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칼은 돌아가지 않고 왕관은 벗겨집니다
에스겔 21장은 불타는 숲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에스겔에게 남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네겝 들판의 숲을 향해 예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숲에는 물기 있는 나무도 있고 마른 나무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 불을 지르시면 어느 나무도 그 불을 피하지 못합니다.
불타는 숲이 예루살렘을 향한 칼로 바뀝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은 바벨론의 칼이 강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여호와야훼께서 그 칼을 뽑으셨기 때문입니까? 에스겔 21장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칼을 휘두르는 왕과, 그 역사에 심판을 선언하시는 여호와야훼를 함께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장의 끝에는 또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왕관이 벗겨지고 왕권이 무너진 뒤에는 누가 그 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 여호와야훼는 그 답을 당장 밝히지 않으십니다. 다만 권리가 있는 이가 올 때까지 기존의 왕권을 무너뜨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기 있는 나무와 마른 나무가 함께 타다
「네겝의 숲에게 이렇게 전해라.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네 안에 불을 지르겠다. 그 불이 네 안의 물기 있는 나무와 마른 나무를 모두 삼킬 것이다. 타오르는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이며, 남쪽에서 북쪽까지 모든 얼굴이 그 불에 그을릴 것이다.』」에스겔 21:3 · 두루새김
일반적으로 마른 나무는 불에 쉽게 탑니다. 반면 물기를 많이 머금은 나무는 상대적으로 불이 붙기 어렵습니다. 이어지는 8–9절에서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을 함께 없애겠다고 말씀하시므로, 나무의 대비는 심판이 얼마나 넓게 미치는지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의로운 사람까지 악한 사람과 함께 심판의 칼을 겪어야 합니까? 에스겔 18장에서는 아버지의 죄를 아들이 짊어지지 않으며, 각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따라 판단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18:19–20). 그런데 21장에서는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함께 칼에 쓰러진다고 하십니다.
18장은 죄에 대한 책임과 하나님의 판단을 설명합니다. 의로운 아들이 악한 아버지의 죄에 대한 책임을 자동으로 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21장은 한 나라 전체를 덮치는 전쟁과 멸망을 이야기합니다.
전쟁은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들만 찾아가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도시가 포위되고 무너지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위험에 놓입니다. 의롭게 산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전쟁의 모든 피해에서 자동으로 보호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구별해야 하는 것은 죄에 대한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 전체가 겪는 역사적 재난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재난을 겪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죄의 책임을 지녔다는 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누군가 큰 재난을 겪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남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 14:12–23에서도 이와 관련된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노아와 다니엘과 욥처럼 의로운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들의 의로움이 심판받는 땅 전체를 자동으로 구해 내지는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도시 전체의 삶을 뒤흔들 것입니다.
남쪽 숲의 일부가 타는 정도가 아닙니다. 땅 전체를 가로지르는 재앙입니다. 4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그 불을 자신이 질렀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아, 주 여호와야훼, 사람들이 저를 두고 『저 사람은 비유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합니다.」에스겔 21:5 · 두루새김
에스겔은 앞에서도 포도나무와 독수리, 사자와 나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비유를 자신들에게 닥칠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불타는 숲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저 특이한 이야기를 하나 더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음 장면에서 하나님은 그 비유의 대상과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불의 정체는 칼이었다
「사람의 아들아,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해라. 성소들을 향해 말을 전하고, 이스라엘 땅을 향해 예언해라.」에스겔 21:7 · 두루새김
이 구절은 2절의 명령과 거의 같은 구조를 지닙니다. 처음에는 남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예루살렘을 향하라고 하십니다.
처음에는 네겝 들판의 숲을 향해 예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성소들을 향해 말을 전하고 이스라엘 땅을 향해 예언하라고 하십니다. 이 대응을 통해 앞의 비유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밝혀집니다.
그리고 여호와야훼는 이제 불 대신 칼을 등장시키십니다.
「이스라엘 땅에게 이렇게 전해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에게 맞서겠다. 내 칼을 칼집에서 뽑아 네 안의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을 모두 죽여 없애겠다.』」에스겔 21:8 · 두루새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한 군대는 바벨론의 군대였습니다. 그 군대의 칼은 바벨론 병사들이 사용하는 실제 무기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 칼을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는 칼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바벨론의 모든 군사 행동이 하나님의 뜻과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에스겔서는 뒤에서 다른 민족들과 그들의 폭력 역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군사적 성공을 단순히 같은 것으로 보는 해석은 본문을 넘어섭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가 밝히시는 것은 바벨론이라는 제국도 예루살렘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독립적인 권한을 가진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통해 여호와야훼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칼이 남쪽에서 북쪽까지 향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 불꽃이 남쪽에서 북쪽까지 번진다고 했던 것과 같은 범위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나 여호와야훼가 내 칼을 칼집에서 뽑았음을 알 것이다. 그 칼은 다시 칼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에스겔 21:10 · 두루새김
무기를 뽑아 든다는 것은 더 이상 위협이나 준비의 단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칼은 보통 싸움이 끝나면 다시 칼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칼은 다시 칼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심판이 이미 결정되었으며, 그것을 가벼운 경고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리는 예언자는 냉정한 관찰자로 머물 수 없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에게 탄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허리가 꺾일 듯 탄식하는 예언자
「사람의 아들아, 너는 탄식해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허리가 꺾일 듯 괴로워하며,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해라.」에스겔 21:11 · 두루새김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판을 말로만 전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으로 그 심판의 무게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허리가 꺾일 듯 괴로워하며 탄식하는 모습은 단순한 슬픔의 표현이 아닙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몸의 힘마저 무너지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왜 탄식하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해라. 『소식 때문이에요. 그 소식이 오고 있어요.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녹아내리고, 손마다 힘이 풀리며, 모두가 기운을 잃고 무릎이 물처럼 풀릴 거예요. 그 일이 다가오고 있어요. 그대로 이루어질 거예요. 주 여호와야훼의 말씀이에요.』」에스겔 21:12 · 두루새김
두려움이 사람의 내부에서 시작되어 몸 전체를 무너뜨리는 모습입니다. 아직 소식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 소식이 가져올 현실을 그의 몸이 먼저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는 재난을 선포하면서 예언자에게 기뻐하거나 승리를 축하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탄식하라고 하십니다.
그 심판이 정당하다는 사실과, 그 심판이 가져올 고통이 실제로 슬퍼할 만하다는 사실은 함께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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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에서도 무릎과 물을 함께 사용합니다. 무릎이 힘을 잃어 주저앉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극심한 공포에 따른 신체적 반응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3절에서는 물기 있는 나무가 불에 삼켜졌습니다. 12절에서는 사람의 무릎이 물처럼 풀립니다. 두 표현을 직접적인 언어유희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심판 앞에서 단단해 보이던 것이 무너진다는 이미지가 반복됩니다.
칼이 날카롭게 갈리고 윤이 나도록 닦이다
이제 본문은 칼 자체를 길게 묘사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며 전해라.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말해라. 『칼이다, 칼이다! 날카롭게 갈고 윤이 나게 닦은 칼이다.』」에스겔 21:14 · 두루새김
「칼이다」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이어 칼이 날카롭게 갈렸다는 말과 윤이 나게 닦였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두 행동에는 서로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죽이려고 날카롭게 갈고, 번개처럼 번쩍이도록 닦았다. 그런데 우리가 기뻐할 수 있겠느냐? 그 칼은 내 아들의 지팡이도 모든 나무처럼 업신여긴다.』」에스겔 21:15 · 두루새김
사람들은 아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미 칼이 준비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칼을 가는 소리, 표면을 닦아 내는 동작,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에 나타나는 듯합니다.
칼이 아직 사람을 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를 준비가 하나씩 완료됩니다. 독자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면서 그 과정을 지켜보게 됩니다.
「내 아들의 지팡이」도 칼 앞에서 안전하지 않다
여기서 「지팡이」는 지도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19:11–14에서도 왕을 세울 수 있는 튼튼한 가지가 지도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지팡이로 묘사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유다의 왕권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소리 높여 울부짖어라. 그 칼이 내 백성과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에게 닥쳤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은 내 백성과 함께 칼에 넘겨졌다. 그러므로 네 허벅지를 쳐라.」에스겔 21:17 · 두루새김
왕의 지팡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 왕의 잘못을 가리지 못합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다윗의 왕조에 관한 약속이 주어졌지만, 그 약속을 받은 왕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반드시 역사적 왕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에스겔은 왕권의 특권이 심판을 면제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칼이 준비될수록 예언자는 더욱 크게 슬퍼해야 합니다. 칼이 얼마나 번쩍이는지를 묘사하는 말씀과, 그 칼 때문에 울부짖으라는 명령이 함께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문장은 매우 압축되어 있고, 주어와 문장 연결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칼을 주어로 삼는 것입니다. 칼이 왕의 지팡이를 비롯한 모든 나무를 업신여긴다는 뜻입니다. 다른 읽기는 「내 아들의 지팡이」를 유다 왕권에 대한 별도의 언급으로 보면서, 그 지팡이에 대한 기대와 곧 닥칠 칼의 심판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뻐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이 어느 표현과 이어지는지도 해석에 영향을 미칩니다. 본문의 정확한 문장 구조에는 불확실성이 있지만, 이어지는 말씀은 심판이 지도자들에게도 미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18절에서도 지팡이의 운명이 다시 언급되지만, 원문의 문장 연결이 어려워 구체적인 의미를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칼이 두 번, 세 번 내려치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라. 칼이 두 번, 세 번 거듭 치게 해라. 그것은 사람들을 죽이는 칼, 큰 인물까지 죽이는 칼, 그들을 에워싸는 칼이다.」에스겔 21:19 · 두루새김
손뼉을 치는 행동은 문맥에 따라 여러 감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기쁨이나 조롱, 분노나 격한 감정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칼이 사람들을 죽이고 에워싸는 모습과 하나님의 분노가 이어지므로 단순히 기뻐서 손뼉을 치는 장면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앞에서 예언자는 탄식하고 울부짖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제 손뼉을 치는 행동까지 더해집니다. 말뿐 아니라 몸 전체가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칼질은 공격이 한 번의 타격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암시합니다. 20절에서는 모든 성문에 사람을 죽일 칼을 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문은 도시로 드나드는 통로이자 방어의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런데 그곳마다 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시가 칼에 에워싸인 것입니다.
「칼아, 날을 세워라. 오른쪽으로 가라. 자리를 잡아라. 왼쪽으로 가라. 네가 향하도록 정해진 곳은 어디냐?」에스겔 21:21 · 두루새김
칼이 살아 움직이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이는 칼의 무차별적인 움직임을 묘사하면서도 그 칼이 아무 목적 없이 휘둘러지는 것은 아니라는 긴장을 만듭니다.
「나도 손뼉을 치고 내 분노를 다 풀겠다. 나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에스겔 21:22 · 두루새김
같은 행동이 예언자와 하나님에게서 연이어 나타납니다. 에스겔은 심판을 알리고, 그 무게를 몸으로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선언하신 심판을 실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의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칼은 아직 특정한 군대의 모습으로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그 칼을 실제로 움직일 왕이 등장합니다.
갈림길에 선 바벨론 왕
「사람의 아들아, 바벨론 왕의 칼이 들어올 두 길을 정해 놓아라. 두 길은 같은 땅에서 나올 것이다. 길을 알려 주는 표지판을 깎아 만들어라. 도시로 가는 길 어귀에 세울 표지판을 만들어라.」에스겔 21:24 · 두루새김
이제 칼의 정체가 역사 속에서 구체화됩니다.
앞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벨론 왕이 그 칼을 가지고 전쟁에 나섭니다.
한쪽은 암몬 자손의 랍바로 향합니다. 다른 한쪽은 성벽으로 단단히 둘러싸인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 왕은 갈림길에 섭니다.
「바벨론 왕이 점을 치려고 두 길이 시작되는 갈림길에 섰기 때문이다. 그는 화살들을 흔들고, 드라빔에게 묻고, 짐승의 간을 살펴보았다.」에스겔 21:26 · 두루새김
그는 여호와야훼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을 따라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따르는 점술의 방식으로 전쟁의 방향을 결정하려 합니다.
「그의 오른손에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점괘가 나왔다. 성문을 부술 기구들을 배치하고, 죽이라고 외치며 함성을 지르려는 것이다. 성문마다 그 기구들을 놓고, 공격을 위한 흙 언덕과 벽을 쌓으려는 것이다.」에스겔 21:27 · 두루새김
바벨론 왕은 자신이 점괘에 따라 길을 선택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에스겔은 그보다 먼저 여호와야훼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칼을 뽑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야훼는 바벨론의 점술을 옳다고 인정하시거나, 이스라엘에게 점을 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바벨론 왕의 결정이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하지도 않으십니다.
에스겔 4:1–3에서도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장면이 상징 행동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때는 예언자가 벽돌에 도시를 새기고 포위 공격을 재현했습니다. 이제는 바벨론 왕이 실제로 포위 공격을 준비합니다.
처음에는 예언자의 손에 있던 그림이었습니다.
이제는 군대가 실행할 작전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랍바는 암몬의 중심 도시로, 오늘날 요르단의 암만 지역과 연결됩니다. 당시 암몬과 유다는 바벨론의 영향 아래 놓인 주변 왕국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7:1–3에는 유다와 암몬을 비롯한 여러 왕국이 바벨론의 지배와 관련된 정치적 상황 속에 등장합니다. 드라빔은 고대 근동에서 신적인 뜻을 알아보는 데 사용되던 형상들과 관련된 말입니다. 창세기 31:19에서는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가져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간을 살피는 행동은 제물로 바친 짐승의 간에 나타나는 모양 등을 통해 징조를 읽으려는 고대 근동의 점술 관행과 연결됩니다. 화살을 흔드는 행동 역시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얻기 위한 점술 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헛된 점괘라고 생각했지만, 드러난 것은 자신들의 죄였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헛된 점괘로 보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맹세로 맺은 약속들이 있다. 그러나 바벨론 왕은 그들의 죄를 들추어 그들이 사로잡히게 할 것이다.」에스겔 21:28 · 두루새김
이 구절의 대명사와 맹세가 누구에게 향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과 맺었던 맹세를 떠올린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이 세운 시드기야가 그와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에스겔 17:13–19에서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은 기존의 계약 때문에 바벨론 왕이 실제로 예루살렘을 공격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읽기는 그들이 의지하고 있던 다른 맹세나 동맹, 약속들을 배경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확한 대상은 확정하기 어렵지만, 문맥에서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반역이 드러나고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죄가 나타나, 너희 스스로 너희 죄를 기억나게 했다. 너희가 저지른 죄 때문에 이렇게 기억되었으니, 너희는 적의 손에 붙잡힐 것이다.』」에스겔 21:29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여기서 기억에 관한 표현이 반복됩니다. 죄가 드러나 기억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붙잡힙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그들이 정말로 주목해야 할 것은 점괘의 신뢰성이 아니라 자신들의 드러난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점괘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동안, 자신들의 행위가 이미 어떤 현실을 만들어 왔는지는 외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벨론 왕의 점술이 예루살렘의 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반역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이 붙잡히는 이유를 자신들의 죄와 반역에서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책임은 유다의 지도자에게 집중됩니다.
두건을 벗고 왕관을 치워라
「『더럽혀진 악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야, 네 죄를 심판할 마지막 때, 네 날이 왔다.』」에스겔 21:30 · 두루새김
여기서 예언의 상대가 달라집니다.
역사적 문맥에서 이 지도자는 시드기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바벨론 왕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그와 맺은 맹세를 깨뜨렸습니다. 에스겔 17장은 그 행동을 여호와야훼께 대한 배신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도자」라고 부릅니다. 그에게서 왕권의 상징을 제거하겠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두건을 벗고 왕관을 치워라. 이제 그대로 있지 않을 것이다. 낮은 것은 높이고 높은 것은 낮추어라.』」에스겔 21:31 · 두루새김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에 의해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호와야훼는 그 왕권을 제거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예루살렘의 권력 구조는 왕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누가 높은 지위에 있는지에 따라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 질서를 그대로 두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사람들이 높다고 인정하는 자리도 하나님 앞에서는 영구적인 자리가 아닙니다.
「『내가 무너뜨리고, 무너뜨리고, 무너뜨리겠다. 권리가 있는 이가 올 때까지는 이것도 더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그에게 주겠다.』」에스겔 21:32 · 두루새김
왕의 지위를 낮추는 정도가 아닙니다. 왕국의 질서를 허무는 것입니다. 에스겔 19장에서는 지도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지팡이가 될 만한 가지가 더 이상 남지 않았다고 애도했습니다.
여기서 예언은 뜻밖의 방향으로 열립니다.
왕권은 무너집니다. 그러나 그 무너짐이 모든 가능성의 영원한 끝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권리가 있는 이가 올 때까지」라는 말씀이 남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가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기존 왕권의 폐지와, 통치할 정당한 권리를 여호와야훼께서 결정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왕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왕관을 정당하게 쓸 권리가 있다는 사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가 심판받는 사건은 왕 한 사람의 자리만 바꾸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도시가 포위되고 백성이 두려움에 빠지며, 의로운 사람들까지 전쟁의 재앙을 겪게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책임은 단지 자신의 성공이나 실패에 대한 책임이 아닙니다. 그의 결정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과 미래에 대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칼의 방향이 다시 바뀝니다.
이번에는 암몬을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두건」에 해당하는 미츠네페트(מִצְנֶפֶת)는 제사장의 머리에 쓰는 관을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출애굽기 28:4, 37). 반면 왕관은 왕권을 나타내는 분명한 상징입니다. 따라서 두건과 왕관을 함께 제거한다는 말씀은 예루살렘의 종교적·정치적 권위가 함께 무너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31절의 두건을 반드시 특정 대제사장의 관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지도자를 직접 부르는 문맥이므로, 권위와 지위를 상징하는 머리 장식들을 제거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낮은 것은 높이고 높은 것은 낮추어라」라는 명령은 에스겔 17:24에서 여호와야훼가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신다고 말씀하신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무너뜨리고, 무너뜨리고, 무너뜨리겠다」라고 같은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이것은 숫자 셋에 별도의 상징을 부여하는 표현으로 읽기보다, 왕권이 완전히 무너질 것을 강렬하게 선언하는 반복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권리가 있는 이」에 관해 히브리어는 아셰르 로 함미슈파트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에게 그 권리 또는 판결이 속한 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연결은 창세기 49:10입니다. 그곳에서도 유다의 통치권에 관한 말씀 가운데 어떤 인물이 올 때까지의 기간을 나타내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두 본문 모두 통치권의 지속과 장래의 인물에 관한 기대를 떠올리게 하므로, 에스겔 21:32를 유다 왕권과 다윗 왕조에 대한 약속의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의 히브리어 표현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에스겔이 창세기 49:10을 직접 인용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왕권과 그 권리가 정당하게 누구에게 속하는가라는 주제가 연결된다고 보는 것이 신중합니다. 이 구절을 미래의 다윗 계열 지도자를 가리키는 약속으로 읽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성경 전체를 함께 읽으며 궁극적으로 메시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에 연결하여 해석해 왔습니다. 하지만 에스겔 21장 자체가 그 인물을 예수님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않았다고 암몬이 안전한 것은 아니다
「사람의 아들아, 암몬 자손과 그들이 퍼붓는 모욕에 관해 예언하며 이렇게 전해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칼이다, 칼이다! 사람들을 죽이려고 뽑힌 칼이다. 집어삼키도록, 번개처럼 번쩍이도록 닦였다.』」에스겔 21:33 · 두루새김
처음에 바벨론 왕은 두 갈래 길 앞에 섰습니다.
점괘는 예루살렘을 가리켰습니다. 그렇다면 암몬은 안전해진 것일까요? 마지막 단락은 그렇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에스겔 25:1–7에서는 암몬이 이스라엘의 성소와 땅, 유다 백성에게 닥친 재난을 조롱한 일 때문에 심판받을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따라서 21장의 「모욕」도 유다의 재앙 앞에서 암몬이 보인 적대적인 태도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14–15절의 표현이 거의 그대로 반복됩니다. 「칼이다, 칼이다!」라는 외침이 나옵니다.
여기서 칼이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지에 대해서는 읽기가 갈립니다. 한 가지 읽기는 암몬을 공격할 칼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읽기는 암몬이 자신들의 적을 향해 뽑아 든 칼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암몬 역시 여호와야훼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34절에서는 헛된 환상과 거짓 점이 등장합니다. 이는 앞에서 바벨론 왕이 점을 치던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바벨론 왕의 점술은 예루살렘으로 향할 공격의 방향과 연결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암몬에게 주어진 헛된 환상과 거짓 점이 그들을 안전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 칼을 칼집에 도로 넣어라. 네가 만들어진 곳, 네가 태어난 땅에서 내가 너를 심판하겠다.』」에스겔 21:35 · 두루새김
이 말씀은 10절과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앞에서는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의 칼이 이미 뽑혀 그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서는 암몬을 향해, 혹은 암몬이 의지하던 칼을 내려놓게 하면서 그 나라 자체가 자신의 땅에서 심판받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내 분노를 네 위에 쏟고, 내 노여움의 불을 네게 내뿜겠다. 너를 사나운 사람들, 파괴에 능숙한 자들의 손에 넘기겠다.』」에스겔 21:36 · 두루새김
여기서 처음의 불 이미지가 다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네겝의 숲에 불이 붙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암몬을 향해 여호와야훼의 노여움의 불이 내뿜어집니다.
「『너는 불의 먹이가 되고, 네 피는 그 땅 한가운데 있을 것이다.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나 여호와야훼가 말했기 때문이다.』」에스겔 21:37 · 두루새김
암몬에 대한 이 마지막 말씀은 유다 왕권에 대한 32절과 다르게 끝납니다. 유다 왕권이 무너진 자리에는 권리가 있는 이가 올 때까지라는 여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암몬을 향한 이 단락에서는 회복에 관한 약속이 제시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한 구절만으로 암몬이라는 민족의 이후 모든 역사나 그 후손들의 영원한 운명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암몬의 권세와 명성이 심판을 통해 사라질 것을 강하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암몬을 공격할 칼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읽기의 경우 예루살렘을 향했던 심판이 암몬까지 확장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암몬이 자신들의 적을 향해 뽑아 든 칼을 가리킨다는 읽기는 이어지는 35절에서 그 칼을 칼집에 도로 넣으라고 명령하는 표현이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칼집과 왕관 사이에 남겨진 질문
이 장에서 가장 두려운 사실은 바벨론의 칼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의지하던 왕관조차 여호와야훼의 심판 앞에서는 벗겨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이 장은 왕권의 마지막 권한이 칼을 가진 제국의 왕에게 있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칼은 바벨론 왕의 손에 들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칼을 자신의 칼이라고 부르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왕관은 유다 지도자의 머리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왕관을 치우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여호와야훼이십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암몬의 땅까지 심판의 불이 번집니다. 어느 나라도 자신의 힘과 지위만으로 여호와야훼의 판단 밖에 설 수 없습니다.
에스겔 21장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번쩍이는 칼과 벗겨진 왕관입니다.
그러나 그 둘 가운데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의 말씀이 놓여 있습니다. 「권리가 있는 이가 올 때까지는 이것도 더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그에게 주겠다.」
지금 왕관을 쓰고 있는 사람은 그 자리를 잃습니다. 그러나 왕관을 줄 수 있는 권한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권한은 여전히 여호와야훼께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