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6–7장 · 하나님과 백성의 다툼

사라진 의인과 죄를 던지시는 하나님

미가서의 마지막 장은 텅 빈 포도밭에서 시작합니다.

수확은 끝났습니다. 포도송이는 보이지 않고, 처음 익은 무화과도 찾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 열매를 간절히 원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미가가 정말 찾고 있는 것은 포도나 무화과가 아닙니다.

그가 찾는 것은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미가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탄식합니다. 서로를 믿을 수 없고, 지도자들은 악한 일을 위해 협력하며,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믿음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텅 빈 밭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예언자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같은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처음에는 한결같은 사람이 어디 있는지 찾았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 어디 있는지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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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미가 7:1–2 본문 →

미가가 탄식했습니다. 「아, 내 신세야! 나는 여름 열매를 거둔 뒤에, 포도 수확이 끝난 뒤에 먹을 것을 찾는 사람과 같다. 먹을 포도송이가 하나도 없구나. 내 마음은 처음 익은 무화과를 간절히 바란다.」미가 7:1 · 두루새김

한쪽에는 수확이 끝나고 남은 열매가 있습니다. 다른 쪽에는 처음 익은 무화과를 향한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처음 익은 무화과는 기다리던 수확의 기쁨을 떠올리게 합니다. 반면 포도 수확이 끝난 뒤의 밭은 열매를 찾기 어려운 장소입니다.

원하는 것은 가장 좋은 열매인데, 눈앞에 있는 것은 이미 수확이 끝난 빈 밭입니다.

히브리어 첫 문장은 예언자가 수확 후 남겨진 열매와 같은 신세라는 뜻으로도, 열매를 찾으러 나온 사람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상황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수확이 끝난 뒤 먹을 것을 찾는 사람이라는 읽기를 따릅니다. 곧이어 나오는 「먹을 포도송이가 하나도 없구나」라는 말도 열매를 찾으려는 사람의 실망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그 열매가 무엇인지 밝혀집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는 이가 땅에서 사라졌고, 사람들 가운데 정직한 이가 없다. 모두 사람을 죽이려고 숨어 기다리며, 저마다 자기 형제를 그물로 사냥한다.」미가 7:2 · 두루새김

미가가 찾는 사람은 단순히 법을 어기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한결같이 행동하며 관계의 책임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 주던 한결같음과 올바름이 사라진 것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사냥하는 세상

2절 후반은 갑자기 폭력적인 장면으로 바뀝니다.

그물은 원래 짐승이나 물고기를 잡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붙잡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형제는 서로를 돌보고 보호해야 할 관계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붙잡아 이용하려는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사람은 더 이상 이웃에게 함께 살아갈 존재가 아니라, 기회를 보아 잡아야 할 먹잇감이 됩니다.

그리고 그 폭력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를 다음 절에서 보여 줍니다.

악을 위해 협력하는 사람들

미가 7:3–4 본문 →

「그들은 두 손으로 악한 일을 능숙하게 해낸다. 관리는 뇌물을 요구하고, 재판관은 뇌물을 받는다. 힘 있는 자는 마음에 품은 욕심을 말하고, 그들은 함께 그 일을 꾸민다.」미가 7:3 · 두루새김

사람들은 무능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능숙합니다. 그들은 악한 일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접근할 줄 알고, 재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움직일 줄 알며, 서로의 이익을 연결할 줄 압니다.

각자의 욕심과 부패한 행동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힘 있는 자가 원하는 바를 말하면, 관리와 재판관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협력합니다.

이것은 부패한 개인 몇 명의 문제가 아니라, 불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협력하고 있지만, 그 협력의 목적은 서로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데 있습니다. 함께 일한다는 사실 자체가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협력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가장 좋은 사람도 가시덤불 같다

4절은 이러한 사회의 결과를 또 다른 자연의 모습으로 그립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좋은 이도 가시덤불 같고, 정직한 이도 가시 울타리보다 못하다. 네 파수꾼들이 경고한 날, 곧 네가 벌받을 때가 왔다. 이제 그들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미가 7:4 · 두루새김

가시덤불은 열매를 얻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울타리 역시 보호하는 기능을 하지만 가시 울타리라면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을 찌릅니다.

예언자는 먹을 만한 열매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한 것은 열매 대신 가시입니다.

공동체를 지탱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상처를 줍니다.

원문에서 「네 파수꾼들이 경고한 날」은 해석이 갈리는 표현입니다. 파수꾼들이 미리 내다보고 경고한 날일 수도 있고, 지켜보는 이들 자신에게 심판이 닥치는 날일 수도 있습니다. 예언서에서 파수꾼은 위험을 살피고 경고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사용됩니다(에스겔 3:17; 33:7).

부패한 사람들은 서로 이익을 얻기 위해 능숙하게 협력했지만, 마침내 그들이 의지하던 질서가 무너집니다. 사람들을 속이고 이용하기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관계들이 공동체에 안정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가족 안에서도 말을 조심해야 하는 시대

미가 7:5–6 본문 →

4절까지는 사회 전체의 부패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시선이 가장 가까운 관계로 옮겨 갑니다.

「친구를 믿지 말고, 가까운 벗도 의지하지 마라. 네 품에 누운 아내 앞에서도 말을 조심하여라.」미가 7:5 · 두루새김

미가는 이것을 모든 시대의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지혜로운 생활 원칙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서로를 믿는 마음이 철저히 무너진 사회의 모습을 그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안전하게 나눌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낯선 사람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가족이나 가까운 벗에게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가가 그리는 사회에서는 그 마지막 공간마저 안전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의 「말을 조심하여라」에 해당하는 자리는 원문에서 입의 문들을 지키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입술을 문에 비유합니다. 말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입을 통해 나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문을 닫아 두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한 말조차 자신을 해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서 믿음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믿기 전에 그가 자신을 배신할 가능성부터 계산해야 합니다.

결국 모든 관계가 자신을 방어하는 관계로 바뀝니다.

6절에서는 그 모습이 가족 전체로 확대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기 때문이다. 사람의 원수가 바로 자기 집안사람들이다.」미가 7:6 · 두루새김

미가는 서로 다른 세대와 가족 관계를 나열합니다. 이것은 특정한 연령이나 성별이 다른 집단보다 더 악하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가족 안에서 기대되는 존중과 한결같음이 무너진 상황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집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돌아와 쉴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집 안에 원수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무너짐이 가장 가까운 관계까지 파고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예언자의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야훼를 바라보며」

미가 7:7 본문 →

「그러나 나는 여호와야훼를 바라보며, 나를 구원하실 하나님을 기다리겠다. 내 하나님께서 내 말을 들어 주실 것이다.」미가 7:7 · 두루새김

7절은 미가 7장의 첫 번째 결정적인 전환입니다.

미가는 갑자기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친구와 가족조차 믿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현실 속에서 자신이 누구를 바라볼 것인지 밝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바라보며」(⁨צָפָה⁩)와 「기다리겠다」(⁨יָחַל⁩)는 두 동사가 함께 사용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주의 깊게 바라보며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내 하나님께서 내 말을 들어 주실 것이다.」 이 말은 응답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때문에 기다립니다.

믿음은 모든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가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는 확신으로 나타납니다.

이 확신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더욱 어려운 시험을 받습니다.

죄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자기 편에 서시기를 기다리다

미가 7:8–10 본문 →

8절에서는 「나」의 목소리가 이어지지만, 그 성격이 조금 달라집니다.

시온의 목소리입니다. 「나의 원수야, 내 불행을 기뻐하지 마라. 나는 넘어졌어도 일어날 것이다. 내가 어둠 속에 앉아 있어도 여호와야훼께서는 나의 빛이시다.」미가 7:8 · 두루새김

이것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는 이 고백은 현재의 상황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구별합니다.

상황은 어둡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빛이십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셨는데, 어떻게 다시 변호자가 되시는가

9절에 이르면 더욱 뜻밖의 말이 나옵니다.

「내가 여호와야훼께 죄를 지었으니, 그분께서 내 편에서 다투시고 나를 위해 판결해 주실 때까지 그분의 분노를 견디겠다. 그분께서 나를 빛으로 이끌어 내실 것이고, 나는 그분의 의로움을 보게 될 것이다.」미가 7:9 · 두루새김

하나님은 자신을 심판하신 분인데, 동시에 자신을 위해 다투어 주실 분이기도 하십니다.

같은 하나님이 심판자이며 변호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죄에 대해 변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죄 때문에 자신들이 겪는 모든 고통을 적들이 마음대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는 사실과, 그들을 공격하고 조롱하는 적들까지 하나님이 판단하신다는 사실은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도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누군가가 그를 마음대로 짓밟을 권리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화자는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받아들이면서도, 마지막 판단은 하나님이 내려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로움」은 단순히 죄인을 벌하시는 엄격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올바르게 판단하시고, 자기 백성을 향한 한결같음을 드러내시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심판에서 나타나지만, 구출에서도 드러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고백에서는 두 가지가 함께 나타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야훼는 어디 계시느냐?」

10절에서는 원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내 원수도 이것을 보고 부끄러움에 휩싸일 것이다. 내게 『네 하나님 여호와야훼는 어디 계시느냐?』 하던 자다. 내 두 눈으로 그 원수를 볼 것이다. 이제 그자는 거리의 진흙처럼 짓밟힐 것이다.」미가 7:10 · 두루새김

이 질문은 단순히 하나님의 위치를 묻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말입니다. 시편 42편 3절과 10절에서도 고통받는 사람이 비슷한 조롱을 듣습니다.

현재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겪는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그들을 영원히 버리셨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10절 마지막에서 원수는 거리의 진흙처럼 짓밟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 이미지는 적대 세력이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그 원수는 하나님의 부재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시 일으키시면, 그 확신은 무너질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을 예언자 개인의 고백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절들에서 성읍의 회복과 다른 민족들의 부끄러움이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예루살렘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한 사람처럼 말하는 공동체의 고백으로 이해하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시온의 목소리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미가 6장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고발하셨습니다. 그런데 7장에서는 죄를 인정하는 백성이 하나님께 자기 소송을 맡아 달라고 기대합니다. 원문에서는 원수가 여성형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적대적인 도시나 민족이 여성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원수가 어느 나라나 도시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다시 세워지는 담과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

미가 7:11–13 본문 →

8–10절에서는 한 사람처럼 말하는 화자의 소망이 나타났습니다.

11절에서는 다시 회복의 날이 선포됩니다.

미가가 말했습니다. 「네 성벽을 다시 세울 날이 온다. 그날에는 네 경계가 멀리 뻗어 갈 것이다.」미가 7:11 · 두루새김

성벽을 포함한 방어 시설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거대한 도시 성벽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너졌던 경계가 다시 세워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네 경계가 멀리 뻗어 갈 것이다」라는 말은 해석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표현은 영토의 경계가 멀리 확장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을 제한하던 규정이나 명령이 멀어져 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땅의 경계가 넓어지는 읽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고, 이전보다 넓은 공간을 확보하는 회복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회복은 단순히 폐허가 된 도시의 건물을 다시 짓는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날에는 아시리아에서, 그리고 이집트의 성읍들에서 사람들이 네게 올 것이다. 이집트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바다에서 바다까지, 산에서 산까지 이르는 곳에서 올 것이다.」미가 7:12 · 두루새김

아시리아와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강력한 외부 세력으로 등장했던 나라들입니다. 원문에서 강이라고만 한 자리는 문맥상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산에서 산까지」는 특정한 경로를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넓은 지역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흩어졌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시온으로 모여드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두 움직임이 함께 포함된 것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온의 고립이 끝나는 방향으로 장면이 움직인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는 친구와 가족조차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먼 지역에서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시온을 둘러싸고 있던 단절이 새로운 만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회복의 약속 옆에 남아 있는 황폐함

그런데 13절은 갑자기 다른 말을 합니다.

「그 땅은 거기 사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의 행실이 맺은 열매 때문에 폐허가 될 것이다.」미가 7:13 · 두루새김

여기서 「그 땅」이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이스라엘이 죄 때문에 폐허가 되는 모습을 다시 언급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적대적인 민족들의 땅이 그들의 악행으로 폐허가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회복을 약속하신다는 사실이 인간의 악행을 아무런 결과 없이 지나가는 것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회복의 약속과 행실에 대한 심판이 나란히 놓입니다.

미가 7장은 먹을 열매가 없는 탄식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사람들의 행실에도 열매가 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바랐던 좋은 열매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악한 행위가 가져온 폐허라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한결같음의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자신의 행실이 가져오는 결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공동체가 다시 살아갈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미가는 다시 하나님에게 말을 건넵니다.

조금 더 깊이

「네 경계」에 해당하는 원문은 정해진 한계나 규정, 경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특히 미가 4장 1–2절에서는 많은 민족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우러 시온으로 몰려오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7장 12절의 장면을 그 환상과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절만으로 먼 곳에서 오는 모든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이동하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땅」에 해당하는 원문은 문맥에 따라 특정한 땅이나 더 넓은 세계를 가리킬 수 있으므로, 낱말만으로 어느 쪽인지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홀로 남은 양 떼를 돌보아 주십시오

미가 7:14–15 본문 →

백성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지팡이로 주님의 백성을 돌보아 주십시오. 주님께 속한 양 떼는 갈멜 한가운데 숲에서 홀로 살고 있습니다. 옛날처럼 바산과 길르앗에서 풀을 뜯게 해 주십시오.」미가 7:14 · 두루새김

14절에서는 예언이 기도로 바뀝니다.

목자의 이미지는 미가 5장에서 하나님이 세우실 통치자를 설명할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양 떼를 돌보아 달라는 요청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좋은 지도자가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결국 그들을 돌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지팡이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주님의 지팡이로 주님의 백성을 돌보아 주십시오」라는 표현은 목자가 양 떼를 인도하고 보호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팡이는 양 떼가 가야 할 길을 안내하고 위험에서 보호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요청하는 행동은 양 떼를 벌하거나 쫓아내는 일이 아닙니다.

돌보는 일입니다.

더욱이 그 양 떼는 「주님의 백성」, 「주님께 속한 양 떼」라고 불립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다시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백성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보다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계에 기대어 기도합니다.

갈멜과 바산과 길르앗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양 떼가 홀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고립되어 있거나, 충분히 넓은 풀밭을 누리지 못하는 처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산과 길르앗에서 풀을 뜯게 해 달라는 기도는 양 떼가 넉넉한 먹을거리와 안정된 삶을 누리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열매를 찾지 못하던 목소리가, 하나님께 그분의 백성을 먹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15절에서는 응답이 들립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나오던 날들처럼,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겠다.」미가 7:15 · 두루새김

미가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출애굽의 기억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것은 6장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운 행동들을 기억하라고 하셨던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단순히 옛날에 무엇을 하셨는지 기억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때처럼 다시 행동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희망은 과거가 다시 돌아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 그들을 구출하셨던 하나님이 여전히 같은 하나님이시라는 데 있습니다.

이 응답은 곧 민족들의 모습을 바꾸어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갈멜은 풍요로운 땅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지만, 히브리어 갈멜은 비옥한 들이나 경작지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절이 반드시 특정한 갈멜산의 한 장소를 가리키는지, 숲과 비옥한 들판이 함께 나타나는 지형을 묘사하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바산과 길르앗 두 지역은 요단강 동쪽의 목축과 관련된 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민수기 32장 1절에는 르우벤과 갓 자손이 길르앗과 야셀 땅을 살펴보고 가축을 기르기에 좋은 곳이라고 판단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산 역시 풍요로운 풀밭과 가축의 이미지로 성경에 등장합니다(신명기 32:14; 에스겔 39:18). 두루새김은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밝혀 이 말을 여호와야훼의 응답으로 옮겼습니다. 다만 원문에서는 말하는 이를 뚜렷하게 밝히는 표지가 없고, 「네가」와 「그에게」라는 인칭 변화가 있어 구체적으로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두 자리를 「너희가」와 「너희에게」로 옮겼습니다.

자기 힘을 자랑하던 민족들이 입을 가리다

미가 7:16–17 본문 →

백성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민족들은 그 일을 보고 자기들의 온갖 힘을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그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귀는 듣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미가 7:16 · 두루새김

민족들은 자신들의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의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출하시는 일을 보면서 그 힘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손으로 입을 가리는 이 몸짓은 놀라움이나 충격, 할 말을 잃은 침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욥기 40장 4절에서도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입에 손을 얹겠다고 말합니다. 또한 「귀는 듣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행동 앞에서 압도되어 듣고 반응할 능력을 잃는 모습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힘의 질서가 무너지는 광경 앞에서 침묵하게 됩니다.

17절은 그 굴욕을 더욱 강하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뱀처럼 흙먼지를 핥고, 땅을 기어 다니는 짐승처럼 떨며 요새에서 나올 것입니다.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 두려워 떨며 나아오고, 주님을 두려워할 것입니다.」미가 7:17 · 두루새김

뱀처럼 흙먼지를 핥는다는 이미지는 극단적인 굴욕과 낮아짐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3장 14절에서 뱀은 평생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을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미가의 표현도 땅에 엎드린 듯한 굴욕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새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동 앞에서는 그 요새도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튼튼하다고 생각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를 가리킨다고 읽으면, 민족들이 마침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그렇다고 이 두려움을 곧바로 모든 민족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예배하는 모습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한 민족들이 자기 힘을 부끄러워하며 두려워하는 모습이 중심입니다.

그러나 미가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세 절에서 시선은 민족들의 굴욕보다 더 깊은 곳으로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주님」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원문에서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흐름이므로 여호와야훼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이의 인칭과 가리키는 대상이 변하기 때문에 앞서 언급된 공동체와 연결하려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두루새김은 「주님」으로 옮겨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었습니다.

「주님 같은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미가 7:18 본문 →

「주님 같은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주님은 주님께 속한 남은 백성의 죄를 없애 주시고, 그들이 거역한 일을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를 영원히 품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미가 7:18 · 두루새김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를 없애 주시고 거역한 일을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그분은 죄를 무시하여 그것이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고 선언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죄를 실제로 다루시고, 그 죄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영원히 끊지 못하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미가서는 심판을 겪고도 남은 백성을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은 백성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이유가 그들 자신에게 죄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없애 주시고 거역한 일을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남은 백성은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들이어서 살아남았다고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며, 그 사랑 안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미가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가볍게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분이 자신의 분노를 영원히 품고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한결같은 사랑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미가 6장 8절에서는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7장 18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한결같은 사랑을 기뻐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기에 자기 백성에게도 그것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한결같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한결같은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미가서의 마지막 소망은 사람들이 마침내 충분히 믿음직해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사람들의 실패보다 깊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주님 같은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라는 표현은 예언자 미가의 이름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미가는 일반적으로 「누가 여호와야훼와 같은가?」라는 뜻을 지닌 이름의 줄임말로 이해됩니다. 책을 시작할 때 등장했던 예언자의 이름이 마지막에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 질문으로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이것이 저자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이용한 말놀이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표현 사이의 연결은 분명합니다.

죄를 굴복시키고 바다 깊은 곳에 던지시다

미가 7:19 본문 →

18절에서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이 선포되었습니다.

19절에서는 그 용서가 두 가지 생생한 행동으로 묘사됩니다.

「그분께서 다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희의 죄를 짓밟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남은 백성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실 것입니다.」미가 7:19 · 두루새김

죄는 단순히 장부에 기록된 잘못처럼 취급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적처럼 묘사됩니다. 이것은 용서가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잊는 일로만 표현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죄가 더 이상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누르는 이미지가 사용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적대적인 민족들만 제압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기 백성 안에 있는 죄도 짓밟으시는 분이십니다.

바다 깊은 곳에 던져진 죄

고대 이스라엘의 시적 상상력에서 바다의 깊은 곳은 사람이 쉽게 다가가거나 통제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무언가 그곳에 가라앉으면 인간의 힘으로 다시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진다는 표현은 죄를 완전히 없애는 일을 나타내는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이 장면은 출애굽의 기억과도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15장 4–5절에서 모세의 노래는 이집트의 병거와 군대가 바다에 던져졌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었다고 노래합니다. 미가 7장에서도 깊은 바다에 무언가가 던져집니다.

그러나 이번에 던져지는 것은 적의 군대가 아닙니다.

죄입니다.

이것을 출애굽기 15장의 직접적인 인용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미가 7장 15절에서 이미 이집트에서 나오던 날들의 놀라운 일을 다시 보여 주겠다는 말씀이 나왔다는 점에서, 두 장면을 주제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백성을 위협하는 적을 물리치는 일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백성 자신을 무너뜨리던 죄까지 없애는 일로 깊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원문에는 주목할 만한 인칭 변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두루새김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희의 죄를」처럼 자신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원문에서 「그들의 모든 죄」라고 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그 남은 백성의 모든 죄」로 옮겼습니다. 같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서로 다른 인칭으로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앞에 등장한 민족들까지 시야에 들어온다고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18절에서 「주님께 속한 남은 백성」이 언급되고, 20절에서 야곱과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으로 끝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대목의 중심에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신 백성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원문만으로 마지막의 「그들」을 반드시 모든 민족에게 넓혀 읽어야 한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이다

미가 7:20 본문 →

미가서는 마지막에 두 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님께서는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고, 아브라함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실 것입니다. 오래전에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입니다.」미가 7:20 · 두루새김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약속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12장 2–3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 7–8절에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사이에 언약을 세우시고, 가나안 땅을 그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28장 13–15절에서는 야곱에게도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주시며, 어디로 가든 함께하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가는 이제 그 오래된 약속을 다시 떠올립니다.

여기서 「하신 약속을 지키시고」로 풀어 옮긴 히브리어 에메트(⁨אֶמֶת⁩)는 진실함과 믿을 만함, 신실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두 표현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변함없이 지키시는 성품을 함께 드러냅니다.

미가서가 마지막으로 붙잡는 것은 백성이 이루어 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점에서 20절은 단순히 과거의 위대한 조상을 기념하는 말이 아닙니다. 현재의 실패를 넘어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근거를 밝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오래전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잊지 않으십니다.

미가서는 무엇을 마지막 말로 남기는가

미가 7:1–20 본문 →

미가서의 마지막 대답은 인간의 죄보다 하나님의 용서가 더 깊으며, 인간의 불성실함보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한결같음이 더 오래간다는 것입니다. 미가서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충분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인간의 불성실함보다 오래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영원히 죄인으로 몰아붙여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이 자신의 잘못을 가볍게 여기거나, 그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믿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잘못을 진지하게 인정하고, 가능한 자리에서 관계를 바로잡으려는 책임이 남습니다.

텅 빈 포도밭에서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을 찾지 못해 탄식하던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의 능력이나 자신의 의로움에서 마지막 희망을 찾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주님 같은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그리고 깊은 바다를 떠올립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던지실 곳입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던 죄들이 가라앉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이 오래전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