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25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흔들리지 않는 산과 굽어지는 길
시편 125편은 흔들리지 않는 산으로 시작해서 굽은 길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영원히 제자리를 지키는 시온산이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자기 길을 벗어나 어디론가 끌려가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사이에는 의로운 사람들이 몫으로 받은 땅 위에 자리 잡으려는 악의 지팡이가 놓여 있습니다.
이 세 장면을 함께 읽으면 시편의 중요한 질문이 드러납니다. 누가 끝까지 제자리에 머물고, 무엇이 결국 떠나야 합니까?
첫 두 절은 매우 든든한 약속처럼 들립니다.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시온산처럼 흔들리지 않으며,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을 둘러싼 산들처럼 자기 백성을 둘러싸고 계십니다.
그런데 3절에 이르면 뜻밖의 말이 나옵니다. 악의 지팡이가 의로운 사람들이 몫으로 받은 땅 위에 계속 머물지는 않을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악의 지팡이가 지금은 그들의 땅 위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는 뜻 아닙니까? 여호와야훼가 백성을 둘러싸고 계신다면, 어떻게 악이 그들 위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시인은 하나님의 보호를 악이 전혀 접근하지 못하는 상태로 그리지 않습니다. 악이 존재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그 압력 아래 놓일 수 있으며, 심지어 그들 자신이 악한 일에 손을 뻗을 위험까지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위험을 느끼지 않아서도, 본래부터 강한 사람들이어서도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마지막으로 결정하시는 분이 악의 지팡이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둘러싸고 계신 여호와야훼이기 때문입니다.
앞선 시편 124편이 덫에서 벗어난 공동체의 구원을 노래했다면, 125편은 그 백성이 무엇을 의지하며 굳게 설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시온산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 신뢰가 얻는 자리
오름의 노래.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이들은 시온산과 같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머무는 산입니다.시편 125:1 · 두루새김
시인은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나무나 강이나 새에 비유하지 않습니다. 산에 비유합니다. 그것도 아무 산이 아니라 시온산입니다.
산은 사람과 달리 쉽게 자리를 옮기지 않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그곳에 서 있습니다. 사람들이 산을 오르내리고, 그 주변에서 여러 일이 벌어져도 산 자체는 제자리를 지킵니다.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사람들」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은 복수형이지만, 이어지는 「흔들리지 않고」(מוֹט)와 「제자리를 지킵니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단수형(יָשַׁב)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연결을 「그 산은」이라고 밝혀 옮겼습니다.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먼저 설명하기보다, 시온산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 주고 그 모습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뢰를 마음속의 확신이나 감정으로 이해합니다. 불안하지 않은 마음, 흔들리지 않는 결심,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시편은 의지하는 사람의 마음속을 직접 그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시온산은 이스라엘에게 단순한 지형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자기 이름을 두시고 자기 백성과 관계를 맺으시는 장소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시편 48:1–3은 시온을 하나님의 도성으로 찬양하고, 시편 132:13–14는 여호와야훼가 시온을 자신의 거처로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온산의 모습은 단순히 산이 단단하다는 자연의 특징만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함께 계시고 선택하신 장소라는 의미도 함께 지닙니다.
시인은 의지하는 사람들이 자기 능력으로 산처럼 단단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를 의지하기 때문에 시온산처럼 굳게 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역사적으로 결코 함락되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하 25:1–10은 실제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일을 기록합니다. 산을 통해 표현되는 영원함과 역사 속 도시의 운명은 구별해야 합니다. 시편의 관심은 산이 지질학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지, 도성이 전쟁에서 언제나 승리하는지에 있지 않습니다. 의지하는 백성이 무엇을 바탕으로 굳게 서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의지하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삶에 흔들리는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의지하는 분이 변하지 않으신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다음 절에서 다른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4:10과도 의미 있는 연결이 생깁니다. 그곳에서는 산들이 옮겨지고 언덕들이 흔들릴 수 있어도, 여호와야훼의 한결같은 사랑과 평화의 언약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시편 125편은 산의 단단함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를 설명합니다. 이사야 54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산조차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의지해야 할 것은 피조물의 단단함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에게 신실하신 여호와야훼라는 것입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 보호의 위치가 바뀌다
예루살렘 둘레에 산들이 있고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백성 둘레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계십니다.시편 125:2 · 두루새김
1절에서는 시온산 하나가 등장했지만, 2절에서는 시야가 넓어집니다. 이제 시인은 예루살렘을 둘러싼 여러 산을 바라봅니다.
예루살렘은 산악 지형에 자리한 도시입니다. 동쪽에는 올리브산이 있으며, 다른 방향에도 골짜기와 능선이 이어집니다. 시인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해 여호와야훼와 그의 백성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원문에서는 「둘레에」(סָבִיב)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두루새김에서도 「둘러싸고 있습니다」와 「둘러싸고 계십니다」로 같은 모습이 이어집니다. 두 문장은 거의 같은 공간적 구조를 이룹니다. 산과 예루살렘의 관계가 곧 여호와야훼와 그의 백성의 관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1절에서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시온산과 같았습니다. 그들 자신이 흔들리지 않는 산에 비유되었습니다. 하지만 2절에서는 그들이 보호받는 예루살렘의 자리에 놓이고, 여호와야훼가 그 둘레의 산들에 대응하십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의지하는 사람들이 굳게 서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그렇게 설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드러납니다.
백성이 시온산처럼 굳게 서 있을 수 있는 까닭은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둘러싸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산들은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새롭게 쌓아 올리는 성벽이 아닙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 산들은 이미 그 자리에 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보호를 이런 모습에 빗댑니다.
이 비유에서 여호와야훼는 위기가 발생한 뒤에야 먼 곳에서 달려오시는 분으로 그려지지 않으십니다. 이미 자기 백성을 둘러싸고 계시는 분입니다.
1절에서는 시온산이 영원히 제자리를 지킨다고 했고, 2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지금부터 영원히」 백성을 둘러싸고 계신다고 합니다. 공간에서 굳게 서 있는 모습이 시간 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보호와 연결됩니다. 시인이 말하는 보호는 한순간의 도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백성이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며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산들이 있다고 해서 모든 적의 접근이 차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여러 차례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의 비유는 현실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까?
바로 다음 절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보호를 고백하면서도 악한 지배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지배가 왜 영원히 계속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악의 지팡이는 계속 머물지 못한다 — 의로운 사람의 손까지 지키시는 하나님
참으로 악의 지팡이는 의로운 이들이 받은 몫 위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 의로운 이들이 악한 일에 손을 뻗지 않습니다.시편 125:3 · 두루새김
이 절은 시편의 중심에 놓인 가장 날카로운 선언입니다.
앞의 두 절이 산과 도시를 이야기했다면, 이제 지팡이와 사람의 손이 등장합니다. 먼저 「악의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원문의 셰베트(שֵׁבֶט)는 막대기나 지팡이를 뜻하지만, 다스리는 힘이나 권위를 상징하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악의 지팡이는 단순히 개인이 휘두르는 폭력의 도구라기보다 악한 지배나 권세를 가리키는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지팡이가 놓이는 자리는 「의로운 사람들이 몫으로 받은 땅」입니다. 「몫」에 해당하는 원어(גּוֹרָל)는 본래 제비를 뜻하며, 제비뽑기를 통해 결정된 몫이나 나누어 받은 몫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표현을 「몫으로 받은 땅」으로 옮겼습니다. 실제로 악한 통치자가 그들의 땅을 장악한 상황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은 구체적인 영토나 지배자를 밝히지 않으므로, 의로운 사람들에게 주어진 삶의 영역에 악한 권세가 미치는 상황까지 담은 표현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중요한 것은 악의 지팡이가 의로운 사람들이 받은 몫에 계속 머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쉬거나 머무르거나 자리 잡는다는 뜻을 지닙니다. 악의 지팡이가 의로운 사람들이 받은 몫 위에 영원히 자리 잡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시온산은 영원히 제자리를 지킵니다. 그러나 악의 지팡이는 그곳에 계속 머물 수 없습니다.
시인은 악이 의로운 사람들의 삶에 전혀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악이 잠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현실과, 그 지배가 영원하지 않다는 소망을 함께 말합니다.
시인은 악한 통치가 오래 지속되면 의로운 사람들이 고통받기 때문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악한 일에 손을 뻗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은 시편의 관심을 바깥의 적에게서 의로운 사람들 자신에게로 돌립니다.
악한 지배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까지 바꿀 수 있습니다. 불의한 질서가 오랫동안 계속되면 사람들은 그 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의한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압박받을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불이익을 받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이익을 얻는 상황이 계속되면, 의로운 사람들조차 자신의 손을 더럽히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은 바로 이 위험을 바라봅니다.
「악한 일에 손을 뻗지 않게」라는 표현은 의로운 사람들이 마음으로만 악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악한 일에 참여하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이제 여호와야훼의 보호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더 분명해집니다.
여호와야훼는 단지 자기 백성이 악한 자들에게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들이 악한 지배 아래에서 결국 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지키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바깥의 위협에서 생명을 보호하는 일과 마음과 행동의 의로움을 지키는 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서 시편 125편은 의로운 사람들을 지나치게 완벽하게 그리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들도 압력이 오래 지속되면 악한 일에 손을 뻗을 위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그 위험을 사람들의 의지력만으로 이겨 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의 지팡이가 영원히 머물지 않도록 하시는 여호와야훼의 보호를 바라봅니다.
물론 이것을 모든 악한 지배가 정해진 짧은 기간 안에 반드시 끝난다는 역사적 예측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는 그 기간도, 해방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방식도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인은 억압이 끝나는 시점을 알려 주기보다, 악한 권세가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히 지배할 최종적인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믿음의 확신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시의 어조가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보호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는 직접 여호와야훼께 기도합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49:10에서도 유다와 관련하여 통치자의 지팡이가 언급됩니다. 「몫」에 해당하는 말은 여호수아 14:2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이 땅을 나누어 받는 방식과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이 절의 관심은 구약 전체에서 반복되는 주제와도 연결됩니다. 출애굽기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억압에서 해방하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어떤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곧바로 이어집니다. 레위기 19장에는 이웃을 향한 정의와 정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거룩한 삶의 요구가 등장합니다. 억압에서 벗어나는 일과 남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 일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바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해 주십시오 — 약속이 기도가 되다
여호와야훼여, 선한 이들에게, 마음이 곧은 이들에게 선을 베풀어 주십시오.시편 125:4 · 두루새김
앞의 세 절만 보면 이 시편은 확신으로 가득한 노래처럼 보입니다. 의지하는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고, 여호와야훼는 그들을 둘러싸고 계시며, 악의 지팡이는 그들이 몫으로 받은 땅 위에 계속 머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노래를 끝내지 않습니다.
이미 여호와야훼가 백성을 지키신다고 확신한다면, 왜 다시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까?
이 기도는 앞선 확신이 현실을 외면하는 낙관론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시인은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지만, 동시에 그 보호가 지금 자신들의 삶에 나타나기를 구합니다.
확신과 간구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시편에서는 확신이 기도의 근거가 됩니다.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을 둘러싸고 계시기 때문에, 시인은 그분께 좋은 일을 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선한 사람들」이라고 말한 다음, 곧바로 「마음이 바른 사람들」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두 표현은 서로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선하다는 것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거나 겉으로 선한 행동을 보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마음이 바른 상태와 연결됩니다.
「마음」은 성경에서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의지, 판단과 선택이 이루어지는 내적 중심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마음이 바르다는 말은 그 사람의 중심이 비뚤어지지 않고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의로운 사람들이 악한 일에 「손」을 뻗지 않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제 4절에서는 그들의 「마음」이 바른 것이 중요합니다. 손은 사람이 실제로 행하는 일을 보여 주고, 마음은 그 행동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드러냅니다.
시인은 악에 가담하지 않는 행동뿐 아니라, 그 행동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방향에도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을 선한 사람들이 자기 공로로 복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는 공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인간의 선함을 보상의 근거로 계산하는 대신, 좋은 일을 해 주시는 여호와야훼께 직접 간구합니다.
이 기도는 공동체가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지도 드러냅니다. 악한 지배가 끝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지배 아래 살아온 사람들이 마음과 행동에서 올바름을 지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마지막 절에 등장시킵니다.
바른 마음과 굽은 길 — 누가 이스라엘의 평화를 누리는가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제 굽은 길로 빗나가는 이들을 악을 저지르는 이들과 함께 끌고 가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기를.시편 125:5 · 두루새김
4절에는 마음이 바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5절에는 굽은 길로 빗나가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시인은 여기서 단순히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서로 다른 두 집단으로 나누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는지를 길의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원문에서 「굽은 길」(עֲקַלְקַל)에 해당하는 말은 굽거나 뒤틀린 것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문맥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길을 비뚤어지게 만드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바른 마음은 여호와야훼를 향한 올바른 방향을 나타내고, 굽은 길은 그 방향에서 벗어나는 삶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단지 어떤 사람이 원래부터 악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자기 길을 굽게 만들며 벗어나는 행동을 그립니다. 이들은 3절에서 우려했던 일을 실제로 선택하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악한 일에 손을 뻗지 않기를 바라는 시인의 걱정과, 굽은 길로 빗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다만 본문은 이들이 모두 원래 의로운 사람이었다가 타락한 사람들이라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이들을 공동체 안에서 올바른 길을 떠난 사람들로 이해할 여지는 있지만, 그들의 이전 상태를 구체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 단순히 이스라엘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결말을 맞는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시인이 처음부터 흔들리지 않는다고 선언한 대상은 무조건적인 모든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 절은 그 신뢰가 삶의 방향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를 의지한다는 말과 자기 뜻대로 굽은 길을 선택하는 삶이 아무런 모순 없이 공존할 수는 없습니다.
1절에서 의지하는 사람들은 시온산처럼 제자리를 지킵니다. 그러나 5절에서 굽은 길로 향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지 못하고 끌려갑니다. 이 시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누가 굳게 서 있고 누가 자기 자리를 잃는지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문은 그들이 정확히 어디로 끌려가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특정한 유배지나 죽은 뒤의 형벌로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시인의 관심은 이동할 장소보다 그들이 누구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되는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경고로 시편을 끝내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짧은 축복을 덧붙입니다. 이 결말은 앞의 경고와 어떻게 연결됩니까?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단지 전쟁이나 충돌이 없는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문맥에 따라 평안함, 온전함, 안정된 삶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시편 125편에서 평화는 특별히 두 가지 문제와 연결됩니다. 하나는 바깥에서 공동체를 억누르는 악한 지배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압력 아래에서 공동체 사람들이 스스로 악한 일에 가담하거나 굽은 길로 빗나가는 문제입니다.
시인은 악의 지팡이가 더 이상 의로운 사람들이 몫으로 받은 땅을 지배하지 못하고, 마음이 바른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선하심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악한 일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그 악에서 아무런 결과 없이 보호받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마지막의 평화는 악을 그대로 둔 채 모든 갈등이 덮이는 평화로 읽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의 평화는 여호와야훼의 보호와 정의가 함께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2:13–15에서도 바른 길을 버리고 어두운 길로 향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그들의 길은 굽어 있다고 그려집니다. 길의 방향은 단순한 이동 경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과 선택을 나타냅니다. 또 마지막 절은 시편 122:6–9의 예루살렘을 위한 평화의 기도와 연결됩니다. 그 시편에서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하며 성 안의 평안과 공동체의 안녕을 바랍니다. 시편 125편은 그 평화가 악한 지배와 굽은 삶의 길이라는 문제를 외면한 채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무엇을 붙드는가
시편 125편을 다시 돌아보면, 처음과 끝 사이에 중요한 변화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굳게 서 있다는 사실이 이야기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면 그렇게 서 있는 삶은 사람의 행동과 마음, 삶의 방향이라는 윤리적 문제와 연결됩니다.
신뢰는 자신이 결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의 압력과 자기 마음의 약함을 알면서도, 여호와야훼의 보호와 선하심을 의지하며 올바른 길을 붙드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를 의지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바로 그 여호와야훼를 의지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마음과 삶을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인의 눈앞에는 여전히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도시 둘레로 산들이 이어져 있고, 그 안에는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 악한 권세의 압력을 받으며, 때로 자기 길을 굽게 만들 위험에 놓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힘보다 더 큰 보호가 필요합니다.
시인은 그 도시를 바라보며 산들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고백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지금부터 영원히 자기 백성을 둘러싸고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