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과 무너진 성읍의 양심
예레미야 5장은 뜻밖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조사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군사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적의 침략에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도 묻지 않으십니다.
대신 사람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왕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며, 특별한 능력을 지닌 영웅도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찾으시는 사람은 공정하게 행동하고 진실함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 여호와야훼는 「찾아보아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공정하게 행동하고 진실함을 찾는 사람을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6절에서는 「내 백성 가운데 악한 자들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서는 이 악한 자들이 ‘발견되었다’고 말합니다.
찾으라고 하신 사람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발견됩니다.
앞 장에서 예루살렘의 파괴가 창조의 질서마저 무너지는 듯한 환상으로 나타났다면, 이번 장은 왜 그 성읍이 심판에 이르렀는지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행동에서 찾습니다.
성읍을 용서하기 위해 찾으시는 한 사람
첫 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의 거리와 광장을 조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를 두루 다니며 자세히 살펴보아라. 광장마다 사람을 찾아보아라. 공정하게 행동하고 진실함을 찾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보아라. 그런 사람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겠다.」예레미야 5:1 · 두루새김
거리와 광장은 사람들이 모이고 교류하며 거래하고, 공적인 관계를 맺는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탐색은 누군가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경건한 감정을 찾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진실함」은 에무나입니다. 이 말에는 믿을 만함, 성실함, 충실함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공정하게 「행동하고」라고 말합니다. 진실함은 「찾는」다고 말합니다.
진실함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모든 면에서 완전한 사람이라는 뜻보다,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추구하는 방향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요구하신 삶의 기본적인 방향이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간청보다 더 낮아진 문턱
이 장면은 창세기 18:22–33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의 멸망을 앞두고 여호와야훼께 의인들이 있다면 성읍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는 오십 명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열 명의 의인이 있어도 그 성읍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응답을 얻었습니다. 예레미야 5장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먼저 한 사람만 있어도 예루살렘을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본문이 동일한 법적 기준을 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성읍의 심판을 앞두고 그 안에서 올바르게 사는 사람을 찾는다는 점에서 뚜렷한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에서는 여호와야훼 자신이 탐색을 명령하신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심판을 선언하시는 분이 동시에 용서할 근거를 찾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문제가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살아 계신 여호와야훼를 두고 맹세합니다』라고 말해도, 정작 그 맹세는 거짓이다.」예레미야 5:2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앞 장의 첫머리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4:2에서 여호와야훼는 진실과 공정과 의로움으로 자신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5:2에서는 그 맹세의 실제 모습이 드러납니다.
문제는 하나님에 관한 말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그 말에 걸맞게 살아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 주님은 진실함을 찾으시는 분이 아닙니까? 주님이 그들을 치셨지만 그들은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철저히 무너뜨리셨지만 잘못을 고치라는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얼굴을 바위보다 단단하게 굳히고 돌아오기를 거부했습니다.」예레미야 5:3 · 두루새김
여기서 1절의 「진실함」과 같은 단어가 반복됩니다. 여호와야훼는 진실함을 찾는 사람을 찾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여호와야훼께서 바로 그 「진실함을 찾으시는 분」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이 구절에서 백성은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 신체적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닥친 징계가 삶의 태도를 바꾸는 계기가 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얼굴은 사람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얼굴을 굳게 한다는 것은 부끄러워하거나 잘못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고집스러운 태도를 나타냅니다. 이 표현은 회개의 부재를 구체적인 몸짓으로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의 문제는 아무런 경고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경고를 받고도 바뀌기를 거부했다는 데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지도자들에게로 — 무너지는 마지막 기대
예레미야는 아직 탐색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다. 여호와야훼의 길과 자기들의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몰라서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이다.」예레미야 5:4 · 두루새김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은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으로 낮은 처지를 함께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가난한 사람들은 본래 무지하고 악하다는 예레미야서의 일반적인 가르침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탐색 도중 내놓는 잠정적인 판단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세운 설명을 시험하기 위해 다음 장소로 갑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해 보겠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길과 자기들의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한결같이 멍에를 부수고 묶인 줄을 끊어 버렸습니다.예레미야 5:5 · 두루새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영향력과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배웠을 것이고,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것이라고 예레미야는 기대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는 무지를 보았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의도적인 거역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길을 몰라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알면서도 거부합니다.
여기서 멍에와 묶인 줄은 여호와야훼의 권위와 그분께 대한 순종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지도자들은 그것을 자신들을 억압하는 속박처럼 여기고 끊어 버렸습니다.
출애굽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실제 종살이에서 해방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백성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이끄시는 여호와야훼의 권위에서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여깁니다.
구원하신 분과의 관계를 끊는 일이 자유가 된 셈입니다.
진실한 사람이 없는 것은 단순히 교육이나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공동체의 방향 자체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숲에서 나온 사자가 그들을 칠 것이며, 황야의 늑대가 그들을 짓밟을 것입니다. 표범이 그들의 성읍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그곳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맹수에게 찢길 것입니다. 그들이 거역한 일이 많아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선 일이 크게 늘었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5:6 · 두루새김
숲과 황야, 성읍의 경계까지 위험이 퍼져 있습니다. 이 맹수들은 다가오는 파괴와 침략의 위협을 묘사하는 비유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성읍 안에서도 안전하지 않고, 밖으로 나오면 맹수에게 찢길 위험에 놓입니다.
배불리 먹이셨는데, 그들은 다른 것을 탐했다
7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직접적인 고발이 다시 시작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너를 내가 어떻게 용서하겠느냐? 네 자녀들은 나를 버리고 신도 아닌 것들을 두고 맹세했다.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였지만 그들은 간음하고, 창녀의 집으로 떼 지어 몰려갔다.」예레미야 5:7 · 두루새김
첫 절에서 여호와야훼는 한 사람을 발견하면 성읍을 용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너를 내가 어떻게 용서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처음의 제안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탐색을 통해 드러난 성읍의 상태를 반영합니다.
이것은 백성이 부족한 것 때문에 여호와야훼를 떠났다고 변명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셨는데도, 그들은 다른 것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고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수말들이다. 저마다 이웃의 아내를 향해 히힝거린다.」예레미야 5:8 · 두루새김
간음이라는 표현에는 언약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긴다는 예언서의 비유가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8절에서 「이웃의 아내」를 향한 욕망이 직접 언급되는 만큼,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부부의 약속을 저버리고 관계를 파괴하는 일도 고발의 범위에서 제외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사실이 먼저 등장합니다. 문제는 받은 풍요가 감사와 책임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관계를 침범하는 욕망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보고도 내가 벌하지 않겠느냐?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이런 민족에게 내가 직접 보복하지 않겠느냐?」예레미야 5:9 · 두루새김
여기서 「보복」은 사적인 원한을 풀기 위한 감정적 복수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맥상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의 배신과 불의에 책임을 물으시는 심판을 가리킵니다.
10절에서는 포도나무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그 여자의 포도밭으로 올라가 파괴해라. 그러나 완전히 끝장내지는 마라. 덩굴들을 잘라 내라. 그것들은 여호와야훼의 것이 아니다.」예레미야 5:10 · 두루새김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여호와야훼의 백성이 아니라는 선언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11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자손들과 유다의 자손들이 여호와야훼를 배신했다고 말합니다. 즉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실제로 자라나게 한 것 가운데는 여호와야훼와의 관계에 걸맞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파괴되지만, 파괴의 범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두루새김이 「포도밭」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뜻을 확정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포도나무의 줄이나 심어진 구획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세부적인 모습을 분명하게 재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언자의 말은 바람인가, 불인가?
12절에서는 백성이 여호와야훼의 심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를 부인하며 말했습니다. 「그분이 그러실 리 없어. 우리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을 거야. 전쟁도 굶주림도 겪지 않을 거야.」예레미야 5:12 · 두루새김
「그분이 그러실 리 없어」라는 말은 여호와야훼께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부정합니다.
이 말은 예레미야 4:10에서 예언자가 제기한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예레미야는 평화를 약속받았다고 여기는 백성에게 칼이 다가오는 현실을 보고 여호와야훼께 항의했습니다. 이제 5장에서는 재앙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확신이 드러납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자신들이 사는 성읍이 무너질 리 없습니다. 자신들이 의지하는 질서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언자들은 바람일 뿐이야.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그들이 말한 일이 자기들에게나 닥칠 거야.」예레미야 5:13 · 두루새김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런 말을 했으므로, 보아라, 예레미야야, 내가 네 입에 있는 내 말을 불로 만들고 이 백성을 장작으로 만들겠다. 그 불이 그들을 먹어 치울 것이다.」예레미야 5:14 · 두루새김
바람은 불어 지나가면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반면 불은 자신이 닿는 대상을 실제로 태웁니다. 이 대조에서 핵심은 예언자의 말을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는가가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그 말씀을 어떻게 이루시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여호와야훼는 「내 말」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개인의 분노나 그의 말솜씨가 백성을 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 자체가 심판의 힘을 가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긴다고 해서 그 말씀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늘날 종교적 발언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특별한 예언자적 권위는 그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받았다는 본문의 분명한 선언에 근거합니다. 이 장면의 초점은 인간의 말을 절대화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거짓된 안심으로 지워 버리려는 태도를 고발하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로 후, 곧 ‘그가 아니다’라는 간결한 표현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말을 「그분이 그러실 리 없어」로 옮겼습니다. 이 말만으로 백성이 여호와야훼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앞에서는 그들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문맥상 그들은 예언자가 선포하는 재앙이 여호와야훼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거나, 여호와야훼가 실제로 그런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3절은 발언의 경계와 마지막 문장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처럼 백성이 예언자들을 비웃는 말로 이어 읽을 수도 있고, 그 비웃음에 대한 별도의 응답이 포함되었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말하는 군대
「이스라엘의 자손들아, 보아라, 내가 먼 곳에서 한 민족을 데려와 너희를 치게 하겠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들은 강한 민족이며,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민족이다. 너희는 그들의 언어를 모르고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예레미야 5:15 · 두루새김
앞에서는 맹수의 이미지로 심판이 표현되었습니다.
이제는 실제 외국 민족이 등장합니다.
침략군이 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어떤 명령을 내리는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전쟁은 성벽이 무너지는 일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온 세계의 언어와 질서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신명기 28:49–52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먼 곳에서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민족이 와서 성읍들을 포위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예레미야 5장의 표현은 그 언약의 경고를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땅에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민족이 그 땅을 지배할 위기에 놓입니다.
「그들의 화살통은 입을 벌린 무덤 같고, 그들은 모두 힘센 전사들이다.」예레미야 5:16 · 두루새김
화살통은 전쟁에서 화살을 담아 두는 도구입니다. 그것을 입을 벌린 무덤에 비유한다는 것은 그 안에서 나오는 화살이 죽음을 가져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17절에 이르면 침략의 결과는 더욱 구체적이고 끔찍해집니다.
「그들이 네 수확물과 양식을 먹어 치울 것이다. 네 아들들과 딸들을 먹어 치울 것이다.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어 치우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도 먹어 치울 것이다. 네가 믿고 의지하는 튼튼한 성벽을 두른 성읍들을 칼로 무너뜨릴 것이다.」예레미야 5:17 · 두루새김
「먹어 치울 것이다」라는 표현이 거듭 반복됩니다. 먹을 양식과 재산, 자녀와 다음 세대, 농사를 짓고 살아갈 미래의 생계까지 모두 공격받습니다.
특히 「네 아들들과 딸들을 먹어 치울 것이다」라는 표현은 매우 거칩니다. 이것을 반드시 침략자들이 사람을 문자 그대로 먹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확물과 가축을 먹어 치우는 침략군의 파괴 행위와 함께, 자녀들의 생명까지 빼앗는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파괴는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던, 튼튼한 성벽을 두른 성읍들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유다가 안전하다고 여긴 것들이 하나씩 무너지는 것입니다.
완전한 파괴는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18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뜻밖의 한계를 선언하십니다.
「그날들에도 내가 너희를 완전히 끝장내지는 않겠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5:1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10절에서 포도밭을 파괴하되 완전히 끝장내지는 말라고 하신 명령과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는 백성의 잘못이 심각하지 않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침략과 유배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이 자신의 백성을 향한 모든 뜻을 완전히 끝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히십니다.
「백성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왜 우리에게 이 모든 일을 하셨을까?』 하고 물으면, 너는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해라. 『너희가 나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낯선 신들을 섬겼으니, 이제 너희 땅이 아닌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예레미야 5:19 · 두루새김
문장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서로 대응합니다.
| 이스라엘의 행동 | 심판의 결과 | | --- | --- | | 자기 땅에서 |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 | 낯선 신들을 섬김 | 낯선 사람들을 섬김 |
심판은 죄와 무관한 형태로 내려지지 않습니다.
유배는 단지 거주지가 바뀌는 사건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던 백성이 그 땅을 떠나 다른 권력의 지배를 받는 일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낯선 주인들을 향한 충성이, 이제 원하지 않는 낯선 주인들 아래에서 살아가는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뒤에 예레미야 30:11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여러 민족을 멸하시더라도 자신의 백성은 완전히 끝장내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레미야 31장에서는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시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약속이 이어집니다. 다만 5장은 그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다는 경계를 지키는데, 사람은 지키지 않는다
20절에서는 새로운 명령이 내려집니다.
「야곱의 자손들에게 이 말을 알리고 유다에 전해라.」 그리고 여호와야훼는 백성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어리석고 분별없는 백성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예레미야 5:21 · 두루새김
1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의 거리를 다니며 자세히 살펴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3절은 여호와야훼께서 진실함을 찾으시는 분이 아니시냐는 예언자의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백성은 눈이 있어도 보지 않는다고 고발받습니다.
문제는 볼 수 있는 기관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눈앞에 있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보고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시편 115:4–8에서는 우상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만들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그와 같아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5:21이 그 시편을 직접 인용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두 본문은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영적 무감각이라는 주제에서 연결됩니다.
그런데 22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갑자기 바다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너희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 앞에서 떨지 않느냐? 내가 모래를 바다의 경계로 세워 영원히 넘지 못하게 정했다. 파도가 거세게 일어나도 넘지 못하고, 소리 높여 울부짖어도 그 경계를 넘지 못한다.」예레미야 5:22 · 두루새김
바다는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면 모래는 약해 보입니다.
손으로 움켜쥐면 쉽게 흩어지고, 물결에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 모래를 바다의 경계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바다가 어떤 경우에도 해안선을 넘어올 수 없다는 과학적 진술을 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창조 세계에 질서와 경계를 정하시는 여호와야훼의 권위를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아무리 거세게 움직이는 바다라도 여호와야훼가 마련하신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그러나 이 백성에게는 고집을 부리며 거역하는 마음이 있다. 그들은 나에게서 돌아서서 떠나갔다.」예레미야 5:23 · 두루새김
거센 파도조차 여호와야훼가 정하신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데,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백성은 스스로 그분의 뜻을 거스릅니다. 바다는 도덕적 선택을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고 그에 응답해야 하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주어진 분별과 응답의 능력이 오히려 거역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자. 그분은 때에 맞춰 가을비와 봄비를 내려 주시고, 우리가 정해진 때에 수확하도록 지켜 주신다.』」예레미야 5:24 · 두루새김
가을비와 봄비는 이스라엘의 농사와 관련됩니다. 가을비는 비가 오지 않는 계절이 끝난 뒤 땅을 적셔 씨를 뿌릴 수 있도록 돕고, 봄비는 곡식이 자라 수확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이 땅을 갈고 씨를 뿌릴 수 있지만, 비가 언제 오고 생명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모두 자기 힘으로 조절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질서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야훼가 누구신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5절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멍에를 부수고 묶인 줄을 끊어 버렸다는 말은 이제 더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다스림을 자신들을 제한하는 속박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정하신 질서는 이스라엘의 생명을 유지하는 토대이기도 했습니다.
「너희의 잘못이 이런 것들을 물러가게 했고, 너희의 죄가 너희에게 올 좋은 것들을 가로막았다.」예레미야 5:25 · 두루새김
이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한 예언자의 판단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어떤 지역에 가뭄이나 흉작이 발생했다고 해서, 그 원인을 그 지역 사람들의 특정한 죄에서 곧바로 찾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풍요를 누리면서도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이스라엘의 모순과,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의 죄악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새장에는 새가 가득하고, 부자의 집에는 속임수로 얻은 것들이 가득하다
「내 백성 가운데 악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새를 잡는 사냥꾼처럼 웅크려 엿보다가, 덫을 놓아 사람들을 붙잡는다.」예레미야 5:26 · 두루새김
새를 잡는 사람은 새가 지나갈 만한 곳을 살피고, 덫을 놓고, 걸려들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는 자신이 위험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덫에 접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악한 자들은 사람을 새처럼 붙잡습니다.
덫을 놓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걸려들도록 미리 상황을 마련한다는 뜻입니다.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하고, 그 움직임을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다만 본문이 정확히 어떤 경제적 수법이나 법적 제도를 가리키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새장에 새가 가득하듯, 그들의 집에는 속임수로 얻은 것들이 가득하다. 그렇게 그들은 힘을 얻고 부자가 되었다.」예레미야 5:27 · 두루새김
여기서 속임수는 부를 얻는 과정에 곁들여진 작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들의 집은 속임수로 얻은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들이 부유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그 부가 다른 사람을 붙잡고 해치는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살이 찌고 윤기가 흐른다. 악한 짓을 하는 데에도 도를 넘었다. 고아의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서도 잘살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한 일도 공정하게 판결해 주지 않았다.」예레미야 5:28 · 두루새김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은 고대 사회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기 쉬웠습니다. 특히 가족이나 재산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공정한 재판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신명기 24:17은 나그네와 고아의 권리를 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며, 27:19에서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굽게 하는 사람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5장의 악한 자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재판과 억울한 일을 공정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고아의 「재판」과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한 일을 「공정하게 판결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이 정당하게 주장해야 할 권리가 있었지만, 그것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순한 동정심만이 아니라 정의로운 판결이었습니다.
그리고 29절에서 익숙한 질문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런 일들을 보고도 내가 벌하지 않겠느냐?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이런 민족에게 내가 직접 보복하지 않겠느냐?」예레미야 5:29 · 두루새김
이것은 9절의 질문과 동일합니다. 처음에는 백성의 배신과 부정한 욕망이 고발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덫에 걸리게 하고, 속임수로 얻은 것들로 집을 채우며,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외면하는 현실까지 드러났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심판은 단지 사람들이 다른 신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부를 쌓으며, 힘없는 사람의 권리를 어떻게 다루었는가도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고아의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서도 잘살았다」라는 표현에는 원문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성공하고 잘살았다는 독립적인 진술로 읽을 수도 있고, 고아가 잘되도록 재판을 처리하지 않았다는 앞 문장의 일부로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전자를 따라, 고아의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잘살았다고 옮겼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대조가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그들의 번영은 공동체가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공동체의 정의가 무너졌다는 증거로 제시됩니다.
모두가 좋아하는 거짓 — 「이런 일의 끝이 닥치면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마지막 두 절은 예레미야 5장의 모든 고발을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로 모읍니다.
「이 땅에서 소름 끼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여호와야훼는 이제 무엇이 가장 끔찍한 일인지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그 예언자들의 지시에 따라 다스린다. 내 백성은 그런 것을 좋아한다. 이런 일의 끝이 닥치면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예레미야 5:31 · 두루새김
거짓을 말하는 지도자와 거짓을 좋아하는 백성
이 문장은 잘못된 지도자들 때문에 무고한 백성이 속고 있다는 설명을 넘어섭니다.
물론 지도자들에게는 특별한 책임이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해야 할 예언자들이 거짓을 말하고, 종교적 질서를 지켜야 할 제사장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권위를 행사합니다.
그러나 백성 역시 그 질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백성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합니다. 백성은 그런 지도자들을 좋아합니다. 그 관계 속에서는 누구도 잘못을 바로잡을 이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진실을 몰랐다면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보다 자신이 듣고 싶은 거짓을 더 좋아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진실 자체가 불편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앞으로 직면하게 될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그는 단순히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짓에 맞서, 그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질문은 대답을 요구한다
이 장은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질문으로 끝납니다.
여기서 「이런 일의 끝」은 현재의 잘못된 질서가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될지를 묻게 합니다. 지금은 거짓된 예언이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제사장들과 백성이 그 질서 안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악한 자들이 잘살고,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함은 해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가 끝없이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이 질문은 독자에게 대답을 대신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의지하고 좋아하던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무엇이 남겠느냐고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31절의 제사장들에 관한 히브리어 표현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처럼 예언자들의 지시에 따라 다스리는 것으로 읽을 수 있고, 제사장들이 자기 손에 권력을 쥐고 다스린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종교적 지도 체계가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맺음 — 사람을 찾던 거리에서 들리는 마지막 질문
처음 여호와야훼가 찾으셨던 것은 공정하게 행동하고 진실함을 찾는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독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고, 약한 사람의 권리를 외면하지 않으며, 듣기 좋은 거짓보다 진실을 택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아직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말을 좋아하는 백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좋아하는 말이 앞으로 닥칠 현실을 막아 주지는 못합니다.
성벽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공정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외국 군대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사람들은 서로를 속이고 있었습니다.
예언자의 말이 거짓이 되고, 제사장들이 그 예언자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며, 백성은 그 모든 일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은 자신을 보호해야 할 진실을 스스로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5장은 그 사람을 발견했다는 소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거짓을 좋아하는 백성 앞에, 여호와야훼의 마지막 질문만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일의 끝이 닥치면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