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29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세상을 뒤흔들고 평화를 주시는 왕
시편 29편은 거대한 폭풍을 보여 줍니다.
물이 요동치고, 천둥이 울리며, 레바논의 백향목이 부러집니다. 산들이 어린 짐승처럼 뛰고, 광야가 몸부림치며, 숲은 벌거벗겨집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장면이 끝난 뒤 시인이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은 뜻밖에도 평화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11절) 이 시에서 하나님은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폭풍 가운데서 천둥을 울리시고, 나무를 꺾으시며, 산들을 흔드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어떻게 세상을 뒤흔드는 힘이 평화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면 시편의 독특한 구성이 드러납니다. 시편은 하늘의 존재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명령하면서 시작합니다. 이어서 땅 전체가 하나님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이야기합니다.
하늘에서 시작된 찬양은 폭풍이 휩쓰는 땅을 지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주시는 복으로 끝납니다.
그 흐름을 묶는 말은 「힘」입니다.
1절에서 하늘의 존재들은 여호와야훼께 힘을 돌리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신들의 아들들아, 여호와야훼께 영광을 돌려라
다윗의 시입니다. 신들의 아들들아, 여호와야훼께 영광을 돌리라. 여호와야훼께 영광과 힘을 돌리라. 여호와야훼께 그 이름에 걸맞은 영광을 돌리라. 거룩한 아름다움 속에서 여호와야훼께 엎드리라.시편 29:1–2 · 두루새김
시인은 처음부터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 않습니다.
「신들의 아들들」을 부릅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반드시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자녀를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류에 속한 존재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시편 29편의 첫 장면은 하늘의 존재들이 모여 있는 왕의 궁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이 표현을 강력한 인간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가능성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존재들을 향한 부름으로 읽을 때, 9절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는 장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들이 어떤 존재이든, 시인은 그들조차 여호와야훼 앞에 엎드려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이미 영광과 힘을 지니신 분께 무엇을 돌리는가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과 힘을 돌리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아직 영광과 힘이 부족해서 다른 존재들이 그것을 더해 드려야 한다는 뜻일까요?
이어지는 시편의 내용은 정반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만으로 백향목이 부러지고 산들이 흔들립니다. 그분에게 힘이 부족할 리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광과 힘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없는 것을 보태 드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께 이미 속한 영광과 힘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2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을 크게 칭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름에 걸맞은 영광」을 돌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걸맞게 그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차림으로」 여호와야훼께 엎드리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 표현은 「거룩함의 아름다움」 또는 「거룩한 장엄함」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표현이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위엄을 가리키는지, 경배하는 이들이 갖추는 거룩한 차림이나 예배의 모습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두 읽기 모두 언어적으로 가능합니다. 두루새김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차림으로」라고 옮겨, 경배하는 이들의 차림을 가리키는 쪽으로 풀었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중심 행동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야훼께 엎드리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리는 하늘의 질서는 여러 존재들이 서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모두가 한 분의 영광을 인정하고 그 앞에 몸을 굽히는 모습입니다.
시인은 이제 하늘의 궁정에서 시선을 돌려 자연 세계로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 시편 89:6–7이 도움이 됩니다. 그곳에서도 하늘의 존재들과 거룩한 이들의 모임이 등장하며, 여호와야훼께 견줄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욥기 1:6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 서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고대 근동에서는 폭풍과 천둥이 신의 힘을 표현하는 중요한 이미지였습니다. 우가릿 문헌에서도 바알의 목소리는 천둥과 연결되고, 그 소리에 땅과 산이 흔들리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시편 29편은 이와 비슷한 폭풍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힘의 주인이 여호와야훼임을 반복해서 선언합니다. 다만 이러한 비슷한 점만으로 시편이 특정한 이방 찬가를 그대로 가져와 이름만 바꾸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목소리가 물 위에 울립니다
여호와야훼의 목소리가 물 위에 울린다. 영광의 하나님이 천둥을 울리신다. 여호와야훼는 큰 물 위에 계신다. 여호와야훼의 목소리는 힘차다. 여호와야훼의 목소리는 위엄에 차 있다.시편 29:3–4 · 두루새김
시편의 앞부분에서는 하늘의 존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천둥을 울리십니다」라는 표현을 통해 독자는 시인이 말하는 「여호와야훼의 목소리」가 폭풍 속에서 들리는 천둥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천둥이라는 자연 현상과 단순히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연 현상을 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천둥이라는 압도적인 소리를 통해 하나님이 지니신 큰 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말을 하면 소리가 공기를 통해 전달됩니다. 그러나 시편이 묘사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자연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시에서 거대한 물은 인간이 다스리기 어려운 힘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친 바다와 넘치는 물은 인간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그 물 아래에 갇혀 계시거나 물에 휩쓸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큰 물 위에 계십니다.
일곱 번 울리는 목소리
「여호와야훼의 목소리」라는 표현은 3절부터 9절까지 정확히 일곱 번 등장합니다.
· 3절에 한 번
· 4절에 두 번
· 5절에 한 번
· 7절에 한 번
· 8절에 한 번
· 9절에 한 번
독자는 이 반복을 따라가면서 마치 천둥이 연이어 울리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목소리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목소리가 무엇을 일으키는지 보여 줍니다.
물이 요동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나무와 산, 불길과 광야, 숲과 살아 있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목소리가 미치는 범위가 넓어집니다. 일곱 번의 반복은 시 전체에 강한 리듬을 부여하며, 하나님의 힘이 자연 세계 곳곳에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시를 읽으며 창세기 1장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빛이 생기고, 물과 하늘이 구별되며, 땅과 생명이 나타납니다. 시편 29편에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이미 존재하는 자연 세계를 뒤흔듭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사건을 이야기하지만, 둘 다 자연 세계가 하나님과 따로 떨어져 스스로 힘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는 공통된 신앙의 관점을 드러냅니다. 이 둘을 함께 읽으면 하나님이 세계를 처음 만드신 분일 뿐 아니라, 그 세계가 계속해서 그분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향목이 부러지고 산들이 뛰다
여호와야훼의 목소리가 백향목들을 꺾는다. 여호와야훼가 레바논의 백향목들을 꺾어 부수신다.시편 29:5 · 두루새김
시인이 처음으로 구체적인 파괴의 대상으로 제시하는 것은 백향목입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고대 근동에서 귀한 목재로 여겨졌습니다. 크고 곧게 자라며 단단한 나무였기 때문에 왕궁이나 성전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에 사용되었습니다. 열왕기상 5–6장에서도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레바논의 백향목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시편에서 백향목은 단순한 나무 이상의 이미지를 지닙니다. 크고 장엄하며 쉽게 꺾이지 않을 것 같은 자연의 힘과 아름다움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백향목이 하나님의 목소리에 꺾입니다.
시인은 특별한 무기나 도구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도끼를 들고 나무를 쓰러뜨리시는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나무를 꺾습니다.
산들이 어린 짐승처럼 뛰다
6절에서는 더욱 뜻밖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그분은 그것들을 송아지처럼, 레바논과 시룐을 들소 새끼처럼 뛰게 하신다.시편 29:6 · 두루새김
이제 움직이는 것은 나무만이 아닙니다. 산들이 뜁니다.
「시룐」은 헤르몬산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신명기 3:9에는 시돈 사람들이 헤르몬을 시룐이라고 부른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레바논과 헤르몬은 이스라엘 북쪽 지역의 웅장한 산악 지형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거대한 산들을 어린 짐승에 비유합니다. 송아지와 들소 새끼는 크고 무거운 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시인의 의도를 잘 드러냅니다.
인간의 눈에는 산이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소리 앞에서는 그 산조차 뛰어다니는 어린 짐승처럼 묘사됩니다.
여기서 「그것들」이 앞서 언급된 백향목들을 가리키는지, 이어서 등장하는 산들과 연결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시 전체의 중심 이미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단단하고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하나님의 목소리 앞에서 흔들리고 움직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단단해 보이는 것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14:4에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노래하며 산들이 숫양처럼 뛰고 언덕들이 어린양처럼 뛰었다고 표현합니다. 두 시편은 서로 다른 장면을 다루지만 같은 시적 상상력을 사용합니다. 인간에게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자연의 질서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길을 쪼개고 광야를 몸부림치게 하다
여호와야훼의 목소리가 불길을 쪼갠다. 여호와야훼의 목소리가 광야를 몸부림치게 한다. 여호와야훼가 가데스 광야를 몸부림치게 하신다.시편 29:7–8 · 두루새김
「쪼갭니다」는 깎다, 쪼개다, 잘라 내다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시인은 돌이나 나무가 아니라 불길을 쪼갠다고 말합니다.
폭풍의 흐름 안에서 이 장면은 번개를 떠올리게 합니다. 어두운 하늘을 가르는 번갯불이 갈라지거나 쪼개지는 모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번개라는 명사를 직접 사용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단단한 것들이 부러지거나 움직였습니다. 이제는 붙잡을 수 없는 불길마저 하나님의 목소리에 의해 갈라집니다.
광야가 몸부림친다는 말
광야는 산이나 나무와 또 다릅니다. 넓고 황량하며, 눈에 띄는 생명이나 움직임이 적은 공간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광야가 몸부림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산들을 어린 짐승에 비유했던 것처럼, 여기서는 광야 전체를 몸으로 반응하는 존재처럼 그립니다. 「몸부림치게 합니다」는 흔들다, 떨게 하다, 고통스럽게 몸을 움직이게 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광야를 일반적으로만 말하지 않고 「가데스 광야」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민수기 13:26과 20:1에 등장하는 남쪽의 가데스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시의 장면이 북쪽의 레바논과 헤르몬에서 남쪽 광야까지 뻗어 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북쪽의 레바논 지역과 연결되는 가데스를 염두에 두었다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이 경우 폭풍의 묘사는 북부 지역의 지리 안에서 더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본문만으로 이 지명을 어느 장소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울창한 숲이 있는 산악 지형에서도, 황량한 광야에서도 그 힘을 드러냅니다. 시인은 서로 다른 자연환경을 하나씩 등장시키면서, 여호와야훼의 힘이 특정한 장소에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9절에 이르면 시편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뀝니다.
숲이 벌거벗겨지고 궁전에서는 「영광!」을 외치다
여호와야훼의 목소리가 암사슴들에게 새끼를 낳게 하고 숲들을 벌거벗긴다. 그분의 궁전에서 모두가 외친다. 「영광!」시편 29:9 · 두루새김
이 절에는 서로 다른 세 장면이 들어 있습니다.
암사슴들이 새끼를 낳습니다. 숲이 벌거벗겨집니다. 궁전에서는 모두가 영광을 외칩니다.
암사슴들이 새끼를 낳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목소리는 자연의 거대한 사물들을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살아 있는 짐승의 몸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의 목소리가 미치는 범위가 지형과 식물에서 동물의 생명 활동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이 첫 문장은 「암사슴들에게 새끼를 낳게 하고」로도, 「나무들을 뒤틀고」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이 전달하는 장면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숲속 깊은 곳까지 미치며, 인간의 힘으로 다스릴 수 없는 반응을 일으킵니다.
모든 것이 벗겨진 뒤 들리는 한마디
하나님의 목소리가 지나간 자리에서 숲은 벌거벗겨집니다. 이 표현은 나무의 잎과 가지가 벗겨지고, 가려져 있던 숲의 모습이 드러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단순히 무섭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궁전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1–2절에서 하늘의 존재들은 여호와야훼께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제 9절에서는 모두가 「영광!」을 외칩니다.
처음의 명령이 찬양의 응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누구의 궁전인가
「궁전」은 하늘의 궁전일 수도, 땅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일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 모두 가능하지만, 시의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구조를 생각하면 하늘의 궁정이라는 이미지가 특히 자연스럽습니다.
땅에서는 백향목이 부러지고 광야가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전에서는 그 광경 앞에 「영광!」이라는 외침이 울립니다.
자연 세계가 크게 요동치는 동안, 하나님의 위엄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히브리어 아얄로트(אַיָּלָה)를 「암사슴들」로 읽어, 「암사슴들에게 새끼를 낳게 하고」라고 옮겼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히브리어 모음 표기에 근거한 자연스러운 읽기입니다. 다만 이 구절을 「암사슴들이 놀라 조산했다」고 구체화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입니다. 한편 일부 번역은 이 단어를 「큰 나무들」 또는 「참나무들」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읽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에서 숲이 벌거벗겨지는 모습이 나오므로 두 문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전해진 히브리어 모음과 단어 해석을 달리해야 합니다. 두 읽기를 최종적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궁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칼(הֵיכָל)은 왕궁과 성전을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하늘의 궁전으로 읽으면 1절에서 부름받은 신적인 존재들이 하나님의 큰 힘을 보고 영광을 외치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땅의 성전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폭풍 속에서 드러나는 그분의 위엄을 인정하며 찬양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홍수 위에 앉아 계신 왕
여호와야훼는 홍수 때 왕좌에 앉아 계셨고 여호와야훼는 영원히 왕으로 앉아 계신다.시편 29:10 · 두루새김
지금까지 시인은 하나님의 목소리가 무엇을 일으키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소리의 주인이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 선언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왕이십니다.
앞에서는 모든 것이 움직였습니다. 나무가 꺾이고, 산이 뛰고, 광야가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 자신은 어디론가 쫓겨 가시거나 흔들리시는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자연의 거대한 힘이 아무리 요동쳐도, 그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홍수는 노아의 홍수인가
「홍수」는 노아 시대의 대홍수로도, 3절에서 등장한 큰 물, 곧 지금 시인이 묘사하는 폭풍의 거대한 물결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해석을 선택하든 본문이 전하는 중심은 같습니다.
여호와야훼는 물에 압도되시는 분이 아니라 그 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홍수 때부터 영원까지
첫 문장은 과거의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둘째 문장은 그 다스림이 끝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폭풍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나무가 부러지고 산이 흔들리는 사건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권은 한 번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시인은 더 큰 천둥이나 더 강력한 심판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복을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홍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מַבּוּל)는 구약에서 창세기 6–11장과 시편 29:10에만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는 노아 시대의 홍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두루새김이 옮긴 것처럼 「홍수 때 왕좌에 앉아 계셨습니다」라고 읽으면, 하나님이 과거의 대홍수 때에도 왕으로 다스리셨다는 선언이 됩니다. 창세기 6–9장에서 그 물조차 하나님의 다스림 밖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홍수를 내리시고, 노아와 생명들을 지키시며, 마침내 물이 물러가게 하십니다. 반면 3절의 큰 물과 연결하여 읽으면 하나님은 폭풍이 몰아치는 물 위에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시편 93편에서도 큰 물들이 소리를 높이지만, 높은 곳에 계신 여호와야훼가 그 물들의 소리보다 더욱 위대하시다고 말합니다. 두 시편 모두 그 물이 아무리 압도적이더라도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 왕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것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리라.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시리라.시편 29:11 · 두루새김
처음과 마지막에 같은 낱말, 곧 「힘」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사용되는 방향이 다릅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께 힘을 돌립니다. 11절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늘의 존재들이 하나님께 힘을 돌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강해지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본래 속한 힘을 인정합니다. 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는 것은 실제로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지탱하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압도적인 힘은 단지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을 지니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실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왜 마지막에 평화가 등장하는가
「평화」는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공동체가 안전하고 온전하게 살아가는 상태, 관계의 평안과 복된 삶을 폭넓게 나타냅니다.
앞에서는 거의 모든 장면이 움직임과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원문에서 마지막 단어는 평화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힘을 찬양하기 위해 폭풍을 묘사했다면, 마지막에는 모든 원수를 파괴하시는 하나님을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시인이 선택한 결말은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약속이 그들이 앞으로 어떤 자연재해나 고난도 겪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편이 말하는 것은 그보다 깊습니다. 자연 세계를 뒤흔드는 힘조차 다스리시는 왕이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확신인가, 축복을 비는 기도인가
11절의 히브리어 동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선언하는 형태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루새김은 「힘을 주실 것입니다」, 「평화의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라고 옮겼습니다.
하지만 문맥상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힘을 주시기를」,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려 주시기를」이라는 축복을 비는 의미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동사의 형태만으로 두 가능성을 완전히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확신으로 읽든 축복을 비는 기도로 읽든, 시인의 마지막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힘과 평화가 주어지는 일입니다. 왕이 영원히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은 그분께 힘과 평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천둥이 울리고, 왕은 앉아 계신다
이 흐름에서 폭풍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폭풍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왕권이 중심입니다.
시편 29편은 모든 위험이 사라진 세계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폭풍은 여전히 거세고, 백향목은 부러지며, 광야는 흔들립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다스림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평화는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만 근거하지 않습니다. 위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돌보신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거대한 물 위에서 천둥이 울렸습니다.
백향목이 꺾이고, 높은 산들이 어린 짐승처럼 뛰었습니다. 불길이 갈라지고 광야가 몸부림쳤습니다. 숲이 벌거벗겨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궁전에서는 「영광!」이라는 한마디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 위에 왕좌에 앉으신 여호와야훼가 계십니다.
시인은 그 왕을 묘사하면서 마지막으로 가장 압도적인 힘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왕이 자신의 백성에게 무엇을 주실 것인지 이야기합니다.
힘과 평화입니다.
하늘의 모든 존재가 경배해야 할 왕이, 땅에 있는 자기 백성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
시인은 폭풍이 완전히 사라지는 장면을 보여 주지도 않습니다. 대신 영원히 왕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를 남깁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