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하나님이 이마에 표를 남기신 사람들
에스겔 9장은 무서운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도시를 파괴할 도구를 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파괴하는 도구를 든 사람들이 성전 앞에 도착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먼저 심판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글을 기록할 때 쓰는 먹통을 찬 사람을 따로 부르십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마에 표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단순히 의로운 사람은 살고 악한 사람은 죽는다는 교훈으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노인과 젊은 사람뿐 아니라 어린아이까지 포함하는 가혹한 심판을 명령하십니다. 이를 지켜보던 에스겔은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외칩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심판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심판 앞에서 탄식하는 예언자. 그리고 도시의 악을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표를 남기시는 하나님.
이 두 종류의 탄식이 9장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입니다.
내리쳐 부수는 무기와 글을 기록할 때 쓰는 먹통 — 성전 앞에 도착한 사람들
앞 장에서 에스겔은 성전 안에 자리 잡은 우상들과 그 앞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행위에 대한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그분께서 내가 듣는 데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이 도시를 벌하는 일을 맡은 자들아, 저마다 파괴하는 도구를 손에 들고 가까이 와라.」에스겔 9:1 · 두루새김
앞 장에서는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성전의 감추어진 방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드러난 악에 대한 판결이 공개적으로 집행되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원문에서 이들을 부르는 말은 도시를 맡아 관리하고 보호하는 책임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부름받은 이들은 보호할 도구가 아니라 파괴할 도구를 들고 옵니다. 두루새김은 이 장면에서 맡은 일을 드러내어 「이 도시를 벌하는 일을 맡은 자들」로 옮겼습니다.
북쪽을 향한 위쪽 문으로 난 길에서 여섯 남자가 오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손에 내리쳐 부수는 무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글을 기록할 때 쓰는 먹통을 찬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들어와 청동 제단 곁에 섰습니다.에스겔 9:2 · 두루새김
앞 장에서도 북쪽은 중요한 방향이었습니다. 에스겔이 처음 본 질투의 형상이 북쪽 문 부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8:3–5). 따라서 심판을 집행할 자들이 들어오는 길은 성전이 더럽혀졌음이 드러난 장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마포 옷은 이스라엘의 제사장 복장과도 관련됩니다. 레위기 16:4에서는 대제사장이 속죄일 의식을 위해 아마포로 만든 거룩한 옷을 입도록 규정합니다. 따라서 이 남자의 옷차림은 성소와 관련된 역할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그를 제사장이라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고대에 글을 기록하는 일을 맡은 사람은 글을 쓰기 위한 도구를 지니고 다녔습니다. 이 남자 역시 무엇인가를 기록하거나 표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손에는 내리쳐 부수는 무기가 있습니다. 이 남자의 허리에는 글을 쓰는 도구가 있습니다.
아직 누구도 행동을 시작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맡을 역할은 이미 구별되어 있습니다.
청동 제단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단 곁에 제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심판을 집행할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예배의 장소가 심판의 출발점으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문턱으로 옮겨 가는 영광
이때 하나님의 영광이 움직입니다.
그룹 위에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떠올라 성전 문턱으로 옮겨 갔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먹통을 찬 남자를 부르셨습니다.에스겔 9:3 · 두루새김
문턱은 안과 밖을 가르는 자리입니다.
그곳은 성전 안에 머무르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밖으로 나가는 길목이기도 합니다. 에스겔서 10–11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 이동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첫 움직임은 앞으로 이어질 성전을 떠나는 일의 시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9장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영광이 도시를 완전히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문턱에서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성소에서 벌어진 악을 외면하며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의 문턱에서 심판을 지휘하시고, 동시에 보호할 사람들을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먼저 내려진 명령은 파괴가 아니라 표를 남기는 일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룹은 이스라엘의 성소 전통에서 하나님의 보좌와 밀접하게 관련된 존재입니다. 출애굽기 25:18–22에서는 언약궤의 속죄판 위에 그룹들이 놓이며, 하나님이 그 그룹들 사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고 기록합니다.
탄식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남긴 표
하나님은 아마포 옷을 입은 남자에게 예루살렘 한가운데를 지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도시 안을, 곧 예루살렘 안을 지나가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역겨운 짓 때문에 한숨 쉬며 신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두어라.」에스겔 9:4 · 두루새김
무엇을 보고 탄식하는가
4절에는 「한숨 쉬며 신음하는」이라는 두 표현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서로 가까운 뜻의 두 동작이 겹쳐지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이 강조됩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형편이 어렵다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의 손해나 불행만을 슬퍼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악을 보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앞 장에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며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도시의 악을 바라보며 탄식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 그 악에 맞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본문이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탄식하는 사람들을 모두 완전한 의인이나 적극적인 저항 운동의 참여자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악에 무감각하지 않았습니다.
악이 일상이 되어 버린 곳에서도, 그것을 슬퍼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이 성전의 우상숭배와 땅에 가득한 폭력을 함께 고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들의 탄식은 단순히 예배 의식의 잘못만을 향한다고 좁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도시가 실제로 어떤 모습이 되었는지를 괴로워합니다.
하나님께 신실하다는 것은 잘못된 일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자신도 심각하게 여기는 태도와 관련됩니다. 이 사람들의 탄식은 도시의 죄를 자신의 문제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왜 이마에 표를 남기는가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모양이 아니라 그 표가 하는 일입니다.
그 표는 심판이 시작될 때 어떤 사람을 보호해야 하는지를 구별합니다. 이마는 사람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이마에 표를 남긴다는 것은 그 사람을 눈에 보이게 구별한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출애굽기 12:7, 12–13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피를 집의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릅니다. 그 피는 심판이 지나가는 동안 그 집을 구별하는 표지가 됩니다. 에스겔 9장도 심판이 집행되는 가운데 특정한 사람들을 구별하여 보호한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그러나 두 장면은 같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는 사건 속에서 집의 문에 피를 바릅니다. 에스겔에서는 이스라엘 자신의 도시가 심판받는 가운데 사람의 이마에 표를 남깁니다. 출애굽기의 표가 이스라엘의 구출을 이야기한다면, 에스겔의 표는 이스라엘 안에서도 구별이 필요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도시가 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악에 동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차이를 알고 계시며, 심판 속에서도 그들을 구별하십니다.
그렇다고 탄식 자체가 어떤 공로가 되어 구원을 얻는다고 설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탄식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보호의 표를 그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표를 남기라고 명령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표가 사람을 보호하도록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탄식은 사람의 공적을 내세우는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악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의 「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타브(תָּו), tāw입니다. 여기서 타브는 표식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며,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 이름이기도 합니다. 고대 히브리 문자의 타브가 십자 모양에 가까웠다는 점 때문에 이 표를 특정한 형태로 이해하는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9장 자체는 실제로 어떤 모양을 그렸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해라 — 가장 거룩한 장소가 심판의 시작점이 되다
표를 남기라는 명령이 내려진 뒤, 하나님은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내가 듣는 데서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뒤를 따라 도시를 지나가며 사람들을 쳐라. 불쌍히 여기지 말고 아끼지도 마라.」에스겔 9:5 · 두루새김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보호할 사람들을 구별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이 순서는 하나님이 심판의 대상과 보호의 대상을 구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명령은 매우 가혹합니다.
「표가 있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가지 마라. 그 밖에는 노인과 젊은 남자와 처녀,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해라.」 그러자 그들은 성전 앞에 있던 노인들부터 죽이기 시작했습니다.에스겔 9:6 · 두루새김
본문은 여러 연령과 성별을 나열하여 심판의 범위가 도시 전체에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본문은 어린아이들이 각각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른들과 같은 책임을 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환상 속에 나타난 도시 전체를 파멸시키는 심판입니다. 이를 당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선언이라는 문맥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환상이라는 사실이 어린아이들까지 죽임당하는 장면의 무게를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본문이 그리는 집단적 재난의 참혹함은 쉽게 해소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죄에 대한 심판이 그 안에 살아가는 약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치는 장면 앞에서, 오늘의 독자가 심각한 윤리적 질문을 품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이 장의 폭력을 오늘날 특정한 집단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에스겔에게 누군가를 직접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환상으로 보여 줍니다.
왜 성소에서부터 시작합니까?
이스라엘에게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며 보호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곳에 있고, 그분께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성전이 보호를 보장하는 장소가 아니라, 심판이 시작되는 장소가 됩니다.
성전은 원래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장소에서 먼저 심판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장소라는 사실은 그곳에서 저질러지는 악을 가볍게 만드는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악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이유가 됩니다.
이어 하나님은 더욱 충격적인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을 더럽히고 뜰들을 죽임당한 사람들의 시신으로 채워라. 나가라.」 그들은 나가 도시에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에스겔 9:7 · 두루새김
그런데 이 성전은 이미 하나님이 보시기에 역겨운 행위들로 더럽혀진 곳이었습니다.
앞 장에서는 사람들이 성전에 다른 신들의 형상을 세우고, 그곳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제는 죽임당한 사람들의 시신이 성전 뜰을 채웁니다. 앞에서는 예배의 타락이 성전의 거룩함을 훼손했다면, 이제는 심판의 참상이 그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심판은 성전을 넘어 도시로 퍼집니다.
이제 에스겔은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 18:1–20은 아버지의 죄 때문에 아들이 저절로 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9장의 집단적인 심판 환상과 18장의 개인적 책임에 관한 가르침을 어느 한쪽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9장은 공동체 전체를 휩쓰는 심판의 참혹함을 보여 주고, 18장은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이 져야 할 도덕적 책임을 다룹니다. 그러나 그 구별만으로 9장에 나타난 어린아이들의 죽음에 관한 모든 윤리적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7:4–15에서 이미 지적되었듯이, 성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신뢰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불의를 행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백성을 책망하셨습니다. 앞 장에는 우상 앞에 서 있던 일흔 명의 장로가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죽임당하는 노인들을 그들과 연결해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문에서 이들을 가리키는 낱말은 나이가 많은 남자와 직책을 가진 장로를 모두 가리킵니다. 이들이 앞 장의 일흔 명과 정확히 같은 집단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서 시신과의 접촉은 부정과 관련됩니다(민수기 19:11–16). 따라서 성전 뜰이 죽임당한 사람들로 가득 차는 것은 그 장소의 거룩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습입니다.
나는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 심판을 보던 예언자의 탄식
앞부분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8절에서 그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죽이는 동안 나는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외쳤습니다. 「아, 주 여호와야훼여! 예루살렘에 분노를 쏟으시면서 이스라엘에 남은 사람들을 모두 없애시는 것입니까?」에스겔 9:8 · 두루새김
그는 이미 성전에서 벌어진 악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왜 심판하시는지에 관한 설명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심판이 실제로 집행되는 광경 앞에서 그는 남은 사람들의 운명을 염려합니다.
그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사실에 안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묻습니다.
표를 받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합니다. 에스겔은 심판이 집행되는 가운데 남은 사람들이 모두 멸망할까 두려워하며 외칩니다.
이들은 공동체의 파괴를 무관심하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 심판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슬퍼하는 것은 반드시 서로 반대되는 태도가 아닙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예언자이면서 동시에 자기 백성을 위해 부르짖는 사람입니다.
본문은 예언자의 탄식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전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는 과정 속에 그 탄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전해야 할 심판의 무게를 자기 백성의 운명과 연결하여 느끼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나는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라는 말은 환상 속에서 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에스겔 자신이 남아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가 예루살렘의 마지막 생존자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32:11–14에서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앞에서 백성을 위해 간청합니다. 아모스 7:1–6에서 아모스 역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재앙 앞에서 야곱이 작기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부르짖습니다. 에스겔의 외침도 이처럼 예언자가 백성을 위해 간청하는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모세나 아모스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심판을 거두셨다는 응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왜 심판이 내려지는지를 다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보지 않으신다는 말의 결말
하나님은 에스겔의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의 죄가 매우, 매우 크다. 그 땅은 사람을 죽이는 일로 가득 찼고, 도시는 옳지 않은 일로 가득 찼다. 그들이 『여호와야훼께서는 이 땅을 버리셨다. 여호와야훼께서는 보지 않으신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에스겔 9:9 · 두루새김
앞 장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지 않으신다는 말은 어둠 속에서 우상에게 향을 피우는 장로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8:12). 이제 그 말은 도시 전체에 대한 심판의 이유를 설명하는 자리에 등장합니다.
「매우, 매우 크다」라는 표현에서 그 정도가 강조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선언입니다.
원문에서는 땅이 「피」(דָּם)로 가득 찼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몸속에 흐르는 피를 뜻하는 표현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현실을 가리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사람을 죽이는 일」로 풀어 옮겼습니다. 도시를 채운 「옳지 않은 일」은 정의가 뒤틀리고 왜곡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땅을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자신들이 하는 일을 보지 않으신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행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쉬워집니다.
본문은 그런 생각이 실제로 모든 사람의 폭력을 일으킨 구체적인 마음의 과정이라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말과 땅에 가득한 살인과 옳지 않은 일을 같은 고발 안에 놓으십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이해가 삶의 불의와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에스겔 9장 전체가 이 믿음을 부정합니다.
하나님은 도시의 악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그 악을 슬퍼하는 사람들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죄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탄식도 그분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한 대로 그들에게
「나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아끼지도 않겠다. 그들이 한 대로 그들에게 갚아 주겠다.」에스겔 9:10 · 두루새김
이는 심판이 아무 까닭 없이 내리는 처벌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와 관련된 결과임을 나타냅니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이 한 일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신다는 표현은 되풀이하여 등장합니다. 에스겔 7:3–4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행실대로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도시 전체의 악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탄식하는 사람들을 구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한 대로」 갚으시는 심판은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도덕적 상태에 있다는 주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제게 명령하신 대로 모두 했습니다 — 마지막에 돌아온 사람
에스겔 9장은 파괴가 끝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도시를 치는 사람들이 돌아와 보고하는 모습도 아닙니다.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다시 나타나는 사람은 글을 기록할 때 쓰는 먹통을 찬 남자입니다.
그때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먹통을 찬 남자가 보고했습니다. 「제게 명령하신 대로 모두 했습니다.」에스겔 9:11 · 두루새김
앞에서 이 남자에게 내려진 명령은 도시를 지나가며 탄식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표를 받은 사람들이 몇 명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별하라고 명령하셨고, 그 일을 맡은 남자가 명령을 모두 따랐다고 보고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야기는 보호의 표를 남긴 사람의 보고에서 멈춥니다.
파괴하는 자들이 지나간 뒤에도 남는 장면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악을 더 이상 눈감아 주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그 악 때문에 탄식하는 사람들을 심판의 대상으로부터 구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예언자는 그 심판 앞에서 백성을 위해 탄식합니다.
다만 그 사실이 심판의 참혹함을 지우지는 않습니다. 에스겔의 외침이 본문에 남아 있는 것처럼, 독자도 이 장의 무게를 성급하게 해소하지 않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남자가 돌아옵니다.
그가 지닌 것은 내리쳐 부수는 무기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표를 남기기 위한 먹통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마쳤다고 보고합니다.
본문은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 때문에 탄식했는지는 기록했습니다.
악으로 가득한 예루살렘에서, 그 악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파괴의 소리가 도시에 퍼지는 동안, 하나님 앞에 마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누군가의 이마에 보호의 표를 모두 남겼다는 보고였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