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는 착각
에스겔 8장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은 우상 앞에 절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보다 앞서, 예언자가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했을 때 발견한 광경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은밀하게 우상에게 향을 피우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우리를 보지 않으신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 땅을 버리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정말로 떠나신 것인가요? 하나님이 떠나셨다고 믿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른 신을 찾는 것인가요? 아니면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는 행동이 그분의 임재를 성소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나요?
에스겔은 이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에게 보라고 명령하십니다.
바벨론의 집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 여전히 그곳에 계신 하나님
에스겔은 자기 집에 앉아 있습니다. 그의 앞에는 유다의 장로들이 앉아 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벨론으로 끌려온 유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입니다. 에스겔은 이미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1:1–28), 그 영광이 벌판에 나타나는 것도 경험했습니다(3:22–23).
이제 장로들이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자리에서 주 여호와야훼의 능력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바벨론에서는 유다의 장로들이 예언자 앞에 앉아 있고, 예루살렘에서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우상 앞에 서 있습니다. 서로 떨어진 두 장소에 있는 지도자들의 모습이 한 환상 안에 놓이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불과 환한 빛으로 가득한 형체를 봅니다. 그 형체는 손처럼 생긴 것을 뻗어 에스겔의 머리카락 한 움큼을 붙잡고, 영은 그를 땅과 하늘 사이로 들어 올립니다.
본문은 이것이 「하나님의 환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밝힙니다(8:3). 그는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환상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의 현실을 목격합니다.
그를 데려간 곳은 북쪽을 향한 성전 안뜰 문 입구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는 우상」이 있습니다.
여기서 질투는 단순히 다른 존재가 받는 관심을 부러워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34:14에서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이름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밝히실 때처럼, 언약 관계에서 요구되는 오직 그분만을 향한 충성과 관련됩니다.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십계명에서 다른 신을 섬기거나 형상을 만들어 예배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도 이 관계에 근거합니다(출애굽기 20:2–5).
그곳에는 내가 벌판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에스겔 8:4 · 두루새김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이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에만 묶여 있지 않다는 앞선 환상을 다시 확인시킵니다. 동시에 성전이 우상으로 더럽혀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미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영광과 우상이 나란히 존재하는 상황을 하나님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느냐? 이스라엘 백성은 여기서 몹시 역겨운 짓들을 저질러 나를 내 성소에서 멀리 떠나게 하고 있다. 너는 또 다른 몹시 역겨운 짓들을 보게 될 것이다.」에스겔 8:6 · 두루새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 성소에서 멀어지시게 하는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동시에 제시됩니다.
그 긴장 속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더 깊은 곳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그 우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신을 나타냈는지는 8장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열왕기하 21:7은 므낫세가 성전에 아세라 목상을 세운 일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와 같은 우상숭배의 역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본 우상을 바로 그 목상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8:6의 히브리어는 성소에서 멀어지는 일을 말하지만, 누가 멀어지는지 문법적으로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임재가 성소에서 떠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자연스럽고, 뒤따르는 10–11장의 영광 이동 장면도 그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다만 8장에서는 아직 그 떠남이 완료된 것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벽을 파고 들어간 곳 —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들
에스겔은 뜰 입구에서 벽에 난 구멍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벽을 파라고 명령하십니다. 에스겔이 벽을 파자 입구가 나타납니다. 그곳으로 들어가 보니 사방의 벽에 온갖 기어 다니는 동물과 역겨운 짐승의 모습, 이스라엘 백성의 온갖 우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첫 번째 우상은 성전 문 부근에서 바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광경은 벽을 파야만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안쪽으로 들어가고, 그제야 감추어진 예배의 모습을 목격합니다.
벽에 새겨진 짐승들이 어떤 신들을 상징하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기어 다니는 동물」과 「역겨운 짐승」이라는 표현은 레위기 11장의 정결 규정과도 연결되지만,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특정 동물의 형상을 그렸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우상들과 함께 예배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방의 중심에는 형상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장로 70명이 그 형상들 앞에 서 있었고, 그들 가운데는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있었습니다. 저마다 향을 피우는 그릇인 향로를 손에 들고 있었고, 짙은 향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에스겔 8:11 · 두루새김
하나님을 뵙고 그분의 뜻을 따라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이, 지금은 다른 형상들 앞에서 향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어둠 속에서, 저마다 형상으로 꾸민 자기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보았느냐? 그들은 『여호와야훼께서는 우리를 보지 않으신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 땅을 버리셨다.』 하고 말한다.」에스겔 8:12 · 두루새김
예루살렘은 이미 바벨론의 압박을 받고 있었고, 여호야긴과 일부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열왕기하 24:10–17). 하나님의 백성이 외국 왕에게 패하고 성전의 물건까지 빼앗겼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야훼가 자신들을 버리셨다는 생각이 생겨났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장로들이 실제로 어떤 경험을 통해 이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그 생각을 우상숭배와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방향이 거꾸로 바뀌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 여호와야훼를 찾고,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며, 그분의 약속을 붙들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들은 여호와야훼가 떠나셨다고 판단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장로들은 벽에 새겨진 형상들을 바라봅니다. 에스겔은 그 장로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그들을 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그들의 행위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감추어 두었다고 생각한 방은 하나님 앞에서 감추어진 장소가 아닙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은 장로들이 「저마다 형상으로 꾸민 자기 방」에서 하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앞서 에스겔은 한 공간에서 함께 향을 피우는 일흔 명을 보았는데, 이제 그 행위가 각자의 방에까지 퍼져 있는 모습으로 설명됩니다.
환상은 지도자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와 각자의 은밀한 신앙생활을 함께 드러냅니다.
어둠 속에 숨겨진 방이 끝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일흔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오래된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24:9–11에서는 모세와 아론, 나답과 아비후, 이스라엘의 장로 일흔 명이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뵙습니다. 민수기 11:16–25에서는 모세를 도와 백성을 이끌 장로 일흔 명이 세워집니다. 에스겔 8장의 일흔 명이 그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재현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야아사냐의 아버지로 기록된 사반이라는 이름은 요시야 왕 시대의 서기관 사반을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하 22:8–13에서 사반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의 내용을 왕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다만 이 두 본문의 사반이 반드시 동일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동일 인물이라면 율법책의 발견과 개혁에 관여한 집안의 후손이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역설이 되겠지만, 그것은 가능한 읽기이지 본문이 직접 확인해 주는 사실은 아닙니다.
성전 문에서 흘리는 눈물 — 담무스를 위한 애곡
다음 장면은 훨씬 짧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여호와야훼의 성전 북쪽 문 입구로 데려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여자들이 앉아 담무스를 두고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에스겔 8:14 · 두루새김
앞선 장면이 벽 속 깊은 곳에서 벌어진 은밀한 의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성전 문 입구에서 슬피 우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담무스는 메소포타미아의 두무지와 연결되는 신으로, 고대 문헌에서는 목축과 식물의 생명, 죽음과 관련된 전승에 등장합니다. 특히 그의 죽음이나 부재를 슬퍼하며 우는 의식이 알려져 있습니다. 에스겔 8:14의 여자들이 바로 그러한 전통에 속한 의식을 행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슬피 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슬픔을 나타내는 중요한 행위입니다. 시편에는 슬픔과 탄식이 가득하고, 예언자들은 백성에게 하나님 앞에서 울며 돌아오라고 요청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울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의 슬픔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장로들의 손에는 향을 피우는 그릇인 향로가 들려 있었습니다. 향을 피우는 행위 자체는 이스라엘의 예배에도 속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우상 앞에서 행했습니다.
예배의 형식이 남아 있어도, 그 형식이 향하는 대상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종교적 열심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열심이 여호와야훼 아닌 다른 존재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보았느냐? 너는 이것들보다 더 역겨운 짓들을 또 보게 될 것이다.」에스겔 8:15 · 두루새김
여기에서는 앞선 두 번의 예고와 달리 「이것들보다 더 역겨운」이라는 비교가 명시됩니다. 다음 장면이 지금까지 보아 온 광경과 어떻게 다른지 주의 깊게 보라는 뜻입니다.
성전을 등지고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들 — 뒤집힌 예배
하나님은 에스겔을 성전 안뜰로 데려가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여호와야훼의 성전 안뜰로 데려가셨습니다. 성전 건물 입구,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는 남자들이 25명쯤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성전 건물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해에게 절하고 있었습니다.에스겔 8:16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성전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들어가는 구조였습니다. 안뜰에 있는 사람이 성전 건물과 지성소를 향해 바라보려면 서쪽을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정반대로 서 있습니다.
그들의 등 뒤에는 여호와야훼의 성전이 있고, 그들의 얼굴 앞에는 동쪽 하늘의 태양이 있습니다.
앞선 장면들이 성전에 무엇을 들여왔는지 보여 주었다면, 마지막 장면은 사람들이 무엇을 향해 돌아섰는지 보여 줍니다.
이 모습은 단순히 몸의 방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와 맺은 관계가 뒤집혔음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허물지 않았습니다. 성전 건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제단도 있고, 뜰도 있고, 현관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장소에서 사람들은 다른 대상을 향해 절합니다.
성전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곳에서 참된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성전의 현관과 제단 사이는 제사장들이 맡은 일과 깊이 관련된 공간입니다. 요엘 2:17에서는 바로 이곳에서 제사장들이 여호와야훼께 백성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울며 기도하도록 요청합니다. 이들의 위치 때문에 제사장들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스물다섯이라는 숫자를 역대상 24장의 제사장 스물네 반열의 대표자들과 대제사장 한 명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맡은 직분을 직접 밝히지 않으므로, 그렇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열왕기하 23:5, 11은 요시야 왕이 해와 달과 별들에 대한 예배 의식을 폐지하고, 유다 왕들이 태양을 위해 두었던 말들과 병거를 성전에서 제거한 일을 기록합니다. 요시야가 성전에서 제거했던 종류의 숭배가 환상 속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태양을 숭배하는 행위는 신명기 4:19와 17:3에서도 금지됩니다. 해와 달과 별은 사람이 경배해야 할 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우상에서 땅의 폭력으로 — 하나님이 마지막에 지적하신 죄
에스겔은 지금까지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네 가지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지막에 예상과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보았느냐? 여기서 역겨운 짓을 저지른 것이 유다 백성에게는 하찮은 일이냐? 그들은 이 땅을 폭력으로 가득 채우고 또다시 나를 화나게 했다. 보아라, 그들이 나뭇가지를 자기 코에 내밀고 있다.」에스겔 8:17 · 두루새김
성전 안의 우상숭배와 성전 밖의 폭력이 한 문장 안에 놓입니다.
앞서 7:23에서도 땅에 피 흘림이 가득하고 성읍에 폭력이 가득하다는 고발이 등장했습니다. 8장은 그 사회적 폭력과 성전의 우상숭배를 따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를 섬긴다는 것은 그분만을 예배 대상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인정하고, 그분이 명령하신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이 다시 약한 사람을 억압하고, 이웃에게 불의를 행하며, 사회를 폭력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기 22:21–27에서 나그네와 과부, 고아를 억압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이 예배해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전 안에서 여호와야훼를 등지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과, 성전 밖에서 이웃에게 폭력을 행하는 일은 서로 무관한 두 문제가 아닙니다.
둘 다 여호와야훼가 어떤 분이신지를 거부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주장하는 공동체의 실제 신앙은 그들이 무엇 앞에 절하는가뿐 아니라,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도 드러납니다.
코에 내미는 나뭇가지
17절의 끝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몸짓이 등장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이 행위를 자신을 화나게 하는 행동들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심판이 선언됩니다.
「그러니 나도 분노하여 행동하겠다. 나는 불쌍히 여기지 않고 아끼지도 않겠다. 그들이 내게 큰 소리로 외쳐도 나는 듣지 않겠다.」에스겔 8:18 · 두루새김
처음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외침을 듣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을 하나님이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든 기도를 무조건 거절하신다는 일반 원칙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8장에서 드러난 지속적인 우상숭배와 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심판 선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외면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자신의 외침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따라서 18절의 심판은 이유 없는 분노가 아니라, 앞서 제시된 고발에 대한 응답입니다.
조금 더 깊이
「폭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חָמָס)는 하마스입니다. 물리적 폭행만을 뜻하는 좁은 표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해악과 폭력적인 불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나뭇가지를 자기 코에 내밀고 있다」는 구절의 의미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예배 의식에서 가지를 코에 가까이 대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본문은 구체적인 의식이나 대상 신을 밝히지 않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이것을 여호와야훼를 향한 모욕적인 행위로 읽는 것입니다. 특히 원문에서 코를 가리키는 낱말이 분노라는 의미와도 관련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런 언어적 연관성만으로 몸짓의 정확한 의미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전은 누구의 것인가 — 에스겔 8장이 드러내는 신앙의 붕괴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바벨론에 끌려온 사람들은 성전에 갈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떠나셨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말이 현실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보고 계셨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영광 가운데 계신 성전.
그리고 바로 그 성전 건물을 등지고 해에게 절하는 사람들.
성전은 그들의 등 뒤에 있습니다. 그들은 동쪽을 바라보며 몸을 굽힙니다. 자신들이 어느 방향으로 돌아서 있는지조차 문제 삼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거듭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보았느냐?」
그들이 하나님을 보지 않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