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34장

이 장의 자리 · 28–35장 · 잘못된 의지에 내릴 화

혼돈에도 측량줄을 드리우시는 하나님

이사야 34장의 마지막 장면은 뜻밖에도 땅을 나누어 주는 모습입니다.

누군가가 땅을 측량하고, 제비를 뽑고, 차지할 몫을 정해 줍니다. 얼핏 보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나누어 받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땅을 받는 존재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막 짐승들과 자칼, 새들과 뱀들입니다. 한때 왕이 다스리고 귀족들이 살며 궁전과 요새가 세워져 있던 땅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곳에서 인간의 통치는 사라졌고, 하나님은 그 땅을 다른 생물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처음에는 줄과 추로 그 땅을 혼돈에 빠뜨리고 텅 빈 곳으로 만드십니다. 마지막에는 줄을 대어 짐승들이 살아갈 땅을 나누어 주십니다.

똑같은 측량 도구가 황폐와 분배라는 서로 다른 장면에 등장합니다.

보통 측량줄은 건물을 세우거나 땅의 경계를 정할 때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너질 땅에도 측량줄을 드리우십니다. 그리고 사람이 떠난 땅을 다른 생물들의 거처로 정하십니다.

앞 장에서 이사야는 안전한 시온과 용서받은 백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34장에서는 시온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일이 민족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보호받는 도시와 황폐해지는 땅이 대조됩니다.

이 장은 뒤따르는 이사야 35장과도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34장에서 인간의 거처가 황무지로 변한다면, 35장에서는 광야가 기뻐하고 메마른 땅이 꽃피는 회복이 선포됩니다. 두 장은 황무지와 생명, 심판과 회복의 이미지가 서로를 비추도록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34장 자체의 결말은 회복된 인간 사회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독자를 사람들이 떠난 황무지에 남겨 두고, 거기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보게 합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634장 본문 읽기 →

온 세상이 들어야 할 심판

이사야 34:1–4 본문 →

에돔에 대한 말씀인데 왜 모든 민족을 부르는가

1절은 매우 넓은 청중을 부릅니다.

민족들아, 가까이 와서 들어라. 백성들아, 귀를 기울여라. 땅과 그 안에 가득한 모든 것은 들어라. 세상과 거기서 나오는 모든 것은 들어라.이사야 34:1 · 두루새김

여기에는 법정의 분위기도 있습니다. 여러 민족과 온 세상이 불려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누구도 이 사건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기며 지나갈 수 없습니다.

이사야 1:2에서도 예언은 하늘과 땅을 증인처럼 부르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이 반역했다는 고발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34장에서는 모든 민족이 청중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모든 민족에게 분노하시고, 그들의 모든 군대에 크게 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기로 정하시고, 죽임당하도록 넘기셨습니다.이사야 34:2 · 두루새김

그러나 5절부터는 특별히 에돔이 심판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에돔을 모든 민족 가운데 심판의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넓은 선언이 한 나라의 운명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읽기는 이사야 13–23장에 펼쳐진 여러 나라에 대한 예언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바벨론, 앗시리아, 모압, 이집트 등은 서로 다른 역사와 상황 속에 있지만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입니다.

「완전히 멸망시키기로 정한」이라는 말의 무게

2절의 「완전히 멸망시키기로 정하시고」(⁨חָרַם⁩)와 5절의 「완전히 멸망시키기로 정한 백성」은 같은 중요한 히브리어 낱말에서 나옵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일반적인 사용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하나님께 돌리거나, 심판의 문맥에서는 철저한 파괴의 대상으로 지정하는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뒤에 「죽임당하도록」이 나오므로 분명히 파괴적인 심판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말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적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일부 영토를 빼앗는 정도가 아니라, 그 나라의 기존 질서가 철저히 끝나는 심판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언어는 고대 전쟁과 종교적 심판의 문맥에 속합니다. 그것을 오늘날 특정 집단을 제거해도 된다는 인간의 명령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인간에게 민족을 완전히 멸망시키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모습을 예언의 언어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시체의 악취에서 무너지는 하늘까지

3절은 전쟁이 남기는 가장 참혹한 결과를 보여 줍니다.

죽임당한 사람들은 내버려지고, 그 시신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올라올 것입니다. 산들은 그들의 피로 녹아내릴 것입니다.이사야 34:3 · 두루새김

고대 세계에서 죽은 사람을 장사하지 못하고 내버려 두는 것은 죽음 자체에 더하여 심각한 수치와 재난을 나타냈습니다. 제대로 묻히지 못한 시신은 사회의 기본적인 질서와 존엄마저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시신에서 올라오는 지독한 냄새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 때문에 산이 녹아내린다는 표현은 일상적인 관찰을 넘어섭니다. 폭력의 결과가 땅의 단단한 부분까지 무너뜨리는 듯한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시선이 하늘로 향합니다.

하늘의 모든 군대가 썩어 사라지고, 하늘은 두루마리처럼 말릴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잎이 시들어 떨어지듯, 무화과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듯, 하늘의 모든 군대가 떨어질 것입니다.이사야 34:4 · 두루새김

별들은 인간이 바라볼 때 거의 변하지 않는 존재들처럼 보입니다. 반면 포도나무의 잎은 계절이 바뀌면 쉽게 시들어 떨어집니다.

이사야는 가장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가장 쉽게 떨어지는 것들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인간이 굳건하다고 여기는 세상의 질서조차 흔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역사 속 나라들이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의미는 우주적인 이미지로 확대됩니다.

이제 하늘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심판이 한 나라를 향해 내려옵니다.

조금 더 깊이

「하늘의 모든 군대」는 이 문맥에서 하늘의 별들과 천체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해와 달과 별들이 하늘의 군대로 불리기도 합니다(신명기 4:19; 열왕기하 23:5). 이 말씀을 특정한 날짜에 실제 하늘이 물리적으로 접히고 모든 천체가 떨어지는 현상에 대한 상세한 예측으로 한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 6:14가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이미지를 다시 사용합니다. 이는 이사야 34:4의 심판 언어를 떠올리게 하는 분명한 문학적 연결이지만, 이사야가 묘사한 에돔의 모든 세부 장면을 신약의 특정 사건과 하나씩 짝지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칼과 에돔의 희생제사

이사야 34:5–8 본문 →

왜 에돔인가

5절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지닌 나라입니다. 창세기 25:29–30과 36:1은 에돔을 에서와 연결합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므로, 이스라엘과 에돔은 성경에 전해지는 족보 속에서 형제 관계를 지닌 민족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역사 속에서 계속 우호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민수기 20:14–21에서는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자기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훗날 오바댜 10–14절에서는 에돔이 형제 야곱에게 폭력을 행하고, 예루살렘이 재난을 당했을 때 기뻐하며 약탈에 가담한 일을 꾸짖습니다. 시편 137:7에서도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날 에돔 사람들의 적대적 행동을 기억합니다.

이런 본문들은 이스라엘과 에돔 사이의 적대감이 단순한 영토 분쟁만이 아니라, 형제 민족의 고난에 대한 배신과 폭력의 문제로 이해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에스겔 35:5–15는 에돔이 계속 품어 온 적대감과 이스라엘의 황폐를 기뻐한 행위를 심판의 이유로 제시합니다.

다만 이사야 34장에는 에돔이 저지른 구체적인 사건이나 심판이 선포된 정확한 연도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오바댜와 시편 137편에 등장하는 사건을 이사야 34장의 직접적인 역사적 계기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8절이 시온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일을 심판의 이유로 제시하므로, 이 장에서 에돔은 시온과 관련된 적대와 불의 때문에 심판받는 나라로 나타납니다.

하늘에서 흠뻑 취한 칼

여호와야훼께서 그 까닭을 말씀하십니다. 「내 칼이 하늘에서 흠뻑 취했다. 보아라, 그 칼이 에돔으로 내려가, 내가 완전히 멸망시키기로 정한 백성을 심판할 것이다.」이사야 34:5 · 두루새김

이사야는 에돔의 몰락을 단순히 더 강한 제국의 침략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전쟁터가 희생제사의 장소가 되다

6절에서는 비유가 더욱 충격적으로 바뀝니다.

여호와야훼의 칼은 피로 가득하고 기름으로 덮였습니다. 어린 숫양과 숫염소의 피, 숫양의 콩팥 기름입니다. 보스라에서 여호와야훼께 바치는 희생제사가 벌어지고, 에돔 땅에서 많은 이가 죽임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야 34:6 · 두루새김

에돔의 사람들이 심판받는 장면이 동물을 죽이는 장면과 겹쳐집니다. 이사야는 에돔을 향한 심판을 하나님의 희생제사라는 섬뜩한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이 비유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정당화하거나 권장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제사의 언어를 심판의 장면에 적용하여, 에돔의 군사적 몰락이 하나님께 속한 심판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내는 시적 표현입니다.

보스라는 에돔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로 등장합니다. 창세기 36:33은 에돔의 왕과 관련하여 보스라를 언급하고, 아모스 1:12에서는 에돔의 보스라에 불이 닥칠 것을 선포합니다. 모든 민족을 향한 우주적 심판이 에돔의 땅, 그중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도시에까지 이릅니다.

큰 짐승들도 함께 쓰러진다

7절에서는 제사의 이미지가 확대됩니다.

들소들도 그들과 함께 쓰러지고, 어린 수소들도 힘센 수소들과 함께 쓰러질 것입니다. 그들의 땅은 피로 흠뻑 젖고, 흙은 기름으로 뒤덮일 것입니다.이사야 34:7 · 두루새김

이런 짐승들을 에돔의 강력한 인물들이나 지도층에 대한 비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누가 왕이고 누가 장군인지를 일일이 대응시키지는 않습니다. 핵심은 크고 강한 존재들조차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칼과 땅이 모두 피와 기름으로 가득해지는 이미지가 반복됩니다. 이사야는 심판을 아름답거나 가벼운 사건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피와 죽음이 뒤따르는 참혹한 사건으로 묘사합니다.

시온의 송사를 위한 날

여호와야훼께는 원수를 갚을 날, 시온의 억울함을 풀어 주려고 되갚을 해가 있기 때문입니다.이사야 34:8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정의의 문제를 판단하시고 억울함에 응답하신다는 예언적 선언입니다. 물론 이 점이 본문의 폭력적인 이미지가 던지는 윤리적 어려움을 모두 해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죽음과 나라 전체의 황폐를 선포하는 언어는 오늘날 독자에게도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34장은 힘 있는 민족이 자신들의 폭력에 대한 책임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심판의 결과는 군대의 패배로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흠뻑 취했다」는 충분히 마셔 흡족해지거나 흠뻑 젖는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칼이 피를 마신다는 비유는 신명기 32:41–42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표현을 하나님의 칼이 하늘에서 심판을 위해 준비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4절의 하늘의 군대에 대한 심판과 이어져, 하늘의 영역에서부터 심판이 펼쳐지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원문은 칼이 무엇을 마셔서 흠뻑 취했는지, 하늘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3:3–5에서는 화목제물의 내장에 붙은 기름과 콩팥 주변의 기름을 제단에서 불살라 바치는 절차가 설명됩니다. 따라서 이사야 34:6의 표현은 당시의 제사 언어를 의도적으로 떠올리게 합니다. 8절의 「시온의 억울함을 풀어 주려고」라는 표현의 원문에는 히브리어 리브(⁨רִיב⁩)가 쓰였습니다. 이 말은 다툼이나 분쟁을 뜻하며 법적 소송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한쪽으로는 에돔이 시온을 적대하고 해친 사건에 대해 하나님이 되갚으시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쪽으로는 하나님이 시온의 소송을 맡아 그 권리를 회복시키시고 억울함을 바로잡으신다는 의미가 강조될 수 있습니다. 두 해석은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이 시온과 관련된 불의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불타는 땅과 혼돈의 측량줄

이사야 34:9–12 본문 →

물줄기가 불타는 역청으로 변한다

9절에서 심판의 풍경이 바뀝니다.

에돔의 물줄기들은 역청으로, 그 흙은 유황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 땅은 불타는 역청이 될 것입니다.이사야 34:9 · 두루새김

앞에서는 사람과 짐승의 피가 땅을 적셨습니다. 이제는 땅 자체가 불타는 물질로 변합니다.

물줄기는 보통 생명의 원천입니다. 사람들이 마시고, 밭에 물을 대고, 가축에게 공급하는 곳입니다.

생명을 공급하던 것이 더 이상 생명을 공급하지 못합니다.

꺼지지 않는 불과 영원히 올라가는 연기

10절은 이 황폐가 계속됨을 강조합니다.

그 불은 밤에도 낮에도 꺼지지 않고, 연기는 영원히 올라갈 것입니다. 그 땅은 대대로 황폐해지고, 영원토록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이사야 34:10 · 두루새김

잠깐의 군사적 패배를 당하고 곧 이전의 번영을 회복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에돔의 기존 질서가 다시는 이전과 같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는 심판입니다.

10절에서는 불이 밤에도 낮에도 꺼지지 않고 연기가 영원히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11–15절에서는 그 땅에 짐승과 새들이 살고 둥지를 틀며 새끼를 기릅니다.

꺼지지 않는 불과 계속 올라가는 연기는 심판의 철저함을 강조합니다. 이어지는 짐승들의 정착은 그 땅이 더 이상 인간 왕국의 거처가 아니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하나의 황폐를 묘사하기 위해 겹쳐집니다.

땅이 타 버린 뒤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폐허에 측량줄을 드리우시는가

사다새와 호저가 그 땅을 차지하고, 얀슈프와 까마귀가 그곳에 살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줄을 늘이고 추를 드리워, 그 땅을 혼돈에 빠뜨리고 텅 빈 곳으로 만드실 것입니다.이사야 34:11 · 두루새김

측량줄과 추는 본래 땅과 건축물을 재는 도구입니다. 정해진 선을 따라 건물을 세우고, 수직을 확인하며, 땅의 경계를 정할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엇을 측량할까요?

원문에서는 혼돈과 공허를 측량하는 듯한 표현을 씁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그 땅을 혼돈에 빠뜨리고 텅 빈 곳으로 만드실 것입니다」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던 땅이, 다시 혼돈에 빠지고 텅 빈 상태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가 되돌려지는 듯한 이미지입니다.

측량줄은 질서와 계획을 상징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측정되는 결과는 혼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통제를 잃은 무질서한 분노가 아니라는 사실을 글의 표현을 통해 드러냅니다.

인간에게는 모든 질서가 무너진 혼돈으로 보이는 장소에도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이 미치고 있습니다.

왕을 세울 사람조차 없다

12절은 혼돈과 텅 빈 상태가 정치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는지 보여 줍니다.

그곳에는 왕으로 세울 귀족들이 없고, 지도자들도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이사야 34:12 · 두루새김

국가는 단순히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왕국을 지탱하던 구조 자체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를 다른 존재들이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역청은 검고 끈적한 천연 물질로, 불이 붙으면 연기와 함께 탈 수 있습니다. 유황 역시 불과 강한 냄새를 떠올리게 하는 물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창세기 19:24–28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과 불로 심판받는 장면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유황과 불이 심판의 이미지로 등장하고, 아브라함이 바라본 땅에서는 연기가 올라옵니다. 「얀슈프」가 정확히 어떤 동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이름은 레위기 11:17과 신명기 14:16에도 등장하며, 대체로 특정한 새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종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사야 34:11의 원문에 나오는 혼돈의 측량줄과 공허의 추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전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레미야 4:23에서도 동일한 두 낱말이 등장합니다. 예언자는 심판받는 땅을 바라보며 혼돈과 공허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12절의 히브리어는 왕권과 귀족, 부름의 관계가 압축되어 있어 문장 구조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왕으로 세울 귀족조차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귀족들이 왕권을 선포하거나 주장해도 아무런 실체가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 2:12–17에서는 높아진 모든 것과 교만한 모든 자가 낮아지고, 그날에는 여호와야훼만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라고 선포됩니다. 이사야 34장의 에돔도 같은 원리 아래 놓입니다. 왕으로 세울 귀족들과 지도자들이 차지했던 높고 튼튼한 자리가 결국 텅 비게 됩니다.

궁전에서 쉬는 릴리트와 둥지를 트는 새들

이사야 34:13–15 본문 →

인간의 기쁨이 사라진 궁전

13절은 황폐해진 도시의 모습을 더 가까이에서 보여 줍니다.

궁전에는 가시나무가 자라고, 요새에는 쐐기풀과 가시덤불이 돋아날 것입니다. 그 땅은 자칼들의 거처가 되고, 타조들의 보금자리가 될 것입니다.이사야 34:13 · 두루새김

궁전은 왕과 지배층이 살며 권력을 행사하는 공간이고, 요새는 바깥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시설입니다. 이 식물들은 사람의 명령을 듣고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 공간을 돌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자랍니다.

궁전은 여전히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건물이 본래 하던 역할은 끝났습니다.

왕의 명령이 들리던 자리에서 짐승들이 살아갑니다.

특히 이사야는 궁전과 요새를 무너뜨리는 군대의 모습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시간이 흘러 그곳에 가시나무와 가시덤불이 자라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한순간의 파괴가 아니라, 사람들이 더 이상 돌아와 돌보지 않는 시간이 쌓이는 것입니다.

사막 짐승과 염소 귀신과 릴리트

14절은 더욱 낯선 존재들을 등장시킵니다.

사막 짐승들이 들짐승들과 만나고, 염소 귀신이 제 동료를 부를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릴리트가 쉬며, 자기가 쉴 곳을 찾을 것입니다.이사야 34:14 · 두루새김

이사야는 에돔이 이제 사람들이 안전하게 생활하고 다스리는 도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땅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 야생 생물과 사막의 기이한 존재들이 어울리는 장소가 됩니다. 고대 사람들이 황무지와 폐허를 바라보며 느꼈을 낯섦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적 장면입니다.

인간에게는 폐허인 곳이 다른 존재에게는 쉴 곳이 됩니다.

폐허에서 새끼를 기르는 생물들

15절은 앞의 섬뜩한 풍경과 달리 매우 구체적으로 새끼를 낳고 기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거기서 화살뱀이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부화시키며, 새끼들을 제 그늘에 모을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매들이 저마다 제 짝과 함께 모일 것입니다.이사야 34:15 · 두루새김

인간에게는 심판의 결과로 주어진 황폐한 땅입니다. 하지만 그곳을 차지한 생물들에게는 새로운 생명을 이어 가는 장소입니다. 이사야는 생물들을 단순히 죽음과 불길함의 상징으로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15절의 「저마다 제 짝과 함께 모일 것입니다」는 바로 다음 16절의 「어느 것도 제 짝을 잃지 않았습니다」와 이어집니다. 마지막 두 절에서 그들이 그곳에 사는 일을 하나님의 명령과 땅을 나누어 주시는 일에 연결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염소 귀신」(⁨שָׂעִיר⁩)으로 번역된 낱말은 털이 많은 숫염소를 가리킬 수 있지만, 어떤 문맥에서는 숫염소의 모습을 지닌 초자연적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레위기 17:7에서는 이스라엘이 숫염소 귀신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사야 34:14의 표현을 단순한 야생 숫염소로 읽을 수도 있고, 황무지에 있다고 여겨졌던 초자연적 존재를 나타낸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절만으로 특정한 영적 존재가 실제로 있는지, 어떤 존재인지 자세히 정할 수는 없습니다. 「릴리트」(⁨לִילִית⁩)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등장합니다. 밤과 관련된 존재로 이해되어 왔으며, 고대 근동 사람들이 생각했던 밤의 영적 존재와 연결하여 읽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 문맥상 밤에 활동하는 동물이나 새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길도 있습니다. 후대의 유대 전승에서는 릴리트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가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대의 이야기를 이사야 34:14에 그대로 가져와서는 안 됩니다. 「화살뱀」이 정확히 어떤 생물을 뜻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뱀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고, 올빼미와 같은 새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따라서 두루새김의 「화살뱀」은 이 생물이 무엇인지에 관한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책에서 찾아 읽어 보아라」

이사야 34:16–17 본문 →

왜 갑자기 책을 읽으라고 하는가

16절에서는 또 한 번 시선이 바뀝니다.

여호와야훼의 책에서 찾아 읽어 보아라. 이들 가운데 하나도 빠지지 않았고, 어느 것도 제 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내 입이 명령했고, 여호와야훼의 영께서 이들을 모으셨기 때문입니다.이사야 34:16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의 책」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어떤 문서를 가리키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앞서 선포된 예언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이 정하신 일을 확실히 기록한 책이라는 넓은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오늘날 우리가 가진 완성된 성경 전체를 직접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의 「이들」이 15절의 새들만을 가리키는지, 앞서 나열된 생물들 전체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책에서 읽은 말씀과 실제로 이루어질 일이 서로 들어맞는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이 장에서 민족의 군대는 무너지고, 인간의 통치자들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황폐한 땅에 자리 잡는 생물들은 제 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들의 존재가 하나씩 기억되고, 그들이 함께 살아갈 자리가 마련됩니다.

하나님의 입과 영이 함께 등장한다

그 생물들이 모이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과 영의 활동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32:15에서는 높은 곳에서 영이 부어져 광야가 경작지가 되는 회복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34:16에서는 영이 황폐한 땅에 살아갈 생물들을 모으는 일과 연결됩니다. 한쪽에서는 인간 사회가 회복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 사회가 무너진 땅에 새로운 거주자들이 모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원하는 결과만 만들어 내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분은 살리시기도 하고, 심판하시기도 하며, 땅의 질서를 정하십니다.

제비를 뽑아 짐승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신다

마지막 17절에서 측량의 이미지가 돌아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들을 위해 제비를 뽑으시고, 자기 손으로 줄을 대어 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들은 영원히 그 땅을 차지하고, 대대로 그곳에 살 것입니다.이사야 34:17 · 두루새김

이 표현들은 구약에서 땅을 나누어 줄 때 쓰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여호수아 14–19장에서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제비를 뽑아 약속의 땅을 나누어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곳에서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상속의 몫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34장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땅을 나누어 주는 말이 전혀 다른 대상에게 쓰입니다.

에돔의 땅을 받는 것은 인간 지파들이 아닙니다.

사막의 생물들과 새들입니다.

이사야가 인간이 없는 생태계를 그 자체로 이상적인 낙원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이 황폐해진 것은 심판의 결과이며, 인간의 삶과 공동체가 파괴된 비극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을 단순히 자연이 인간에게서 땅을 되찾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의 인칭을 그대로 따르면 「내 입」이라고 한 뒤에 「그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직접 발언이 중간에 서술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예언자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과정에서 인칭이 바뀌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고대 이사야 사본인 쿰란의 이사야 대두루마리에는 「내 입」 대신 「그의 입」으로 읽히는 형태가 전해집니다. 그렇게 읽으면 하나님의 입과 영이 같은 분에게 속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두루새김은 「내 입」을 유지하고, 뒤의 「그의 영」을 「여호와야훼의 영」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영이 누구의 영인지는 분명히 드러내지만, 「내 입」의 화자가 누구인지에 관한 긴장은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의미 — 인간의 권력은 땅의 최종 소유자가 아니다

이사야 34:1–17 본문 →

이사야 34장의 마지막은 황폐 자체가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통치가 끝난 자리에서도 땅의 운명을 정하시는 분이 여호와야훼이심을 보여 줍니다. 민족들은 자신들의 군사력과 영토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통치가 끝날 때 그 땅이 누구에게 돌아갈지도 결정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가 특정 나라의 재난이나 전쟁을 보면서 곧바로 이사야 34장의 심판을 적용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셨다고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34장은 에돔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입니다. 이 예언을 오늘의 어느 민족이나 국가에 그대로 옮겨 적용할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장을 읽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확신보다, 자신이 의지하는 질서도 하나님의 정의 아래 있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사야 34장은 마지막에 화려한 하나님의 왕좌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를 보여 주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사람이 떠난 땅을 보여 줍니다.

궁전에는 가시나무가 자라고, 요새에는 야생 생물들이 삽니다. 새들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으며, 저마다 자기 짝과 함께 모입니다.

그리고 그 황무지 위에 하나님이 땅을 재시는 줄이 놓입니다.

한때 왕들이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던 곳입니다. 군대가 지키고 귀족들이 다스리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땅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분은 제비를 뽑으시고, 경계를 정하시고, 새로운 거주자들에게 각자의 몫을 주십니다.

왕국은 사라졌지만, 땅의 주인이신 여호와야훼의 통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