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27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집을 짓는 사람과 잠을 주시는 하나님

시편 127편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한 두 장면이 등장합니다. 앞부분에는 집을 짓고, 성을 지키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뒷부분에는 자녀를 얻은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그는 젊을 때 낳은 아들들과 함께 성문에서 원수들을 마주합니다.

건축과 노동에 관한 교훈을 하다가 갑자기 자녀의 복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이 시편의 가장 중요한 연결을 놓치게 됩니다.

시인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안전하고 든든하게 세우려 할 때, 무엇이 정말 그 삶을 지탱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사람은 집을 짓고 성벽을 지키며 미래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고해도 자신이 세운 모든 것을 스스로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까지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 줄 것처럼 보이는 자녀들조차, 시인은 인간이 만들어 낸 성과가 아니라 여호와야훼께 받은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편에서 여호와야훼의 일과 인간의 일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들의 활동을 없애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수고가 어디에서 의미를 얻는지 다시 묻습니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2절은 인간의 수고와 여호와야훼의 일하심을 대조합니다. 3–5절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자녀를 통해 한 가정의 미래와 보호를 이야기합니다. 앞선 시편 126편이 눈물로 씨를 뿌리는 사람의 수고와 장차 거둘 기쁨을 노래했다면, 127편은 그 수고 자체가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읽는 시간 15분소단락 6127편 본문 읽기 →

여호와야훼께서 집을 짓지 않으시면 — 인간의 수고가 헛되어지는 때

시편 127:1 본문 →

오름의 노래. 솔로몬의 시. 여호와야훼께서 집을 짓지 않으시면 집 짓는 이들이 애써도 헛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지키는 이가 깨어 있어도 헛됩니다.시편 127:1 · 두루새김

시인은 두 가지 활동을 나란히 놓습니다. 하나는 집을 짓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성을 지키는 일입니다.

집을 짓는 사람은 아직 없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경비병은 이미 있는 것을 잃지 않도록 지킵니다. 무엇인가를 이루는 일과 이룬 것을 보호하는 일은 삶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활동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두 활동 앞에 똑같은 조건을 붙입니다.

본문에는 실제로 집을 짓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애쓰고 있습니다. 성에도 경비병이 있으며, 그는 깨어서 지키고 있습니다. 시인은 건축이 불필요하다거나 경비병이 없어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수고가 성공적인 결과를 반드시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원문에서 세 번 반복되는 낱말은 헛됨, 공허함, 성과 없는 수고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두루새김은 1절에서 두 번 「헛수고입니다」로, 2절에서는 「헛됩니다」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헛수고」는 건축이나 경계 활동 자체에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일하심을 떠나 인간의 노력만으로 결과를 확보하려 할 때, 그 수고가 목표를 이루지 못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첫 번째 문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집을 짓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집의 돌과 나무를 쌓는 사람은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문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성을 지키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밤을 새우며 경계하는 사람은 경비병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활동과 인간의 활동을 같은 문장 안에 놓습니다. 집을 짓는 사람의 수고가 있다고 해서 여호와야훼의 일하심이 필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여호와야훼께서 일하신다고 해서 건축하는 사람의 수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집과 성을 선택했을까요? 집은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공간이고, 성은 그 집들을 포함하는 더 넓은 공동체의 공간입니다. 시인은 가장 작은 생활의 울타리에서 더 큰 사회적 울타리로 시야를 넓힙니다.

더 중요한 연결은 사무엘하 7:11–13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여호와야훼를 위한 집을 세우려 하지만, 여호와야훼는 오히려 다윗에게 집을 세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한 집을 세우려는 생각과 하나님이 사람의 집안을 세우시겠다는 약속이 서로 맞물리는 것입니다.

시편 127편 역시 비슷한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끝내 집을 세우는가요?

원문의 바이트(⁨בַּיִת⁩)는 건물로서의 집뿐 아니라 가족이나 집안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1절에서는 「집을 짓는 사람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건축물의 이미지가 직접적입니다. 그러나 3절부터 자녀들이 등장하면서 이 집의 이미지는 가족과 세대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넓어집니다.

첫 절에서 사람은 집을 짓습니다. 마지막 절에 이르면 그 집에서 자란 자녀들이 성문에서 가족을 지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시편에는 「솔로몬의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열왕기상 6장에서 성전을 건축한 왕으로 등장하며, 열왕기상 9:15에서는 여러 건축 사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집을 짓고 성을 지키는 장면은 솔로몬의 삶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표제가 솔로몬이 직접 썼다는 사실을 확정하는 것은 아니며, 본문이 구체적으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일찍 일어나 늦게야 쉬는 사람들 — 하나님이 주시는 잠

시편 127:2 본문 →

그대들이 일찍 일어나고 늦게야 쉬며 고생 속에 빵을 먹어도 헛됩니다. 그분은 사랑하시는 이에게 이처럼 잠을 주십니다.시편 127:2 · 두루새김

1절에서 시인은 집을 짓는 사람들과 경비병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시선은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으로 옮겨 갑니다. 사람들은 가능한 한 일찍 일을 시작하고, 늦게까지 활동을 계속합니다.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최대한 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삶의 수고가 「헛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단순히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으로 읽으면 앞의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일찍 일어나거나 늦게 일한다는 사실 자체라기보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기는 방식입니다.

이 구절의 사람들은 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일에 쏟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되게 일해 빵을 먹고삽니다.

수고가 많다고 해서 삶의 불안이 반드시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더 일하면 더 안전해질 것 같지만, 아무리 일해도 내일의 삶을 완전히 보장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시인은 뜻밖의 말을 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잠을 주십니다.

왜 하필 잠일까요? 집을 짓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건축 자재나 기술일 수 있습니다. 성을 지키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기와 방어 시설일 수 있습니다. 고되게 일해 빵을 먹고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한 양식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마지막에 언급하는 것은 잠입니다.

잠은 사람이 활동을 멈추는 시간입니다.

집을 짓는 사람도 잠들면 건축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경비병도 잠들면 경계를 계속할 수 없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는 사람도 잠든 동안에는 먹고살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호와야훼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게 바로 그 잠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잠 자체를 주신다고도, 잠자는 동안에도 주신다고도 읽을 수 있는데, 두루새김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잠을 주십니다」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모든 일을 끝내고 자신의 미래를 완벽하게 확보했기 때문에 잠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삶을 완전히 지킬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잠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불면이나 먹고사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이 대비하는 것은 끝없이 수고하며 모든 것을 스스로 붙들려는 삶과, 자신의 수고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여호와야훼께 맡길 수 있는 삶입니다.

잠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장 일상적으로 드러내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잠든 동안에도 세상은 계속 움직입니다. 앞에서 경비병은 깨어 있었지만, 여호와야훼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그 경계는 헛수고였습니다. 이제 사랑받는 사람은 잠듭니다. 그러나 그 잠은 삶을 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선물로 묘사됩니다.

이 대조는 시편 121:3–4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깨어 있을 수 없지만, 여호와야훼의 보호는 인간의 경계 능력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되게 일해 빵을 먹고사는 수고」는 원문에서 고통과 수고에 연결된 빵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창세기 3:17–19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담은 땅에서 양식을 얻기 위해 평생 수고해야 하며,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게 됩니다. 두 본문은 정확히 같은 단어를 반복하지는 않지만, 고통스러운 수고와 양식을 얻는 일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통합니다. 또 원문의 마지막 구절에는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잠을 주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잠자는 동안에도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첫 번째 읽기에서는 잠 자체가 여호와야훼의 선물입니다. 두 번째 읽기에서는 사람이 활동하지 않는 시간에도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의미가 강조됩니다. 문맥상 두 해석 모두 인간의 끊임없는 노동과 하나님의 공급을 대조한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보십시오, 아들들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몫입니다 — 집을 세우는 또 다른 선물

시편 127:3 본문 →

참으로 아들들은 여호와야훼께 받은 몫이고 배 속의 열매는 그분이 주신 상입니다.시편 127:3 · 두루새김

이 절은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첫 절은 집을 짓는 사람에게서 시작했습니다. 그 집에 누가 살게 되는가요? 그 집이 한 세대의 삶을 넘어 계속 이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시인은 집 자체에서 집안을 이루는 사람들로 시선을 옮깁니다. 건물로서의 집은 사람이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어질 생명과 세대까지 사람이 자기 노력만으로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보십시오」는 독자의 시선을 새로운 대상으로 돌립니다. 두루새김이 「몫」으로 옮긴 원문의 나할라(⁨נַחֲלָה⁩)는 유산이나 물려받은 몫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께 받은 땅을 말할 때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유산은 대개 누군가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원문에서는 태어난 아이들을 태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열매는 사람이 생산품을 만들듯 완전히 통제하여 만들어 내는 물건이 아닙니다. 생명이 자라 열매를 맺는 과정에는 인간이 자기 의지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앞 절의 잠과 이 절의 자녀는 서로 다른 선물이지만, 두 장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에는 인간이 만들어 냈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절에서 시인은 태어난 아이들을 그분께서 주신 「상」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을 하나님이 부모의 선행에 대한 대가로 반드시 자녀를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의 낱말은 보수나 보상(⁨שָׂכָר⁩)을 가리키지만, 이 구절은 어떤 행위에 대한 지급 조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몫」과 「상」은 모두 자녀를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귀한 선물로 묘사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자녀가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한다는 증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 시편은 자녀를 받은 사람의 복을 노래하지, 모든 사람에게 자녀가 반드시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또한 본문에 「아들들」이 특별히 언급되는 것은 당시 가정과 사회에서 아들들이 맡았던 역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딸들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거나, 자녀의 가치가 성별에 따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은 당시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가족의 모습을 통해 복을 노래합니다.

여기에서 1절의 질문이 다시 떠오릅니다. 집을 세운다는 일이 단지 벽을 쌓고 지붕을 올리는 일이라면, 시인은 왜 자녀를 이야기하는가요?

집의 참된 의미가 건축물에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을 짓는 수고의 결과가 건물이라면,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선물은 그 집을 살아 있는 공동체로 만드는 생명입니다.

용사의 손에 든 화살과 같습니다 — 젊을 때 낳은 아들들의 힘

시편 127:4 본문 →

용사의 손에 든 화살처럼 젊은 날에 낳은 아들들이 그러합니다.시편 127:4 · 두루새김

화살은 용사가 자신을 지키거나 적과 싸울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용사의 손에 화살이 있다는 것은 위협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두루새김은 「젊을 때 낳은 아들들」이라고 옮겼습니다. 문맥상 아들들이 젊은 나이에 있다는 뜻보다는 부모가 젊을 때 그들을 낳았다는 의미로 이해한 것입니다. 부모가 젊을 때 낳은 아들들은 부모가 나이가 들었을 무렵 이미 성장하여 가족을 도울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개인이 노년의 생활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가 제한적이었습니다. 가족과 친족의 관계가 생존과 재산, 사회적 보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을 단순히 노년에 부모를 부양할 일손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화살이라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바로 다음 절의 성문 장면을 준비합니다.

시인이 자녀를 화살에 비유했다고 해서 부모가 자녀를 자신의 목적을 위한 무기로 사용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비유는 고대 사회에서 성장한 자녀들이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데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또한 화살은 용사가 활용할 수 있는 힘의 이미지이지, 모든 위험을 완전히 없애는 보증서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자녀들이 가족의 안전과 존엄을 지키는 데 힘이 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놓인 3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녀들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몫입니다.

시인은 인간에게 필요한 보호의 수단을 인정하면서도, 그 수단을 끝까지 믿고 의지할 대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성문에서 원수들과 맞서 말할 때 — 화살이 아니라 말이 등장하다

시편 127:5 본문 →

복되구나, 그들로 제 화살통을 가득 채운 사람이여. 그들은 성문에서 원수들과 말로 맞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시편 127:5 · 두루새김

화살의 비유는 한 번 더 이어집니다. 화살통을 가득 채운 사람은 필요한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화살을 충분히 지닌 사람입니다. 화살과 용사가 등장했으니, 우리는 곧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전쟁터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성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적을 향해 화살을 쏘지 않습니다. 원수들과 맞서 말을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단순히 사람들이 도시를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고, 법적 다툼을 다루며, 공적인 결정을 내리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 장면은 가족의 권리나 명예가 걸린 공적인 만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문에서 원수들과 말을 나누는 상황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는 화살통을 가득 채운 「사람」 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에서는 아버지와 아들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문장의 초점이 한 사람의 복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겪는 결과로 넓어진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시인은 마지막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끝낼까요? 성문에서의 만남은 공동체 앞에서 가족의 명예와 권리가 인정되거나 부정되는 자리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힘이 있고,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무력하게 밀려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시편의 처음과 마지막이 연결됩니다.

1절에서는 성을 지키는 경비병이 등장했습니다. 5절에서는 그 성의 성문에서 원수들과 마주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어느 경우에도 그 안전을 인간의 힘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1:19에서는 부모가 문제를 일으킨 아들을 성의 장로들에게 데려갈 때 성문으로 나아갑니다. 룻기 4:1–2에서는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장로들을 불러 집안의 재산을 되살 권리에 관한 일을 처리합니다. 물론 본문이 구체적으로 법정에서 재판받는 상황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 적대 세력과 맞서는 상황일 가능성도 배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원문에서는 이 복수형이 아들들을 가리키거나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하는 가족의 모습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그 아버지와 아들들」로 풀어 옮겼습니다. 원문의 정확한 범위를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가 집을 세우는가

시편 127:1–5 본문 →

인간은 수고할 수 있지만, 그 수고의 결과를 완전히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동을 비관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동에 지나친 기대를 걸지 않도록 하는 말입니다.

신뢰는 자신이 맡은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짓는 사람들은 여전히 건축하고, 경비병은 여전히 경계하며, 부모는 여전히 자녀를 돌봅니다. 다만 자신이 하는 일이 삶을 끝까지 지탱하는 근거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부모가 자신의 불안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소유해야 하는 수단으로만 이해될 수 없습니다.

누가 집을 세우는가요?

사람이 짓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 짓지 않으시면 그 수고는 헛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지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그 경계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족을 돌보고 다음 세대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가 돌보는 생명 자체가 이미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한쪽에는 밤새 성을 지키는 경비병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여호와야훼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게 주시는 잠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시인의 시선은 성문으로 옮겨 갑니다. 그곳에는 집에서 자란 아들들이 있으며, 가족은 원수들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집을 지었던 사람이 평생 자신의 두 손만으로 모든 것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그 집에서 자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서 있습니다.

시편의 마지막 장면은 전투에서 승리한 용사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자랑하는 부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자녀들과 함께 성문에 서서, 원수들과 마주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한 가족이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