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3–7장 · 쉰두 날의 성벽 공사
성벽은 완성되었지만 남아 있는 틈
느헤미야 6장은 거의 승리의 순간에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에는 더 이상 무너진 틈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성벽이 마침내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공사가 완성에 가까워지자 적들의 행동이 뜻밖의 방향으로 바뀝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성벽을 무너뜨리려고만 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를 성벽에서 떠나게 하려고 합니다. 만나자고 초대하고, 반역을 꾀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마침내 예언자에게 돈을 주어 그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잘못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느헤미야 6장의 핵심은 성벽을 끝까지 세워 낸 성공만이 아닙니다. 성벽이 완성되어도 사람들의 두려움과 충성, 권력과 이해관계의 문제까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 서술자는 52일 만에 성벽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도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을까요?
「나는 큰 공사를 하고 있어서 내려갈 수 없습니다」
성벽의 틈이 사라지자 공격의 대상이 바뀝니다
내가 성벽을 쌓아 무너진 틈을 모두 메웠다는 소식이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우리의 나머지 적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다만 그때까지 성문에 문짝을 달지는 못했습니다.느헤미야 6:1 · 두루새김
성벽이 하나로 이어졌지만 모든 작업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적들이 느헤미야의 활동을 중단시키려 한다면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제 적들은 새로운 방법을 선택합니다.
산발랏과 게셈이 나에게 말을 전해 왔습니다. 「오노 평야의 마을들로 오십시오. 함께 만납시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해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느헤미야 6:2 · 두루새김
겉으로 보기에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외교적 제안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함께 만납시다」라고 말할 뿐, 공개적으로 위협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성벽을 세우는 사람들을 공격하여 공사를 중단시키려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일을 이끄는 느헤미야를 공사 현장 밖으로 끌어내려 합니다.
「큰 공사」는 자신의 위대함을 뜻하는가?
나는 그들에게 사람들을 보내 말을 전했습니다. 「나는 큰 공사를 하고 있어서 내려갈 수 없습니다. 내가 일을 놓고 여러분에게 내려가느라 공사를 멈추게 해서야 되겠습니까?」느헤미야 6:3 · 두루새김
그는 자신의 정치적 지위나 개인적인 성취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을 가리킵니다.
느헤미야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는 적들과 만나기 싫다는 감정만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 자리를 떠나면 공사가 중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 제시합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외부의 요청을 거부한 사람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페르시아 왕과 대화했고, 지방 관리들에게 편지를 전달했으며, 예루살렘의 귀족들과도 회의를 열었습니다.
오늘의 독자가 자신에게 불편한 말을 하는 사람을 모두 산발랏이나 도비야라고 부른다면, 오히려 본문의 핵심을 잃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느헤미야는 앞 장에서 자기 공동체 안의 가난한 사람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행동을 바꾸었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무시해야 할 방해가 아니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현실을 드러내는 목소리였습니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실제로 자신을 해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초대입니다.
네 번의 초대와 네 번의 거절
그들은 네 번이나 같은 말을 전해 왔고, 나는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느헤미야 6:4 · 두루새김
적들은 새로운 이유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도 매번 새로운 변명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는 만남을 거절하면서 상대방의 모든 의도를 낱낱이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대답은 공사를 떠날 수 없다는 이유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네 차례의 시도가 실패하자 적들의 방법이 달라집니다.
이번에는 만남의 제안에 정치적 위협이 더해집니다.
봉하지 않은 편지에 담긴 가장 위험한 소문
왜 편지를 봉하지 않았을까?
산발랏은 다섯 번째에도 같은 말을 전하려고 자기 시종을 보냈습니다. 시종은 봉하지 않은 편지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느헤미야 6:5 · 두루새김
고대에 중요한 편지를 봉인하는 것은 내용의 보호와 보낸 사람의 권위를 표시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봉하지 않은 편지는 내용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는 상태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부러 소문을 퍼뜨리기 위한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편지를 누가 읽었는지, 산발랏이 공개적으로 퍼뜨리라고 직접 지시했는지까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당신과 유다 사람들이 반역을 꾀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당신이 성벽을 쌓고 있다는 소문이 여러 민족 사이에 돌고 있습니다. 가스무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 소문에 따르면 당신은 그들의 왕이 되려 하고 있습니다.」느헤미야 6:6 · 두루새김
산발랏은 이 주장들을 자신이 직접 확인한 사실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여러 민족 사이에 소문이 돌고 있고, 가스무도 그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가스무는 앞에서 게셈으로 등장한 인물의 이름이 다른 형태로 적힌 것입니다. 편지에서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산발랏만의 주장이 아니라 다른 힘 있는 인물도 같은 말을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문은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가 아니라,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왜 하필 왕이 되려 한다고 했을까?
그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허락을 받아 유다로 왔습니다. 왕의 편지와 지원을 받고 성벽 재건을 진행했습니다(느헤미야 2:5–9).
그런데 이제 산발랏은 느헤미야가 바로 그 왕에게 반역하려 한다고 주장합니다.
왕의 허락을 받아 하는 공사가 왕에게 반역하기 위한 공사라는 것입니다.
특히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 한다는 비난은 단순한 개인적 욕심에 관한 소문이 아닙니다. 페르시아 왕이 임명한 지방 관리가 독립된 왕권을 세우려 한다는 혐의입니다. 그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면 느헤미야의 지위와 안전, 성벽 공사의 정당성까지 위협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 당신은 예언자들을 세워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두고 『유다에 왕이 있다!』 하고 외치게 했습니다. 이제 이 소문이 왕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십시오. 함께 의논합시다.」느헤미야 6:7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권과 예언자의 관계는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다윗이 왕이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사무엘상 10:1, 16:13), 아히야는 여로보암에게 왕국이 갈라진 뒤의 통치를 예고했습니다(열왕기상 11:29–39). 따라서 예언자가 왕권을 선포했다는 주장은 종교적인 권위까지 동원하여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한다는 혐의로 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6장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산발랏이 편지에서 주장한 내용입니다.
반역 소문을 전하면서 느헤미야를 도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왕에게 소문이 전해질 수 있다는 위협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만남에 응하도록 만들려는 것입니다.
소문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의 행동을 바꾸기 위한 압박 수단이 됩니다.
느헤미야가 길게 변명하지 않은 이유
느헤미야는 짧게 답합니다.
나는 산발랏에게 말을 전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혼자 지어낸 이야기입니다.」느헤미야 6:8 · 두루새김
여기서 느헤미야는 하나하나 반박하는 긴 문서를 작성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을 세운 적이 없다는 증인을 모으거나, 자신이 왕이 될 의도가 없음을 자세히 증명하는 장면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저들은 힘이 빠져 일을 그만두고, 공사는 끝나지 못할 거야」 하며 우리를 겁주려 했습니다. 나는 기도했습니다. 「이제 제 손에 힘을 주십시오.」느헤미야 6:9 · 두루새김
적들은 느헤미야가 두려움 때문에 일을 멈추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느헤미야가 구하는 것은 두려운 상황을 없애는 것보다, 두려운 상황에서도 맡은 일을 계속할 힘입니다.
이 짧은 기도에는 설명조차 붙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도 없고, 긴 이유도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는 더욱 교묘한 위협이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느헤미야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직접 요구하지 않습니다. 살고 싶다면 하나님의 집으로 피하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힘이 빠져」로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손이 약해진다는 말로, 일할 힘이나 의지가 꺾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원문에서는 「손」이 양쪽에 똑같이 등장합니다.
살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가라는 예언
위험을 피하라는 말이 왜 함정이 되었을까?
나는 므헤다벨의 손자이며 들라야의 아들인 스마야의 집에 갔습니다. 그는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집, 곧 성전 안쪽 건물에서 만나 그 건물의 문들을 닫읍시다.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러 오고 있습니다. 밤에 당신을 죽이러 올 것입니다.」느헤미야 6:10 · 두루새김
느헤미야에게는 실제로 적들이 있었습니다. 앞에서는 그를 해치려는 계획이 있었고, 정치적인 소문으로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느헤미야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경고를 무조건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과 거룩함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곳으로 피하라는 말은 신앙적인 권고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성전 안쪽에 들어가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대답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달아나겠습니까? 또 나 같은 사람이 성전 안쪽에 들어가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느헤미야 6:11 · 두루새김
한쪽에서는 성소의 거룩함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거절이 강조됩니다. 다른 쪽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책임을 버리고 달아나지 않겠다는 거절이 강조됩니다. 두 읽기를 반드시 완전히 분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스마야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가 내게 이런 예언을 한 것은 도비야와 산발랏이 그에게 돈을 주고 시켰기 때문입니다.느헤미야 6:12 · 두루새김
어떤 경로로 그 사실을 알아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몰래 알려 주었는지, 직접 증거를 확보했는지, 다른 방식으로 알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내가 겁을 먹고 그의 말대로 행동하여 죄를 짓게 하려고 스마야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나를 헐뜯고 내 이름을 더럽힐 구실을 얻으려 했습니다.느헤미야 6:13 · 두루새김
여기서 적들은 느헤미야를 실제로 죽이지 않아도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성전으로 달아나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그를 헐뜯을 구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발랏의 편지는 느헤미야에 관한 거짓 소문을 퍼뜨리려 했습니다. 스마야의 제안은 느헤미야가 실제로 잘못된 일을 하게 만들어 그 잘못을 헐뜯을 근거로 삼으려 했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일에서 물러나게 할 수도 있지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특히 스마야의 말은 하나님을 언급하고 성전을 안전한 장소로 제안한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겉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하나님에 관한 말을 사용했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말이 실제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인가, 그리고 그 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신명기 13:1–5는 종교적인 표징이나 예언자라는 권위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말은 그 종교적인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거부해야 합니다.
좋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어도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어야 했습니다(신명기 17:18–20). 자신이 맡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대로 바꿀 권한은 없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총독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를 넘어가면서까지 이루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큰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권리로 삼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중요한 것은 일을 완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일을 하나님 앞에서 옳은 방식으로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그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아추르는 붙들려 있거나 갇혀 있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지만, 누가 왜 그를 그렇게 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외부의 힘에 의해 갇혀 있었을 수도 있고, 스스로 집에 머물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정결상의 이유로 외출하지 못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두루새김이 「성전 안쪽 건물」로 옮긴 히브리어 헤칼은 성전 건물 또는 그 안의 성소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제안을 제사장이 아닌 느헤미야가 들어갈 수 없는 성전 내부로 피신하자는 말로 이해할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민수기 18:7에서는 제사장들에게 맡겨진 거룩한 일과 장소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권한 없이 접근하는 사람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기록합니다. 성전의 모든 구역이 일반인에게 금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스마야가 정확히 어느 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느헤미야의 「나 같은 사람이 성전 안쪽에 들어가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성전으로 숨어드는 행위 자체를 비겁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여기는 질문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한 사람들
나는 기도했습니다. 「저의 하나님, 도비야와 산발랏을 기억하시고 그들이 한 이런 일에 따라 갚아 주십시오. 저를 겁주던 여자 예언자 노아댜와 나머지 예언자들도 기억해 주십시오.」느헤미야 6:14 · 두루새김
앞 장의 마지막에서도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는 자신이 백성을 위해 한 일을 선하게 기억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5:19). 그런데 이번에는 도비야와 산발랏이 한 일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같은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구하지만, 기도의 방향은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이 기도에는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인물이 등장합니다. 여자 예언자 노아댜입니다. 이 장이 그에 관해 알려 주는 것은 매우 적습니다. 느헤미야를 겁주려 했던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지만, 그가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노아댜도 스마야와 같은 방식으로 돈을 받고 그런 일을 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가 여자 예언자였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구약에는 드보라와 훌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여자 예언자들도 등장합니다(사사기 4:4, 열왕기하 22:14–20).
느헤미야가 문제 삼는 것은 노아댜의 성별이 아니라, 그를 겁주려 했던 활동입니다.
예언자들까지 느헤미야를 겁주려는 일에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의 모든 활동을 하나씩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느헤미야는 그 모든 사람이 한 일을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맡기고, 이야기는 곧바로 성벽의 완성으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두루새김은 「그들이 한 이런 일에 따라 갚아 주십시오」라고 옮겼습니다. 원문에서는 이 표현이 가리키는 대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앞에 도비야와 산발랏 두 사람이 등장하지만 단수형 표현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어느 한 사람의 행동을 특별히 가리키는지, 두 사람이 한 일을 느슨하게 묶어 표현한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쉰이틀 만에 완성된 성벽
긴 명단과 갈등 끝에 나오는 짧은 완공 기록
성벽은 엘룰월 25일에 완성되었습니다. 공사를 시작한 지 52일 만이었습니다.느헤미야 6:15 · 두루새김
어떤 성대한 완공식이 있었는지, 느헤미야가 어떤 연설을 했는지, 백성이 어떻게 환호했는지는 이 절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날짜와 기간을 밝힙니다.
사람들은 각자 맡은 구간을 보수했습니다. 외부의 공격 가능성에 대비하여 무기를 들고 일했으며, 공동체 안의 경제적 불의도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벽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그 성취를 느헤미야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백성의 노동에만 돌리지 않습니다.
적들이 자신감을 크게 잃다
우리의 모든 적이 이 소식을 듣고, 우리 주변의 모든 민족이 완성된 성벽을 보고 자신감을 크게 잃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느헤미야 6:16 · 두루새김
이 장에서 산발랏과 도비야는 느헤미야와 유다 사람들을 겁주려 했습니다. 그런데 성벽이 완성되자, 이제 적들이 자신감을 크게 잃게 됩니다.
여기서 적들이 하나님을 믿고 회개했다거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예배하기 시작했다고까지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공사가 이루어졌다고 인정하게 되었다고 말할 뿐, 그들의 믿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까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와 백성이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바라며 감당했던 일을, 마침내 적들까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일로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이 완공 소식을 결말로 삼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엘룰월은 대체로 오늘날의 8~9월에 해당하는 달입니다. 원문에서는 자신의 눈에 자신이 작아졌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전까지 자신들이 더 강하고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성벽 완공이라는 결과 앞에서 자신들의 판단을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성벽이 완성된 뒤에도 오가는 편지들
적들은 성벽 밖에만 있지 않았다
그 무렵 유다의 귀족들은 도비야에게 편지를 많이 보냈고, 도비야도 그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느헤미야 6:17 · 두루새김
이것이 성벽 완공 이후 처음 생긴 관계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 무렵」이라는 표현은 성벽을 다시 세우던 시기에 이미 이렇게 편지가 오가고 있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세우는 동안 유다에서 힘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그를 반대하는 도비야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적들은 유다 공동체 내부와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성벽 바깥의 반대와 공동체 안의 관계를 완전히 나눌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혼인 관계가 만든 복잡한 충성
유다에는 도비야에게 맹세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도비야가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였고, 그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입니다.느헤미야 6:18 · 두루새김
느헤미야 3:4에서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은 성벽을 보수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3:30에서도 같은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또 다른 구간을 보수했습니다. 따라서 6:18의 므술람은 성벽을 다시 세우는 데 참여했던 그 사람과 같은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느헤미야를 반대했던 도비야의 아들이 성벽을 다시 세우는 데 참여한 유다 사람의 딸과 결혼한 것입니다.
본문은 므술람이 느헤미야의 정보를 도비야에게 전달했다거나 그와 함께 음모를 꾸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공사에 참여했다는 사실과 그의 딸이 도비야의 아들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줄 뿐입니다.
여기서 「도비야에게 맹세한 사람이 많았습니다」라는 말은 단순히 서로 알고 지냈다는 뜻보다 강합니다. 일정한 의무나 충성이 따르는 관계가 맺어져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그 맹세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 정치적 충성인지 경제적 의무인지, 가족 사이의 어떤 약속인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외부와 연결된 모든 관계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느헤미야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관계를 통해 실제로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을 방해하거나 위협을 가하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6장의 마지막 장면을 단순히 외부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말라는 교훈으로 줄여 읽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연결은 실제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같은 사람을 두고 서로 다른 이야기가 오가다
귀족들은 내 앞에서 도비야가 한 좋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내가 한 말은 도비야에게 전하곤 했습니다. 도비야는 나를 겁주려고 편지들을 보냈습니다.느헤미야 6:19 · 두루새김
여기서 귀족들이 느헤미야를 설득하려 했는지, 도비야와 느헤미야 사이에서 두 사람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하려 했는지, 실제로 도비야에게 충성하여 그를 도왔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본문은 각자의 동기를 모두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도비야가 실제로 아무런 좋은 일을 한 적이 없었다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그들이 말한 좋은 일들 때문에 느헤미야를 향한 위협이 정당해진다고 보아서도 안 됩니다.
느헤미야가 경험한 도비야와 귀족들이 말하는 도비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도비야는 호의를 베푼 인물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에게 그는 공사를 방해하고 자신을 겁주려는 인물이었습니다.
맺음 — 문이 달리기 전의 성벽과 완공 후에도 오가는 편지
느헤미야 6장의 첫 장면에는 틈이 메워진 성벽이 있습니다. 돌들은 서로 이어져 있지만 성문에는 아직 문짝이 달리지 않았습니다. 성벽에는 더 이상 무너진 틈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 성벽 안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6장의 결말이 성벽 완공 이후에도 이어지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다시 편지가 등장합니다.
유다의 귀족들과 도비야 사이에 편지가 오가고, 느헤미야가 한 말이 도비야에게 전달됩니다. 도비야는 여전히 느헤미야를 겁주려고 편지들을 보냅니다.
쉰이틀 만에 성벽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비야의 편지는 여전히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