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9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하나님은 누구를 기억하시는가

시편 9편은 감사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마음을 다하여 감사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자신의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올바르게 판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악한 사람들이 멸망했고, 그들의 이름과 기억마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부르는 승리의 노래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시를 계속 읽으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합니다.

시인은 여전히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 때문에 겪는 고통을 보아 달라고 요청하고, 죽음의 문에서 자신을 끌어 올리시는 하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마지막에 이르면 하나님께 다시 일어나 민족들을 심판해 달라고 외칩니다.

이미 하나님이 심판하셨다고 노래하면서, 왜 다시 심판을 요청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풀어 주는 열쇠는 시편 곳곳에 반복되는 「기억」과 「잊음」이라는 말입니다. 악한 사람들의 이름과 기억은 사라집니다(6–7절).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받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십니다(13절).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지만(18절),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잊히지 않습니다(19절).

시편 9편은 누가 세상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인가를 묻습니다. 힘으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사람들은 사라지지만, 세상에서 잊힌 사람들의 부르짖음은 하나님께 잊히지 않습니다.

이 시에서는 찬양과 간구가 번갈아 등장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행하신 심판을 노래하다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피난처가 되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자신의 고통을 보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악한 사람들의 멸망을 말한 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일어나 달라고 외칩니다.

시인은 이미 경험한 하나님의 공의를 근거로, 아직 해결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그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구합니다.

따라서 이 시에서 감사와 간구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79편 본문 읽기 →

이름을 지우시는 하나님, 영원히 앉아 계시는 하나님

시편 9:1–9 본문 →

시인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마음을 드리겠다고 선언합니다.

여호와야훼여, 마음을 다해 감사드리며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겠습니다.시편 9:2 · 두루새김

여기서 감사는 마음속의 감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동사는 뒤에 다시 등장합니다. 시편 전체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보이는 중요한 응답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야기하려는 놀라운 일은 무엇일까요?

내 원수들이 뒤로 물러날 때 당신 앞에서 비틀거리고 멸망합니다.시편 9:4 · 두루새김
당신이 나를 위해 재판하시어 내 권리를 지켜 주시고 왕좌에 앉아 바르게 판결하셨기 때문입니다.시편 9:5 · 두루새김

그는 자신의 군대가 강했기 때문에 원수를 이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전략이 뛰어났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원수들은 「주님 앞에서」 비틀거리며 멸망합니다.

시인이 바라보는 승리의 중심에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앉아 계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고대 세계에서 왕은 단순히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왕에게는 백성 사이의 다툼을 판결하고 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3:16–28에서 솔로몬이 두 여인의 다툼을 판결하는 장면은 왕의 이러한 역할을 보여 줍니다. 시편 9편에서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재판관이자 왕으로 나타나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재판하시고 자신의 권리를 지켜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민족들을 꾸짖으시고 악한 사람을 멸망시키셨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억울함을 다루시는 하나님이 동시에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시인의 관심은 원수들이 멸망했다는 사실보다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갑니다.

당신은 민족들을 꾸짖으시고 악한 이를 멸망시키셨으며 그들의 이름을 영영 지워 버리셨습니다.시편 9:6 · 두루새김
원수는 끝장나 영원한 폐허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성읍들을 뿌리째 뽑으셨고 그들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졌습니다.시편 9:7 · 두루새김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고, 「기억」이 사라집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을 남기는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왕들은 돌에 글을 새기고 기념물을 세워 자신의 업적을 기록했으며, 성읍과 건축물은 그들의 권력과 명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악한 사람들의 이름을 지우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남기려 했던 영광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와 정반대되는 선언을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영원히 앉아 계시고 심판을 위해 왕좌를 굳게 세우셨습니다.시편 9:8 · 두루새김

원수들의 성읍은 무너지고 그들의 이름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좌는 영원히 굳게 서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시인은 영원한 통치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선언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시인을 위해 재판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시며 여러 백성을 공평하게 재판하십니다.시편 9:9 · 두루새김

그분의 왕좌는 온 세상을 판단하는 왕좌입니다.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그 높은 왕좌가 세상에서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 여러 구절이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시작됩니다. 이런 형식을 알파벳 시, 또는 답관체 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모든 글자가 빠짐없이 이어지지는 않고, 다음 시편인 10편에서 이러한 알파벳 배열의 흔적이 계속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두 시편이 나뉘어 있지만, 칠십인역에서는 하나의 시편으로 묶여 있습니다. 두 편이 원래부터 하나의 작품이었는지, 전해지는 과정에서 합쳐지거나 나뉘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글의 짜임과 주제가 서로 연결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시편 9편에서 하나님이 고난받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신다고 선언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시편 10편에서는 어려움을 겪을 때에 하나님이 왜 멀리 서 계시는 것처럼 보이시는지를 묻게 됩니다. 또 이 왕좌의 판결은 앞의 시편 7편에서 다루었던 주제와 연결됩니다. 다만 시편 7편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을 요청하는 데 무게가 있었다면, 시편 9편의 앞부분에서는 실제로 판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무게가 있습니다. 7절의 히브리어는 원수와 폐허, 성읍을 파괴하는 행위의 주체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따라 다르게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원수가 파괴한 성읍들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방향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 전체에서 원수의 권세와 그들이 남긴 흔적이 사라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높은 왕좌가 억눌린 사람에게는 높은 피난처가 된다

시편 9:10–13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 억눌린 이에게 높은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를, 고난의 때에 높은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를.시편 9:10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이 왕좌에 앉아 계신다고 노래한 뒤 곧바로 「높은 피난처」를 말합니다. 높은 왕좌는 통치자의 권위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높이 계신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높은 피난처」는 높은 곳에 있는 안전한 장소, 적의 공격이 쉽게 닿지 않는 요새를 떠올리게 합니다.

10절은 하나님이 피난처이시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히브리어 동사 형태는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를 바라는 기원으로 읽을 근거도 제공합니다. 11절의 「믿고 의지하기를 바랍니다」까지 이어 읽으면,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실제 보호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기도가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통치가 지금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도 보호와 구원으로 드러나기를 간구합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의 이름을 아는 이들이 당신을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찾는 이들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시편 9:11 · 두루새김

「주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할 줄 아는 사람들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이름으로 알려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의 성품과 행동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도록 초대합니다.

시온에 앉아 계신 여호와야훼께 노래하라. 여러 백성 가운데 하신 일들을 전하라.시편 9:12 · 두루새김

시온은 예루살렘과 연결된 장소이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며 다스리신다고 특별히 고백하던 중심지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시온에 계신 하나님을 이스라엘만의 지역적인 신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온에서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이 하신 일을 여러 백성에게 알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사람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행동을 한 가지 더 밝힙니다.

흘린 피의 책임을 물으시는 분께서 그들을 기억하시고 고난받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잊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시편 9:13 · 두루새김

피 흘린 책임을 묻는다는 말

두루새김이 「사람을 죽인 자에게 책임을 물으시는」(⁨דָּרַשׁ⁩)으로 옮긴 자리에는 찾다, 조사하다, 요구하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가 사용됩니다. 누군가의 피가 흘려졌을 때 하나님은 그 책임을 물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9:5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피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보다 앞선 창세기 4:10에서는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아벨은 자신을 죽인 가인에게 더 이상 항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피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앞에서는 악한 사람들의 이름과 기억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고난받는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십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오래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없는 사람은 자신이 당한 일을 기록하거나 세상에 알릴 기회조차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하나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신다고 선언합니다.

세상의 기록에 남아 있는가와 하나님께 기억되는가는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의 문에서 시온의 문으로

시편 9:14–15 본문 →

13절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이야기한 시인은 갑자기 자기 자신의 간구로 돌아옵니다.

여호와야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이들 때문에 겪는 내 고통을 보아 주십시오. 죽음의 문들에서 나를 끌어 올리시는 분,시편 9:14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악한 사람들을 멸망시키셨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전히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난받고 있습니다.

이미 경험한 구원과 지금 필요한 구원이 함께 존재합니다.

내가 딸 시온의 문들에서 당신께 드릴 찬양을 모두 전하고 당신의 구원으로 기뻐하게 해 주십시오.시편 9:15 · 두루새김

두 절 모두 문을 말합니다. 하나는 「죽음의 문」이고, 다른 하나는 「딸 시온의 성문」입니다.

죽음의 문들

고대 도시의 문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였습니다. 「죽음의 문」은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떠올리게 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시인이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죽음에 가까운 위협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런데 왜 살아나기를 원합니까?

단순히 더 오래 살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15절에서 시인은 그 목적을 밝힙니다. 자신이 시온의 성문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만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기뻐하기 위해서입니다.

딸 시온의 문들

「딸 시온」은 시온을 사람처럼 부르는 시적 표현입니다. 성문은 도시의 출입구이면서 사람들이 모이고 공동체의 일을 처리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시온의 성문에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이 공동체 가운데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널리 알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죽음의 문에서 시온의 성문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처음에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고난에서 구원받아 그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기를 구합니다. 그에게 찬양은 단순히 감사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공동체 안에서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시편의 흐름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구원을 요청한 뒤 다시 민족들과 악한 사람들의 운명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죽음의 문」과 「딸 시온의 성문」의 문을 모두 복수로 말합니다.

악인은 자기가 만든 함정에 빠진다

시편 9:16–17 본문 →

민족들은 자기들이 만든 구덩이에 빠졌고 자기들이 숨긴 그물에 제 발이 걸렸습니다.시편 9:16 · 두루새김

구덩이와 그물은 둘 다 다른 사람을 잡거나 해치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구덩이는 파서 만들고, 그물은 숨겨 놓습니다. 상대방이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걸려들도록 만든 함정입니다.

그 함정에 빠진 것은 바로 그것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심판을 내리시어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악한 이는 제 손으로 한 일에 걸려듭니다. 힉가욘. 셀라.시편 9:17 · 두루새김

시인은 단순히 악한 사람이 멸망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나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의롭게 판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다만 17절 후반의 히브리어는 누가 누구를 함정에 빠뜨리는지를 문법적으로 다르게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한 사람을 그의 행위로 쓰러뜨리시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악한 사람이 자기 손으로 한 일에 스스로 걸려드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판결을 실행하신다는 데 무게가 있고, 두 번째는 악한 사람이 자기 행동의 결과를 당한다는 데 무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16절과 연결하면 하나님의 심판과 악한 사람이 스스로 무너지는 일이 서로 분리된 두 사건으로만 그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이 자신이 만든 함정에 빠지는 모습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이 드러나는 장면으로 이해합니다.

노래가 이 장면에 잠시 머무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리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은 앞의 시편 7편에서 나왔던 구덩이와 함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시편 9편에서는 그 모습이 민족들의 심판을 설명하는 데 사용됩니다. 17절 끝의 「힉가욘」은 다른 곳에서 묵상이나 읊조림과 관련된 의미로 사용되지만, 이 자리에서 정확히 어떤 음악적 기능을 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셀라」 역시 시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정확한 기능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잊은 사람들과 하나님께 잊히지 않는 사람들

시편 9:18–19 본문 →

이제 시인은 두 부류의 사람을 직접 대비합니다.

악한 이들, 하나님을 잊은 모든 민족은 스올로 돌아갈 것입니다.시편 9:18 · 두루새김
가난한 이는 끝내 잊히지 않고 고난받는 이들의 희망도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 9:19 · 두루새김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잊지 않으십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을 잊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과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믿고, 다른 사람을 억압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잊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삶의 태도로 드러납니다.

스올은 히브리 성경에서 죽은 사람들이 속하는 영역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에서 그것을 곧바로 후대의 지옥 개념과 같은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악한 사람들의 권력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려 하더라도 결국 죽음의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희망은 무엇인가

여기서 두루새김이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로 옮긴 말은 경제적인 어려움만을 나타내는 말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사람을 포함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삶을 지키기 어렵고 다른 사람의 억압을 받기 쉬운 사람들을 가리키는 문맥입니다. 13절의 고난받는 사람들, 10절의 억눌린 사람과 함께, 이 모든 표현은 사회적 위치와 삶의 형편에서 힘이 부족한 사람들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묘사합니다.

그런데 19절에서는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희망은 모든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는 낙관과 다릅니다. 그들은 아직 자신들을 억압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권리가 즉시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희망은 고난이 없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받는 사람들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세상에서 잊힌다는 것과 하나님께 잊힌다는 것은 다릅니다. 시편 9편의 희망은 바로 이 차이에 놓여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 19절의 두 행은 「영원히」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서로 대응합니다. 둘째 행에는 부정어가 따로 나타나지 않지만, 앞 행의 부정을 이어받아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기도 — 인간이 자신이 인간임을 알게 하십시오

시편 9:20–21 본문 →

시편은 다시 간구로 끝납니다.

여호와야훼여, 일어나 주십시오. 사람이 기세를 떨치지 못하게 하시고 민족들이 당신 앞에서 심판받게 해 주십시오.시편 9:20 · 두루새김

5절과 8절에서 하나님은 왕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그 하나님께 일어나 달라고 요청합니다.

왕좌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왕이시며 심판하시는 권위를 가지셨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일어나 달라는 말은 그 권위가 지금 현실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간청입니다. 시인은 이미 하나님이 의로운 재판관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자신의 힘을 믿고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여, 그들에게 두려움을 내려 주십시오. 민족들이 자신들도 사람임을 알게 해 주십시오. 셀라.시편 9:21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민족들이 겁을 먹는 일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통해 그들이 「자신들도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이유

21절의 「사람」에는 히브리어 에노시(⁨אֱנוֹשׁ⁩)가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사람을 가리키며, 문맥에 따라 연약하고 한계가 있는 사람의 모습을 부각합니다. 바로 앞의 시편 8편에서 시인이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기억하시는지 물었을 때 사용한 단어도 에노시였습니다.

시편 8편의 인간은 하나님의 드넓은 창조 세계 앞에서 자신의 작음을 발견합니다. 반면 시편 9편의 마지막에서 인간은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믿고 있습니다. 민족들은 자신들의 권세가 영원한 것처럼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잊습니다.

시편 8편은 인간이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광과 위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9편은 인간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큰 권세를 가진 민족이라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한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존귀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21절의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민족들에게 두려움을 주신다는 읽기와, 그들을 가르치시고 통제하실 권위를 세우신다는 방향의 읽기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이어지는 목적은 동일합니다. 민족들이 자신들도 사람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는 선언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려움」(⁨מוֹרָ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라는 드물게 쓰이는 형태이므로 해석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두루새김처럼 두려움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칠십인역은 이를 「법을 주는 이」 또는 「입법자」로 옮깁니다.

죽음의 문에서 시온의 문을 바라보며

시편 9:1–21 본문 →

시편 9편은 왜 이미 심판하신 하나님께 다시 심판을 구하며 끝날까요? 하나님의 의로움은 분명하지만, 시인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아직 불의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미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분이 앞으로도 의롭게 행동하시기를 기다리고 간구하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두려움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기댈 수 있는 희망이 됩니다.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부르짖음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찬양하는 사람은 자신도 누구의 고통을 잊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자기 손으로 원수들의 이름을 지우거나 그들에게 직접 보복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일어나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분노와 판단을 언제나 하나님의 정의와 같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죽음의 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난받고 있습니다. 자신을 구할 힘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죽음의 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음의 문에서 끌어 올리시는 하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서게 되기를 원하는지 말합니다. 딸 시온의 성문입니다. 그곳에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만한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아직 죽음의 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할 자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고난받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서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려 하지만 그 이름이 지워집니다. 반면 시인은 자기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기를 원합니다.

죽음의 문에서 시온의 성문으로.

시인은 그 길을 자신의 힘으로 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끌어 올리시는 하나님께 구원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시온의 성문에서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을 잊지 않으신 하나님의 이름이 찬양될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