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8–9장 · 함께 들은 율법

약속의 땅에서 종이 된 백성의 기도

느헤미야 9장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길게 되돌아보는 기도입니다. 창조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 출애굽, 광야, 가나안 정착, 사사 시대와 왕국의 역사를 차례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어디에 도착하는지 먼저 살펴보면, 지나온 역사를 다시 읽게 됩니다.

그들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 성벽도 다시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절기를 지키며 공동체의 삶을 회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종이라고 부릅니다.

이 기도의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신 사건이 나오고, 끝에는 그 땅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후손들의 현실이 나옵니다. 그 사이에 놓인 긴 역사는 하나의 질문을 향해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셨는데, 왜 그 약속을 받은 백성은 여전히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이 기도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난 역사를 되짚습니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셨는지, 자신들은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구별하여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긴 이야기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89장 본문 읽기 →

죄를 고백하기 전에 하나님을 찬양하다

느헤미야 9:1–6 본문 →

초막절을 지킨 뒤인 일곱째 달 24일,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 모였습니다.

이번에는 음식을 먹지 않고 자루옷을 입고 몸에 흙을 뿌렸습니다. 기쁨의 절기를 마친 뒤,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는 집회를 연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다른 민족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서 따로 나왔습니다」(2절).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와 책임을 고백하는 자리에 모였습니다. 2절은 그들이 「자기들의 죄와 조상들의 잘못」을 고백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다른 민족 사람들과 구별되어 섰다는 사실을 다른 민족 사람은 모두 부정하거나 열등한 존재라는 선언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이 특정한 참회 집회에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언약에 따른 자신들의 책임을 고백하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리에 서서 낮 시간의 4분의 1 동안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율법책을 읽었습니다. 또 4분의 1 동안은 죄를 고백하며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 엎드려 절했습니다.느헤미야 9:3 · 두루새김

기도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읽었다는 순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고백하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막연한 죄책감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율법 낭독이 끝난 뒤에야 모든 고백이 시작되었다는 엄격한 시간표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상당한 시간을 말씀 낭독과 고백과 경배에 바쳤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고백한 죄에는 자신들의 죄뿐 아니라 조상들의 잘못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조상들의 죄를 현재의 사람들이 자동으로 모두 떠안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는 자신들의 삶을 앞선 세대의 역사와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공동체가 지나온 길 전체를 돌아봅니다.

그런데 죄를 고백하는 이 집회의 첫 기도는 죄에 관한 말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레위 사람 예수아, 갓미엘, 바니, 하삽느야, 세레뱌, 호디야, 스바냐, 브다히야가 말했습니다.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십시오.」 이어서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은 모든 찬양과 찬송보다 높습니다.」느헤미야 9:5 · 두루새김

백성에게 하던 말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첫 내용은 이스라엘의 잘못도, 이스라엘의 고통도 아닙니다.

창조입니다.

「주님만이 홀로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주님은 하늘과 가장 높은 하늘과 그곳의 모든 군대, 땅과 그 위의 모든 것,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살아 있게 하시며, 하늘의 군대는 주님께 엎드려 절합니다.」느헤미야 9:6 · 두루새김

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려는 사람들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부터 이야기할까요? 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단지 자신들의 조상에게만 관계된 지역적인 신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셨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금도 살아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백성은 자신들의 실패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고백한 뒤, 그분 앞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바라봅니다.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느헤미야 9:7–15 본문 →

창조를 찬양한 기도는 곧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좁혀집니다.

「주님은 아브람을 택하신 하나님 여호와야훼이십니다. 그를 칼데아 사람들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느헤미야 9:7 · 두루새김

온 세계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이 선택은 창세기 12:1–3에서 시작되는 아브라함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그의 고향에서 불러내어 새로운 땅으로 인도하셨고, 그를 통해 많은 민족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7:5에서는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이 주님께 충실한 것을 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의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의로우시기에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셨습니다.」느헤미야 9:8 · 두루새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여기서는 약속을 성실하게 이루시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잊거나 뒤집지 않으셨습니다.

이 선언은 기도의 뒤쪽에 나오는 또 다른 고백과 대응합니다. 33절에서 백성은 자신들에게 닥친 고난에 대해 「주님은 의로우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셨을 때도 의로우셨고, 불순종한 백성이 고난을 겪게 되었을 때도 의로우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기도는 출애굽으로 향합니다.

「주님은 저희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겪던 고통을 보셨고, 갈대 바다에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느헤미야 9:9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출애굽기 3:7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백성의 괴로움을 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뒤로 하나님의 행동이 빠르게 이어집니다. 파라오에게 표징과 기적을 나타내셨고, 바다를 가르셨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출애굽의 구원을 바다를 건넌 사건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주님은 시나이산 위로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올바른 법과 참된 가르침, 좋은 규정과 명령을 주셨습니다.」느헤미야 9:13 · 두루새김

이집트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삶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게 된 백성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억압적인 명령들의 모음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올바른」 법, 「참된」 가르침, 「좋은」 규정과 명령으로 불립니다.

백성은 자신들이 고백하는 죄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전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말씀이 본래 좋은 것이었다고 인정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안식일을 그들에게 알려 주시고, 주님의 종 모세를 통해 명령과 규정과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느헤미야 9:14 · 두루새김

안식일은 단순한 종교적 규칙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5:12–15에서는 안식일의 근거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에, 그들 역시 종과 가축을 쉬게 해야 했습니다.

자유를 얻은 백성이 다른 사람에게도 쉼을 허락하도록 명령받은 것입니다.

이어지는 15절에서 하나님은 배고픈 백성에게 빵을 주시고 목마른 백성에게 물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그 말씀이 요구하는 삶을 살아갈 사람들의 몸에 필요한 것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은 약속의 땅으로 향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후손들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었고, 광야에서 인도받았으며, 마침내 땅을 차지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기억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다

느헤미야 9:16–21 본문 →

15절까지 반복되던 하나님의 선한 행동 뒤에 16절은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저희 조상들은 교만하게 굴었습니다. 고집을 세우며 주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느헤미야 9:16 · 두루새김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광야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듣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듣기를 거부하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고집을 세우고 주님께 반항하며, 다시 종살이로 돌아가려고 우두머리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너그러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쉽게 화를 내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이 넘치는 분이시기에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느헤미야 9:17 · 두루새김

여기서 문제는 지식의 부족만이 아닙니다. 이미 경험한 일을 기억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성경에서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머릿속에 보관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건이 현재의 삶을 어떻게 이끄는지 인정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경험했지만, 그 사건이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신뢰와 순종을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이 행동은 민수기 14:4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로 우두머리를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말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반역을 이야기하는 한가운데서 기도는 하나님에 관한 선언을 덧붙입니다.

17절의 「주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며」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34:6–7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성품을 선포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사건 이후에 자신의 성품을 밝히십니다. 느헤미야 9장도 곧이어 금송아지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 금속을 녹여 송아지 모양의 우상을 만들고, 『이것이 너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네 하나님이시다』 하고 말하며 주님을 크게 모욕했을 때에도,」느헤미야 9:18 · 두루새김

백성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을 다른 형상으로 나타내고, 그 형상에게 구원의 공로를 돌렸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신 분이 누구인지 왜곡한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은 문장을 끝맺지 않은 채 다음 절로 넘어갑니다.

「주님은 그들을 크게 불쌍히 여기셔서 광야에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 위에서 떠나지 않고 길을 이끌었으며, 밤에는 불기둥이 떠나지 않고 그들이 걸어갈 길을 비추었습니다.」느헤미야 9:19 · 두루새김

이 장면은 하나님의 자비가 마음속 태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잘못을 못 본 척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이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인도의 역사를 곧바로 중단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의 선한 영을 주셔서 그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먹을 주님의 만나를 끊지 않으셨고, 목마른 그들에게 물을 주셨습니다.」느헤미야 9:20 · 두루새김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단지 놀라운 능력을 주시는 분으로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일에 관여하십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30절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으로 예언자들을 통해 백성에게 경고하십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먹여 살리셔서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옷은 해어지지 않았고 발도 붓지 않았습니다.」느헤미야 9:21 · 두루새김

광야는 백성이 자신들의 생존을 스스로 보장할 수 없는 장소였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를 돌아보면 불순종과 원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9장의 기도는 그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버리지 않으시는 자비라는 관점에서 기억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의 「우두머리를 세웠습니다」에 해당하는 구절에는 전승과 해석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머리를 두다」라는 표현을 지도자를 세우는 것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역 가운데」라는 표현 대신 이집트를 뜻하는 표현을 읽는 고대 그리스어 전승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을 거부하고 이전의 종살이로 돌아가려 했다는 중심 의미는 분명합니다.

풍성한 땅에서 하나님을 잊다

느헤미야 9:22–26 본문 →

광야 이야기가 끝나자 기도는 땅을 차지한 역사로 넘어갑니다.

시혼과 옥의 땅을 얻고,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졌으며, 마침내 가나안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겠다고 하셨고(창세기 15:18–21), 그의 후손을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15:5). 22–24절은 그 두 약속이 후손들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들과 기름진 땅을 점령했습니다.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한 집들과 바위를 파서 만든 물 저장 구덩이들, 포도원과 올리브나무와 많은 과일나무를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어 살이 쪘으며, 주님께서 베푸신 풍성한 좋은 것들을 누렸습니다.」느헤미야 9:25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신명기 6:10–12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짓지 않은 좋은 집들과 파지 않은 우물, 심지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나무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풍요 속에서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느헤미야 9장은 바로 그 경고가 현실이 된 역사를 되돌아봅니다.

배부르고 살이 쪘다는 것은 여기서 단순히 건강한 삶을 누렸다는 뜻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기도는 풍성함을 누리던 사람들이 곧이어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맞서며, 주님의 율법을 내팽개쳤습니다. 그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려고 경고하던 주님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주님을 크게 모욕했습니다.」느헤미야 9:26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은 받아들이면서, 그것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은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 경고하던 예언자들까지 죽였다는 고백은 이 반역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드러냅니다. 이와 관련하여 열왕기상 19:10과 역대하 24:20–22에 예언자들이 박해받고 죽임당한 사건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기도가 보여 주는 문제는 풍요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과 그 열매는 좋은 것이었습니다. 25절은 그것을 분명히 「주님께서 베푸신 풍성한 좋은 것들」이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풍요를 누리면서 그 풍요가 어디에서 왔는지 잊어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광야에서는 자신들의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쉽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풍성한 밭과 가득 찬 집을 얻게 되자,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착각이 가능해졌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율법을 내팽개쳤습니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율법을 실수로 잊어버렸다는 뜻보다 강합니다. 원문에서는 율법을 등 뒤로 던졌다고 말합니다. 등 뒤로 던진다는 것은 더 이상 마주 보지 않겠다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앞에 두고 따르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말씀을 뒤로 밀어 놓았습니다.

고난과 구원이 반복되는 역사

느헤미야 9:27–31 본문 →

26절 이후 기도는 긴 역사를 빠르게 요약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적들의 손에 넘기시자 적들이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들이 고통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주님은 하늘에서 들으시고, 크게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구해 줄 사람들을 주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들을 적들의 손에서 구해 냈습니다.」느헤미야 9:27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사사기의 역사와 닮아 있습니다. 사사기 2:11–19는 바로 이러한 반복을 설명합니다. 느헤미야 9장의 기도는 그 역사를 한 번의 실패와 한 번의 회복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편안해지면 그들은 다시 주님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적들의 손에 버려두시자 적들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그들이 다시 주님께 부르짖으면, 주님은 하늘에서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거듭 구해 내셨습니다.」느헤미야 9:28 · 두루새김

고난이 끝나고 삶이 안정되었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께 충실한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기도는 인간의 불순종을 반복하여 보여 주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도 반복하여 말합니다. 같은 표현을 반복하는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의 성품을 강조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백성의 불순종이 반복될 때마다 그들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주님의 율법으로 돌아오도록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하게 굴며 주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주님의 법을 어겨 죄를 지었습니다. 그 법은 사람이 지켜 행하면 살게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등을 돌리고 고집을 세운 채 듣지 않았습니다.」느헤미야 9:29 · 두루새김

「그 법은 사람이 지켜 행하면 살게 되는 법입니다」라는 표현은 레위기 18:5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규정과 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면서, 사람이 그것을 행하면 그것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을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영원한 생명을 벌어야 한다는 뜻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레위기의 문맥에서 율법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규범입니다. 느헤미야 9장에서도 율법은 백성이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주어진 가르침으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삶의 길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6–17절에서 조상들은 고집을 세웠습니다. 29절에서도 후손들은 똑같이 고집을 세웁니다. 시대가 달라졌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거부하는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랜 세월 그들을 참아 주시고, 주님의 영으로 주님의 예언자들을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자, 주님은 그들을 여러 나라 민족들의 손에 넘기셨습니다.」느헤미야 9:30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돌이키도록 오래 기다리셨지만, 끝없는 불순종을 아무런 결과 없이 그대로 두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 가운데서도 마지막 말은 멸망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크게 불쌍히 여기셔서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너그러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느헤미야 9:31 · 두루새김

이 구절은 17절과 대응합니다. 광야에서 반역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여러 민족의 지배 아래 놓였을 때도 그들을 완전히 없애거나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충실했기 때문에 공동체가 보존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셨다는 사실과 그들이 여전히 심각한 고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함께 존재합니다. 바로 그 현실이 마지막 기도의 출발점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그들을 참아 주시고」라는 표현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인내가 지속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원문의 동사는 본래 끌거나 길게 늘이는 뜻을 지니지만, 무엇을 길게 하셨는지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래 참으셨다는 이해가 자연스럽지만, 벌을 미루시거나 자비를 오래 베푸셨다는 의미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제」 — 역사의 이야기가 오늘의 기도가 되다

느헤미야 9:32–35 본문 →

32절은 한 단어로 분위기를 바꿉니다.

「이제 저희 하나님, 위대하시고 강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 언약과 한결같은 사랑을 지키시는 하나님, 저희가 겪은 모든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아시리아 왕들의 시대부터 오늘까지 저희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조상들과 주님의 온 백성이 겪은 고통입니다.」느헤미야 9:32 · 두루새김

지금까지 기도는 주로 하나님과 조상들의 행동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행하셨고, 조상들은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셨고, 조상들은 다시 불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난을 하나님 앞에 내놓습니다.

그들은 고난의 역사를 아시리아 왕들의 시대부터 헤아립니다. 이것은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고 멸망한 역사(열왕기하 17장)와 이후 유다에 닥친 침략과 압박의 역사를 함께 돌아보게 합니다. 이후 바벨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무너졌으며, 포로에서 돌아온 뒤에도 유다 공동체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긴 역사를 자신들이 겪어 온 하나의 고난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고난이 실제로 크고 무겁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저희에게 닥친 모든 일에서 주님은 의로우십니다. 주님은 진실하게 행하셨으나, 저희는 악한 일을 했습니다.」느헤미야 9:33 · 두루새김

그들이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불의하게 행동하셨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의로우셨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고난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숨기지 않습니다.

34–35절에서는 그 고난의 책임을 더욱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조상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풍성한 좋은 것들과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 그분을 거역했다는 역사가 이제 현재의 고난을 설명하는 근거가 됩니다.

35절에서 백성은 조상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36절에서는 자신들이 「종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은 백성이 그분을 섬기지 않았고, 그 결과 이제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지배 아래에서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경험하는 고난은 단지 정치적인 독립을 잃었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누구를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지 잃어버렸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다만 느헤미야 9장의 고백을 오늘 누군가가 겪는 고난은 반드시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 자체가 의인의 고난을 다루는 욥기와 시편 등에서 그러한 단순한 인과관계를 문제 삼습니다. 이 장의 백성은 자신들의 특별한 언약 역사를 돌아보며 고난의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섬기다와 종이라는 표현은 같은 어근인 아바드(⁨עָבַד⁩)에서 나왔습니다. 이 어근은 섬기다, 일하다, 종으로 일하다는 뜻을 지닙니다.

약속의 땅에서 들려오는 두 번의 탄식

느헤미야 9:36–37 본문 →

「보십시오, 오늘 저희는 종입니다. 주님은 이 땅의 열매와 좋은 것들을 먹도록 저희 조상들에게 이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바로 이 땅에서 저희는 종입니다.」느헤미야 9:36 · 두루새김

「보십시오」라는 호소가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자신들의 현재 처지를 가리킵니다. 두 번째는 그 종살이의 장소를 가리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땅이라는 것입니다.

이 반복은 단순히 감정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의 모순을 하나님 앞에 드러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왔지만 그곳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저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왕들을 세워 저희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 땅의 수확물은 그 왕들에게 풍성하게 돌아갑니다. 그들은 저희 몸과 가축을 마음대로 다스립니다. 저희는 큰 고통 속에 있습니다.」느헤미야 9:37 · 두루새김

이때 「종」이라는 표현을 이집트에서의 강제노동과 똑같은 법적 신분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의 유다 공동체는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으며, 이 기도는 그들이 정치와 경제에서 다른 나라에 매여 있는 처지를 종살이라는 언어로 묘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놓인 끝나지 않은 역사

느헤미야 9:1–37 본문 →

기도는 이 질문에 대해 자신들의 죄와 조상들의 불순종이 그 원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으로 현실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결말은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는 것과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고난을 겪는 것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기도는 마침내 그들이 서 있는 땅을 다시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 조상들이 들어와 차지했던 땅, 한때 풍성한 열매를 누렸던 땅입니다. 그 땅에는 지금도 수확물이 풍성합니다. 밭은 열매를 맺고 가축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확물은 다른 왕들에게 돌아가고, 그 왕들은 백성의 몸과 가축을 마음대로 다스립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역사를 모르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역사를 하나님과 함께 기억한 다음,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현재를 가리킵니다.

「보십시오, 바로 이 땅에서 저희는 종입니다.」

느헤미야 9장은 이 호소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창조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세대를 지나온 긴 기도는, 마침내 약속의 땅에 서 있는 백성의 이 한마디 앞에서 멈춥니다.

「저희는 큰 고통 속에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