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33장

이 장의 자리 · 28–35장 · 잘못된 의지에 내릴 화

누가 하나님의 불 곁에서 살 수 있는가

이사야 33장은 처음에 약탈자를 향한 심판으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백성은 구원을 구하고, 하나님은 마침내 일어나셔서 민족들을 심판하십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장은 앗시리아의 위협에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시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런데 14절에 이르면 뜻밖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적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온에 사는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질문은 「우리 가운데 누가 집어삼키는 불과 함께 살 수 있겠느냐?」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적들을 물리쳐 주신다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안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적들만 두려워하게 만드는 사건이 아닙니다. 구원받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누구 앞에서 살아가는지 깨닫게 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이 자신들의 편에 계신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자신들 가운데 있는 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사야 33장은 이 질문을 피해 가지 않습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833장 본문 읽기 →

약탈자의 운명이 뒤집히다

이사야 33:1–6 본문 →

아무도 자신을 약탈하지 못할 것 같았던 사람

첫 절에서 예언자는 이름 없는 약탈자에게 말합니다.

아, 약탈당한 적도 없으면서 남의 것을 빼앗는 자야! 배신당한 적도 없으면서 남을 배신하는 자야! 네가 약탈을 마치면 너도 약탈당하고, 네가 배신을 끝내면 사람들도 너를 배신할 것이다.이사야 33:1 · 두루새김

그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도 자신은 그 피해를 입지 않을 만큼의 힘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문맥상 앗시리아를 가리킨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앗시리아는 유다를 위협하던 강대국이며, 뒤에서 군사적 위협과 평화 협상의 실패가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절 자체에는 앗시리아라는 이름이 없으므로, 이 비판은 약탈을 통해 번영하는 강대국의 행동을 더 넓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원문에서 이 문장의 특징은 같은 행위가 반복되면서 그 행위를 하는 쪽과 당하는 쪽이 뒤바뀐다는 점입니다. 한동안 어떤 세력이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짓밟을 수 있었더라도, 그 상태가 영원하지는 않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특히 「네가 약탈을 마치면」이라는 표현에는 냉혹한 반어가 담겨 있습니다. 약탈자가 스스로 만족할 만큼 모든 일을 마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이제까지 피했던 결과가 찾아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그 행동의 최종적인 결과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침마다 그들의 힘이 되어 주시고」

2절에서는 목소리가 바뀝니다.

우리는 여호와야훼께 기도합니다. 「여호와야훼,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는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아침마다 그들의 힘이 되어 주시고, 고난을 겪을 때에는 저희의 구원이 되어 주십시오.」이사야 33:2 · 두루새김

백성은 자신들의 능력이나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여기서 「기다렸습니다」(⁨קָוָה⁩)에 해당하는 표현은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이는 단순히 시간이 흐르기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도움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는 기다림입니다.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말하다가 「그들의 힘」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저희의 구원」을 구합니다. 원문에도 이러한 인칭의 전환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특별히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일 수도 있고, 백성을 대표하여 행동하는 이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원문에서는 하나님을 팔에 빗대어 말합니다. 성경에서 팔은 힘을 행사하는 능력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자주 사용됩니다. 두루새김은 이 이미지를 「힘」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위기가 절정에 달한 어느 한순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침마다 필요합니다.

전쟁의 위협은 사람들의 삶을 한순간에 끝낼 수도 있지만, 그 위협 아래에서 보내는 매일의 아침도 견뎌야 합니다. 백성은 바로 그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구원은 단지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매일을 살아갈 힘을 공급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소리 하나에 흩어지는 민족들

3–4절에서는 기도에 대한 응답을 미리 바라보는 듯한 선언이 이어집니다.

「요란한 소리에 민족들이 달아났고, 주님이 높이 일어서시자 나라들이 흩어졌습니다.」이사야 33:3 · 두루새김

군대의 숫자나 무기의 성능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민족들은 거대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는 하나님이 일어나시는 것만으로 그들이 흩어집니다.

약탈자들아, 메뚜기가 먹이를 거두듯 사람들이 너희가 빼앗아 모은 것을 거두어 갈 것이다. 메뚜기 떼가 달려들듯 그 물건들에 달려들 것이다.이사야 33:4 · 두루새김

메뚜기 떼가 몰려드는 모습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휩쓸어 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는 약탈자를 쓰러뜨리는 것뿐 아니라, 그가 약탈로 쌓아 놓은 것까지 뒤집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무엇이 한 시대의 든든한 바탕이 되는가

5–6절에서는 시선이 하나님과 시온으로 옮겨 갑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드높으십니다. 높은 곳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시온을 정의와 의로움으로 채우셨습니다.이사야 33:5 · 두루새김

하나님의 높으심이 땅 위의 사람들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다스리고 바로잡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여러분의 시대를 든든히 받쳐 주시고, 풍성한 구원과 지혜와 지식을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여러분의 보물입니다.이사야 33:6 · 두루새김

하나님은 군사적으로 위험한 순간에만 백성을 도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시대를 지탱하는 든든한 바탕이 되십니다. 또한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뿐 아니라 지혜와 지식입니다.

삶을 위협하는 적을 물리치는 것만으로 공동체가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바로잡고,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무서워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마땅히 높이고, 그분의 권위와 뜻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이사야 11:2–3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영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태도가 서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처럼 높은 전망을 보여 준 직후, 본문은 다시 심각한 위기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은 히브리어에서 명사들의 연결 관계가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어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특히 원문의 ‘그의 보물’이 정확히 누구의 보물인지, 앞의 명사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읽기가 가능합니다. 두루새김은 여호와야훼가 앞 문장의 주어로 이어져 여러분의 시대를 든든히 받쳐 주시고, 풍성한 구원과 지혜와 지식을 주시는 것으로 옮겼습니다. 보물의 주인도 「여러분」으로 풀어 밝혔습니다.

평화를 구하던 사절들이 울고 있다

이사야 33:7–12 본문 →

평화의 사절들이 흘리는 눈물

보십시오, 용사들이 밖에서 외칩니다. 평화를 위해 보낸 사절들이 쓰라리게 웁니다.이사야 33:7 · 두루새김

용사들은 힘으로 위험에 맞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평화를 위해 보낸 사절들은 협상과 약속을 통해 위험을 피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싸우는 사람도, 협상하는 사람도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길이 끊어지고 약속이 깨진다

큰길들이 황폐해지고 길을 지나는 사람이 끊겼습니다. 약탈자는 언약을 깨뜨리고 도시들을 업신여기며, 사람을 하찮게 여겼습니다.이사야 33:8 · 두루새김

길은 도시와 도시를 연결합니다. 사람과 물자가 오가고, 장사와 여행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전쟁의 피해는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에만 발생하지 않습니다. 길을 다닐 수 없고, 물건을 운반할 수 없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삶은 무너집니다.

여기서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라기보다, 침략자와 상대국 사이의 약속이나 조약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두루새김은 약속을 깬 이를 「약탈자」로 풀어 밝혔습니다. 원문에서는 그가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앗시리아의 왕이나 그 권력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특정 조약을 이름 붙여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침략자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깨뜨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존엄한 존재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져오는 것은 단지 정치적 불안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믿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질서 자체의 붕괴입니다.

레바논과 샤론과 바산과 갈멜도 슬퍼한다

9절에서는 위기의 범위가 땅 전체로 넓어집니다.

땅이 슬퍼하며 시들어 갑니다. 레바논은 수치를 당하고 말라 갑니다. 샤론은 메마른 벌판처럼 되었고, 바산과 갈멜은 잎을 떨굽니다.이사야 33:9 · 두루새김

레바논은 울창한 숲과 백향목으로 알려진 지역입니다. 샤론은 지중해 연안의 평야이며, 바산은 비옥한 목초지로, 갈멜은 숲과 농경지의 풍요를 떠올리게 하는 지역입니다. 풍요를 상징하는 장소들을 한꺼번에 불러내어 재난의 범위와 깊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약속을 깨뜨리고 서로를 하찮게 여기며 폭력을 행사할 때, 그 결과는 사람들 사이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까지 황폐해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일어나겠다」

10절은 세 번 반복되는 「이제」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일어나겠다. 이제 내가 높이 오르겠다. 이제 내가 드높아지겠다.」이사야 33:10 · 두루새김

이 세 번의 선언은 본문의 흐름을 단번에 바꿉니다.

5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이미 드높으신 분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스스로 높이 오르시고 드높아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세상이 인정하지 않거나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능력이 그분의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겨를 배고 지푸라기를 낳을 것이다. 너희 숨결은 너희를 삼킬 불이 될 것이다.」이사야 33:11 · 두루새김

아이를 배고 낳는 일에는 오랜 시간과 큰 수고가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겨와 지푸라기라면 어떨까요? 여기서 겨와 지푸라기는 가치 없고 쉽게 불타는 것을 나타냅니다.

강대국은 거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군대를 모으고, 다른 나라를 압박하고, 재물을 빼앗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계획의 결실은 겨와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불은 하나님의 숨결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숨결과 연결됩니다. 이는 그들의 파멸이 자신들의 행동과 무관하게 갑자기 닥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품고 만들어 낸 것이 결국 자신들을 무너뜨린다는 역설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민족들은 석회석을 굽듯 불에 타 버릴 것이다. 잘라 낸 가시덤불처럼 불에 탈 것이다.」이사야 33:12 · 두루새김

석회석을 굽는 불과 잘라 낸 가시덤불을 태우는 불은 심판의 강도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힘없는 백성을 두렵게 하던 민족들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쉽게 타 버릴 수 있는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불의 이미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불은 약탈자들을 삼키는 심판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는 그 불이 시온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조금 더 깊이

「용사들」로 번역된 낱말은 원문에서 뜻이 분명하지 않은 에르엘람(⁨אֶרְאֵל⁩)입니다. 강한 용사나 영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하며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히스기야는 앗시리아 왕 산헤립에게 막대한 은과 금을 바쳤지만,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앗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위협합니다. 다만 33:7 자체에는 사절단의 이름이나 구체적인 협상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불 앞에서 누가 살아갈 수 있는가

이사야 33:13–16 본문 →

멀리 있는 사람과 가까이 있는 사람

1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을 향합니다.

「멀리 있는 자들아, 내가 한 일을 들어라. 가까이 있는 자들아, 내 힘을 알아라.」이사야 33:13 · 두루새김

멀리 있는 이들을 여러 민족으로, 가까이 있는 이들을 시온의 주민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본문은 그 구분을 엄격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까이에서 경험한다는 것은 그 능력의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적이 아니라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한다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이 떨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집어삼키는 불과 함께 살 수 있겠느냐? 우리 가운데 누가 영원히 타는 불길과 함께 살 수 있겠느냐?」이사야 33:14 · 두루새김

앞에서 하나님은 약탈자와 배신자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죄를 못 본 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국경이나 민족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앗시리아의 폭력을 심판하신다면, 시온 안에 있는 폭력과 불의도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자리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이사야 6:1–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예언자는 거룩하신 여호와야훼의 영광을 보고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며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사야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먼저 비난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정함을 깨닫습니다.

누가 그 불 곁에서 살 수 있는가

15절은 그 질문에 직접 대답합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이는 의롭게 행동하고 바르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억눌러 얻는 이익을 거부하고, 뇌물을 받지 않으려고 손을 털며, 사람을 죽이자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악한 일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입니다.이사야 33:15 · 두루새김

예언자는 특별한 종교적 의식을 치르는 사람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많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나 성전에서 오랫동안 기도하는 사람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분리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시편 15:1은 누가 여호와야훼의 장막에 머무르고 그분의 거룩한 산에 살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온전하게 행하고 의를 실천하며 진실을 말하는 사람,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을 제시합니다(시편 15:2–5).

손을 털고, 귀를 막고, 눈을 감는다

그런데 귀를 막고 눈을 감는 것이 어떻게 의로운 행동이 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악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듣지 않으려는 태도를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맥락에서 의롭게 행동하고 남을 억눌러 얻는 이익을 거부하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으므로, 살인과 악에 가담하거나 그것을 즐기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태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두루새김은 원문에서 피 흘리는 일을 듣지 않는다는 표현을 「사람을 죽이자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로 풀어 옮겼습니다. 폭력적인 계획에 귀를 기울이거나 살인을 위한 제안에 동조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한 일을 보지 않는다는 것 역시 불의한 광경을 모른 척하는 태도가 아니라, 악을 즐기거나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태도로 읽어야 문맥에 어울립니다.

이 사람은 단지 자신이 직접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악이 자신의 손과 귀와 눈을 통해 삶에 들어오는 것까지 경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도덕적 성취를 대가로 보호를 파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의 성격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의로움이 드러나는 곳에서 불의를 붙잡고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높은 곳은 누구의 거처인가

16절은 이 사람에게 주어지는 약속을 선언합니다.

그런 사람은 높은 곳에 살고, 바위 요새를 피난처로 삼을 것입니다. 그에게 먹을 빵이 주어지고 마실 물도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이사야 33:16 · 두루새김

5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높은 곳에 사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는 의롭게 행동하는 사람도 높은 곳에 살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처와 관련된 보호와 안전을 의로운 사람에게 허락하신다는 이미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고대 도시가 적군에게 포위되면 성벽이 아무리 튼튼해도 식량과 물이 부족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안전은 적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그 안에서 사람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는 데 있습니다.

앞에서 약탈자들은 남의 소유물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안전은 남의 것을 빼앗아 쌓아 놓은 재물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분이 공급하시는 빵과 물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는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 자체가 바뀝니다.

두려움의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왕이 보인다

이사야 33:17–19 본문 →

「아름다운 모습의 왕」은 누구인가

17절에서 본문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여러분의 눈은 아름다운 모습의 왕을 보고, 멀리 펼쳐진 땅을 볼 것입니다.이사야 33:17 · 두루새김

유다의 왕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반면 이 왕을 여호와야훼 자신으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17절 자체에는 왕의 이름이 없습니다. 인간 왕을 가리키는지 여호와야훼를 가리키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백성의 눈앞을 가득 채우던 것은 침략자의 위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름다운 왕의 모습과 멀리 펼쳐진 땅이 보입니다.

시야가 달라진 것입니다.

위험에 둘러싸인 사람은 눈앞의 위협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이루어진 장면에서 백성은 다시 먼 곳을 바라봅니다.

두려움을 기억하지만 더 이상 붙잡혀 있지 않다

여러분은 두려웠던 때를 마음에 되새기며 말할 것입니다. 「수를 세던 자는 어디에 있느냐? 무게를 달던 자는 어디에 있느냐? 망대의 수를 세던 자는 어디에 있느냐?」이사야 33:18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두려움이 완전히 잊히는 장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백성은 이전의 두려움을 다시 떠올립니다.

그런데 그 기억을 떠올리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수를 세고 무게를 달던 사람들은 침략군의 행정이나 공물을 거두는 일에 관여하던 관리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망대의 수를 세던 사람은 도시의 방어시설을 조사하던 군사 담당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본문이 이들의 구체적인 직책을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도시가 침략자의 계산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재물을 거둘 수 있을지, 어느 부분을 공격할 수 있을지, 어떤 방어시설이 있는지 조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도시를 자신들이 차지하거나 지배할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제 백성은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묻습니다.

이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보다 해방의 놀라움이 담겨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들이 나타나는 것만으로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사라졌음을 확인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기억이 더 이상 자신을 지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던 말도 사라진다

19절은 그 변화를 이어 갑니다.

여러분은 그 사나운 민족을 더 이상 보지 않을 것입니다. 말이 낯설어 알아들을 수 없고, 말소리가 더듬는 듯 들려 이해할 수 없던 그 민족을 말입니다.이사야 33:19 · 두루새김

본문은 이방 민족의 언어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침략자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 사람들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사나운」(⁨יָעַז⁩)에 해당하는 낱말은 원문에서 의미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 민족의 성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말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28:11에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입술과 다른 언어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언급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백성이 결국 낯선 언어를 통해 심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33:19에서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침략자의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그들의 눈은 다시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의 「아름다움」(⁨יֳפִי⁩)은 외모뿐 아니라 위엄과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17절의 아름다운 왕을 인간 왕으로 읽는다면, 앞에서 외교와 군사적 위기에 처했던 예루살렘이 구원받고, 왕이 다시 위엄 있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멀리 펼쳐진 땅」은 포위된 도시 안에 갇혀 있던 백성이 다시 넓은 영토를 바라보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 왕을 여호와야훼 자신으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22절에서 본문은 분명하게 「여호와야훼께서는」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옮겨 다니지 않는 장막과 적이 들어올 수 없는 강

이사야 33:20–22 본문 →

움직이지 않는 장막이라는 역설

20절에서 예언자는 명령합니다.

우리가 명절을 지키려고 모이는 도시 시온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눈은 평온한 거처인 예루살렘을 볼 것입니다. 그곳은 옮겨 다니지 않는 천막과 같을 것입니다. 그 말뚝들은 영원히 뽑히지 않고, 밧줄들은 하나도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이사야 33:20 · 두루새김

예루살렘은 도시입니다. 성벽과 건물이 있는 정착지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도시를 천막에 비유합니다.

고대의 천막은 옮겨 다니며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든 거처입니다. 말뚝을 뽑고 밧줄을 풀면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묘사하는 천막은 다릅니다.

앗시리아와 같은 제국은 정복한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옮겨 살게 하며 통제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옮겨 다니지 않는 천막」은 단순히 집이 튼튼하다는 의미보다 깊은 안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성벽보다 말뚝과 밧줄을 말합니다.

거대한 돌벽이 얼마나 튼튼한지보다, 평범한 거처를 지탱하는 말뚝이 뽑히지 않고 밧줄이 끊어지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가장 약해 보이는 거처조차 흔들리지 않게 하실 수 있다는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8절에서는 큰길이 황폐해지고 길을 지나는 사람이 끊겼습니다. 그러나 20절에서는 사람들이 다시 모일 수 있는 도시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명절을 지키려고 모이는 도시」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함께 모이는 장소로서 시온을 보여 줍니다.

회복된 예루살렘은 단지 공격받지 않는 도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시 함께 살아가고, 모이고, 예배할 수 있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큰 강이 없는데

참으로 위엄 있는 여호와야훼께서 거기서 우리에게 폭넓은 강과 물줄기가 있는 곳이 되실 것입니다. 노를 젓는 배도 그곳을 다니지 못하고, 큰 배도 지나가지 못할 것입니다.이사야 33:21 · 두루새김

예루살렘은 나일강이나 유프라테스강 같은 거대한 강가에 세워진 도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폭넓은 강과 물줄기가 있는 곳처럼 묘사합니다.

물은 생존을 위해 필요했고, 강은 농업과 물자 이동에 도움을 주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외부의 공격을 막는 천연 방어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풍요와 보호의 근거가 되신다는 시적 이미지로 읽는 것이 문맥에 잘 어울립니다.

강이 주는 보호와 풍요는 있지만, 그 강을 타고 들어오는 군사적 위협은 없습니다.

고대의 강은 도시를 지키는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적의 군대가 접근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강이 제공하는 이점을 주시면서도, 그 강을 이용해 적이 침입하는 일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8:6–8과 연결해서 읽으면 이 이미지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앗시리아 왕의 힘을 큰 강물에 비유하십니다. 강물이 넘쳐흘러 유다의 목까지 차오르는 모습으로 침략의 위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33장에서는 강이 더 이상 침략의 위협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단지 위험한 것들이 사라진 빈자리가 아닙니다. 생명을 지탱하는 풍요가 있으면서도, 그것을 파괴할 위협은 막혀 있는 상태입니다.

누가 이 도시를 다스리는가

22절은 이러한 안전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우리의 재판관이시며, 우리에게 법을 세워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이사야 33:22 · 두루새김

재판관은 다툼을 판단하고 정의를 실현합니다. 법을 세우는 분은 공동체가 따라야 할 질서를 정합니다. 왕은 백성을 다스리고 보호합니다.

예루살렘이 안전한 이유는 단순히 더 좋은 자연환경을 얻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도시를 참으로 다스리는 분이 누구인지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재판관, 법을 세워 주시는 분, 왕이라고 말한 뒤에 구원이 나옵니다. 그분은 백성을 보호하시는 왕이면서 동시에 그 백성의 행동을 판단하시는 재판관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정의로운 통치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너진 배와 약탈물을 얻는 다리 저는 사람들

이사야 33:23 본문 →

느슨해진 밧줄은 누구의 것인가

23절은 앞의 평화로운 장면과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로 시작합니다.

너의 밧줄들이 느슨해졌습니다. 밧줄들은 돛대의 받침을 단단히 붙들지 못하고, 돛도 펼쳐 주지 못합니다. 그때에는 전쟁에서 빼앗은 많은 물건이 나뉠 것이며, 다리를 저는 사람들까지 그 물건들을 가져갈 것입니다.이사야 33:23 · 두루새김

이 배는 누구의 것일까요?

첫째, 적의 배를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둘째, 예루살렘 자체를 배에 비유한다는 해석입니다. 본문만으로 한쪽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들도 전리품을 얻는다

이것은 전쟁의 승리를 표현하는 독특한 방식입니다.

보통 전투에서 빼앗은 물건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승리한 군대의 병사들입니다. 싸울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적을 물리치고 그들이 남긴 물건을 거둡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리를 저는 사람들까지 그 물건들을 얻습니다.

이것은 전투에 참여할 능력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조차 물건을 차지할 만큼 적이 철저하게 무너졌음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또한 구원의 혜택이 강한 군사들만의 몫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절에서 다리를 저는 사람이 단순히 무능하거나 열등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의 전투 상황에서 몸이 불리한 조건에 있는 사람도 전쟁에서 빼앗은 물건을 얻는다는 역설이 강조됩니다.

처음에는 힘을 가진 사람이 약한 사람의 것을 빼앗았습니다. 이제는 힘이 약한 사람조차 강대한 적의 패배로 인한 혜택을 누립니다.

강대한 적의 몰락이 그동안 위협받던 사람들의 해방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 장을 전쟁에서 빼앗은 물건을 나누는 장면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은 전쟁의 승리보다 더욱 깊은 회복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문법적으로는 「너의 밧줄들」이라는 이인칭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그 「너」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21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 폭넓은 강과 물줄기가 있는 곳이 되시는 곳에는 어떤 배도 지나가지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23절은 예루살렘을 침략하려던 세력이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23절의 이인칭 표현이 계속 시온을 가리킨다고 읽는다면, 위기 속에서 힘을 쓰지 못했던 시온이 구원받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죄의 용서다

이사야 33:24 본문 →

그곳 주민 누구도 「나는 아프다」 하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곳에 사는 백성은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이사야 33:24 · 두루새김

이사야 33장의 마지막 말씀은 놀랍도록 조용합니다.

여기서 두 문장을 단순히 원인과 결과로 묶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는 모든 질병이 개인의 죄 때문에 발생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병든 사람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아픈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현실에서 결코 질병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일반화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회복된 시온의 모습을 두 가지 측면에서 그립니다. 삶을 괴롭히던 아픔이 사라지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죄 문제가 용서로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살아가는 문제는 단순히 도덕적인 기준을 충족하는 문제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미 죄를 지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행동하는 삶이 중요하지만, 그 삶만으로 과거의 모든 불의와 죄가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장의 결말에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15절에서는 악을 거부하고 의롭게 행동하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지워 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24절에서는 죄의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1:4에서는 이스라엘이 죄 많은 민족이며 하나님을 버렸다고 선언됩니다. 1:5–6에서는 그 백성이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1:18에서는 하나님이 죄가 진홍같이 붉더라도 눈처럼 희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33장의 마지막은 그 오래된 질문에 다시 응답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오늘의 의미 — 하나님의 보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다는 것

이사야 33:1–24 본문 →

죄 많은 백성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셔야 합니다. 이 용서는 불의를 가볍게 여기는 허락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은혜이며, 그분의 정의로운 통치 아래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구원을 화려한 승리의 행렬로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온한 예루살렘을 보여 줍니다. 말뚝이 뽑히지 않는 천막이 있습니다. 밧줄이 끊어지지 않는 거처가 있습니다. 적의 배가 들어오지 못하는 폭넓은 강과 물줄기가 있고, 백성에게 빵과 물이 공급됩니다.

그리고 그 도시의 주민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고통 때문에 신음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리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의 함성이 아닙니다.

「그곳에 사는 백성은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단지 적이 들어오지 못하는 도시가 아니라, 거룩하신 여호와야훼께서 다스리시고 용서받은 백성이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도시가 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