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7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실 때

시편 7편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은 시인이 하나님께 자신을 심판해 달라고 요청하는 대목입니다.

보통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하나님께 상대방을 심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자기 자신도 심판의 자리에 세워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호와야훼, 저의 의로움과 떳떳함에 따라 저를 판결해 주십시오.」(9절) 그보다 앞에서는 「원수가 저를 뒤쫓아 따라잡게 하십시오. 제 목숨을 땅에 짓밟고 제 명예를 흙먼지 속에 눕히게 하십시오」(6절)라고까지 말합니다. 자신이 정말 잘못했다면 원수에게 짓밟혀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인이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흠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일까요?

시편 7편을 이해하는 열쇠는 시인이 주장하는 의로움의 의미와 그가 하나님께 요청하는 심판의 성격에 있습니다.

이 시는 원수들에게 쫓기는 사람의 구조 요청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재판관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악한 사람이 만들어 낸 폭력이 어떻게 그 자신에게 돌아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67편 본문 읽기 →

사자에게 쫓기는 사람의 피난처

시편 7:1–3 본문 →

표제는 이 시가 다윗이 베냐민 사람 구스의 말에 관해 부른 노래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구스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시의 계기가 된 것은 어떤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그 말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시인은 자신이 부당한 행동을 했다는 의혹에 맞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의 갈등은 단순한 신체적 위협을 넘어, 누가 정당하고 누가 불의를 행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야훼, 나의 하나님, 당신께 몸을 피했습니다. 나를 뒤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해 주시고 건져 주십시오.시편 7:2 · 두루새김

시인은 아직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뒤쫓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 몸을 피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반드시 안전한 장소에 도착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자로 삼고 그분께 도움을 요청한다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위협이 남아 있지만, 그 위협을 마주하는 자리가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뒤쫓는 사람들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큰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자처럼 내 목숨을 물어뜯어 건져 줄 이 없이 갈기갈기 찢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시편 7:3 · 두루새김

사자는 먹잇감을 붙잡아 찢어 버리는 동물입니다. 시인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바로 그 사자에 비유합니다. 사자에게 잡힌 짐승이 스스로 빠져나오기 어렵듯, 시인 역시 자신을 구할 사람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앞 절의 두 요청, 곧 「구해 주시고」와 「건져 주십시오」가 절박해집니다.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때 시편은 원수들이 실제로 얼마나 강한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의 공격 앞에서 시인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시인은 예상 밖의 말을 꺼냅니다. 자신이 무력한 피해자라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지부터 판단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무엘상·하의 다윗 이야기에서도 이 이름의 베냐민 사람을 확실하게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사울 왕의 지파였으므로 사울과 다윗의 갈등을 배경으로 이해할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만으로 구스가 사울의 측근이었다거나 특정 사건의 인물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심판받겠다는 사람

시편 7:4–6 본문 →

여호와야훼, 나의 하나님, 내가 이런 일을 했다면, 내 손에 불의가 있다면,시편 7:4 · 두루새김
까닭 없이 나를 적대하던 이까지 구해 주었는데도 나와 평화롭게 지내던 이에게 악으로 갚았다면,시편 7:5 · 두루새김
그렇다면 원수가 내 목숨을 뒤쫓아 따라잡고 내 생명을 땅에 짓밟으며 내 영광을 티끌 속에 눕히게 두십시오. 셀라.시편 7:6 · 두루새김

이 세 절은 하나의 조건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표현은 단순한 결백 주장보다 훨씬 강합니다. 자신의 말이 거짓이라면 그에 합당한 불이익을 받아들이겠다는 맹세의 성격을 띱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법과 기도에는 하나님의 판단에 자신의 주장을 맡기는 방식이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8:31–32에서도 이웃 사이에 죄를 지었다는 문제가 발생하여 맹세가 요구될 때, 하나님께 악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을 가려내어 각각 행위에 따라 갚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시편 7편 역시 하나님을 그런 판단의 최종 권위자로 인정합니다.

시인은 막연히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나쁜 짓을 했는지를 묻습니다. 손은 사람이 실제로 행동하고 일을 실행하는 신체 부분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잘못이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말입니다.

다만 5절의 마지막 부분, 「오히려 저는 까닭 없이 저를 적대하던 사람도 구해 주었습니다」는 해석이 갈립니다. 히브리어 동사 할라츠(⁨חָלַץ⁩)는 문맥에 따라 구출하거나 빼내는 행동을 나타내지만, 벗겨 내거나 빼앗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시인이 적대하던 사람마저 구해 주었다는 진술로 읽을 수도 있고, 원수를 부당하게 약탈했다면 자신이 벌을 받아도 좋다는 조건의 연장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읽으면 시인은 자신의 결백을 더욱 강하게 주장하는 셈입니다. 두 번째로 읽으면 조건문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두 읽기 모두 시인의 핵심 주장과 연결됩니다. 자신에게 적대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을 해칠 권리가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 시인은 자기 생명뿐 아니라 자신의 「명예」까지 흙먼지 속에 눕혀도 좋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목숨을 잃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명예와 존엄이 무너지는 모습까지 포함합니다. 앞의 표제에서 문제가 된 것은 한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그 말이 시인의 평판과 관련된 고발이나 비난이었다면, 여기서 명예가 흙먼지에 눕는다는 표현은 더욱 절실하게 들립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호소하면서도, 진실보다 자기 명예를 앞세우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잘못했다면 수치를 감수하겠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정당하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밝혀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수를 해치지 않는 모습은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의 다윗 이야기에서도 발견됩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해칠 기회가 있었지만, 직접 그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 사건이 시편 7편의 정확한 배경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원수에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점에서 두 본문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재판이 시작된다

시편 7:7–10 본문 →

지금까지 시인은 자신을 뒤쫓는 원수와 자신의 결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7절에 이르면 시야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여호와야훼여, 분노하시며 일어나 주십시오. 나를 적대하는 자들의 거센 분노에 맞서 높이 서 주십시오. 나를 위해 깨어나 주십시오. 당신이 심판을 명하셨습니다.시편 7:7 · 두루새김

이 표현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잠들어 계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이 보기에는 불의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심판이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제 재판관으로서 행동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원수들에게는 「거센 분노」가 있습니다. 그들은 시인을 공격하고 뒤쫓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도 거세게 분노하여 보복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며 일어나 원수들의 거센 분노에 맞서 주시기를 구합니다.

원수들의 분노와 하나님의 분노는 이 시에서 같은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의 거센 분노는 적대적인 공격으로 나타나지만, 하나님께 요청하는 분노는 불의를 심판하고 정의를 세우시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분노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원수들의 행위를 판단할 권한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뭇 민족의 무리가 당신을 에워싸기를 빕니다. 그 무리 위 높은 자리로 돌아와 주십시오.시편 7:8 · 두루새김

방금 전까지는 자신을 뒤쫓는 사람들에게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눈앞에는 여러 민족의 무리가 모이고, 그들 위 높은 곳에 하나님이 자리하시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갈등을 우주적인 심판의 장면으로 확대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시인과 원수들 사이의 문제만 처리하시는 지방 재판관이 아니십니다.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뭇 백성을 심판하십니다. 여호와야훼, 나의 의로움과 내게 있는 온전함을 따라 나를 판단해 주십시오.시편 7:9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께 자기에게만 유리한 특별한 판결을 내려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모든 백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자신의 사건에도 적용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저의 의로움과 떳떳함」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을 시인이 평생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이해하면 앞의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시인은 앞서 자신의 손으로 나쁜 짓을 했는지, 평화롭게 지내던 사람에게 악을 행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지금 그가 판단받으려는 것은 자신과 원수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의로움과 떳떳함은 우선 현재 문제가 된 사건에서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고 흠이 없다는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 전체가 온전하다고 확신했는지까지 본문이 상세히 구별해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문맥에서 강조하는 것은 특정한 고발과 적대 행위에 대한 정당성입니다.

그는 자신이 의로우니 심판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오히려 심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악한 사람에게만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억울한 사람에게는 진실이 밝혀질 수 있다는 희망이기도 합니다.

마음과 콩팥을 살피시는 의로우신 하나님, 부디 악한 이들의 악은 끝나기를 빕니다. 의로운 이는 굳게 세워 주십시오.시편 7:10 · 두루새김

두루새김의 「마음과 속생각」은 원문에서 마음과 콩팥을 가리키는 표현을 풀어 옮긴 말입니다. 시의 표제에는 구스의 「말」이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말을 통해 누군가를 고발하거나 변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로 표현된 주장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동기까지 살피십니다.

거짓말을 진실처럼 꾸밀 수도 있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그런 겉모습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런 분께 자신의 사건을 맡깁니다.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악이 끝나고 의로운 사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이 고통받기를 바라는 것보다 넓은 요청입니다. 불의가 멈추고 의로운 질서가 굳게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히브리어 표현에서 마음은 생각과 판단, 의지와 관련되며, 콩팥은 사람의 깊숙한 감정과 내면을 나타내는 신체어로 사용됩니다. 두 표현을 함께 사용하면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깊은 부분까지 살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레미야 17:10에서도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시고 내면을 시험하여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갚으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칼을 갈고 활을 당기시는 하나님

시편 7:11–14 본문 →

내 방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마음이 곧은 이들을 구하시는 분이십니다.시편 7:11 · 두루새김

앞에서는 자신을 뒤쫓는 원수를 사자에 비유했습니다. 거기에는 방어할 힘이 없는 사람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방패가 등장합니다.

방패는 원수의 공격을 대신 맞아 주는 물건입니다. 시인에게 방패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은 자신의 안전이 스스로 행사하는 힘에 달려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재판관이시고 날마다 분노하시는 분이십니다.시편 7:12 · 두루새김

왜 의로우신 재판관이라는 말 다음에 날마다 분노하신다는 표현이 나올까요?

여기서 분노는 변덕스러운 감정이나 순간적인 기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앞에서부터 이어진 심판의 문맥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과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해치는 불의를 보고도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날마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공의가 특정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를 말한 뒤 곧바로 심판의 조건을 제시합니다.

돌아서지 않으면 그분은 칼을 가십니다. 활을 당겨 겨누어 두셨습니다.시편 7:13 · 두루새김

심판의 이미지가 등장하기 전에 돌아설 가능성이 언급됩니다. 이것은 악한 사람이 계속 악을 행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아니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악에서 돌아서는 길이 열려 있지만, 그가 돌아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를 향합니다.

두루새김은 돌아서지 않는 주체를 「악한 사람」으로 밝히고, 하나님이 무기를 준비하시는 것으로 읽습니다.

그를 겨냥해 죽음의 무기를 마련하시고 화살을 불화살로 만드십니다.시편 7:14 · 두루새김

칼을 갈고 활을 당기며 화살을 준비하시는 장면은 이미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실제로 칼이 내려치거나 화살이 발사되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 바로 다음 절에서 악한 사람이 스스로 악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돌아서지 않으면」에 해당하는 말의 주어가 명시되지 않으며, 이어지는 칼과 활의 소유자를 누구로 볼 것인지에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앞 절의 하나님을 계속 주어로 읽으면, 하나님이 회개하지 않는 악한 사람을 향해 무기를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반면 악한 사람의 무기 준비를 묘사하는 것으로 읽으면, 원수가 자기 공격을 준비한다는 뜻이 됩니다. 문맥상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첫 번째 읽기가 자연스럽지만, 문법만으로 다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악인이 낳은 것은 무엇인가

시편 7:15–17 본문 →

보십시오, 악한 자는 죄악을 낳으려 몸부림치고 해악을 잉태하여 거짓을 낳습니다.시편 7:15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칼을 갈고 활을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갑자기 임신과 출산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악한 사람이 어떤 일을 꾸미는 과정을 아이를 뱃속에 품고 낳는 일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비유는 악을 단순히 순간적으로 저지르는 행동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악은 마음속에서 형성되고, 자라나고, 결국 바깥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태어나는 것은 「거짓」입니다.

시의 표제에서 문제가 된 것도 어떤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물론 구스가 실제로 거짓말을 했는지, 15절이 바로 그 말을 가리키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의 시작에 놓인 「말」과 마지막 부분의 「거짓」을 함께 읽으면, 이 시가 단순한 물리적 공격만이 아니라 진실과 거짓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구덩이를 파고 깊이 파더니 자기가 만든 함정에 빠졌습니다.시편 7:16 · 두루새김

구덩이는 상대방을 빠뜨리기 위해 만든 함정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함정에 빠지는 사람은 함정을 만든 사람 자신입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다른 사람을 해칠 방법을 마련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준비가 자기 파멸의 원인이 됩니다.

함정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은 의도를 가지고 수고하여 그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함정에 빠지는 장면은 악행과 그 결과 사이의 관계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이것은 모든 악한 사람이 현실에서 곧바로 자신이 저지른 방식대로 벌을 받는다는 기계적인 법칙은 아닙니다. 성경의 다른 본문들은 악한 사람이 잘살거나 의로운 사람이 고난받는 현실도 숨기지 않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악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결과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끼친 해악이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가 휘두른 폭력이 자기 정수리로 떨어집니다.시편 7:17 · 두루새김

15절에서 악한 사람이 뱃속에 품었던 「남을 해칠 일」은 17절에서 「그가 남에게 준 고통」이 되어 자기 머리로 돌아옵니다. 원문에서는 이 두 자리에 같은 낱말이 쓰입니다. 그가 만들어 낸 것이 결국 그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쓰러뜨리려고 함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안에 빠집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자기 머리로 돌아옵니다.

그는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그 폭력이 자기 정수리로 떨어집니다.

시의 처음에 시인은 사자에게 찢길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공격하는 자 자신이 위험에 빠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시의 극적인 역전입니다.

특히 17절의 「돌아오고」는 앞서 13절에서 악한 사람이 「돌아서지 않으면」이라는 말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두 곳에 같은 어근 슈브(⁨שׁוּב⁩)가 사용됩니다.

악한 사람이 악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 악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에서 원문은 구덩이를 파는 행동을 두 번 거듭하여 표현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구덩이를 파 놓았지만」으로 옮깁니다. 잠언 26:27도 구덩이를 파는 사람이 거기에 빠지고, 돌을 굴리는 사람에게 그 돌이 되돌아온다는 같은 지혜의 원리를 말합니다. 13절과 17절의 두 표현이 반드시 의도적으로 서로 대응하도록 배열되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같은 동사가 가까운 문맥에서 서로 다른 방향의 돌아옴을 나타낸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시인이 마지막에 노래하는 것은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다

시편 7:18 본문 →

시편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 의로우심을 따라 나는 여호와야훼께 감사드리고 가장 높으신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노래하겠습니다.시편 7:18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원수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패배했다는 이야기도 없고, 자신이 명예를 회복했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의로움을 근거로 감사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의로우심에 감사드리며」라고 말합니다. 9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의로움을 근거로 심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끝날 때 그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결백 자체가 아닙니다. 그는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고 사람의 깊은 마음을 살피시며 악을 끝내시고 의로운 사람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바라봅니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심판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단순히 자기편을 드시는 분이시라면, 시인은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만을 원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의로우신 재판관이시라면, 시인은 자신의 행동까지 그분의 판단 아래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7편의 결백 주장은 자기 의로움이 절대적이라고 내세우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 앞에 자신을 내놓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불의에 침묵하거나 부당한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은 분명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악이 끝나기를 간청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구합니다. 다만 정의를 바란다는 이유로 자신도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태도가 그 기도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악한 사람이 만들어 낸 구덩이를 보여 주면서, 불의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드러냅니다.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려고 땅을 파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구덩이는 충분히 깊어졌고, 함정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보여 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 구덩이에 빠지는 사람은 함정을 만든 사람 자신입니다.

이제 시인은 그를 직접 공격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판 함정으로 향하는 악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준 뒤, 마지막으로 시선을 들어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그의 기도는 억울함에서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의로움을 노래하는 자리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