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2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누구의 말이 세상을 움직이는가
시편 12편에는 두 종류의 말이 등장합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듣기 좋은 말로 속이며, 자신의 혀를 자랑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을 아무도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혀로 이길 것이다.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다. 누가 우리의 주인이냐?」
그런데 시편 한가운데서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립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신음하니, 이제 내가 일어나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말로 이기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다른 사람을 속이고 억누르는 데 사용됩니다. 반면 하나님은 자신이 일어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폭력에 짓눌린 사람들을 안전한 곳에 두시겠다는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시편 12편은 이 대조를 단순히 참말과 거짓말의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은 권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상처받고, 속임을 당하고, 폭력에 노출됩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기 말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시편은 뜻밖에도 악한 사람들이 여전히 사방을 돌아다닌다는 말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고 확실하다면, 왜 거짓말을 하는 악한 사람들은 아직도 활개 치고 있을까요?
시편 12편은 그 긴장을 그대로 남겨 두면서, 어떤 말이 끝까지 믿을 만한지를 보여 줍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사라진 세상
여호와야훼여, 구해 주십시오. 참으로 충실한 이가 더는 없고 사람들 가운데 믿을 만한 이들이 사라졌습니다.시편 12:2 · 두루새김
시편은 설명 없이 구해 달라는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원수들이 공격하고 있다는 설명도 없고, 어떤 재난이 닥쳤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시인은 먼저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유가 독특합니다. 한결같이 충실한 사람이 더는 없고, 믿을 만한 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나쁜 사람이 많아졌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서로 믿으며 살아갈 수 있는 관계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결같이 충실한 사람」(חָסִיד)과 「믿을 만한 이들」(אָמַן)은 서로 가깝지만 완전히 같은 표현은 아닙니다. 「한결같이 충실한 사람」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나타내는 말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 한결같이 충실하거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믿을 만한 이들」은 한결같이 충실하고 믿을 만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 두 표현을 함께 읽으면 시인이 무엇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고, 약속과 관계에서 충실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실제로 사회 전체에서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는 통계적인 설명일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겪는 도덕적 붕괴를 탄식의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과장이라고 가볍게 넘길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생기는 근본적인 불안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함께 살아가려면 다른 사람의 말을 어느 정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약속하면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어야 하고, 어려울 때 도움을 구하면 상대방이 자신의 약점을 악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말은 더 이상 관계를 이어 주는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속이고 지배하는 도구가 됩니다.
시인은 바로 그 모습을 다음 절에서 설명합니다.
입술은 하나인데 마음은 둘이다
저마다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고 아첨하는 입술로 두 마음을 품고 말합니다.시편 12:3 · 두루새김
시인이 묘사하는 악은 낯선 사람에게만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적대자들만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거짓말을 합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조차 말이 진실한지 믿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단순히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고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입술로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다고 말합니다.
매끄러운 입술
「듣기 좋은 말」은 기본적으로 매끄럽거나 부드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말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모든 거짓말이 거칠고 공격적인 말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거짓말은 상대방을 칭찬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겉으로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목적은 그 사람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잠언 26:28은 아첨하는 입이 파멸을 가져올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잠언 29:5에서도 이웃에게 아첨하는 일을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행동에 비유합니다. 그 말이 진실한 관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 될 때, 부드러운 말도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고 말한다는 것
히브리어 원문은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를 베레브 바레브, 문자적으로 「마음과 마음으로」라는 표현으로 씁니다. 원문에서는 마음이 두 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이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입니다.
그는 입으로는 한 가지를 말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합니다. 아첨은 입술에 나타난 모습이고, 두 마음은 그 말이 나오는 내면의 상태입니다.
문제는 단순히 말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말과 마음을 일부러 분리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첫머리에서 믿을 만한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탄식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관계 속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말과 마음이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에서는 그 일치가 무너져 있습니다.
예레미야 9:4–8에서도 비슷한 사회가 묘사됩니다. 사람들은 이웃을 속이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며,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해칠 계획을 세웁니다. 시편 12편 역시 사람들이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사회, 그래서 말 자체를 믿기 어려워진 사회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자신들의 말하는 능력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보여 줍니다.
「누가 우리의 주인이냐?」
여호와야훼가 아첨하는 모든 입술과 큰소리치는 혀를 끊어 버리시기를 빕니다.시편 12:4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께 강한 심판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사람의 몸을 문자 그대로 훼손해 달라는 요청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이 바로 앞에서 문제 삼은 것은 거짓말과 아첨, 그리고 말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그 입술과 혀를 끊어 달라는 기도는 거짓되고 거만한 말의 힘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도록 해 달라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듣기 좋은 말로 속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거만한 말을 합니다. 자신의 힘과 권위를 과시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두 말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매이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악한 사람들은 스스로 그 의도를 밝힙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 혀로 이기겠다.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다. 누가 우리 주인이냐?」시편 12:5 · 두루새김
혀로 이기겠다는 사람들
「이길 것이다」(גָּבַר)는 강하게 만들거나 우세하게 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참인지를 밝히기 위해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진실하게 소통하기 위해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기기 위해 말합니다.
여기서 말은 승패를 결정하는 무기가 됩니다.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실한 설득이든 속임수이든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다」라는 문장은 단순히 말할 자유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맥에서 그들은 이미 거짓말과 듣기 좋은 말을 통해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술은 자신들의 것이므로 누구도 자신들을 다스릴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말에 대해 다른 누구에게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주인」은 주인이나 지배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 위에 어떤 주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입술이 자기 것이라는 사실과, 그 입술로 한 행동에 대해 아무에게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들이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고발합니다.
그런데 시편은 그 질문에 긴 설명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말을 듣고 일어나시는가
여호와야훼가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이 짓밟히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신음하니 이제 내가 일어나겠다. 안전한 곳을 애타게 바라는 이를 내가 그곳에 두겠다.」시편 12:6 · 두루새김
시편 12편의 중심이 되는 절입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거짓말을 했고, 입술로 듣기 좋은 말을 했으며, 자신들의 혀를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분의 발언을 그대로 들려줍니다. 사람들의 거짓된 말로 가득했던 공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옵니다.
「이제 내가 일어나겠다」
「이제」는 바로 지금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왜 일어나십니까? 자신의 이름이 모욕당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먼저 나오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인이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단순히 권위를 과시하시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는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억눌리고 신음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은 앞부분을 새롭게 보게 만듭니다. 이 시에서 거짓된 말은 단순히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언어 습관이 아닙니다. 약한 사람들을 해치는 사회적 악과 연결됩니다.
악한 사람들의 말은 시끄럽고 자신만만합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신음입니다. 그들은 긴 연설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변호하는 능숙한 말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단지 신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신음 때문에 일어나십니다.
사람들은 가장 큰소리로 말하는 자가 이기는 세상을 만들려 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힘없는 사람의 신음을 행동의 이유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말의 크기나 화려함에 따라 누구의 말을 들을지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자기 목소리를 충분히 낼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들으십니다.
안전한 처지에 두시겠다는 약속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단순히 일어나시겠다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안전한 곳」은 구원이나 구출, 안전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씀하시겠다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안전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바라는」은 안전을 바라는 사람의 바람으로도, 그 사람을 향한 악한 사람들의 멸시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이 폭력에 짓눌린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신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말은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한 사람을 강한 자의 폭력에서 구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시인은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요? 바로 다음 절이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가 바라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피아흐 로는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처럼 안전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의 숨결이나 바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누군가가 그 사람을 향해 거만하게 콧김을 내뿜거나 멸시하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앞의 읽기는 하나님이 사람이 바라는 안전을 주신다는 뜻이고, 뒤의 읽기는 악한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사람을 보호하신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거짓된 입술과 일곱 번 정제된 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깨끗한 말씀, 땅 위 도가니에서 녹여 일곱 번 정련한 은과 같습니다.시편 12:7 · 두루새김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은에 비유합니다.
은은 땅에서 얻은 상태 그대로 언제나 순수한 것은 아닙니다. 불순물이 섞여 있을 수 있으며, 녹이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없앱니다. 은을 거듭 깨끗하게 하여 불순물을 없애듯,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아무런 거짓이나 속임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함이나 충만함을 나타내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이 문맥에서도 실제로 은을 녹이고 다듬는 과정을 정확히 일곱 차례 반복했다는 기술적인 설명보다는, 불순물이 완전히 제거된 순수함을 강조하는 시적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은에 비유하는가
여기서 시의 앞부분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사람들은 입술로 듣기 좋은 말을 했습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듣기 좋은 말이지만, 그 속에는 다른 마음이 있었습니다.
반면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불순물을 없앤 은과 같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말은 사람을 속이기 위해 실제 의도를 감춥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이 행하시려는 일을 진실하게 드러냅니다.
특히 여기서 순수하다고 선언되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바로 앞 6절에서 들려주신 「이제 내가 일어나겠다」는 약속과 연결됩니다. 시인은 그 약속이 믿을 만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면, 그 말에는 악한 사람들의 아첨처럼 숨겨진 다른 의도가 없다는 뜻입니다.
시편 18:30도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다고 고백하고, 잠언 30:5 역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순수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시편 12편의 직접적인 문맥에서는 무엇보다 고통받는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여호와야훼의 약속이 거짓 없는 말씀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성경의 사본이나 번역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해졌는지에 관한 직접적인 설명으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전달 과정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시인이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의 진실함과 믿을 만함입니다.
사람의 말에는 속임이 섞여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합니다.
그리고 이제 시인은 그 말씀을 믿고 다시 하나님께 직접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도가니」로 옮긴 말은 드물게 사용되는 표현이어서 정확한 형태와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은을 녹이고 다듬는 그릇이나 시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뒤의 「땅 위의」라는 말이 그 시설의 구조를 설명하는지, 불순물을 없앤 은의 상태를 묘사하는지에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또 3절에서는 사람들이 두 마음으로 말한다고 했고, 7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곱 번 깨끗하게 한 은」과 같다고 합니다. 원문에 나오는 두 숫자가 반드시 의도적인 대칭 구조를 이룬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구절의 이미지는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이런 이해는 이사야 55:10–11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입에서 나가는 말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를 지켜 주실 것인가
여호와야훼, 당신은 그들을 지키시고 그를 이 세대에게서 영원히 보호하실 것입니다.시편 12:8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이 안전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은 뒤, 보호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첫 문장에서는 「그들을」 지키신다고 말하고, 두 번째 문장에서는 「그 사람을」 보호하신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원문도 첫 동사에는 남성 복수 목적어가, 두 번째 동사에는 남성 단수 목적어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시는가, 사람들을 지키시는가
첫 번째 가능성은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말씀을 지키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 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다고 했으므로, 하나님이 그 말씀을 보존하신다는 의미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7절에서 「말씀」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여성 복수형인데, 8절의 「그들을」은 남성 복수형이어서 가장 자연스러운 문법적 연결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하나님이 앞에서 언급한 가난한 사람들을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안전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8절은 그 약속에 대한 시인의 응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복수형은 고난받는 사람들 전체를, 단수형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을 대표적으로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만 히브리어 원문만으로 두 목적어가 반드시 같은 집단을 가리킨다고 확정하거나, 다른 읽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해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시인이 믿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가 「이 세대」보다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대」라는 표현
「이 세대」는 시편 앞부분에서 묘사한 거짓과 아첨, 교만이 널리 퍼진 시대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문맥입니다. 처음에 시인은 한결같이 충실한 사람과 믿을 만한 이들이 사라졌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약한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영원히」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이 말은 고난받는 사람이 앞으로 어떤 위험도 겪지 않으며 죽음도 맞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뜻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고백하는 것은 이 거짓된 시대가 하나님의 보호를 무효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한결같은 충실함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약속은 악한 사람들의 거짓말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편의 마지막 절은 독자가 기대하지 않았던 현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인역은 이 절의 두 목적어를 모두 「우리를」로 옮깁니다. 이는 보호의 대상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로 이해하는 오래된 읽기를 보여 줍니다. 두루새김도 「그들을」과 「그 사람을」로 복수와 단수를 구별합니다. 두 번째 목적어를 사람으로 풀어 쓰면서도, 복수에서 단수로 바뀌는 점은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런데 악인들은 여전히 사방을 돌아다닌다
사람들 가운데 비열함이 높임을 받을 때면 악한 이들이 사방에서 돌아다닙니다.시편 12:9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이 고난받는 사람들을 보호하실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에는 악한 사람들이 멸망하고 거짓말이 사라진 세상이 묘사될 것처럼 기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 이런 결말인가
「비열한 짓」은 비천함, 경멸스러움, 가치 없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드문 단어를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열한 짓이 사람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습니다.
악한 사람은 어느 사회에나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행이 칭찬받고, 그 방식이 성공의 수단으로 인정받으며, 그들이 존중받는 자리에 오른다면 사회의 가치 판단 자체가 뒤집힌 것입니다.
여기에는 시의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하는 긴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믿을 만한 이들이 사라졌다고 탄식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악한 사람들이 사방을 돌아다닌다고 말합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이 일어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세상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했다는 뜻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이미 해결되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을 좋게 꾸미지 않습니다. 거짓된 말이 가득하고, 비열한 짓이 높임을 받으며, 악한 사람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그대로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고난받는 사람들을 지키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두 문장은 서로를 지우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절은 6절의 「이제 내가 일어나겠다」는 말씀을 더욱 절실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나서셔야 할 이유가 끝까지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이 무너뜨린 세상을 하나님은 말씀으로 돌보신다
시편에서 말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이고, 동시에 정의의 문제입니다.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하는 질문은 누가 자신의 말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가 하는 질문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인간이 본받아야 할 훌륭한 말의 모범이 아닙니다. 인간의 말이 서로를 향한 믿음을 무너뜨린 세상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이 다시 의지할 수 있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시편 12편의 첫 장면에서 시인은 믿을 만한 이들이 사라졌다고 탄식합니다. 사람들은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고, 입술로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혀로 이기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 화려하고 거만한 말들 사이에서 전혀 다른 소리가 들립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신음입니다.
그 신음은 악한 사람들의 자랑처럼 크게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움직일 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신음 때문에 일어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시편의 마지막에 악한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사방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그 세상에 악한 사람들의 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과 전혀 다른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혀로 이기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야훼는 고난받는 사람을 안전한 곳에 두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약속을 믿으며 「여호와야훼, 주님은 그들을 지키실 것입니다」 하고 기도합니다.
시편은 거짓된 말들이 사라진 조용한 세상이 아니라, 여전히 악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거리에서 끝납니다.
그 거리에는 아직도 듣기 좋은 말로 속이는 입술과 거만한 말을 하는 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마지막 말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일어나시겠다고 말씀하신 여호와야훼의 약속이 그곳에 함께 있습니다.
시인이 믿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목소리가 아니라, 가장 힘없는 사람의 신음에 응답하시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