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돌아오라는 부름과 무너지는 창조
예레미야 4장에는 두 개의 땅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아직 씨를 뿌릴 수 있는 땅입니다. 땅은 오래 묵었고 가시덤불이 자라 있지만, 아직 일구어 새로운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의 후반부에 이르면 전혀 다른 땅이 등장합니다.
이제 땅은 단순히 갈지 않은 상태가 아닙니다. 빛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새들마저 사라졌습니다. 마치 창조 이전의 혼돈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예레미야 4장은 다시 일굴 수 있는 땅에서 시작해, 창조의 질서마저 무너진 듯한 땅으로 나아갑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호와야훼는 처음부터 멸망을 선포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마음의 묵은 땅을 갈고, 악을 씻어 내고, 진실하고 공정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지 않는 백성 앞에 북쪽에서 오는 침략군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장의 긴장은 회개의 가능성과 다가오는 심판 사이에 있습니다.
예언자는 멸망을 차갑게 설명하는 관찰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선포하는 재앙을 누구보다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돌아오려거든 내게 돌아와라」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 돌아와라. 네가 내 앞에서 역겨운 것들을 치우고 더는 떠돌지 않으며,」예레미야 4:1 · 두루새김
얼핏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돌아옴을 구별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방식으로든 종교적인 자리로 돌아오는 것과, 실제로 여호와야훼께 돌아오는 것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앞 장에서 유다는 돌아온 것처럼 행동했지만, 온 마음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3:10). 4장의 첫 말씀은 그 문제를 이어받습니다. 이스라엘이 되찾아야 할 것은 단순히 이전의 생활 방식이나 종교적 관습이 아닙니다. 그들이 돌아가야 할 대상은 여호와야훼 자신입니다.
여기서 「역겨운 것들」은 문맥상 다른 신들과 관련된 우상숭배의 대상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께 돌아온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섬기던 다른 대상을 그대로 붙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더는 떠돌지 않으며」라는 표현은 단순히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 장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신과 다른 의지처를 찾아 이리저리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제 그처럼 흔들리고 떠도는 삶을 그쳐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우상숭배를 중단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야훼를 두고 맹세합니다』라고 진실하고 공정하고 올바르게 맹세한다면,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를 통해 복을 빌고 그분을 자랑할 것이다.」예레미야 4:2 · 두루새김
「살아 계신 여호와야훼를 두고 맹세합니다」라는 맹세는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말과 행동의 증인으로 모시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이름으로 맹세하는 삶이 진실하고 공정하고 올바라야 합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거짓이나 속임 없이 믿음을 지키는 태도를, 공정하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바르게 판단하고 대하는 일을, 올바르다는 것은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관계와 행동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사람을 속이고 불의를 행한다면, 그 고백은 자신이 부르는 이름과 어긋납니다.
이스라엘이 정말 돌아왔다면, 그것은 예배에서뿐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돌아옴이 이스라엘 내부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창세기 12:3과 22:18에서는 여러 민족이 아브라함 및 그의 자손과 관련하여 복을 얻게 될 미래가 약속됩니다. 예레미야 4:2는 그 약속을 직접 인용하는 형식은 아니지만, 이스라엘과 여호와야훼의 관계가 여러 민족의 복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주제를 함께 보여 줍니다. 이 점은 앞서 예레미야 3:17에서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모일 것이라고 약속하신 내용과도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께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단지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원래 부름받은 백성다운 삶을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돌아옴은 겉모습만 바꾸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묵은 땅을 갈고 마음의 포피를 벗겨 내라
3절에서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갈지 않은 너희 땅을 갈아라. 가시덤불 사이에 씨를 뿌리지 마라.」예레미야 4:3 · 두루새김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에 땅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갈지 않은 땅은 굳어 있고 잡초가 자라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땅에 좋은 씨앗을 뿌리는 것만으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가시덤불을 그대로 둔 채 씨를 뿌리면, 새싹이 제대로 자라기 어렵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유다의 영적 상태를 바로 그런 땅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바꾸지 않은 채 종교적인 행동만 더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먼저 땅을 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추가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굳어지고 잘못된 방향으로 자라난 삶을 뿌리부터 다시 일구는 일이었습니다.
이어서 여호와야훼는 같은 문제를 전혀 다른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여호와야훼를 위해 할례를 받고 너희 마음의 포피를 벗겨 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악한 행동 때문에 내 분노가 불처럼 터져 나와 타오를 것이다.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예레미야 4:4 · 두루새김
할례는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몸의 표지였습니다(창세기 17:9–14).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몸이 아니라 마음의 포피를 벗겨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마음은 감정뿐 아니라 생각과 의지, 판단과 결정을 포함하는 사람의 내면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고 따르지 못하게 하는 마음속 고집을 없애는 일과 관련됩니다.
신명기 10:16에서도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마음의 포피를 벗겨 내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30:6에서는 여호와야훼 자신이 이스라엘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어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마음을 바꾸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뿌리 깊은 변화는 여호와야훼께서 이루실 일로도 약속됩니다. 예레미야 4장은 먼저 사람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강조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역겨운 것들을 치우고, 삶을 바꾸며, 마음속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묵은 땅은 그대로 두고 씨앗만 뿌릴 수 없습니다. 마음속 고집을 그대로 두고 언약의 표지만 지닐 수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을 갈아엎으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아직 변화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를 외면하면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아무도 끄지 못할 불처럼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그 불은 전쟁의 재앙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뿔나팔이 울리고, 사자가 수풀에서 나온다
5절에서 분위기가 갑자기 바뀝니다.
「유다에 알리고 예루살렘에 전해라. 『이 땅에서 뿔나팔을 불어라!』 하고 말해라. 목청껏 외쳐라. 『모여라! 튼튼한 성벽을 두른 성읍들로 들어가자!』」예레미야 4:5 · 두루새김
짧은 명령들이 연달아 등장하면서 긴박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위험을 천천히 살펴볼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시온으로 가는 길을 알리는 깃발을 들어라. 피신해라. 머뭇거리지 마라. 내가 북쪽에서 재앙과 큰 파괴를 가져오고 있다.」예레미야 4:6 · 두루새김
북쪽에서 오는 군대는 예레미야 1:14–15에서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이제 그 위협이 훨씬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사자가 제 수풀에서 올라왔다. 민족들을 멸망시키는 자가 네 땅을 황무지로 만들려고 제 거처를 떠나 길을 나섰다. 네 성읍들은 무너져 사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예레미야 4:7 · 두루새김
사자는 수풀에 숨어 있다가 먹이를 향해 움직이는 맹수입니다. 그가 수풀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위험이 더 이상 숨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 사자는 단순히 유다를 위협하는 작은 세력이 아닙니다. 「민족들을 멸망시키는 자」라고 불립니다.
5절에서는 튼튼한 성벽을 두른 성읍들로 들어가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7절에서는 성읍들이 무너져 사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성읍으로 피신하라는 명령은 당장의 위험에 대응하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그 성읍조차 끝까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8절에서는 전쟁을 대비하는 명령이 슬퍼하며 울라는 명령으로 바뀝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그러니 자루옷을 두르고 슬피 울며 울부짖어라. 여호와야훼의 타오르는 분노가 아직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았다.」예레미야 4:8 · 두루새김
자루옷은 슬픔과 애도, 때로는 회개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단지 군사적 방어를 준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닥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깨달으라고 요청합니다.
이제 그 위협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에게까지 미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는 왕도 용기를 잃고 관리들도 용기를 잃을 것이다. 제사장들은 질겁하고 예언자들은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예레미야 4:9 · 두루새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들을 지탱하던 마음의 힘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이 장의 앞부분에서는 마음의 포피를 벗겨 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바꾸어야 했지만,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지도자들은 이제 두려움 속에서 마음의 힘을 잃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예레미야가 여호와야훼께 항의합니다.
「주님은 참으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완전히 속이셨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아, 주 여호와야훼, 주님은 참으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완전히 속이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지만, 칼이 목숨에까지 닿았습니다.」예레미야 4:10 · 두루새김
그는 지금 평화를 기대하던 백성 앞에 죽음의 위협이 다가오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듣고 전해야 하는 말씀과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평화의 기대 사이에서 심각한 충돌을 경험합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야훼께 속임을 당했다고 항의했다는 것과, 실제로 여호와야훼가 백성을 속이셨다는 것을 본문이 최종적으로 확정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예언자의 말과 본문 전체가 하나님에 관해 내리는 판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예레미야의 항의를 단순히 믿음이 부족한 사람의 실언으로 처리해서도 안 됩니다.
이 장면에서 예레미야는 모든 것을 이해한 뒤 침착하게 설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현실 앞에서 여호와야훼께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가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는 그 현실을 계속 바라보아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는 속인다는 동사의 강조형 부정사와 활용형 동사가 이어집니다. 두루새김은 「참으로」와 「완전히」라는 말을 써서 이 강한 표현을 살렸습니다. 우선 예레미야 4장 앞부분에는 여호와야훼가 예루살렘에게 아무 조건 없이 평화를 약속하신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돌아오지 않으면 분노가 불처럼 타오를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따라서 10절의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통해, 어떤 상황에서 전해졌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6:14에서는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가 있다고 말하는 지도자들이 책망받습니다. 14:13에서는 예레미야가 다른 예언자들이 칼과 기근이 없고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여호와야훼께 호소합니다. 이 본문들을 함께 읽으면, 예레미야가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전해지던 평화의 약속과 실제로 다가오는 재앙 사이의 모순에 항의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항의의 배경과 의도를 한 가지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바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휩쓰는 바람
11절에서는 새로운 자연 현상이 등장합니다.
그때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여호와야훼의 이런 말씀이 전해질 것입니다. 「광야의 나무 없는 언덕에서 메마른 바람이 내 딸인 백성을 향해 분다. 곡식에서 쓸모없는 것들을 날려 보내 깨끗이 하려는 바람이 아니다.」예레미야 4:11 · 두루새김
타작한 곡식을 공중으로 던지면 가벼운 겨와 찌꺼기는 바람에 날아가고 무거운 낟알은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렇게 바람을 이용해 곡식을 분리하는 일을 키질이라고 합니다. 적절한 바람은 곡식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가 말씀하시는 바람은 그런 바람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거센 바람이 나를 위해 불어올 것이다. 이제 나도 그들에게 판결을 내리겠다.」예레미야 4:12 · 두루새김
이 바람은 조심스럽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골라내는 농부의 손길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휩쓰는 재앙의 이미지입니다.
13절에서는 그 바람이 실제로 다가오는 군대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보십시오, 적이 구름처럼 올라옵니다. 적의 전차들은 폭풍 같고, 말들은 독수리보다 빠릅니다. 우리는 탄식합니다. 「아, 큰일 났다! 우리가 짓밟혔다!」예레미야 4:13 · 두루새김
이러한 묘사는 적의 군사력을 정확한 숫자로 설명하기보다, 그들이 얼마나 막기 어려운 속도와 힘으로 다가오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여기서 예언은 마치 이미 벌어진 전쟁을 목격하는 사람의 말처럼 전개됩니다.
그런데 그 절망적인 외침 사이에 다시 회개의 명령이 나타납니다.
나는 예루살렘에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아, 구원받으려거든 네 마음에서 악을 씻어 내라. 언제까지 네 안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겠느냐?」예레미야 4:14 · 두루새김
4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마음의 포피를 벗겨 내라고 하셨습니다. 14절에서는 예언자가 마음에서 악을 씻어 내라고 말합니다. 두 명령은 같은 문제를 다른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유다에게 필요한 것은 외부의 위험을 피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그 위험과 연결된 자신의 삶을 바꾸는 일입니다. 특히 「언제까지 네 안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겠느냐?」라는 질문은 악이 단지 순간적인 행동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 생각을 붙잡고 있는 동안 잘못된 행동도 계속됩니다.
그런데 이제 전쟁의 소식이 더욱 가까워집니다.
「단에서 소식을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에브라임 산지에서도 재난을 전하는 소리가 들린다.」예레미야 4:15 · 두루새김
단은 이스라엘 북쪽 지역과 연결되는 지명입니다. 에브라임 산지는 그보다 남쪽에 있습니다. 따라서 두 지명은 북쪽에서 시작된 침략의 소식이 남쪽으로 전해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16–17절에서는 침략군이 마침내 유다의 성읍들을 포위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밭을 지키는 사람들처럼 예루살렘을 에워쌌다. 예루살렘이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4:17 · 두루새김
밭을 지키는 사람들은 일정한 영역의 주변을 지키며 그곳을 감시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성읍을 포위한 군대에 적용됩니다.
처음에 여호와야훼는 유다에게 갈지 않은 너희 땅을 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보는 것은 밭에서 일할 농부의 모습이 아니라, 밭을 지키는 사람처럼 자신들을 포위한 적군입니다.
땅을 일구어야 할 백성이 자기 성읍 안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걸어온 길과 네 행동이 이런 일을 불러왔다. 이것이 네 재앙이다. 참으로 쓰라리다. 네 마음 깊이까지 닿았다.」예레미야 4:18 · 두루새김
유다는 자신의 마음속에 품은 악을 씻어 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악이 가져온 재앙이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듭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마음입니다.
전쟁을 선포하는 사람의 몸이 먼저 무너진다
19절에 이르면 본문의 목소리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아, 속이 아픕니다. 나는 애타게 기다립니다. 가슴속이 요동치고 심장이 마구 뜁니다. 나는 잠잠히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뿔나팔 소리와 전쟁의 함성을 들었기 때문이구나.예레미야 4:19 · 두루새김
여기서는 말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이 몸 전체를 뒤흔드는 모습입니다. 앞에서는 예언자가 사람들에게 뿔나팔을 불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제 그 뿔나팔 소리가 예언자 자신의 내면을 뒤흔듭니다.
그는 위험을 알리는 사람인 동시에 그 위험의 소리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백성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그 심판이 가져올 고통을 깊이 경험합니다.
파괴에 파괴가 잇따른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온 땅이 짓밟혔습니다. 갑자기 내 천막들이 파괴되고, 한순간에 내 천막 휘장들이 무너졌습니다.예레미야 4:20 · 두루새김
「파괴에 파괴」라는 반복은 재앙이 그칠 틈 없이 이어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벽이나 왕궁이 아니라 천막과 천막 휘장이 등장합니다. 천막은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그 안에는 가족이 머물고 일상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나라가 무너진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치 질서가 바뀌는 일만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집이 사라지고, 가족이 머물던 공간이 파괴되고, 평범한 삶을 이어 갈 장소가 없어지는 일입니다. 예언자는 그 현실을 「내 천막들」의 파괴로 표현합니다.
그리하여 21절에서 탄식이 절정에 이릅니다.
언제까지 내가 전쟁 깃발을 보고 뿔나팔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예레미야 4:21 · 두루새김
그가 계속해서 전쟁의 징후를 보고 들어야 하는 현실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는 호소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대답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어리석어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련하고 분별없는 자녀들이다. 악을 행하는 데에는 똑똑하지만, 좋은 일을 할 줄은 모른다.」예레미야 4:22 · 두루새김
여기서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여호와야훼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유다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성전에서 예배하며, 자신들이 언약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뜻을 알고 따르는 삶에서는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악한 일을 이루는 데에는 능숙합니다. 방법을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행동할 줄 압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하는 데에는 분별력이 없습니다.
문제는 지혜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일이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도, 그 목적 자체가 잘못되었다면 결국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그 파괴의 끝을 바라봅니다.
그가 보는 것은 단순히 패배한 도시가 아닙니다. 창조의 질서가 거꾸로 무너지는 듯한 세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창자와 같은 내장이 등장합니다. 고대 히브리어에서 이런 내장은 깊은 감정과 고통을 표현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속이 아픕니다」로 옮겼습니다. 「나는 애타게 기다립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원문의 형태와 어근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갈립니다. 기다리거나 괴로워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몸이 뒤틀리거나 진통하듯 고통받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뒤따르는 심장의 요동과 전쟁의 공포를 생각하면, 단순히 어떤 사건을 차분히 기다리는 모습보다는 극심한 고통에 사로잡힌 장면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레미야 자신의 탄식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잘 어울립니다. 다만 19절부터 21절까지의 말이 예레미야 개인의 탄식인지, 예언자가 유다 공동체의 고통을 대신 표현하는 것인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20절의 「내 천막들」은 화자가 공동체의 피해를 자신의 피해처럼 말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19–21절의 탄식에서 여호와야훼의 말씀으로 화자가 바뀌며, 이 장면은 예언자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됩니다.
「형체도 없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 창조가 거꾸로 돌아가는 환상
23절부터는 예레미야 4장에서 가장 장엄하면서도 두려운 환상이 펼쳐집니다.
내가 땅을 보니 형체도 없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하늘을 보니 빛이 없었습니다.예레미야 4:23 · 두루새김
여기에는 창세기 1:2와 직접적인 말의 연결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형체가 잡히지 않고 비어 있는 땅에 질서를 세우십니다. 빛을 있게 하시고, 물과 땅을 구분하시며, 식물과 동물과 사람이 살아갈 세계를 마련하십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장에서는 그 질서가 거꾸로 무너지는 듯한 모습이 등장합니다.
내가 산들을 보니 떨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언덕이 흔들렸습니다.예레미야 4:24 · 두루새김
산과 언덕은 보통 사람에게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지형으로 느껴집니다.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세계의 바탕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내가 보니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늘의 새들도 모두 달아났습니다.예레미야 4:25 · 두루새김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생명체들이 살도록 하십니다. 새들은 하늘을 날고, 사람은 땅 위에 살아갑니다(창세기 1:20–28).
생명으로 채워졌던 세계가 다시 비어 버립니다.
내가 보니 기름진 땅이 광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곳의 모든 성읍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그분의 타오르는 분노 앞에서 무너졌습니다.예레미야 4:26 · 두루새김
3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갈지 않은 땅을 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26절에서는 기름진 땅마저 광야로 변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마련된 땅이 다시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공간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네 번 이어지는 「내가 … 보니」
23–26절에는 「내가 땅을 보니」, 「내가 산들을 보니」, 「내가 보니」, 「내가 보니」라는 표현이 차례로 나옵니다. 이 반복은 독자가 예언자의 눈을 따라 황폐해진 곳들을 차례로 확인하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세상의 형체가 무너집니다.
그다음에는 단단한 지형이 흔들립니다.
이어서 생명체들이 사라집니다.
마지막에는 사람이 농사짓고 세웠던 모든 것이 황폐해집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창조가 단순히 거꾸로 되풀이되는 구조는 아닙니다. 그러나 창조 때 마련된 질서와 생명이 무너지는 모습을 일부러 떠올리게 합니다. 이를 흔히 창조의 역전 또는 탈창조의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실제로 우주 전체가 창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예언하고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직접 심판받는 대상은 유다와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심판을 창조 질서 전체가 무너지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주신 땅에서 여호와야훼를 거역하며 살아온 공동체가, 마침내 그 땅에서 삶을 이어 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절망적인 환상 뒤에 뜻밖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온 땅이 황무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완전히 끝장내지는 않겠다.」예레미야 4:27 · 두루새김
이 선언은 심판이 실제로 이루어지지만, 그 심판이 모든 가능성을 영원히 없애는 완전한 종말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만으로 구체적으로 누가 살아남고, 언제 어떻게 공동체가 회복될 것인지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28절은 이 선언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읽지 못하게 합니다.
「이 때문에 땅이 슬퍼하고 위의 하늘이 어두워질 것이다. 내가 말하고 뜻을 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 내 뜻을 거두지도 않겠다.」예레미야 4:28 · 두루새김
앞에서는 인간에게 돌아오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이 되돌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유다가 심판받는다는 사실과 그 심판이 완전한 끝은 아니라는 사실이 함께 선언됩니다. 이 장은 그 둘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심판은 실제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이 여호와야훼의 백성에 대한 모든 뜻을 끝내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2에서 땅의 상태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표현은 토후 바보후(תֹּהוּ)입니다. 예레미야 4:23에서도 정확히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형체도 없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로 옮겼습니다. 「완전히 끝장내지는 않겠다」는 말씀은 예레미야 5:18과 30:11에서도 반복되는 주제와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는 백성을 심판하시면서도 완전히 끝장내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18:7–10에서는 어떤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여호와야훼가 선언하신 재앙을 거두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4:28은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뜻을 바꾸실 수 없다는 일반적인 선언으로 읽기보다, 여기서 예고된 심판이 확실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버려진 성읍과 자신을 꾸미는 여자
29절에서 환상은 다시 구체적인 전쟁의 장면으로 돌아옵니다.
말을 탄 군인들과 활을 쏘는 군인들의 소리에 모든 성읍의 사람들이 달아났습니다. 사람들은 수풀 속으로 들어가고 바위 위로 올라갔습니다. 모든 성읍이 버려져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예레미야 4:29 · 두루새김
처음에는 튼튼한 성벽을 두른 성읍들로 들어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성읍에서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도망하는 방향이 뒤바뀐 것입니다.
한때 안전한 곳으로 여겼던 성읍이 더 이상 사람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30절에서는 갑자기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짓밟힌 예루살렘아, 이제 무엇을 하겠느냐? 진홍빛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꾸미고 눈화장으로 눈을 커 보이게 해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 헛되다. 너를 탐내던 자들은 너를 버렸다. 그들은 네 목숨을 노린다.」예레미야 4:30 · 두루새김
이 여자는 예루살렘을 사람처럼 표현한 모습입니다. 앞 장에서 유다는 다른 상대들을 찾아다니는 여자로 비유되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신들이거나, 자신이 의지하려던 외국의 강대국들이었습니다.
이제 그 관계가 무너집니다.
유다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상대들이 오히려 유다를 버리고 해치려 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여전히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습니다. 상대가 다시 자신에게 마음을 돌리게 하려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화장이나 장신구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미 자신을 죽이려는 상대에게 아름답게 보이려는 행동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4절에서는 마음의 포피를 벗겨 내라고 명령했습니다. 14절에서는 마음에서 악을 씻어 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30절에서 유다가 하고 있는 일은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을 꾸미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은 자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화려하게 꾸몄던 여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아이를 낳는 여자처럼 울부짖는 딸 시온
나는 아이를 낳는 여자 같은 소리, 첫아이를 낳는 여자의 괴로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딸 시온의 소리였습니다. 시온이 헐떡이며 두 손을 펼치고 말했습니다. 「아, 괴롭다! 나를 죽이려는 자들 때문에 내 목숨이 꺼져 간다!」예레미야 4:31 · 두루새김
아이를 낳는 것은 원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딸 시온이 외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기쁨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는 고통이 생명의 시작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처음에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은 마치 아이를 낳는 여자처럼 고통받으면서 자신의 목숨이 꺼져 간다고 외칩니다.
생명을 낳아야 할 자리에서 죽음의 공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 손짓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자신을 구할 능력이 없는 사람의 절박함을 전달합니다.
맺음 — 씨를 뿌리라는 말씀에서 마지막 울음소리까지
여호와야훼가 요구하신 것은 마음의 변화였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말씀을 듣지 않은 채 계속 자신들이 의지하던 것들에 기대었습니다. 다른 신과 다른 권력에 자신을 맡긴 공동체가, 결국 자신이 의지하던 것들에 의해 버림받고 위협받습니다.
예레미야는 재앙이 백성의 잘못된 길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백성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거나 그들의 멸망을 기뻐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읽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실패와 고통을 쉽게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정하거나, 그 고통을 자신의 옳음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대해 받은 말씀을,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재난에 곧바로 적용할 근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환상의 끝에서 예레미야가 마지막으로 듣는 것은 군대의 함성도, 무너지는 성벽의 소리도 아닙니다.
한 여자의 울음소리입니다.
딸 시온이 헐떡이며 두 손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녀는 한때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고 다른 상대들에게서 보호를 얻으려 했지만, 이제 그들은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4장은 이 절규 앞에서 멈춥니다.
여호와야훼는 이미 완전히 끝장내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있다고 해서 지금 시온이 겪는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은 회복의 미래로 서둘러 독자를 데려가지 않습니다.
갈지 않은 땅을 갈라는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사람이 살던 땅과 성읍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끝까지 보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남깁니다.
한때 예루살렘의 거리에는 여호와야훼께 돌아오라는 말씀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제 그 성읍에서는 딸 시온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아직 씨를 뿌릴 수 있었던 땅이 황무지가 되었고, 그곳에서 살아가던 사람이 두 손을 펼친 채 자신의 목숨이 꺼져 간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