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14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바다가 달아나고 바위에서 물이 솟은 이유

바다가 사람을 보고 도망갈 수 있을까요? 산들이 숫양처럼 뛰어다닐 수 있을까요?

시편 114편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바다는 달아나고, 강물은 뒤로 물러서며, 산과 언덕은 양 떼처럼 뛰어오릅니다. 평소에는 움직이지 않거나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던 자연이 갑자기 전혀 다른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이유를 곧바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바다가 도망갔다고 이야기한 다음, 「바다야, 무슨 일이 있기에 달아나느냐?」 하고 바다를 향해 묻습니다. 독자도 같은 질문을 품게 됩니다. 바다는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달아났을까요?

그 대답은 마지막 두 절에서야 나옵니다. 자연을 움직이게 한 것은 이스라엘의 힘이나 모세의 능력이 아닙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그곳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는 또 하나의 변화가 숨어 있습니다. 바다는 물러나 길을 내주지만, 단단한 바위에서는 오히려 물이 솟아납니다. 같은 하나님 앞에서 물은 물러나기도 하고, 없던 곳에서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읽는 시간 14분소단락 6114편 본문 읽기 →

이집트에서 나온 백성이 하나님의 성소가 되다

시편 114:1–2 본문 →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야곱의 집안이 낯선 말을 쓰는 백성에게서 나올 때,시편 114:1 · 두루새김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출애굽으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건을 설명하는 방식이 특이합니다. 이집트에 내린 재앙도, 파라오와 모세의 대결도, 열 가지 재앙의 순서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두 문장은 같은 사건을 다른 표현으로 되풀이합니다. 첫 번째 문장은 이스라엘이 떠난 장소를 알려 주고, 두 번째 문장은 그들이 떠나온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낯선 말을 하는 백성」은 낯설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말 자체가 이집트 사람들의 언어나 민족적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이집트가 자신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백성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이집트가 이스라엘에게 어떤 곳이었는지 기억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종살이했고,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자유롭게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출애굽기 1:8–14). 그런데 시편은 그 모든 고통을 나열하는 대신, 낯선 말을 사용하는 백성에게서 나왔다는 한 문장으로 그들이 떠나온 세계를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들이 자유를 얻었고 광야로 나아갔으며 약속의 땅을 향해 출발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전혀 다른 대답을 들려줍니다.

유다는 그분의 거룩한 곳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그분이 다스리시는 곳이 되었습니다.시편 114:2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단순히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소가 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 되었습니다.

성소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특별한 건물이나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이 시편은 어떤 건물이 성소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성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장면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19:4–6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음을 다시 일깨우시며, 그들이 자신의 소유이자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단순히 억누르는 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속한 백성인가가 바뀌는 데 있었습니다.

파라오의 지배 아래 있던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살아가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바다가 물러나고 산들이 뛰는 이유는, 어느 민족이 단순히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소이자 그분께서 다스리시는 곳이 된 백성이 그분의 인도 아래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문에서는 2절이 그의 성소와 그가 다스리는 곳을 말하면서도, 그가 누구인지 아직 이름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하나님의 성소」와 「그분께서 다스리시는 곳」으로 옮겨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히 합니다. 출애굽기를 아는 독자는 원문을 읽어도 하나님을 떠올리겠지만, 원문 자체는 그분이 누구신지 밝히는 말을 뒤로 미룹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유다」와 「이스라엘」은 서로 대조되는 두 집단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나란한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유다가 성소이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라는 표현만으로 두 왕국의 정치적 분열이나 이 시편이 쓰인 때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다는 달아나고, 산들은 뛰어오른다

시편 114:3–4 본문 →

바다는 보고 달아났고 요단강은 뒤로 돌아섰습니다.시편 114:3 · 두루새김

이제 시편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을 간결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3절부터 자연이 살아 있는 등장인물처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바다가 봅니다. 그리고 달아납니다.

무엇을 보았을까요? 두루새김은 「그 모습」이라고 옮겼지만, 원문에는 본 것의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았다고 할 수도 있고,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 모습을 보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 생략이 오히려 시적인 효과를 만듭니다. 무언가를 본 바다가 갑자기 도망갔습니다. 독자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집니다.

본문이 가리키는 바다는 출애굽기 14장의 바다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군대의 추격을 받을 때 하나님은 바닷물을 갈라 백성이 지나갈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4장은 바닷물이 갈라지고 물러나는 과정을 서술하지만, 시편 114편은 바다가 도망갔다고 말합니다. 바다는 더 이상 단순한 자연물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보고 물러서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이어지는 요단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장면은 여호수아 3:14–17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멈추고, 백성이 마른땅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건 사이에는 오랜 시간이 있습니다. 바다를 건넌 것은 이집트를 떠난 직후였고, 요단강을 건넌 것은 광야 생활을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였습니다. 시편은 서로 다른 시기의 사건들을 한 절에 나란히 놓습니다. 시간 순서대로 역사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사건의 공통된 의미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때도 물이 길을 내주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물이 길을 내주었습니다.

출발과 도착의 양쪽에서, 사람이 건널 수 없었던 물의 경계가 열렸습니다.

산들은 숫양처럼, 언덕들은 어린 양처럼 뛰었습니다.시편 114:4 · 두루새김

바다는 달아났습니다. 요단강은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러나 산과 언덕은 뜁니다.

숫양과 어린 양은 크기가 다릅니다. 따라서 큰 산과 작은 언덕을 서로 다른 크기의 짐승에 짝지어 보여 주는 표현이 됩니다. 그런데 산과 언덕이 양처럼 뛰어오른다고 말하는 순간, 움직이지 않는 자연이 살아 있는 동물처럼 바뀝니다. 평소에는 굳게 자리를 지키던 산들이 몸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출애굽기 19:18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내려오셨을 때 산 전체가 크게 떨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움직이실 때 온 자연이 반응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산들은 두려워서 뛰는 것일까요? 아니면 기뻐서 뛰는 것일까요? 히브리어 라카드(raqad)는 뛰거나 뛰어오르는 움직임을 나타내며, 춤추는 모습을 묘사할 때도 사용됩니다. 동물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고, 압도적인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땅이 요동하는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산들의 감정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바다는 제자리에서 물러나고, 강물은 흐르던 방향을 거스르며, 산과 언덕은 고정된 자리에서 뛰어오릅니다. 하나님의 행동 앞에서 평소에는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경계와 움직임이 달라집니다.

자연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요? 시인은 그 이유를 즉시 말하는 대신, 자연을 향해 직접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14편은 시내산이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여러 산과 언덕을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시내산이 흔들린 일만을 가리키는 정확한 역사적 묘사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다에게 묻는 질문 — 무엇을 보았기에 달아났는가

시편 114:5–6 본문 →

바다야, 무슨 일이 있기에 달아나느냐? 요단강아, 왜 뒤로 돌아서느냐?시편 114:5 · 두루새김
산들아, 왜 숫양처럼 뛰느냐? 언덕들아, 왜 어린 양처럼 뛰느냐?시편 114:6 · 두루새김

앞에서는 자연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자연을 향해 직접 말을 겁니다. 마치 바다와 강, 산과 언덕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대합니다.

시인은 처음에 사건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독자에게 그 사건의 이유를 묻게 합니다. 바다가 갈라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바다가 왜 갈라졌는지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다가 갈라졌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셨으며, 요단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는 공동체의 기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익숙한 사건을 낯설게 만듭니다. 바다가 도망갔다고 이야기하면서, 마치 처음 보는 일인 것처럼 이유를 묻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에게 왜 바다를 건넜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모세에게 어떻게 바다를 갈랐느냐고 묻지도 않습니다.

바다 자체에게 묻습니다.

출애굽의 이야기가 단지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서 일어난 정치적 해방 사건으로만 남지 않게 됩니다. 그 사건은 바다와 강과 산들까지 반응하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그려집니다.

시편은 모세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의 이야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지팡이를 들고 손을 내밀며, 백성을 인도합니다. 그러나 시편 114편은 그를 이야기의 전면에 세우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역할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을 구원하신 분이 궁극적으로 누구인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질문은 네 번 이어지지만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원문에서 지금까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던 분을 드러냅니다.

땅아, 주님 앞에서 떨어라

시편 114:7 본문 →

땅아, 주님 앞에서 떨라,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시편 114:7 · 두루새김

여기서 질문의 대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시인은 「바다가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평범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시 명령을 사용합니다. 앞에서는 바다와 강, 산과 언덕이 움직였습니다. 이제는 땅 전체가 부름을 받습니다.

시인은 바다가 본 대상을 직접 보충하지 않지만, 7절에 이르면 그 움직임의 이유가 주님의 임재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다가 물러선 것도, 강이 뒤로 물러선 것도, 산들이 뛰어오른 것도 주님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절에서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라는 표현이 한 번 더 이어집니다. 시인은 모든 자연이 반응하는 분을 막연한 신적인 힘이나 이름 없는 초월적 존재로 남겨 두지 않습니다.

그분은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1절에서 「야곱의 집안」이 이집트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7절에서는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땅이 떨도록 요청받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들은 야곱의 집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바다와 강과 산이 움직이게 하신 분은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이름은 출애굽기 3:6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출애굽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신이 우연히 이스라엘을 도와주신 사건이 아닙니다. 조상들과 관계를 맺으셨던 하나님이 그들의 후손을 위해 행동하신 사건입니다.

자연이 움직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크기 때문이지만, 그 능력이 역사 속에서 나타난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은 이 능력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바다를 물러서게 하신 하나님이 이번에는 바위에서 물을 솟게 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떨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훌리(ḥuli)는 몸이 흔들리거나 뒤틀리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문맥에 따라 떨거나 몸부림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춤추듯 움직이는 의미와 연결될 여지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주님 앞에서 땅이 요동하는 모습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움직임을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뛰던 산들은 기뻐한 것이고, 이제 땅은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두 감정을 명확하게 나누어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주님 앞에서」는 문자적으로는 주님의 얼굴 앞에서, 곧 그분의 임재 앞에서라는 의미입니다.

물을 물러서게 하시는 하나님, 바위를 물로 바꾸시는 하나님

시편 114:8 본문 →

바위를 연못으로, 부싯돌을 물 솟는 샘으로 바꾸시는 분.시편 114:8 · 두루새김

이것은 출애굽기 17:1–7과 민수기 20:2–13에 나오는 광야의 물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물이 부족해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고, 백성은 그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8:15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광야를 돌아보면서, 그분이 단단한 바위에서 물을 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바다와 강을 묘사한 방식과 비교하면 뜻밖의 대조가 드러납니다.

바다에서는 물이 물러났습니다.

바위에서는 물이 솟아났습니다.

앞에서는 물이 사라져야 사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물이 나타나야 사람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다 앞에 섰을 때 물은 건너갈 수 없는 장벽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이르렀을 때 물은 없어서는 안 되는 생명의 조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자연을 자신의 능력 아래 굴복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 필요한 길과 생명을 마련하시는 분입니다.

부싯돌은 단단한 돌입니다. 물이 쉽게 흘러나올 것 같은 물질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단단한 돌이 「물이 솟는 샘」으로 바뀐다고 말합니다. 바다에서는 물이 가득하던 곳에 길이 생겼고, 바위에서는 물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샘이 생겼습니다.

구원은 사람을 위험한 곳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다를 건너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그들을 해방하신 뒤 광야에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만나를 주셨고(출애굽기 16장), 물을 공급하셨습니다(출애굽기 17장).

이러한 공급이 언제나 이스라엘의 훌륭한 태도에 대한 보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백성은 물이 없다고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물을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백성이 충분히 믿음을 보여 주었을 때만 작동하는 상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이 연약하고 필요한 것이 부족하며 때로는 불평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행동하십니다.

출애굽은 자연을 이긴 사건인가,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하신 사건인가

시편 114:1–8 본문 →

시편 114편을 전체적으로 보면 자연이 움직이는 모습이 매우 강렬하게 남습니다. 바다는 달아나고, 강은 뒤로 물러서며, 산은 뛰어오르고, 땅은 떱니다. 그러나 시편은 자연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출애굽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이끄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자연 전체를 무대로 불러냅니다.

야곱의 집안은 강력한 자연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했고, 바다 앞에서는 길이 막혔으며, 광야에서는 물이 없어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그들의 힘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속하신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 바다보다 강했던 것이 아닙니다. 바다가 물러선 것은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바위에서 물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물이 나온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가 우리 앞의 모든 장애물이 기적적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도 모든 세대의 모든 어려움이 같은 방식으로 해결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노래를 통해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서, 그 길을 열어 주신 분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많은 물이 길을 막았고, 마지막에는 물이 너무 적어 생존이 위태로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상황 모두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동하십니다.

시편은 그중 마지막 장면, 단단한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는 모습을 남긴 채 끝납니다. 사람들은 그 물을 마셔야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은 그들의 능력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다가 달아난 이유도, 바위에서 물이 솟은 이유도 마침내 한곳에서 만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