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끝이 왔을 때, 무엇이 남는가

에스겔 7장은 한 단어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이 어떻게 포위되고 사람들이 어떻게 죽을 것인지 다시 설명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압축한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끝이다!」

이 선언이 놀라운 까닭은 에스겔이 이 말씀을 받을 당시 예루살렘이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전도 서 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집을 사고팔았으며, 재산을 모으고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7장의 끝은 단순히 외부에서 닥쳐온 재앙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만들어 온 삶의 방식이 이제 자신들을 무너뜨리는 현실과 마주하는 끝입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77장 본문 읽기 →

“끝이다” —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날

에스겔 7:1–9 본문 →

왜 하나님은 같은 말을 거듭하시는가

본문 첫머리에는 「끝」이라는 단어가 집요하게 반복됩니다.

2절에서는 「끝이다」, 「끝이 왔다」라고 하시고, 3절에서는 「이제 네게 끝이 닥쳤다」고 하십니다. 이어 6절에서는 더욱 다급한 표현이 나옵니다.

「끝이 왔다! 끝이 왔다! 끝이 너를 향해 깨어났다. 보아라, 그것이 온다!」에스겔 7:6 · 두루새김

끝을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묘사한 것입니다.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일어나 예루살렘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막연하게 먼 미래에 있을 법한 재앙이 아니라, 이미 행동을 시작한 현실처럼 그려집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이전과 같은 삶을 계속했습니다. 예언자들이 불순종의 결과를 경고했지만, 당장 모든 것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하거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경고를 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 시간이 끝나고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7절에서는 「때가 왔다. 그날이 가깝다」고 하십니다. 그날은 아직 시간상 미래에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는 이미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심판이 정확히 며칠 뒤에 시작되는가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앞으로도 심판이 없으리라는 보증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끝나는가

「사람의 아들아, 주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 땅에 이렇게 말한다. 『끝이다! 이 땅의 네 귀퉁이에 끝이 왔다!』」에스겔 7:2 · 두루새김

여기서 끝은 우주 전체의 종말을 뜻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인 대상은 「이스라엘 땅」입니다. 「네 귀퉁이」라는 표현은 동서남북 모든 방향, 곧 그 땅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끝은 이스라엘 땅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닥칠 역사적 파멸입니다. 모든 인간의 역사가 마지막으로 끝나는 순간에 관한 선언으로 곧장 옮겨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이전처럼 살아갈 수는 없게 됩니다.

“네가 한 대로”라는 반복

3–4절에서 하나님은 그 끝이 왜 오는지 말씀하십니다.

「『이제 네게 끝이 닥쳤다. 내가 네게 분노를 쏟고, 네가 한 대로 너를 심판하겠다. 네 온갖 역겨운 짓의 대가를 네가 치르게 하겠다.』」에스겔 7:3 · 두루새김

그리고 8–9절에서는 거의 같은 말씀이 다시 나옵니다. 특히 「네가 한 대로」와 「네 역겨운 짓」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무런 이유 없이 공격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걸어온 길과 행한 일에 따라 심판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네가 한 대로」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의 핵심은 히브리어 데레크(⁨דֶּרֶךְ⁩), 곧 ‘길’입니다. 사람이 걸어가는 실제 길뿐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행동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됩니다.

이 말은 사람이 행한 결과를 기계적으로 돌려받는다는 단순한 인과법칙이 아닙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직접 그 행동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끝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를 잊으셨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관계 안에서 오래도록 이어진 불순종에 대해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사건입니다.

9절은 첫 단락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나는 불쌍히 여기지 않고 아끼지도 않겠다. 네가 한 대로 갚아 주고, 네 역겨운 짓의 대가를 네 안에서 치르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를 치는 이가 나 여호와야훼임을 알 것이다.」에스겔 7:9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신들을 구원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들을 심판하시는 분으로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을 구원하신 분이라고 해서, 그분이 자신들의 모든 행동을 받아들이시는 것은 아닙니다.

꽃이 핀 것은 희망이 아니라 오만이었다

에스겔 7:10–13 본문 →

화관과 꽃핀 막대기의 역설

10절에서 본문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지는 듯합니다.

「보아라, 그날이다! 보아라, 그날이 온다! 파멸이 닥쳤다. 막대기에 싹이 나고, 교만이 꽃을 피웠다.」에스겔 7:10 · 두루새김

끝과 심판을 선언하던 본문에 싹과 꽃이라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이 장면은 언뜻 새로운 시작이나 번영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꽃을 피운 것은 「교만」입니다.

「폭력이 일어나 악의 막대기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남지 않고, 그들의 무리도 재물도 남지 않으며, 그들이 누리던 영광도 남지 않을 것이다.」에스겔 7:11 · 두루새김

여기서 10절의 막대기와 11절의 막대기가 연결됩니다. 본문은 교만과 폭력이 마치 식물처럼 자라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싹이 텄습니다.

그다음 꽃이 피었습니다.

이제는 폭력이 일어나 악의 막대기가 되었습니다.

교만과 폭력이 충분히 자라 심판의 때와 맞물리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가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좋은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교만과 폭력도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사는 사람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사람도 슬퍼하지 마라

12절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나옵니다.

「때가 왔다. 그날이 이르렀다. 사들이는 사람은 기뻐하지 말고, 파는 사람은 슬퍼하지 마라. 분노가 그 땅의 모든 사람을 향하기 때문이다.」에스겔 7:12 · 두루새김

평상시에는 물건이나 땅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입장이 다릅니다. 사는 사람은 새롭게 소유하게 된 것을 기뻐할 수 있고, 파는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떠나보내며 아쉬워할 수 있습니다.

거래 자체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산 사람은 그것을 소유했다고 해서 안전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판 사람도 잃어버린 소유를 되찾을 기회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아직 살아 있더라도, 판 사람은 자기가 판 것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그 땅의 모든 사람을 향한 이 환상은 거두어지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자기 죄 가운데서 목숨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에스겔 7:13 · 두루새김

땅을 사고파는 일은 시간이 계속 흐르고 공동체의 질서가 유지될 것이라는 기대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제 그 기대 자체가 무너집니다.

사람은 거래를 마쳤지만 그 거래의 미래가 없습니다.

소유를 얻었지만 그것을 누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죄의 방식이 더 이상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앞에서는 교만과 폭력이 자라났지만, 이제 그것으로 삶을 지탱할 수 없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체피라(⁨צְפִירָה⁩)는 성경에서 이 장의 7절과 10절에 등장하는 드문 낱말입니다. 꽃으로 만든 관이나 둥근 테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지만, 닥쳐온 파멸이나 운명의 전환을 뜻한다고 읽는 길도 있습니다. 원문을 화관으로 읽으면 이어지는 막대기와 꽃의 이미지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정확히 누구의 교만을 가리키는지, 막대기가 유다 내부의 악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심판의 도구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11절에서 폭력이 악과 결합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기에는 민수기 17:8과 흥미로운 대조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고 꽃이 피며 열매가 맺힙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제사장직을 확인하는 표징이었습니다. 두 본문 사이에 의도적인 직접 인용 관계가 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같은 식물의 이미지가 서로 대조적인 상황에 사용되었다는 점은 의미 있습니다. 레위기 25:13에서는 희년이 되면 각자가 자신의 소유지로 돌아가도록 규정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토지는 단순한 거래 대상이 아니라 조상들에게 주어진 상속지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판 사람이 자기가 판 것을 되찾지 못한다는 선언은 그 제도가 바탕으로 삼는 안정된 삶이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에스겔 7:13이 희년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자체는 심판으로 인해 이전의 소유 관계를 회복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둡니다.

나팔은 울렸지만 아무도 전쟁에 나가지 않았다

에스겔 7:14–18 본문 →

준비를 마쳤는데 왜 싸우지 않는가

14절은 단 한 장면으로 한 사회의 무력함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나팔을 불고 모든 준비를 마쳐도 싸우러 나가는 사람이 없다. 내 분노가 그 땅의 모든 사람을 향하기 때문이다.」에스겔 7:14 · 두루새김

나팔을 부는 것은 전쟁을 알리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행동입니다. 민수기 10:9에서도 이스라엘이 적과 싸우러 나갈 때 나팔을 불도록 명령합니다.

전쟁의 절차는 남아 있지만, 그 절차를 실행할 힘이 사라졌습니다.

거래는 이루어지지만 소유의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이제 군사적 준비가 이루어지지만 방어할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본문은 군사들의 구체적인 마음 상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탈영했는지, 병력이 부족했는지, 지도력이 무너졌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전쟁은 역사적으로 군대와 무기, 전략과 병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역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군사적 준비는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낼 수 없습니다.

밖에는 칼이 있고, 안에는 역병과 기근이 있다

15절은 도시의 안팎을 나누어 보여 줍니다.

「성 밖에는 칼이 있고, 성안에는 전염병과 굶주림이 있다. 들에 있는 사람은 칼에 죽고, 성안에 있는 사람은 굶주림과 전염병에 삼켜질 것이다.」에스겔 7:15 · 두루새김

성벽은 원래 외부의 적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집니다. 하지만 성벽 안에 갇혀 있는 동안 식량 공급이 끊기고 질병이 퍼진다면, 그 성벽은 오히려 사람들을 고통스러운 공간 안에 붙잡아 두게 됩니다.

바깥의 적을 막기 위해 세워진 구조물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산으로 피한 사람들이 왜 비둘기처럼 신음하는가

16절에서 살아남아 도망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 가운데 피한 사람들은 산에 머물 것이다. 골짜기의 비둘기들처럼, 모두 저마다 자기 죄 때문에 신음할 것이다.」에스겔 7:16 · 두루새김

이사야 38:14과 59:11에서도 비둘기의 소리와 인간의 탄식이 연결됩니다. 비둘기의 울음은 전쟁의 나팔 소리와 전혀 다릅니다.

나팔은 사람들을 모으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산에 남은 사람들에게서 들리는 것은 각자의 죄 때문에 신음하는 소리입니다. 본문은 그들을 「모두 저마다」 신음하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앞 장에서 이스라엘의 산들은 우상숭배의 장소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7장에서 산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그곳에서 안전과 풍요를 누리지 못합니다.

다만 이 장이 도망친 사람들이 반드시 과거에 우상숭배하던 바로 그 장소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같은 산이라는 공간이 이제 피난과 탄식의 장소로 묘사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두려움이 사람의 몸을 무너뜨리다

17–18절은 재앙을 맞은 사람들의 몸을 묘사합니다.

「모든 손에서 힘이 빠지고, 모든 무릎이 물처럼 풀릴 것이다.」에스겔 7:17 · 두루새김

두 표현은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 있게 행동하거나 굳게 서 있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자루옷을 두르고, 두려움에 몸을 떨며, 얼굴마다 부끄러움이 드러나고, 모두 머리를 밉니다. 자루옷과 머리털을 미는 행동은 구약에서 죽음을 슬퍼하거나 깊은 슬픔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등장합니다(이사야 22:12; 예레미야 48:37).

이제 에스겔의 심판 선언은 군대와 도시를 지나 개개인의 몸에 이릅니다.

도시의 붕괴는 건물이 무너지는 사건이기 전에,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없게 되는 사건입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모든 무릎이 물처럼 풀릴 것이다」라는 표현은 해석상 주의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어는 문자 그대로 무릎과 물을 연결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무릎에 힘이 풀리는 모습으로 옮겼습니다. 극심한 공포에 따른 신체적 반응으로 읽는 길도 있습니다. 어느 한 가지 생리적 현상을 확정적으로 가리킨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거리에 내던져진 은과 금 — 가장 귀한 것이 가장 무용해지는 날

에스겔 7:19–22 본문 →

왜 사람들이 자기 돈을 버리는가

19절에서 매우 낯선 행동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은을 거리에 내던지고, 그들의 금은 부정한 것이 될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쏟아지는 날에 은과 금은 그들을 구해 주지 못한다. 허기를 달래 주지도, 배를 채워 주지도 못한다. 은과 금이 그들을 죄에 빠뜨리는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에스겔 7:19 · 두루새김

사람들은 은과 금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잃지 않으려고 보관하고, 위기가 닥칠 때를 대비해 쌓아 두기도 합니다.

은과 금은 일반적으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돈 자체를 먹을 수는 없지만 돈으로 음식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먹을 음식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다면 재산은 이전의 힘을 잃습니다.

은과 금은 무력할 뿐 아니라 죄와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그 재산이 사람들을 어떤 행동으로 이끌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름다운 장식이 어떻게 혐오스러운 것이 되는가

20절에서 재산과 죄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장식품을 자랑거리로 삼았고, 그것으로 역겨운 우상들, 혐오스러운 형상들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을 그들에게 부정한 것으로 만들겠다.」에스겔 7:20 · 두루새김

이 장면에는 가치의 뒤바뀜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금과 은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귀한 것들이 부정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본문이 문제 삼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자기 자랑과 우상숭배의 수단으로 만든 행동입니다. 무엇이 귀한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의 가격이나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자 감추어진 곳이 더럽혀진다

21–22절에서는 외국인들이 들어와 귀한 것들을 빼앗고 더럽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서 얼굴을 돌리겠다. 침입자들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곳을 더럽힐 것이다. 폭력을 일삼는 자들이 그 안에 들어가 더럽힐 것이다.」에스겔 7:22 · 두루새김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이 함께 계심과 호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민수기 6:24–26의 제사장 축복에서는 하나님이 얼굴을 비추시고 향하시며 은혜와 평안을 주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문맥에서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는 행동은 이전에 누리던 보호와 호의가 거두어지는 심판과 연결됩니다.

이 장면의 두려움은 단순히 성전의 귀중품을 빼앗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연결된 장소가 더럽혀지는 것을 하나님이 막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성전이 있는 도시가 안전하다고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성전의 거룩함을 자신들의 죄를 덮어 주는 보증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향해 있지 않은 곳에서, 건물 자체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은 원문에서 대명사와 대상의 관계가 다소 복잡합니다. 원문의 주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장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를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진 귀한 장식과 재산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성전의 아름다운 장식이나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것들과 연결하여 읽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특히 뒤의 22절에서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곳이 더럽혀지는 장면이 나오므로, 성전과 그 안의 귀중한 것들이 함께 염두에 놓여 있다고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20절만으로 장식품의 정확한 정체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내가 소중히 여기는 곳」은 성전의 가장 깊숙하고 거룩한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문에는 감추어 둔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이 성전 지성소라는 명칭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으므로, 그 장소를 확정하는 데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슬을 만들어라 — 폭력으로 가득 찬 도시의 마지막 모습

에스겔 7:23–24 본문 →

왜 갑자기 사슬이 등장하는가

23절은 새로운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사슬을 만들어라. 이 땅에는 사람을 죽게 하는 판결이 가득하고, 이 도시에는 폭력이 가득하기 때문이다.」에스겔 7:23 · 두루새김

사슬은 사람을 묶거나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데 쓰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사슬은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우상숭배와 역겨운 짓들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회적 폭력과 판결의 문제가 직접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예루살렘의 죄는 종교적 행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했고, 사회의 정의가 어떻게 작동했는가 하는 문제도 포함됩니다.

정의롭게 판단해야 할 곳에서 오히려 피가 흘려졌다면, 그 사회의 질서는 안에서부터 무너진 것입니다.

폭력은 갑자기 벌어진 사건 몇 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땅과 도시를 가득 채운 상태로 묘사됩니다.

폭력의 도시가 다른 폭력적인 자들에게 넘겨지다

24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민족들 가운데 가장 악한 자들을 데려오겠다. 그들이 이 백성의 집들을 차지할 것이다. 내가 이 백성 가운데 힘센 자들의 교만을 꺾겠다. 이 백성의 성소들은 더럽혀질 것이다.」에스겔 7:24 · 두루새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폭력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른 폭력적인 민족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민족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오히려 그들을 「민족들 가운데 가장 악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악을 심판하시지만, 그 심판에 사용되는 외국 민족도 스스로 의로운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런 역사 이해는 하박국 1:12–17에서 제기되는 질문과도 연결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왜 더 악한 자들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시는지 묻습니다.

에스겔 7장은 그 질문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민족들의 움직임까지 자신의 심판 안에서 다스리신다고 선언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람을 죽게 하는 판결」을 피를 흘리는 범죄에 대한 판결이나 피를 흘리게 하는 잘못된 법적 판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법적 상황은 확정하기 어렵지만, 원문에서 피와 판결이 연결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두루새김이 「성소들」로 옮긴 표현은 원문의 모음과 문법을 어떻게 읽는가에 따라 성소들 또는 거룩하게 하는 이들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소들이라는 읽기를 따르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여겼던 장소들이 침범당하는 장면이 다시 강조됩니다.

평화를 찾겠지만, 평화는 없을 것이다 — 무너진 지도자들과 사라진 말씀

에스겔 7:25–27 본문 →

왜 사람들은 그때서야 평화를 찾는가

25절은 짧지만 이 장 전체를 압축하는 문장입니다.

「공포가 닥쳐온다. 그들은 평화를 찾겠지만, 평화는 없을 것이다.」에스겔 7:25 · 두루새김

전쟁이 멈추기를 바랄 것입니다. 먹을 것을 얻고 싶을 것입니다. 집과 가족의 안전을 되찾고 싶을 것입니다. 이전처럼 살아갈 수 있는 안정된 질서가 회복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서가 무너진 뒤에야 평화를 찾습니다.

이것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평화를 지탱해야 할 삶의 질서를 오랫동안 훼손한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도 보여 줍니다. 에스겔 7장의 흐름에서 보면, 평화는 정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폭력과 사람을 죽게 하는 판결이 가득한 공동체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화를 기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에 가깝습니다.

예언자와 제사장과 장로에게서 답이 사라진다

26절은 이 장에서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합니다.

「재난에 재난이 닥치고, 소식에 소식이 잇따를 것이다. 그들은 예언자가 환상을 통해 받은 말을 들으려 하겠지만, 제사장의 가르침은 사라지고 장로들의 조언도 사라질 것이다.」에스겔 7:26 · 두루새김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시간조차 얻지 못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제사장은 율법과 정결, 예배에 관한 가르침을 맡았습니다. 장로들은 공동체의 경험과 판단을 바탕으로 조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가 환상을 통해 받은 말을 듣지 못하고, 제사장의 가르침과 장로들의 조언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 활동이 중단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리는 상황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재앙이 현실이 되자 사람들은 예언자가 환상을 통해 받은 말을 들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때에 언제나 새로운 말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한 순간에 꺼내 쓸 수 있는 도구처럼 취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계속 거절한 공동체는 위기가 닥쳤을 때 그것들을 제대로 듣고 활용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이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사라진다거나, 앞으로 어떤 계시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에스겔서 자체가 이후에도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왕과 지도자와 백성의 손이 모두 무너지다

마지막 절은 사회의 여러 집단을 한꺼번에 보여 줍니다.

「왕은 슬퍼하고 지도자는 절망에 휩싸이며, 이 땅의 백성은 두려움에 손을 떨 것이다. 내가 그들이 한 대로 그들을 다루고, 그들이 판단하던 기준대로 그들을 심판하겠다. 그러면 그들은 내가 여호와야훼임을 알 것이다.」에스겔 7:27 · 두루새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과 그 다스림 아래 살아가는 사람 모두 같은 재앙 앞에 놓입니다. 3절과 8절에서는 「네가 한 대로」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27절에서도 같은 원칙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이 판단하던 기준대로」라는 표현이 더해집니다.

앞서 23절에서는 그 땅에 사람을 죽게 하는 판결이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이 판단하던 기준대로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사회에서는 판결이 사람을 죽게 하는 데 연결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사회의 행동과 판단을 자신의 심판 아래 놓으십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들을 모두 잃은 뒤에야, 자신들의 역사를 판단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은 예레미야 6:14와 8:11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가 있다고 말하며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다루는 이들이 책망받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외면한 채 겉으로만 평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장에서 이스라엘은 고통스러운 심판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진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 자체를 기뻐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에스겔 18:23에서 하나님은 악한 사람이 죽는 것을 기뻐하시기보다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 살아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18:32에서는 죽는 자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돌아서 살아나기를 바라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자기 백성의 불의와 폭력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나팔은 울렸지만,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에스겔 7:1–27 본문 →

이 한 장면은 에스겔 7장이 선언하는 「끝」의 의미를 압축합니다. 이스라엘의 끝은 단순히 밖에서 강한 적이 몰려왔기 때문에 닥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삶을 판단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에스겔 7장을 오늘의 삶에 적용할 때,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은 어떤 사회적 재난이나 국가적 위기를 곧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정하는 태도입니다. 이 장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한 일을 판단하시고 특정한 재앙을 예언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모든 재난에 대해 그와 같은 특별한 계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전쟁과 굶주림을 겪거나 공동체가 어려움에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심판받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공동체의 불의를 외면하거나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무관심한 태도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이 사람을 해치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이 부당한 판단을 가볍게 만들 수 없습니다.

나팔은 여전히 울립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절차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가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지탱하던 것들은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외면해 왔던 하나님의 말씀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나팔이 울려도 아무도 나가지 않는 그날, 그들은 마침내 자기들을 지켜 줄 것이라 믿었던 것들과 자신들의 삶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같은 분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