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풀어 읽기 · 33장

이 장의 자리 · 31–34장 · 모세의 마지막 말

서로 다른 지파를 품으시는 하나님

신명기 33장은 뜻밖의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빌어 준 복은 이러합니다.신명기 33:1 · 두루새김

죽음을 앞둔 모세가 마지막으로 백성에게 남기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놀라울 만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지파에게는 살아남기를 빌고, 어떤 지파에게는 전쟁에서 도움을 받기를 구합니다. 어떤 지파에게는 하나님 곁에서 안전하게 살기를 기원하고, 어떤 지파에게는 기름진 땅과 풍성한 수확을 약속합니다. 또 어떤 지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제사를 드리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복은 이렇게 서로 다릅니까?

앞 장의 노래가 이스라엘의 배반과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했다면, 이 장은 그와 같은 미래를 앞둔 백성에게도 모세가 축복을 남긴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백성이 들어가 살아갈 땅과 각 지파의 삶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품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드러냅니다.

먼저 1–5절에서는 시나이에서 나타나시고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이어 6–25절에서는 개별 지파들의 서로 다른 삶을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26–29절에서는 다시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그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작하여 지파들의 삶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구조입니다.

읽는 시간 32분소단락 733장 본문 읽기 →

축복은 시나이에서 오시는 하나님으로 시작된다

신명기 33:1–5 본문 →

하나님이 빛처럼 떠오르신다

모세는 곧장 지파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모세가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시나이에서 오시고, 세일에서 백성에게 떠오르셨다. 바란산에서 빛을 비추시며, 거룩한 수만의 무리 가운데서 오셨다. 그분의 오른손에서 백성에게 불의 법이 나왔다.」신명기 33:2 · 두루새김

시나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그분의 말씀을 받은 장소입니다. 세일은 에돔과 관련된 산악 지대이고, 바란은 광야와 관련된 지역입니다. 이 장소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지나온 남쪽의 광야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구절은 지리적인 여행 기록보다 하나님의 장엄한 출현을 묘사하는 시적 표현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떠오르는 해처럼 묘사되시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미지는 사사기 5:4–5에서도 발견됩니다. 드보라의 노래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세일에서 나오시고 에돔 들판에서 행진하실 때 땅이 흔들리고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노래합니다. 하박국 3:3–4에서도 하나님이 바란산에서 오시며 그분의 빛이 하늘을 덮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신명기 33장에서는 하나님의 출현이 단순히 적을 물리치는 힘으로만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손에서 백성에게 말씀이 주어집니다.

모세는 백성이 풍요로운 땅에 들어가 살아갈 미래를 축복하기 전에, 그들의 삶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셔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세우시고, 살아갈 말씀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지파들이 누릴 땅과 풍요와 안전은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된 선물이 아닙니다.

율법은 부담인가, 상속 재산인가?

3절에서는 하나님의 위엄 있는 출현이 갑자기 친밀한 관계의 언어로 바뀝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거룩한 이들은 모두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발치에 모여들었고, 저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신명기 33:3 · 두루새김

「백성들」과 「거룩한 이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완전히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거룩한 백성으로 묘사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앞 절에 등장한 거룩한 무리와 연결하여 하늘의 존재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발치에 모여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습과 4절의 가르침에 대한 선언을 고려하면,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에게서 말씀을 받는 관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분의 위엄 앞에 있는 이들은 무작정 도망치는 존재들이 아니라 그분의 발치에 모여 말씀을 듣습니다.

「모세가 우리에게 가르침을 명령했다. 그것은 야곱의 모임이 물려받을 몫이다.」신명기 33:4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곧 땅을 물려받게 됩니다. 지파들은 각각 자신들이 물려받을 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들의 공동 유산입니다.

땅은 지파마다 서로 다른 몫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지파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어떤 지파는 좁은 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파마다 땅의 몫은 달라도, 그들이 물려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땅을 얻기 위해 잠시 지켜야 하는 조건이나, 땅에 들어간 뒤에는 불필요해지는 임시 규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계속 살아가도록 주어진 유산입니다.

모세가 노래를 전하는 장면인데, 문장 안에서는 모세가 삼인칭으로 등장하고 「우리」라는 공동체의 목소리가 나타납니다. 이를 백성이 함께 부르는 선언처럼 읽을 수 있지만, 원문에 별도의 화자 표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실제로 어느 무리가 이 부분을 노래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문학적으로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모세 개인에게 속한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신들의 유산으로 고백하는 말씀이라는 효과를 냅니다.

또한 신명기 33:4의 가르침을 「물려받을 몫」으로 받는다는 표현은 시편 119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한 소유로 여기는 태도와 주제상 연결됩니다. 특히 시편 119:111에서는 하나님의 증언들을 영원한 유산으로 삼았다고 고백합니다.

여수룬의 왕은 누구인가?

「백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지파들이 함께 모였을 때, 하나님께서 여수룬의 왕이 되셨다.」신명기 33:5 · 두루새김

여기서 여수룬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특별한 이름입니다. 두루새김은 「하나님께서 여수룬의 왕이 되셨다」라고 옮겼지만, 원문은 왕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앞에서 여호와야훼의 출현과 가르침을 주시는 일을 노래했으므로, 왕을 여호와야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모든 지파가 모인 공동체 위에 실제로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왕을 모세와 연결합니다. 바로 앞에서 모세가 가르침을 명령했다고 말하고, 그가 백성의 지도자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33:5의 원문은 모세를 왕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해석도 원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모든 지파가 함께 모인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전체 공동체가 먼저 등장한 뒤에야 개별 지파들의 이름이 불리기 시작합니다. 지파의 독특한 삶은 이스라엘 전체에 속한 삶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불의 법」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특별히 어려운 표현입니다. 전통적으로 읽어 온 형태를 따르면 에쉬 다트, 곧 ‘불’과 ‘법’이라는 두 낱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로 기록된 형태는 한 낱말이며, 그 뜻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칠십인역은 이 자리에서 ‘그분과 함께한 천사들’을 언급하므로 히브리어의 전통적인 읽기와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하나님이 손으로 불타는 율법책을 들고 계셨다거나, 하늘에서 불로 기록된 법을 내려 주셨다고 구체화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두루새김의 읽기에서는 불과 법이 결합되어 하나님의 장엄한 출현과 율법을 주시는 일이 하나의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출애굽기 19:18에서 시나이산이 불과 연기 가운데 나타난 장면과도 어울립니다.

르우벤과 유다와 레위 — 살아남고, 돌아오고, 말씀을 지키다

신명기 33:6–11 본문 →

르우벤의 축복은 왜 이렇게 짧은가?

「르우벤은 사람 수가 적더라도 살고 죽지 않기를 바란다.」신명기 33:6 · 두루새김

다른 지파에게는 풍성한 땅이나 강한 군사력이 약속되는데, 르우벤에게는 먼저 생존이 언급됩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맏아들이었습니다(창세기 29:32). 그러나 창세기 35:22에서 그는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했고, 창세기 49:3–4에서 야곱은 그의 맏아들로서의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그가 뛰어난 지위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배경은 르우벤이 신명기 33장에서 왜 비교적 제한적인 축복을 받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33:6이 직접 그 사건을 언급하거나 르우벤의 과거 잘못 때문에 이 축복이 짧다고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두루새김은 「사람 수가 적더라도 살고 죽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옮겼습니다. 사람이 적다는 말을 살아남기를 바라는 축복에 연결한 것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읽으면 살고 죽지 않기를 바란 뒤, 사람들의 수가 적기를 바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의 문맥에서는 다소 어색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앞부분의 부정어가 뒷부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읽어, 르우벤의 사람들이 적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축복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의 문법적 근거가 서로 다르므로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모세는 르우벤이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화려한 승리나 특별한 지위가 없어도, 한 지파가 계속 존재하고 그 생명을 이어 가는 것 자체가 축복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유다에게는 승리보다 먼저 들으심을 구한다

유다의 축복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시작합니다.

모세는 유다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여, 유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를 그의 백성에게 데려와 주십시오. 그의 두 손에 충분한 힘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적들에게 맞서 그를 도와주십시오.」신명기 33:7 · 두루새김

본문은 유다가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하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유다가 적들과 맞서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두 손에 충분한 힘이 있기를 바랍니다」에 해당하는 말은 원문에서도 짧고 어려운 구절입니다. 두루새김처럼 자신의 손으로 싸울 수 있는 힘을 갖추기를 바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그가 손으로 하는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다에게는 자신의 손이 있습니다. 적과 맞서 행동해야 하는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손만으로는 충분하다고 선언되지 않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를 도우시기를 구합니다.

또한 「그를 그의 백성에게 데려와 주십시오」라는 말에는 전쟁에 나간 사람이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는 모습을 떠올릴 여지가 있습니다. 이 경우 축복은 단순히 적을 물리치는 승리만이 아니라, 싸움을 마치고 자기 공동체로 돌아오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창세기 49:8–12에서도 유다는 형제들 가운데 특별한 지위와 사자의 이미지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33장은 그에게 왕권이나 후손의 왕조를 직접 약속하지 않습니다.

힘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축복은 자기 힘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아니라, 그 힘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위험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레위에게 필요한 것은 땅보다 분별의 도구다

레위의 축복은 다른 지파들과 분위기가 크게 다릅니다.

모세는 레위에 관해 말했습니다. 「주님의 툼밈과 우림이 주님께 충실한 사람에게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맛사에서 그를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습니다.」신명기 33:8 · 두루새김

우림과 툼밈은 출애굽기 28:30에서 제사장의 판결 가슴받이에 두도록 명령된 것입니다. 사무엘상 28:6에서는 하나님께 뜻을 묻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우림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도구의 구체적인 모양과 사용 절차는 성경이 충분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레위는 다른 지파들처럼 넓은 영토를 축복받는 대신, 공동체가 하나님의 판단을 구할 때 맡게 되는 역할과 연결됩니다. 제사장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종교적인 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1–7에서 이스라엘은 물이 없다고 다투었고, 그곳은 맛사와 므리바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민수기 20:1–13에도 므리바 물 사건이 등장합니다.

다만 신명기 33:8은 레위 또는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이 그곳에서 어떻게 시험받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의 단수형 인물을 레위 지파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고, 제사장을 대표하는 인물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어느 한 사건의 특정 인물에게만 적용하여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전달해야 할 일이 시험과 갈등을 통과한 충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가족보다 언약을 앞세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레위의 축복에서 가장 충격적인 표현은 9절입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고 『나는 그들을 모른다』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자기 형제들도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 자녀들도 아는 체하지 않았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켰고 주님의 언약을 지킬 것이기 때문입니다.」신명기 33:9 · 두루새김

이 말씀을 부모와 형제를 무시하고 가족을 버리는 일이 신앙적인 덕목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맥에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충성이 혈연관계보다 우선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32:25–29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 모세는 여호와야훼 편에 선 사람을 불렀고, 레위 자손들이 그에게 모였습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심판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가까운 가족과 형제의 관계보다 여호와야훼께 대한 충성이 우선된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신명기 33:9가 그 사건을 직접 인용한다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혈연관계보다 언약의 충성을 앞세우는 표현은 분명히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32장의 사건에는 사람을 죽이는 심판이 등장합니다. 신명기 33장은 그 기억을 언약을 지킨 충성의 언어로 나타냅니다. 이러한 고대 이스라엘의 특정한 언약적 심판을 오늘날 개인이나 종교 공동체가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관계를 단절하는 명령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제사를 맡은 사람은 자신의 가족이나 가까운 집단의 이익을 언제나 최우선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편들기 위해 진실이나 공정한 판단을 굽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레위의 손은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가?

10절은 레위가 맡을 일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법을 야곱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주님 앞에 향을 피워 올리고, 주님의 제단에 번제를 바칠 것입니다.」신명기 33:10 · 두루새김

레위가 맡은 일은 단순히 성소의 의식을 유지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알 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유다의 손은 적들과 맞서는 상황에서 등장했습니다. 반면 레위의 손은 제단에서 봉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일과 연결됩니다.

같은 이스라엘 안에서도 손이 하는 일은 다릅니다.

「여호와야훼여, 그의 힘에 복을 내리시고 그가 손으로 하는 일을 기쁘게 받아 주십시오. 그에게 맞서 일어나는 자들과 그를 미워하는 자들의 허리를 쳐부수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신명기 33:11 · 두루새김

제사장은 제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맡은 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바르게 수행하고, 그 일이 그분께 받아들여지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베냐민과 요셉 — 하나님의 품과 풍요로운 땅

신명기 33:12–17 본문 →

베냐민은 어디에서 안전을 얻는가?

베냐민의 축복은 짧지만 매우 친밀합니다.

모세는 베냐민에 관해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 사랑받는 이는 그분 곁에 안전하게 살 것이다. 그분께서 그를 온종일 감싸 주시며, 그는 그분의 두 어깨 사이에 머물 것이다.」신명기 33:12 · 두루새김

다른 지파의 축복이 넓은 땅이나 적을 이기는 능력을 이야기하는 데 비해, 베냐민에게는 하나님과의 가까움이 중심에 놓입니다. 그의 안전은 자신이 얼마나 강한가보다 자신을 감싸시는 분이 누구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복이 반드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보호받으며 안전하게 머무는 것 또한 복입니다.

요셉의 땅에 쏟아지는 풍요

요셉의 축복은 앞선 지파들에 비해 유난히 길고 풍성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 땅 아래 깊은 물, 햇볕으로 자라는 수확물, 달마다 나는 열매, 예부터 있던 산과 오래된 언덕의 귀한 것들이 모두 등장합니다. 모세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계절에서 지형으로 움직입니다.

이스라엘의 농경 생활은 하늘과 땅의 공급에 의존합니다. 사람은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릴 수 있지만, 하늘에서 이슬을 내리게 하거나 햇볕이 농작물을 자라게 하는 모든 조건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가 16절에서 예상 밖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땅과 거기에 가득한 귀한 것들로, 가시덤불에 머무시는 분의 호의로 복을 받기를 바란다. 이 복이 요셉의 머리에, 형제들 가운데 구별된 이의 머리 꼭대기에 내리기를 바란다.」신명기 33:16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출애굽기 3:1–6에서 모세가 가시덤불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불이 붙었지만 타서 없어지지 않는 가시덤불을 보았고, 하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늘과 땅, 햇볕과 달, 예부터 있던 산들의 풍성함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복의 근원으로 광야의 작은 가시덤불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불러냅니다.

죽음을 앞둔 모세는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던 장면과 연결되는 이름으로 요셉의 축복을 빌고 있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만났던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이 들어갈 땅의 풍요를 주시는 분으로 찬양되십니다.

형제들 가운데 구별된 요셉

모세는 이 모든 복이 요셉의 머리에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구별된 이」는 형제들 가운데 특별히 구별된 요셉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창세기 49:25–26에서도 야곱은 요셉에게 하늘과 깊은 곳의 복, 태와 젖의 복을 빌어 주며 형제들 가운데 구별된 그의 머리에 복이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신명기 33장의 요셉 축복은 그 표현들과 상당히 가까운 관계를 가집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풍요로운 농경 이미지가 갑자기 강한 짐승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그는 첫 새끼로 태어난 수소처럼 위엄이 있고, 그의 뿔은 들소의 뿔이다. 그 뿔로 민족들을 한꺼번에 땅끝까지 들이받을 것이다. 그 뿔은 에브라임의 수만 명과 므낫세의 수천 명이다.」신명기 33:17 · 두루새김

고대의 뿔은 짐승의 힘과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요셉에게는 풍성한 땅뿐 아니라 외부의 위협에 맞설 힘도 축복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스라엘에서 각각 지파의 위치를 갖습니다. 에브라임이 수만 명으로, 므낫세가 수천 명으로 묘사되는 것은 에브라임이 상대적으로 더 우세함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특정한 역사적 시점의 정확한 인구 통계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48:13–20에서 야곱이 손자들에게 축복할 때의 장면과 연결됩니다. 므낫세가 형이었지만 야곱은 오른손을 어린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에브라임이 형보다 크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아가는 일은 단지 새로운 영토를 얻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전 세대에게 주어졌던 약속과 축복이 계속 이어지는 역사입니다.

땅의 풍요와 군사적인 힘은 모두 좋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풍요와 힘이 하나님을 잊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풍요로운 땅보다 먼저 그 땅을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조금 더 깊이

「두 어깨 사이」라는 표현은 원문에서 정확히 누구의 어깨를 가리키는지 논의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하나님이 베냐민을 감싸시고 자신의 두 어깨 사이에 머물게 하시는 모습으로 읽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가까이 품어 보호하는 강렬한 이미지가 됩니다. 반면 하나님이 베냐민의 어깨 사이에 머무신다는 방향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베냐민의 영토와 하나님의 거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길이 열립니다. 여기서 특정한 성소나 후대의 예루살렘 성전 위치를 직접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본문 자체는 어떤 장소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지리적 의미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불론과 잇사갈, 갓과 단 —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살아가는 지파들

신명기 33:18–22 본문 →

밖으로 나가는 스불론과 천막에 머무는 잇사갈

모세는 스불론과 잇사갈을 함께 부릅니다.

모세는 스불론에 관해 말했습니다. 「스불론아, 밖으로 나갈 때 기뻐하여라. 잇사갈아, 네 천막들에서 기뻐하여라.」신명기 33:18 · 두루새김

두 지파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말은 「기뻐하여라」입니다. 그러나 기뻐하는 장소는 다릅니다.

이 표현은 두 지파의 서로 다른 활동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일은 이동과 교역 또는 대외적인 활동을 떠올리게 하고, 천막에서 지내는 일은 정착한 생활을 연상시킵니다. 창세기 49:13–15에서도 스불론은 바다와 배가 드나드는 곳과 관련되고, 잇사갈은 짐을 지는 강한 나귀에 비유됩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함께 읽으면 두 지파의 생활 방식에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33:18만으로 스불론은 반드시 상업에 종사했고 잇사갈은 오직 농업에 종사했다는 식으로 직업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19절에서는 두 지파의 활동이 공동의 예배로 연결됩니다.

「그들은 민족들을 산으로 부르고, 거기서 올바른 제사를 드릴 것이다. 바다가 내어 주는 풍성한 것들과 모래 속에 숨은 보물을 얻어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신명기 33:19 · 두루새김

여기서 「산」이 정확히 어느 산인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특정한 성소나 산악 지대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장소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삶과 천막에 머무는 삶이 서로 다르더라도, 하나님 앞에 모이는 일에서는 연결됩니다. 「바다가 내어 주는 풍성한 것들」은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자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래 속에 숨은 보물」은 해안과 관련된 귀한 자원이나 땅속의 재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스불론과 잇사갈이 얻게 될 복은 그들 자신만을 위한 소유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과 연결됩니다.

서로 다른 생활의 자리에서 얻은 풍요가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예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땅을 차지한 갓의 책임

갓의 축복에서는 다시 강한 짐승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모세는 갓에 관해 말했습니다. 「갓의 땅을 넓혀 주시는 분은 찬양받으실 분이다. 갓은 사자처럼 자리 잡고, 적의 팔도 머리 꼭대기도 찢었다.」신명기 33:20 · 두루새김

그런데 20절의 첫 문장에서 찬양받는 이는 갓 자신이 아닙니다. 갓의 땅을 넓혀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갓의 힘과 영토가 누구에게서 주어지는지를 먼저 드러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첫 몫을 골랐다. 거기에 지도자의 몫이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성의 우두머리들과 함께 왔다. 이스라엘과 함께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고 그분의 법을 따랐다.」신명기 33:21 · 두루새김

민수기 32장에 따르면 갓과 르우벤 자손은 요단강 동쪽 땅이 가축을 기르기에 알맞다는 사실을 보고 그곳을 자신들의 소유지로 요청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이 다른 지파들과 함께 요단 서쪽으로 건너가 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그 땅을 허락했습니다. 신명기 3:12–20에서도 이미 땅을 받은 지파들이 다른 형제 지파들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이 제시됩니다.

이 배경을 고려하면 갓이 「첫 몫」을 골랐다는 말은 요단 동쪽에서 먼저 땅을 받은 사실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도자의 몫이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에 해당하는 표현은 원문에서도 어려운 구절입니다. 여기서 지도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그 몫이 어떤 방식으로 남겨져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갓은 먼저 받은 땅을 누리면서도 이스라엘 전체와 함께 움직여야 했습니다.

먼저 받은 복이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몫을 이미 받은 사람이 아직 자기 몫을 얻지 못한 형제들을 도울 책임을 가집니다. 갓의 힘은 자기 영역을 지키는 데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 안에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단의 어린 사자

단에게는 단 한 절의 짧은 축복이 주어집니다.

모세는 단에 관해 말했습니다. 「단은 어린 사자다. 바산에서 뛰어나올 것이다.」신명기 33:22 · 두루새김

앞에서 갓이 사자처럼 묘사되었다면, 단은 어린 사자입니다. 어린 사자는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았지만, 빠르고 힘찬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산은 요단 동북쪽의 지역입니다. 단 지파가 처음 배정받은 땅은 여호수아 19:40–48에서 주로 서쪽 지역과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사사기 18:27–29에서는 단 지파의 일부가 북쪽으로 이동하여 라이스를 점령하고 그 성읍을 단이라고 부르게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러한 후대의 지리적 전개와 33:22의 바산 이미지를 연결해 볼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단 지파가 반드시 바산에 정착할 것이라는 직접적인 예언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바산이라는 장소에서 힘차게 뛰어나오는 어린 사자의 모습을 제시할 뿐, 그 지리적인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요셉에게는 수소의 뿔이, 갓에게는 사자의 힘이, 단에게는 어린 사자의 도약이 주어집니다. 서로 다른 이미지이지만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갈 힘을 나타냅니다.

납달리와 아셀 — 만족과 풍요, 안전한 거처

신명기 33:23–25 본문 →

납달리는 무엇으로 흡족한가?

모세는 납달리에 관해 말했습니다. 「호의를 넉넉히 받고 여호와야훼의 복으로 가득한 납달리야, 서쪽과 남쪽을 차지하여라.」신명기 33:23 · 두루새김

앞의 지파들에게는 특정한 활동이나 자원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납달리에게는 먼저 호의를 넉넉히 받고 복으로 가득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호의」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운 호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뒤에서 여호와야훼의 복이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납달리가 단순히 많은 것을 얻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복으로 가득한 삶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풍요는 많은 자원을 소유하는 것과만 연결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누리는 상태도 복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하여라」라는 말은 납달리가 차지할 지역을 나타냅니다. 바다를 뜻하는 말은 문맥에 따라 서쪽이라는 방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두루새김은 남쪽과 나란히 놓인 이 말을 「서쪽」으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읽는 것은 문맥상 가능하지만, 그 방향이 납달리의 어느 경계나 지역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납달리가 물려받을 땅은 여호수아 19:32–39에서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제시되므로, 이 구절을 곧바로 지중해 연안 전체를 차지하라는 말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아셀은 자기 발을 기름에 담근다

아셀에게는 매우 풍요로운 이미지가 주어집니다.

모세는 아셀에 관해 말했습니다. 「아셀은 아들들 가운데 가장 복을 받기를 바란다. 형제들에게 사랑받고, 발을 기름에 담그기를 바란다.」신명기 33:24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올리브기름은 음식과 등불, 몸에 바르는 기름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풍요를 한껏 크게 보여 주는 시적 표현입니다.

아셀은 여호수아 19:24–31에서 북서부 지역의 땅을 물려받는 지파로 등장합니다. 그 지역의 풍성한 농산물과 올리브기름 생산을 떠올릴 수 있지만, 이 구절 자체가 구체적인 생산량이나 재배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셀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물질적 풍요만이 아닙니다. 다른 지파들과의 관계 안에서 사랑받고 받아들여지는 일도 포함합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공동체 안에서 홀로 떨어져 지낸다면 그 풍요가 온전한 복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모세는 아셀이 형제들과 좋은 관계를 누리면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쇠와 구리의 빗장, 그리고 평안한 날들

「네 문을 잠그는 빗장은 쇠와 구리로 되어 있고, 네가 사는 동안 늘 평안할 것이다.」신명기 33:25 · 두루새김

쇠와 구리로 만든 빗장은 성읍의 문이나 중요한 출입구를 튼튼하게 지키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아셀의 풍요가 외부의 위협에 쉽게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받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째 문장은 원문의 정확한 뜻이 불확실합니다. 두루새김이 「평안」으로 옮긴 히브리어 도브에카(⁨דֹּבֶא⁩)는 성경에서 매우 드물게 등장하는 표현이며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평안이나 안정을 나타내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힘이나 오래 이어지는 기력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문맥에서 쇠와 구리의 튼튼함과 삶을 지탱하는 안정이 함께 나타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베냐민은 하나님 곁에서 안전하게 머무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아셀은 풍성한 생산물과 튼튼한 빗장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안전을 누리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두 지파 모두 안전을 축복받지만, 그 안전을 보여 주는 이미지는 서로 다릅니다.

이제 모세는 개별 지파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마치고 이스라엘 전체를 다시 향합니다.

하늘을 타고 오시는 하나님과 아래에서 받쳐 주시는 팔

신명기 33:26–29 본문 →

여수룬에게는 어떤 하나님이 계신가?

「여수룬아, 하나님 같은 분은 없으시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오시며, 위엄에 차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신명기 33:26 · 두루새김

여기서 모세는 다시 여수룬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이 이름은 바로 앞의 신명기 32:15에서 이스라엘의 배반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수룬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제 그 백성을 향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다시 선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땅 위의 제한된 장소에서만 활동하시는 분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늘 자체가 그분이 움직이시는 무대가 됩니다. 온 하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드러내는 시적 표현입니다.

가장 높은 곳을 다스리시는 분이 자신의 백성을 위해 움직이십니다.

그분의 위대함은 백성의 삶과 무관한 먼 세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영원한 팔이 아래에서 받쳐 준다

이어서 모세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예부터 계신 하나님이 너희가 머물 곳이시고, 그분의 영원한 팔이 아래에서 너희를 받쳐 준다. 그분께서 너희 앞에서 원수를 쫓아내시고 『완전히 없애라』 하고 말씀하셨다.」신명기 33:27 · 두루새김

하나님은 위에서 오십니다. 그리고 아래에서 받쳐 주십니다.

하늘을 타고 움직이시는 위엄 있는 하나님과, 아래에서 백성을 지탱하는 팔의 이미지가 하나로 결합됩니다. 그런데 그 머물 곳은 단지 외부의 적을 막아 주는 높은 성벽이 아닙니다. 백성이 서 있는 아래에서 그들을 지탱하는 팔의 이미지까지 포함합니다.

베냐민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그분의 두 어깨 사이에서 안전하게 머뭅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영원한 팔이 아래에서 받쳐 주는 가운데 하나님을 머물 곳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지파 하나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혜택이 아닙니다. 그분의 백성 전체를 지탱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받쳐 주시는 보호자이면서 그들 앞에서 원수를 쫓아내시는 분으로도 묘사되십니다. 이것은 신명기의 가나안 정복 문맥과 연결됩니다. 다만 이러한 전쟁 언어를 오늘날 신앙 공동체가 다른 민족이나 종교 집단을 공격할 권한을 얻는 일반적인 명령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특정한 역사와 언약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찬양합니다.

그들이 앞에 있는 원수를 물리칠 때도, 발밑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을 때도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스스로 강해져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분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갈 모든 자리에서 의지해야 하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홀로 안전하게 살아가는가?

「이스라엘, 곧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가 나는 땅에 안전하게 홀로 자리 잡았다. 그 땅의 하늘도 이슬을 내려 준다.」신명기 33:28 · 두루새김

여기서 갑자기 전쟁의 긴장감이 사라집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민족들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고 고립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홀로」는 문맥에서는 외부의 위협 없이 안전하게 머무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샘」이라는 표현은 야곱의 후손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과 번성을 나타낸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곡식과 포도주, 하늘의 이슬도 모두 생명과 풍요를 나타냅니다.

모세가 이 말을 전할 때 이스라엘은 여전히 요단강 동쪽에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가나안의 땅을 모두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안전하게 살아 본 경험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축복의 언어로 그들이 누리기를 바라는 미래를 앞당겨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떠돌기만 하도록 부름받은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 자리 잡아 곡식을 거두고 포도주를 만들며 살아갈 백성입니다.

광야에서 이동하며 살았던 이들에게, 안전하게 머물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복입니다.

「하나님 같은 분은 없으시다」에서 「누가 너희와 같겠느냐」로

모세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향해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는 행복하다. 여호와야훼께 구원받은 백성아, 누가 너희와 같겠느냐? 그분은 너희를 돕는 방패이시며 너희의 위엄이 되는 칼이시다. 너희 원수들은 너희에게 굽실거릴 것이고, 너희는 그들의 높은 곳들을 밟을 것이다.」신명기 33:29 · 두루새김

방패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도구입니다. 칼은 적에게 맞서 싸우는 도구입니다. 두 이미지는 보호와 승리를 함께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의 방패와 칼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방패이며 칼이라고 합니다.

26절에서는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고 했는데, 29절에서는 이스라엘 같은 백성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께 구원받고 보호받는 백성이기 때문에 특별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함이 하나님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복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33:27에서 하나님을 「머물 곳」으로 묘사하는 표현은 시편 90:1과도 연결됩니다. 시편 90편은 모세의 기도라고 적혀 있으며, 그 첫머리에서 하나님이 대대로 자신의 백성의 거처가 되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지파별 축복을 끝까지 읽으면 한 가지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시므온의 이름이 없습니다. 여호수아 19:1–9에서는 시므온 지파가 물려받을 땅이 유다 지파가 물려받을 땅 안에 놓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시므온이 별도로 언급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 49장에서 시므온과 레위에게 주어진 경고가 두 지파의 서로 다른 역사와 연결된다고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33장은 시므온을 생략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이 특정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축복에서 제외되었다거나, 하나님이 시므온 지파를 더 이상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으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과의 관계에서는 신명기 33장의 지파별 축복을 특정한 신약 인물이나 사건에 하나씩 짝지어 연결하기보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다양한 역할 안에서 돌보신다는 주제상의 연결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장 자체에는 특정한 메시아의 출현을 직접 예고하는 분명한 진술이 없습니다.

끝맺으며 — 위에는 하늘, 아래에는 영원한 팔

신명기 33:1–29 본문 →

각 지파의 복은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함께 누리는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백성으로 세우시면서도, 그 백성 가운데 서로 다른 지파들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살아가도록 복을 주십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의 복은 인간의 모든 소망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특정한 역사와 언약 안에서 각 지파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이를 오늘날 특정 개인이나 민족이 반드시 어떤 땅을 차지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리라는 보장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근거로 현재의 불평등이나 가난을 무조건 하나님이 정하신 몫이라고 받아들이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신명기 전체에는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보호하고 정의롭게 대해야 한다는 명령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신명기 15:7–11; 24:17–22). 신명기 33장이 보여 주는 것은 복의 모습이 다양하다는 사실이지, 모든 현실의 차이가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장이 아닙니다.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의 앞에는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가 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누군가는 외부의 위험에 맞서야 하고, 누군가는 제단에서 봉사하고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지파의 이름을 더 이상 하나씩 부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말합니다. 「여수룬아, 하나님 같은 분은 없으시다.」

위에는 하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엄이 있고, 아래에는 백성을 지탱하는 영원한 팔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미래를 모두 알지 못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뒤 얼마나 많은 위험과 갈등을 겪을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들이 어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인지는 분명히 알려 줍니다.

모세가 마지막으로 남긴 축복의 중심에는 이스라엘이 얻게 될 것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영원한 팔로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백성은 이제 강을 건너 자신들의 몫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땅으로 흩어져 살아갈 그들 모두에게, 모세는 한 분의 하나님을 가리켜 보여 주었습니다.

하늘을 타고 그들을 도우러 오시는 분.

그리고 그들이 서 있는 곳 아래에서 영원한 팔로 받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