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11장 · 세상과 사람의 시작
살아갈 자리와 함께할 사람
창세기 2장에는 두 가지 뜻밖의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날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사람을 빚으시고 동산까지 마련하셨는데도, 그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일곱째 날의 쉼과 사람의 외로움은 얼핏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창조의 완성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와 여자의 만남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 장면을 차례로 읽다 보면 창세기 2장이 묻는 질문이 조금씩 선명해집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생명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내는 일일까요?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것과 사람이 응답하는 것이 함께 이야기를 이룹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보다 먼저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의 쉼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일을 멈추심으로 창조를 완성하시고, 그다음에는 사람을 살아가게 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일곱째 날 — 하나님은 무엇을 완성하셨는가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완성되었습니다.창세기 2:1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자기가 하시던 일을 마치셨습니다. 일곱째 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을 멈추셨습니다.창세기 2:2 · 두루새김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창조하며 하던 모든 일을 그날에 멈추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2:3 · 두루새김
창조의 여섯 날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는 아무것도 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하나님은 창조를 완성하십니다.
1절의 「완성되었습니다」(כָּלָה)와 2절의 「마치셨습니다」는 히브리어에서 같은 어근을 사용합니다. 첫 문장에서는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다음 문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가 하시던 일을 마치셨다고 말합니다.
완성된 세계와 그 일을 완성하신 하나님이 나란히 놓이는 것입니다.
창세기 2:1에서는 하늘과 땅에 속한 것들을 하나의 무리로 묶어 표현합니다. 중요한 것은 창조 세계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빠짐없이 함께 언급된다는 점입니다.
왜 일곱째 날에 마쳤다고 했을까
앞 장에서는 여섯째 날에 창조의 일이 모두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일곱째 날에 마쳤다고 합니다.
고대 본문 전승에서도 이 차이가 나타납니다. 마소라 히브리어 본문은 「일곱째 날」이라고 기록하지만, 사마리아 오경과 칠십인역은 이 구절의 첫 번째 날짜를 「여섯째 날」로 전합니다.
여섯째 날로 읽으면 창조의 일은 여섯째 날에 끝나고 일곱째 날에는 쉰다는 순서가 분명해집니다. 반면 일곱째 날로 읽으면 일을 마치는 것과 일을 멈추는 것이 같은 날에 놓입니다.
이를 이해하는 한 가지 길은 하나님의 멈추심을 창조의 완성을 이루는 마지막 행동으로 보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만들어야 할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멈추십니다. 다만 이것은 본문의 표현을 이해하는 해석이지, 두 본문 전승 사이의 차이 자체를 없애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치셔서 기력을 회복하셨다는 말은 이 구절에 없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피로가 아니라 일의 완성과 중단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첫 번째 날
이 장면에서 독특한 것은 하나님이 복되게 하고 거룩하게 구별하시는 일이 장소나 생물이 아니라 시간을 향한다는 점입니다.
앞 장에서는 살아 있는 생물들과 인간이 번성하라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일곱째 날 자체가 복을 받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는 말은 그날을 다른 날들과 구별하여 특별한 자리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아직 인간에게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안식일이라는 명사도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멈추심과 그날의 거룩함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뒤에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이해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출애굽기 20:8–11).
원문에서는 앞 장의 여섯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는 문장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는 그런 마무리 문장이 없습니다. 이 차이를 두고 일곱째 날이 끝나지 않는 영원한 날을 뜻한다고 읽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일곱째 날에 저녁과 아침이 없었다거나 그날이 영원히 이어진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창조는 끝없이 무엇인가를 더 만들어야 완성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마치시고 멈추실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2장은 이렇게 완성된 세계를 보여 준 뒤, 다시 인간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자리로 시선을 옮깁니다.
하늘과 땅에서 땅바닥과 사람으로
하늘과 땅이 창조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여호와야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에,창세기 2:4 · 두루새김
4절부터 이야기는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세계 전체를 만드시는 장면이 펼쳐졌다면, 이제는 특정한 땅과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됩니다. 이 표현은 창조된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만이 아니라 그 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펼쳐지는지 이야기하려는 표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앞 창조 이야기의 마무리 표제로 볼지, 뒤 이야기를 여는 표제로 볼지는 해석이 갈리지만, 어느 쪽이든 창세기의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경계에 놓여 있습니다.
4절 안에서도 시선이 바뀝니다.
처음에는 「하늘과 땅」이라고 하지만, 뒤에서는 「땅과 하늘」이라고 합니다. 또한 지금까지 「하나님」으로 불리던 분이 여기서부터 「여호와야훼 하나님」으로 등장하십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셨다고 말함으로써 앞의 창조주와 같은 분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무대는 확실하게 좁혀집니다. 이제 그분은 온 우주에 말씀하시는 창조주일 뿐 아니라, 흙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동산을 만드시며 그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왜 아직 풀이 없다고 할까
들에는 아직 덤불이 하나도 없었고, 풀도 돋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야훼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일굴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2:5 · 두루새김
5절은 처음 읽으면 앞 장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셋째 날에 식물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는 덤불도 아직 하나도 없었고 풀도 돋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모든 종류의 식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보다, 특별히 「들에는 아직 덤불이 하나도 없었고, 풀도 돋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특히 땅을 일굴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15절에서 사람이 동산을 일구도록 그곳에 놓이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두 창조 이야기의 모든 순서 차이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은 세계 전체의 창조를 순서 있게 서술하고, 2장은 인간과 그 생활환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두 본문의 관심과 서술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안개가 땅에서 올라와 땅바닥을 온통 적시고 있었습니다.창세기 2:6 · 두루새김
히브리어 에드(אֵד)는 성경에서 드물게 사용되는 낱말이어서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안개나 수증기처럼 올라오는 물기로 보기도 하고,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보기도 합니다. 칠십인역은 샘을 뜻하는 말로 옮겼습니다.
아직 땅을 일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물이 땅을 적시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람을 빚을 재료가 될 바로 그 땅바닥입니다.
흙먼지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다
여호와야훼 하나님께서 땅의 흙먼지로 사람을 빚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창세기 2:7 · 두루새김
「흙먼지」라는 표현은 인간의 출발점을 더욱 낮춥니다. 흙먼지는 단단한 바위나 귀한 보석이 아닙니다. 쉽게 흩어지고 손에 묻는 티끌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으로 사람을 빚으십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멀리서 사람에게 살아나라고 명령하시는 대신, 직접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흙먼지는 하나님이 빚으시는 재료이고, 생명의 숨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두 행동을 통해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흙먼지로 빚어졌으므로 땅에 속합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의 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실 중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를 지우지 않습니다.
이 연결은 창세기 3:19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나온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 속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막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야훼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빚으신 사람을 아무 곳에나 두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살아갈 장소를 마련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빚고」에 쓰인 동사는 토기장이가 진흙에 모양을 만드는 일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됩니다(예레미야 18:3–6). 여기서 흔히 「살아 있는 존재」를 인간에게만 있는 불멸의 영혼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원문에서는 앞 장의 물속 생물과 땅의 생물들도 같은 표현으로 불립니다(창세기 1:20, 24). 그러므로 7절은 흙으로 만들어진 몸에 따로 존재하는 영혼이 들어갔다는 식으로 몸과 영혼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에덴 동산 — 사람이 만들지 않은 집
여호와야훼 하나님께서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만들고, 자기가 빚은 사람을 그곳에 두셨습니다.창세기 2:8 · 두루새김
두루새김에서 「동산을 만들고」(נָטַע)로 옮긴 자리의 히브리어 동사는 본래 나무를 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갈 곳을 마련하시면서 그곳에 나무를 심으십니다.
여호와야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었고,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창세기 2:9 · 두루새김
동산은 단순히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바라보기에 아름다운 것들도 있는 장소입니다.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이 기뻐할 만한 것들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두 나무는 이야기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맡습니다. 생명의 나무는 그 이름부터 생명과 관련되어 있으며, 뒤에 창세기 3:22에서 영원히 사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는 곧이어 하나님의 명령과 금지의 대상이 됩니다.
9절은 동산 한가운데에 생명의 나무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같은 정도로 분명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문장 구조상 「한가운데」는 먼저 생명의 나무의 위치를 나타냅니다.
동산 밖으로 흐르는 강
이어서 이야기는 잠시 동산에서 멀어집니다.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셨습니다. 그 강은 거기서 갈라져 네 줄기가 되었습니다.창세기 2:10 · 두루새김
피숀은 하윌라 땅을 둘러 흐르고, 그곳에는 질 좋은 금과 브돌라흐와 쇼함 돌이 있습니다. 기혼은 구스 땅을 둘러 흐릅니다. 히데켈은 아시리아 동쪽을 흐르고, 마지막으로 유프라테스강이 등장합니다.
히데켈은 일반적으로 티그리스강에 해당하는 이름으로 이해됩니다. 반면 피숀과 기혼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윌라와 구스라는 지명이 성경의 다른 곳에도 등장하지만, 그것만으로 에덴의 네 강을 오늘날 지도 위에 모두 짚어 낼 수는 없습니다.
브돌라흐와 쇼함 돌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이 보석의 종류를 정확히 알려 주려는 것이 아니라, 강이 흐르는 지역의 특징까지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는 이제 단순히 한 사람을 위한 작은 공간을 묘사하는 데서 더 넓은 세계로 열립니다.
동산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끊어진 닫힌 방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강은 동산을 적시고, 그 물길에 대한 설명은 다른 지역들까지 이어집니다.
나무를 심으신 분도 하나님이고, 사람이 살아갈 자리를 정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이미 마련된 곳으로 옮겨집니다.
동산은 사람이 일해서 얻은 보상이 아닙니다.
사람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주어진 자리입니다.
일구고 지키는 사람 — 자유와 경계가 함께 주어지다
여호와야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어, 동산을 일구고 지키게 하셨습니다.창세기 2:15 · 두루새김
8절에서는 사람이 어디에서 살게 되었는지가 중요했습니다. 15절에서는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밝혀집니다.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땅이 저주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일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일 자체는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닙니다.
창세기 3:17–19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고통과 수고 속에서 땅의 소산을 얻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는 사람이 처음부터 동산을 일구고 지키도록 세워집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세계를 단지 구경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세계 안에서 무언가를 하고, 맡은 것을 지키는 존재입니다.
첫 번째 명령은 금지가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을 맡기신 다음 곧바로 명령하십니다.
여호와야훼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동산의 어느 나무 열매든 마음껏 먹어도 된다.」창세기 2:16 · 두루새김
「그러나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창세기 2:17 · 두루새김
히브리어에서는 「먹다」(אָכַל)라는 동사가 반복되어 먹을 수 있다는 허락을 강조합니다. 두루새김의 「마음껏」은 그 반복의 힘을 살린 표현입니다.
먼저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다음에 하나의 경계가 나타납니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묘사되는지가 달라집니다.
금지만 먼저 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좋은 것을 제한하시는 분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동산의 풍성한 나무들을 먼저 허락하십니다. 사람은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고, 그 가운데 특정한 나무 하나의 열매만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좋고 나쁨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표현은 해석하기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좋고 나쁨을 아는 것이 단순히 지적인 정보를 얻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 전체에서 지식이나 분별력은 언제나 나쁜 것으로 취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3:9에서는 솔로몬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해 좋고 나쁨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구합니다. 신명기 1:39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아직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쓰임을 보면 좋고 나쁨을 안다는 표현에는 도덕적인 분별이나 성숙한 판단과 관련된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능한 읽기 가운데 하나는 좋고 나쁨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권한과 관련된 지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읽기는 인간에게 아직 허락되지 않은 종류의 경험적·도덕적 분별력으로 보는 것입니다. 좋고 나쁨을 아는 능력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얻는 방식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태도가 문제라는 이해도 가능합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2장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 장에서 뱀이 이 나무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인간이 그 열매를 먹은 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까지 함께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분명한 것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행위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동산에서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자신이 정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을 것」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죽다」(מוּת)라는 표현을 거듭 사용하여 죽음의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열매를 먹은 당일에 육체적으로 죽는 것으로 서술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벌거벗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며, 결국 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창세기 3:22–24에서는 생명의 나무에 이르지 못하도록 길이 막힙니다.
이 때문에 죽음이 그날부터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고 읽기도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는 죽음을 우선 가리킨다고 읽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2:17 자체는 이러한 구별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즉각적인 육체적 죽음이나 영적인 죽음 가운데 하나로 뜻을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동산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명령을 들을 수 있고, 그 명령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 대우받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동산이 있고, 먹을 것이 있으며, 할 일과 지켜야 할 명령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두 동사는 땅을 가꾸고 보호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동시에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성소를 지키는 일에도 사용됩니다(민수기 3:7–8). 이 때문에 에덴 동산을 일종의 성소로, 인간의 일을 제사장처럼 섬기는 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만으로 동산이 곧 성막이며 사람이 공식적인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일구고 지킨다는 동사에 붙어 그 대상을 나타내는 접미사는 여성 단수형이지만, 가까운 「동산」이라는 낱말은 남성형입니다. 따라서 앞에 나온 여성명사인 「땅」을 가리킨다고 읽거나, 그 장소 전체를 나타낸다고 읽는 길이 있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여호와야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그에게 맞는 돕는 짝을 만들어 주겠다.」창세기 2:18 · 두루새김
여기서 「좋지 않다」는 말은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도덕적인 결함이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잘못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있는 상태는 좋지 않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의 삶이 온전해지지 못한 이유는 그가 무엇인가를 잘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자신과 마주 설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부족함을 먼저 알아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돕는 짝」은 어떤 사람인가
시편 121:1–2에서 시인은 자신의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묻고, 그 도움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에게도 사용되는 표현이라는 사실은 돕는다는 말 자체에 낮은 지위가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이는 그와 마주 설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와 관계없는 존재도 아니고, 그저 그의 명령을 실행하는 도구도 아닙니다. 자신과 마주하여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입니다.
먼저 짐승들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모든 들짐승과 하늘의 모든 날짐승을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동물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그에게 데려오셨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이 그대로 그 동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창세기 2:19 · 두루새김
이름을 붙인다는 것
앞의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낮과 밤, 하늘과 땅과 바다에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에게 살아 있는 동물들의 이름을 붙이는 일이 맡겨집니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언제나 지배할 권한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을 지음으로써 어떤 존재를 알아보고 구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판단과 행동을 실제로 받아들이신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름들을 미리 정해 놓고 사람에게 외우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이름을 붙이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빚으신 존재들을 사람이 알아보고 부르는 일이 시작됩니다.
동물들은 사람과 전혀 관계없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동물들도 땅의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그것들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같은 흙에서 빚어졌다고 모두 똑같은 관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모든 가축과 하늘의 날짐승과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맞는 돕는 짝은 찾지 못했습니다.창세기 2:20 · 두루새김
동물들은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생명들이지만, 그와 마주하여 같은 종류의 관계를 이룰 존재로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막연히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많은 생명들이 곁에 있어도 자신에게 맞는 상대가 없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장에서는 동물들이 사람보다 먼저 등장합니다. 반면 2:19의 히브리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순서대로 읽으면 하나님이 사람을 빚으신 다음 동물들을 빚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이미 동물들을 빚어 두셨다는 뜻으로 읽어 두 이야기를 조화시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문법이 그러한 시간 관계를 분명히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잠든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을 지으시다
여호와야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그가 잠들자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 하나를 꺼내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습니다.창세기 2:21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서 꺼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고, 그 여자를 그 사람에게 데려오셨습니다.창세기 2:22 · 두루새김
여자를 창조하는 장면에서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사람이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를 직접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일 수는 있었지만, 그 가운데 자신에게 맞는 돕는 짝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행동하십니다.
여자는 남자와 관계없는 재료에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처음 사람은 땅의 흙먼지에서 빚어졌습니다. 여자는 그 사람에게서 꺼낸 것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결과 다음 절에서 두 존재가 깊이 닮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자를 그 사람에게 데려오십니다.
이 행동은 앞에서 동물들을 데려오신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인간이 처음으로 하는 말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이며 내 살에서 나온 살이구나! 이 사람은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불릴 것이다.」창세기 2:23 · 두루새김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이 입을 열어 말하는 장면은 여기서 처음 나옵니다.
사람은 이미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였지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동산에 놓였을 때에도, 먹을 것을 허락받았을 때에도, 금지 명령을 들었을 때에도 사람의 대답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그 앞에 오자 마침내 그의 말이 직접 들립니다.
「이번에야말로」
많은 동물들이 지나갔지만 자신에게 맞는 존재가 없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그가 찾던 상대가 나타났습니다.
사람의 말은 단순히 여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문장이 아닙니다. 자신과 마주 선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기쁨의 말입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이며 내 살에서 나온 살이구나!」
성경에서 뼈와 살을 함께 말하는 표현은 핏줄로 이어진 관계나 깊은 친족 관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자신과 같은 살을 지닌 존재, 자기와 깊이 연결된 사람이라는 깨달음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장면과 여자를 알아보는 장면을 무조건 같은 종류의 지배 행위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남자는 이 사람이 「여자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본문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을 때와 달리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을 먼저 강조합니다.
혼자 있었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와 마주 설 수 있는 상대를 만났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갈비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첼라는 갈비뼈로 읽을 수도 있고, 옆면이나 측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성막과 그 안의 물건들의 옆면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는 낱말입니다(출애굽기 25:12; 26:20). 원문은 그 사람의 첼라들 가운데 하나를 꺼냈다고 말하므로, 갈비뼈로 읽는 데에도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낱말 자체만으로 현대 해부학에서 말하는 특정한 뼈의 형태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원문이 서로 다른 동사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남자와 여자의 가치나 지위에 차이가 있다고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원문이 하나님이 사람을 빚으실 때와 여자를 만드실 때 각각 다른 동작의 모습을 담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알맞습니다.
떠나고 붙어 한 몸이 되다
이 때문에 남자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굳게 결합하고, 둘은 한 몸이 됩니다.창세기 2:24 · 두루새김
23절까지는 동산에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24절은 갑자기 모든 사람의 삶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말로 바뀝니다.
이 이야기의 첫 남자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습니다.
그는 땅의 흙먼지로 빚어졌습니다. 여자는 그에게서 꺼낸 것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굳게 결합하는 남자를 말합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첫 남자와 여자의 만남에서 사람의 결혼 관계에 관한 일반적인 원리를 끌어내는 것입니다.
왜 남자가 부모를 떠날까
고대의 가족생활에서 결혼은 두 사람만의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이 표현이 고대 사회에서 결혼한 남자가 반드시 실제로 부모의 집을 떠나 따로 살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핵심은 새로운 관계를 위해 기존의 가장 가까운 가족 관계에서 떠나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부모에게서 생명을 얻고 자라지만, 결혼에서는 배우자와 새로운 결합을 이룹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히 잠시 함께 머무는 정도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떠난 뒤에는 굳게 결합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 몸」입니다.
앞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내 살에서 나온 살이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이야기하는 이는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한 몸」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지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인 가까움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몸을 가진 두 존재가 결혼을 통해 새로운 친족 관계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성적인 결합도 그 안에 포함되지만, 본문의 「떠나」와 「굳게 결합하고」라는 표현을 고려하면 그 의미를 성행위 하나로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둘은 여전히 둘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관계로 결합합니다.
특히 앞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를 「그에게 맞는 돕는 짝」이라고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 결합이 어느 한쪽의 존재를 지워 버리는 일로 묘사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기 소유에 집어넣는 사건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가장 가까운 관계로 결합하는 사건으로 소개됩니다.
혼자였던 사람의 이야기가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이야기로 옮겨 온 것입니다.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그의 아내는 둘 다 벌거벗고 있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창세기 2:25 · 두루새김
창세기 2장의 마지막 문장은 짧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낯선 존재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자신과 같은 뼈와 살을 지닌 사람으로 알아보았고, 이야기는 둘이 한 몸이 되는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그 관계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은 자신을 가리는 무엇도 없이 함께 있습니다.
여기서 벌거벗음은 단순히 옷이 없다는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아직 부끄러움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관계의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2장의 끝과 3장의 시작이 서로 다른 뜻의 비슷한 소리로 이어집니다. 2장의 마지막에는 벌거벗은 두 사람이 있고, 3장의 첫머리에는 약은 뱀이 등장합니다. 이 소리의 연결은 이후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독자에게 특별한 긴장을 만듭니다. 그러나 아직 그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삶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이 완성하신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야만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것을 받아 누리고, 맡은 일을 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일도 그 삶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동산에 두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지만 한 몸을 이루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을 가리지 않은 채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