과 이어집니다. 그러나 32장의 독특한 강조는 바로 그 생명의 말씀이 심판과 배반에 관한 노래의 형태로 주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는 말씀도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잘못을 알아보게 하는 말씀이야말로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32장은 이 말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모세가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바로 그날,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장면은 산으로 옮겨집니다.
땅을 바라보지만 들어가지 못하는 모세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엇을 보라고 하시는가?
모세는 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의로움과 백성의 불순종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모세 자신의 마지막 길을 말씀하십니다.
「이 아바림 산지의 느보산으로 올라가라. 그 산은 모압 땅 여리고 맞은편에 있다. 거기에서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는 가나안 땅을 보아라.」신명기 32:49 · 두루새김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땅을 차지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주어진 마지막 허락이면서 동시에 분명한 한계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끌어 온 백성이 들어갈 땅을 보게 되지만, 그들과 함께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산에서 죽어 친족들에게로 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형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은 것처럼 모세도 그곳에서 자신의 생애를 마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유도 말씀하십니다.
「친 광야에 있는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너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나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나를 거룩하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신명기 32:51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민수기 20:1–13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곳에서 백성은 물이 없다고 불평했고,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모인 백성 앞에서 반석에게 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을 꾸짖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이 나왔지만,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이 자신을 믿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나타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민수기 20:12).
신명기 32:51은 그 사건을 「나를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모세의 행동이 단순히 지팡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잘못 선택한 기술적인 실수가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분을 어떤 분으로 드러냈느냐에 있습니다.
물론 민수기 20장의 모든 세부 행동이 각각 어느 정도의 잘못인지를 성경이 항목별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잘못을 특정한 몸짓 하나로만 좁혀 볼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거룩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노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완전하고 그분의 모든 길이 공정하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 노래를 전한 모세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판단이 적용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보기는 하지만 들어가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맞은편에서 그 땅을 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는 그 땅으로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신명기 32:52 · 두루새김
그렇다고 이것을 하나님이 모세의 모든 수고를 가치 없게 여기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모세에게 땅을 바라보도록 허락합니다. 또한 그가 이룬 지도자의 역할은 여호수아를 통해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의 사명과 그의 한계는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모세는 백성을 약속의 땅까지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 땅에 들어가 살아갈 백성의 미래까지 자신의 삶 안에 소유하는 역할을 맡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세의 생애보다 큽니다.
끝맺으며 — 느보산 위에서 바라보는 땅
신명기 32장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해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노래하면서, 그 신실하심 앞에서 누구도 자신의 불성실함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분과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과 맺은 관계를 진지하게 대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배반을 심판하시고, 바로 그 관계를 진지하게 대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회복도 이루십니다.
그런데 긴 노래가 끝난 뒤에는 한 사람의 노인이 남습니다.
모세입니다. 그는 이제 느보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산에 오르면 요단강 너머의 땅이 보일 것입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백성을 이끌어 온 목적지가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모세가 바라보는 땅은 여전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약속을 취소하지는 않습니다.
모세의 길은 여기서 끝나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이끄시는 일은 끝나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 말씀을 모두 전했습니다. 이제 그는 산에 올라, 자신이 들어가지 못할 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곳에서 그가 보게 될 것은 자신의 소유가 된 땅이 아닙니다.
자신을 넘어 계속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