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6장 · 성전 공사와 방해

성전보다 먼저 시작된 예배

에스라 3장에는 성전이 두 번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아직 기초조차 놓이지 않은 성전으로, 마지막에는 마침내 기초가 놓인 성전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두 장면 사이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성전이 세워지기도 전에 제사가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제단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번제를 바치며, 초막절을 지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소리가 끼어듭니다.

새 성전의 기초를 보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예전 성전을 기억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큰 소리로 웁니다. 두 소리는 너무 크게 뒤섞여서 서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왜 같은 성전의 기초를 바라보면서 어떤 사람은 기뻐하고 어떤 사람은 울었을까요? 그리고 글쓴이는 왜 이 장을 찬양만으로 끝내지 않고, 기쁨과 울음이 뒤섞인 소리로 마무리할까요?

돌아왔다는 사실과 잃어버린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에스라 3장은 그 간격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하는 백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73장 본문 읽기 →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모이다

에스라 3:1 본문 →

이스라엘 백성이 각자의 성읍에 살고 있을 때 일곱째 달이 되었습니다. 백성은 한마음으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에스라 3:1 · 두루새김

에스라 2장의 마지막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각자의 성읍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3장은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에스라 2장은 사람들을 수많은 가문과 성읍과 맡은 일에 따라 구분했습니다. 바로스 자손, 스바댜 자손, 베들레헴 사람들,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성전 봉사자들처럼 공동체의 구성원을 세세하게 나누어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많은 구분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입니다.

각자의 가문과 성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삶의 터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모인 이 순간만큼은 하나의 공동체로 행동합니다.

왜 일곱째 달인가?

이스라엘에서 예배와 절기를 위해 쓰던 달력으로 일곱째 달은 중요한 절기들이 모여 있는 달입니다. 레위기 23장과 민수기 29장에 따르면, 일곱째 달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갖고(민수기 29:1), 열흘날에는 속죄일을 지키며(레위기 23:27), 열닷새부터는 초막절을 지킵니다(레위기 23:34).

성전 건물은 무너졌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정해진 시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성전은 다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곱째 달은 돌아왔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제단부터 세우다

에스라 3:2–3 본문 →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동료 제사장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동료들이 나서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그 위에서 번제를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에스라 3:2 · 두루새김

예수아는 제사장들의 지도자로, 스룹바벨은 돌아온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이후 성전을 다시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학개 1:1은 스룹바벨을 유다 총독으로, 요사닥의 아들 여호수아를 대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그런데 에스라 3장은 두 사람 중 한 사람만을 중심에 세우지 않습니다. 예수아와 동료 제사장들, 스룹바벨과 그의 동료들이 함께 나서서 제단을 세웁니다.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면서 오래된 말씀으로 돌아가다

포로로 끌려가기 이전의 왕국은 무너졌습니다. 성전도 파괴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일하던 장소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공동체는 새 시대에 맞는 예배 방식을 마음대로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모세의 율법은 그들이 여호와야훼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는 기본 가르침이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던 체제가 무너진 뒤에도 그 가르침은 여전히 공동체의 삶을 이끄는 기준으로 남아 있습니다.

왕국이 존재하던 시대에는 왕이 성전과 예배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윗 왕조의 왕이 다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왕국의 권력만으로 유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따라 자신들의 삶과 예배를 이루어 가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제단을 세우게 한 두려움 — 3절

그들은 주변 여러 민족이 두려웠기 때문에 제단을 원래 받침 위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여호와야훼께 아침저녁으로 번제를 바쳤습니다.에스라 3:3 · 두루새김

이스라엘 백성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은 두려움이 사라진 다음에 예배를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제단을 「원래 받침 위에」 세웠다는 말

이전 제단이 놓였던 자리 또는 그 자리에 해당하는 기초 위에 제단을 다시 세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만으로 이전 제단의 구조물이 얼마나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 곳에나 제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 예배하던 장소에서 예배를 다시 시작한다는 사실이 중요했습니다. 성전 건물이 아직 없어도 그곳에서 번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건물은 아직 없지만, 예배의 장소와 행위는 다시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의 「주변 여러 민족」은 유다 주변에 살던 여러 주민이나 민족 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3절만으로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위협을 가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후 에스라 4장에서는 성전 건축을 둘러싼 반대와 갈등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키는 문맥에 따라 이유를 나타내는 「왜냐하면」으로도, 다른 논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두루새김의 「주변 여러 민족이 두려웠기 때문에」처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제단부터 세웠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제단을 세웠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읽기는 두려움이 제단을 서둘러 세우게 한 이유였음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 읽기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배를 시작한 결단을 강조합니다.

성전보다 먼저 돌아온 것은 하루의 예배였다

에스라 3:4–6 본문 →

3절 마지막에는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번제가 등장합니다.

민수기 28:3–8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일정한 제물을 바치도록 정합니다. 그들은 성전 건축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한 번만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율법에 정해져 있던 정기적인 번제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성전을 다시 세우는 것은 언젠가 완성될 미래의 과제입니다. 그러나 아침과 저녁의 번제는 바로 오늘부터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초막절을 지키다 — 4절

그들은 기록된 대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날마다 그날에 바치도록 정해진 수만큼 번제를 바쳤습니다.에스라 3:4 · 두루새김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았던 역사를 기억하도록 주어진 절기입니다. 레위기 23:42–43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초막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이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실 때 초막에서 살게 하셨다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아직 약속의 땅에 정착하지 못한 백성이었습니다. 에스라 시대에 돌아온 사람들도 고향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워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에스라 3장은 초막절을 지키면서 그들이 특별히 이집트를 떠난 뒤의 광야 생활과 자신들의 귀환을 비교했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초막절에 담은 의미를 생각하면, 이 장면은 새로운 깊이를 얻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정된 정착 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절기 안에는 한때 하나님이 그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셨다는 기억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다시 정착의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규정대로, 날마다

민수기 29:12–38에는 초막절 기간에 날짜별로 드려야 할 제물의 수가 자세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기쁨과 감격은 중요하지만, 예배에는 공동체가 물려받은 질서도 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맞추어 모든 제사의 방식을 새로 정하기보다, 율법에 기록된 예배의 방식을 다시 실천합니다.

5절에서는 그 범위가 더욱 넓어집니다.

정기적으로 바치는 번제, 매달 첫날의 번제, 여호와야훼를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모든 명절의 번제, 그리고 사람들이 스스로 원해서 드리는 제물들이 이어집니다. 하루의 아침과 저녁, 한 달의 시작, 해마다 찾아오는 절기들이 다시 여호와야훼를 예배하는 시간으로 구별됩니다.

무너진 성전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의 질서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기초도 놓이지 않았다 — 6절

그들이 여호와야훼께 번제를 바치기 시작한 때는 일곱째 달 첫날이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여호와야훼의 성전 기초를 놓기 전이었습니다.에스라 3:6 · 두루새김

이 절은 앞에서 설명한 사건의 시작점을 다시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6절은 4–5절 이후에 또 다른 제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앞서 기록된 제사 활동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다시 짚어 주는 문장입니다.

성전은 여전히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성전이 완성되어야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을 건축하려는 이유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에 성전 건축과 예배는 경쟁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목적을 향한 서로 다른 행동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첫 성전을 하나님께 바칠 때, 그는 하나님이 이 건물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열왕기상 8:27). 그런데 동시에 성전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두신 장소였으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심이었습니다. 에스라 3장의 돌아온 사람들도 그 중심을 다시 세우려 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에스라 3:7–9 본문 →

예배가 시작되자 이제 본격적인 성전 건축 준비가 기록됩니다.

그들은 돌을 다듬는 사람들과 건축 기술자들에게 은을 주었습니다. 또 레바논의 백향목 목재를 욥바 바닷가까지 가져오도록 시돈 사람들과 두로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었습니다. 이 일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그들에게 내준 허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에스라 3:7 · 두루새김

시돈과 두로는 지중해 동부 해안의 도시들입니다. 레바논은 백향목으로 알려진 지역이며, 욥바는 지중해 연안의 항구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할 때 두로 왕 히람의 도움을 받아 레바논의 백향목을 공급받았습니다. 역대하 2:16에서는 두로 사람들이 목재를 레바논에서 베어 바다로 욥바까지 보내겠다고 말합니다. 에스라 3:7은 이와 매우 비슷한 건축 준비를 기록합니다.

비슷한 목재, 달라진 정치적 현실

그러나 두 시대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 왕이 직접 외국 왕과 협력하여 성전 건축을 준비했습니다. 반면 에스라 시대에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허가에 따라 목재를 가져옵니다.

이제 유다에는 솔로몬처럼 독립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 없습니다. 제국의 허락과 여러 지역 사람들의 협력을 통해 성전을 건축해야 합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예배를 회복하려 하지만, 조상들의 정치적 권력을 그대로 되찾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성전 건축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둘째 해 둘째 달 — 8절

그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성전 터에 도착한 뒤 둘째 해 둘째 달이었습니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 나머지 동료들인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그리고 포로 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모든 사람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스무 살 이상인 레위 사람들에게 여호와야훼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는 일을 맡겼습니다.에스라 3:8 · 두루새김

열왕기상 6:1에 따르면 솔로몬도 그의 통치 넷째 해 둘째 달에 여호와야훼의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 성전의 건축 시기를 일부러 되살리려는 것인지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첫 성전 건축과 두 번째 성전 건축이 같은 달에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새로운 성전은 완전히 낯선 건물이 아니라, 이전 성전의 역사를 잇는 건물로 준비되고 있습니다.

스무 살 이상의 레위 사람들

성전 건축은 돌을 쌓고 나무를 다루는 기술자들의 작업이지만, 그 일이 여호와야훼의 성전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에 레위 사람들이 감독하도록 일을 맡깁니다. 역대상 23:24–27에서는 다윗 시대의 레위 사람들 가운데 스무 살 이상이 여호와야훼의 성전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도록 정리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라 3장의 나이 기준은 그러한 다윗 시대의 성전 봉사 조직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9절에서는 감독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다시 나열됩니다.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 헤나닷 자손이 함께 일합니다.

처음에는 백성이 하나의 공동체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이제는 성전 건축을 감독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나의 일을 수행합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는 일이 모임에서 끝나지 않고 실제적인 협력으로 이어집니다.

기초를 놓는 순간 울려 퍼진 오래된 노래

에스라 3:10–11 본문 →

건축하는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성전 기초를 놓았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장 옷을 갖춰 입고 나팔을 들고 섰으며, 아삽 자손인 레위 사람들도 제금을 들고 섰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왕 다윗의 지시에 따라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려고 자리에 선 것이었습니다.에스라 3:10 · 두루새김

앞에서는 제단과 제사를 모세의 율법에 따라 회복했습니다. 이제 성전 건축의 기초를 놓는 순간에는 다윗이 마련했던 찬양의 전통을 따릅니다.

모세의 율법이 제사와 절기의 기준이었다면, 다윗은 성전 음악과 예배 봉사 조직의 전통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그 건물 안에서 드려지던 예배의 질서까지 회복하려 합니다.

아직 건물이 아닌 기초를 보며 찬양하다

기초는 아직 성전 자체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예배할 수도 없고, 지붕이나 벽도 아직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초가 놓였다는 것은 성전이 더 이상 계획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너진 성전이 있던 자리에서 실제로 새로운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노래를 주고받으며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선하시다.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하다.」 온 백성은 여호와야훼의 성전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에스라 3:11 · 두루새김

노래의 중심은 여호와야훼의 성품입니다.

폐허 위에서 다시 고백하는 「한결같은 사랑」

성전이 파괴되었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으며, 조상들이 살던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하다」고 노래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영원하다」는 말은 고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가 끊어진 것처럼 보였던 사건조차 여호와야훼의 신실한 사랑을 끝내지는 못했다는 고백입니다.

성전은 무너졌지만,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는 고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때 완성된 성전에서 울렸던 노래가 이제 새 성전의 기초 앞에서 다시 불립니다.

그러나 이 노래가 끝난 뒤, 글쓴이는 예상하지 못한 소리를 들려줍니다.

조금 더 깊이

역대상 16:4–6에서는 다윗이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고 감사하게 했으며,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도록 한 기록이 나옵니다. 역대상 25장에서도 아삽 자손을 비롯한 사람들의 음악 봉사가 기록됩니다. 역대상 16:34에도 여호와야훼가 선하시며 그의 한결같은 사랑이 영원하다는 고백이 등장합니다. 역대하 5:13에서는 솔로몬 성전을 하나님께 바칠 때 나팔을 부는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이 함께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며 같은 내용을 노래합니다. 시편 136편에서도 이 고백은 반복되는 후렴으로 사용됩니다.

같은 기초 앞에서 울고 기뻐하다

에스라 3:12–13 본문 →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집안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예전 성전을 보았던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새 성전의 기초가 놓이는 것을 보며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한편 다른 많은 사람은 기뻐하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에스라 3:12 · 두루새김

성전의 기초는 하나인데, 그 앞에 선 사람들의 기억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새 기초는 자신들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성전이 다시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기쁨의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 성전을 직접 보았던 이들에게 그 기초는 새로운 시작이면서 동시에 잃어버린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울음의 이유를 서둘러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예전 성전의 웅장함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초라한 출발을 슬퍼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던 때의 상실과 고통이 다시 떠올랐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다시 성전을 세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감격 때문에 울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그들의 울음을 단순히 믿음이 부족하거나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난 반응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우는 사람들을 꾸짖지 않습니다. 글쓴이는 그들의 울음과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있는 그대로 기록합니다.

기쁨과 울음이 구별되지 않다 — 13절

백성이 워낙 크게 외쳐서, 사람들은 기쁨의 외침과 울음소리를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 소리는 멀리까지 들렸습니다.에스라 3:13 · 두루새김

그런데 글쓴이는 어느 쪽이 더 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소리가 옳았는지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백성은 「한마음으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한마음으로 모인 그 백성이 서로 다른 소리를 냅니다.

오히려 이 장은 공동체가 하나 된다는 것이 모든 사람의 감정과 기억이 같다는 뜻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기뻐하는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비난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함께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왜 두 소리가 구별되지 않는다고 했을까?

만일 본문이 기쁨의 외침으로만 끝났다면, 독자는 성전의 회복이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느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이 많은 사람들의 울음으로만 끝났다면, 새롭게 시작되는 건축의 기쁨이 가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글쓴이는 두 소리를 모두 남깁니다.

새로운 기초가 놓였다고 해서 과거의 모든 아픔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전의 상실을 기억한다고 해서 새로운 시작을 기뻐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에스라 3장은 회복의 기쁨이 상실의 기억을 반드시 지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학개 2:3에서 여호와야훼는 예전 성전의 영광을 보았던 사람들에게 지금 이 성전이 어떻게 보이는지 물으십니다. 그리고 이전의 영광과 비교하면 지금의 성전이 보잘것없어 보인다는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따라서 옛 성전의 영광과 현재의 초라한 출발을 비교하며 눈물을 흘렸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러나 에스라 3:12 자체는 그들이 운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예전 성전을 보았다는 사실과 지금 기초가 놓이는 것을 보며 운다는 사실을 연결할 뿐입니다. 학개 2:3–9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전 성전의 영광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인정하시면서도, 현재의 작은 출발만 보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스가랴 4:10에는 작은 일의 날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두 본문은 에스라 3장보다 뒤의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므로, 에스라 3장의 울음이 정확히 무엇을 뜻했는지를 직접 설명한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성전을 다시 세우던 공동체가 겪었던 지속적인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울음이 함께 들리던 날

에스라 3:1–13 본문 →

에스라 3장은 어느 쪽의 소리도 지우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두려움과 슬픔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공동체의 회복이 실제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살아가기 시작하는 과정은 사람들의 모든 감정이 정리된 뒤에야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초가 놓인 날 울었던 사람들도 그 공동체의 일부였고,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던 사람들도 같은 공동체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 같은 성전의 기초 앞에 서 있었습니다.

아직 벽도 없고 지붕도 없습니다. 눈앞에는 이제 막 놓인 기초만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이미 예배가 시작되었고, 다시 성전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울음이 뒤섞인 그 소리가 예루살렘에서 멀리까지 들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