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0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믿는 사람들
시편 10편에는 서로 정반대되는 두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께 「여호와야훼, 왜 멀리 서 계십니까? 왜 어려움을 겪을 때에 몸을 숨기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다른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잊으셨다. 얼굴을 숨기셨다.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이 숨어 계신다는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첫 번째 사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을 보고 행동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두 번째 사람은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안심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다른 사람들을 해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한 사람에게는 탄식의 이유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악을 행할 구실이 됩니다.
이것이 시편 10편의 중심에 놓인 갈등입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가 마음속에서 무엇을 믿고 있는지까지 드러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로 보고 계시지 않는지, 정말로 고난받는 사람들을 잊으셨는지를 묻습니다.
시편은 이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않습니다. 먼저 악한 사람이 활개 치는 세상으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그가 왜 악을 행하는지, 어떤 사람들을 노리는지, 무엇을 믿고 두려움 없이 행동하는지를 하나씩 보여 줍니다.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본 뒤에야 시인은 「주님은 보셨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왜 하필 환난의 때에 숨어 계십니까?
여호와야훼여,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십니까? 어찌하여 괴로운 때에 몸을 숨기십니까?시편 10:1 · 두루새김
시편은 아무런 찬양이나 감사 없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 첫 문장은 앞의 시편 9편과 연결해서 읽을 때 더욱 날카롭게 들립니다. 시편 9:9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어려움을 겪을 때에 높은 피난처가 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10편에 오자 바로 그 「어려움을 겪을 때에」 하나님이 멀리 서 계시고 몸을 숨기시는 것처럼 보인다고 호소합니다. 시편 9편에서 고백하고 기대했던 하나님의 보호가, 지금 눈앞의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인지를 추상적으로 논쟁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왜 하나님이 지금 행동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묻습니다.
여기에는 두 동작이 있습니다. 하나는 「멀리 서 계십니까」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숨기십니까」라는 것입니다. 멀리 서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면서도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몸을 숨기는 사람은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는 느낌이 아닙니다. 시인은 「어려움을 겪을 때에」를 강조합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을 괴롭게 합니다.
하나님께 아무런 기대가 없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숨어 계신다는 사실로 이토록 괴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고난받는 사람을 도우시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는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보고 있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호소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 시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배열에서도 연결됩니다. 시편 9편에서 시작된 불규칙한 알파벳 시의 흐름이 시편 10편에서도 이어지며, 칠십인역은 두 시편을 하나로 묶어 전합니다. 따라서 감사와 탄식의 이러한 연결은 두 시를 함께 읽을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악인은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가
악한 이는 거만하게 가난한 이를 뒤쫓고, 가난한 이들은 악한 이들이 꾸민 꾀에 붙잡힙니다.시편 10:2 · 두루새김
이 절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악한 사람의 특징은 교만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묘사하는 교만은 단순히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뒤쫓고 붙잡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가 노리는 대상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가난은 단순히 재산이 적다는 뜻으로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의 가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꾸민 일에 걸려들고, 위협을 받으며, 자기 힘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
시인은 힘의 불균형을 보여 줍니다. 악한 사람은 남을 해칠 일을 꾸밀 수 있고, 그것을 실행할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그가 꾸민 일에 걸려듭니다.
다만 히브리어 원문에서 2절 후반의 복수 동사는 주어가 밝혀져 있지 않아, 가난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의 계략에 붙잡힌다는 읽기와 악한 사람들이 자기 계략에 붙잡히기를 바라는 기원의 읽기가 모두 가능합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악한 사람의 교만과 그가 꾸민 일이 가난한 사람을 위협한다는 것이 이 단락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곧바로 악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갑니다.
참으로 악한 이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 배를 채우는 이는 여호와야훼를 저주하며 업신여깁니다.시편 10:3 · 두루새김
보통 사람은 자신의 욕심이 부끄러운 것일 때 그것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악한 사람은 반대로 행동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랑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욕심이 강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그 욕심은 폭력으로 이익을 얻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이 문맥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악한 사람이 잘못된 이득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긴다는 점입니다.
이제 4절에서 그 태도의 뿌리가 드러납니다.
악한 이는 콧대를 치켜들고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의 온갖 궁리는 하나님은 없다는 생각뿐.시편 10:4 · 두루새김
「콧대를 높이 세우고」라는 표현은 히브리어에서도 얼굴이나 코가 높아진 모습을 사용하여 교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뜻의 동사는 다라시(דָּרַשׁ)입니다. 찾거나 구한다는 뜻도 있고, 조사하거나 책임을 묻는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원문에서는 누구를 찾지 않는지 목적어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악한 사람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이 아무것도 조사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라고 옮겨 앞의 읽기를 택했습니다. 이 차이는 뒤에 같은 동사가 다시 등장할 때 중요해집니다.
이어지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라는 말도 반드시 철학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선언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의 다음 부분에서 악한 사람은 하나님이 잊으셨고, 보지 않으시며,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고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을 삶의 계산에서 제외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하시는지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5절은 이런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그의 길은 언제나 굳건하고, 당신의 판결은 저 높이 그의 눈길 밖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맞서는 모든 이에게 코웃음을 칩니다.시편 10:5 · 두루새김
여기에는 시인이 괴로워하는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결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은 그 판결을 보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에는 자신을 막을 만한 힘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보입니까? 악한 사람이 계속 성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데도 그가 하는 일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결은 아직 그가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이 잘되는 현실은 시인에게 단순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왜 아직 드러나지 않는가 하는 신앙의 질문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에서 3절의 축복한다는 말과 저주한다는 말의 관계는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자신이나 다른 욕심 많은 사람을 축복하면서 하나님을 업신여긴다는 읽기도 가능하고, 두루새김의 「여호와야훼를 저주하고 업신여기기 때문입니다」처럼 하나님을 저주하고 업신여긴다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악인은 자기 마음속에서 이미 판결을 끝냈다
이제 시인은 악한 사람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 말을 직접 들려줍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대대로 불행을 겪지 않으리라.」시편 10:6 · 두루새김
이 말에는 두 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자신의 미래에도 재앙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악한 사람은 단순히 지금 일이 잘 풀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잘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대로」라는 표현은 그 자신뿐 아니라 이어지는 세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안정이 계속되리라는 자만을 드러냅니다. 그에게 현재의 성공은 미래의 안전을 보장하는 증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다음 장면들을 통해 보여 줍니다.
그 입은 저주와 속임수와 억압으로 가득하고, 그 혀 밑에는 괴로움과 악.시편 10:7 · 두루새김
「혀 밑」은 혀 밑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이미지입니다. 겉으로 하는 말과 그 말이 만들어 내는 결과 사이에 숨은 악의가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의 말은 단순히 무례하거나 거친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을 속이고 해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악한 사람은 실제로 몸을 숨기고 사람을 공격합니다.
그는 마을에 숨어 앉아 은밀한 곳에서 죄 없는 이를 죽이고, 그 눈은 힘없는 이를 몰래 노립니다.시편 10:8 · 두루새김
숨어 기다립니다, 덤불 속 사자처럼. 가난한 이를 낚아채려고 숨어 기다리다 가난한 이를 낚아채 자기 그물로 끌어당깁니다.시편 10:9 · 두루새김
여기에는 두 이미지가 겹쳐 있습니다. 하나는 사냥하는 사자이고, 다른 하나는 덫을 놓는 사냥꾼입니다. 사자는 숨어서 먹잇감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달려듭니다. 사냥꾼은 그물을 감추어 놓고 상대방이 걸려들기를 기다립니다.
그는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정면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숨어서 기다리고, 상대방의 약점을 노리고, 갑자기 공격하여 붙잡습니다.
8절에서 악한 사람의 눈은 「힘없는 사람」을 몰래 노립니다. 그는 상대방을 보호하기 위해 살피는 것이 아닙니다. 공격할 기회를 찾기 위해 살핍니다. 가난한 사람의 위치와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그 사람을 해칠 방법을 찾습니다.
그런데 시의 첫 절에서 시인이 호소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몸을 숨기시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에는 정말로 몸을 숨기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악한 사람입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왜 숨어 계시느냐고 묻는 동안, 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 실제로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숨으심은 시인에게 고통스러운 의문입니다. 반면 악한 사람이 숨는 것은 약한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입니다.
더욱이 악한 사람은 하나님도 자신처럼 숨어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잊으셨다, 얼굴을 숨기셨다, 영영 보지 않으시리라.」시편 10:11 · 두루새김
이제 처음의 질문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몸을 숨기시는 것처럼 보인다고 탄식했습니다. 악한 사람은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을 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악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행동을 보지 않으시기를 원합니다.
10절은 이런 공격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 줍니다.
그는 웅크려 몸을 낮추고, 그 억센 힘에 힘없는 이들이 쓰러집니다.시편 10:10 · 두루새김
힘을 가진 공격자는 몰래 접근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그 공격 앞에서 쓰러집니다. 악한 사람은 그 결과를 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그에게 불의를 계속할 용기를 줍니다.
그런데 시인은 바로 그 확신을 정면으로 뒤집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히브리어 문면에는 주어와 낱말 형태의 어려움이 있어, 악한 사람이 몸을 낮추는 모습과 피해자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에서 이어지는 장면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보셨다는 선언
여호와야훼여, 일어나 주십시오. 하나님, 손을 들어 주십시오. 고난받는 이들을 잊지 마십시오.시편 10:12 · 두루새김
긴 악한 사람 묘사가 끝난 뒤, 시인은 다시 하나님께 직접 말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행동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일어나 주십시오」와 「손을 들어 주십시오」라는 두 요청은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행사해 주시기를 바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앉아 계시거나 잠들어 계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드러내지 않으신 심판과 구원의 행동을 시작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사람들을 해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 그분의 손을 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악한 사람의 힘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악한 사람은 하나님이 잊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맞서 시인은 하나님께 잊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여기서 「잊지 마십시오」라는 말은 단순히 어떤 사람에 관한 정보를 기억해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고난받는 사람들을 기억하신다는 것은 그들의 처지를 살피시고 그들을 위해 행동하시는 것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2:23–25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조상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을 살피십니다. 또한 출애굽기 22:22–23에서는 고아나 과부를 괴롭혀 그들이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0편의 시인도 바로 그런 하나님의 행동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제 13절에서 시인은 악한 사람의 가장 깊은 생각을 다시 드러냅니다.
어찌하여 악한 이는 하나님을 업신여깁니까? 그는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당신은 따져 묻지 않으시리라.」시편 10:13 · 두루새김
이 말은 앞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나 「하나님은 잊으셨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악한 사람은 단순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것이다」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4절의 「찾지 않습니다」와 같은 어근 다라시에서 왔습니다. 그러나 이 동사는 조금 뒤 15절에서 다시 등장하며 시의 흐름을 바꿉니다.
그전에 시인은 먼저 악한 사람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당신은 보셨습니다. 참으로 당신은 괴로움과 울분을 눈여겨보시고 당신 손으로 바로잡으려 하십니다. 힘없는 이는 당신께 자신을 맡깁니다. 당신은 고아를 도와 오셨습니다.시편 10:14 · 두루새김
하나님은 무엇을 보셨는가
시의 첫머리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몸을 숨기시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악한 사람은 하나님이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제 「주님은 보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은 앞에서부터 이어진 질문과 악한 사람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에게 즉시 형벌이 내려졌다고 보고하지도 않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시인이 하나님의 살피심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것은 단순히 악한 사람의 행동만이 아닙니다. 「고통과 괴로움」도 보십니다. 이는 악이 만들어 낸 고통과 상처를 하나님이 살피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손수 해결하시려고」 살펴보십니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손을 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원문에서는 14절에도 손이 다시 등장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손수 해결하시려고」라고 옮겨, 하나님이 직접 고통과 괴로움을 다루신다는 뜻을 드러냅니다.
여기에는 악한 사람의 시선과 하나님의 시선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의 눈은 힘없는 사람을 몰래 노립니다. 그 사람을 해칠 기회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없는 사람의 괴로움을 살펴보십니다. 그 고통을 손수 해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사람을 바라보지만, 악한 사람은 그를 공격할 대상으로 보고 하나님은 돌보아야 할 사람으로 보십니다.
힘없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고아를 도와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고아를 도와 오셨다는 표현은 단순히 불쌍한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신다는 뜻 이상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지킬 힘이 없는 사람의 편에서 그를 보호하고 도우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10편은 바로 그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바로잡을 힘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처지를 살피시고 행동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괴로움」에는 원문에서 분노를 나타낼 수도 있는 말이 쓰여, 그 고통으로 인해 생긴 격한 감정까지 하나님이 살피신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고아는 가족 안의 보호자가 없기 때문에 경제적·법적 보호를 받기 어려운 처지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고아와 억눌린 사람을 돕는 하나님의 모습은 구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신명기 10:18은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시편 82:3은 약한 사람과 고아를 위해 공정하게 판결하고 고난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라고 요청합니다.
악인의 팔을 부러뜨리라는 기도
악한 이의 팔을 부러뜨려 주십시오. 못된 이가 저지른 악을 더는 찾을 수 없을 때까지 따져 물어 주십시오.시편 10:15 · 두루새김
이 기도는 매우 거칠게 들립니다.
여기서 팔은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히브리 시에서 팔은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자주 사용됩니다. 따라서 악한 사람의 팔을 부러뜨려 달라는 말은 그가 악을 행하는 데 사용하는 힘을 꺾어 달라는 요청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뒤쫓았고, 죄 없는 사람을 죽였으며, 사자처럼 숨어서 약한 사람을 붙잡았습니다. 그의 강한 힘에 힘없는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 폭력이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팔을 부러뜨리는 요청 다음에는 「끝까지 따져 물어 주십시오」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앞서 살펴본 히브리어 동사 다라시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 반복은 시의 핵심적인 반전을 만듭니다.
| 구절 | 표현 | 의미 | | --- | --- | --- | | 4절 |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 악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태도. 원문에서는 하나님이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고 여기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음 | | 13절 | 「주님은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것이다」 | 악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내린 판단 | | 15절 |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끝까지 따져 물어 주십시오」 | 하나님이 악을 끝까지 조사하고 처리하시기를 바라는 기도 |
악한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 바로 그 책임을 물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원문에서 같은 동사가 반복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포함하는지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도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악한 사람은 바로 이것을 거부합니다.
이 점에서 시편 10편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도 무시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심판은 무작정 폭력을 가하는 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악을 찾아내고, 그 책임을 따져 묻고, 결국 그것이 더 이상 남지 않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15절 후반의 히브리어는 짧게 압축되어 있어, 악행을 끝까지 조사하여 없애 달라는 뜻과 악행을 찾아도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을 정도로 악을 끝내 달라는 뜻 사이에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시인이 원하는 것은 악한 사람의 힘과 악행이 계속되는 현실이 끝나는 것입니다. 시인은 단순히 악한 사람이 고통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다음 절에서는 하나님을 왕으로 선언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영원토록 왕이시며, 민족들은 그분의 땅에서 멸망했습니다.시편 10:16 · 두루새김
앞에서 악한 사람은 자신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대대로 재앙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진정으로 영원한 분이 누구인지 선언합니다. 악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의 권력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민족들조차 하나님의 다스림 앞에서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시에서 이어진 악행과 고난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이 결국 불의를 판단하고 바로잡으실 권한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선언 다음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에 관한 추상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고난받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악인의 마음과 고난받는 사람의 마음
여호와야훼, 당신은 고난받는 이들의 바람을 들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시고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시편 10:17 · 두루새김
앞부분에서도 「마음」은 여러 차례 등장했습니다.
악한 사람은 6절에서 마음속으로 자신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1절에서는 하나님이 잊으셨고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3절에서는 하나님이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의 마음속 말을 세 번이나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고난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두 부류의 사람에게 모두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의지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악한 사람의 마음은 자기 힘과 안전을 확신합니다. 반면 고난받는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합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와주시는 일입니다.
두 종류의 바람
3절에서 악한 사람은 「자기 마음의 욕심」을 자랑했습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이 「고난받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두루새김에서는 욕심과 바라는 것으로 달리 옮겼지만,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두 곳에 같은 명사 타아바(תַּאֲוָה)가 사용됩니다. 바람이나 욕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단어 자체가 언제나 나쁜 욕심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바라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악한 사람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 잘못된 방법으로 이익을 얻는 일입니다. 고난받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들을 억누르는 폭력이 멈추고 공의로운 판단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원문에서는 같은 말이지만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한 사람의 욕심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데로 나아갑니다. 다른 사람의 바람은 그 폭력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기도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마음을 굳게 해 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안정은 자신이 가진 힘과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에 근거합니다. 반면 고난받는 사람의 마음을 굳게 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그들이 갑자기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원수들이 모두 물러갔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해 주시고 귀 기울여 들으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심리적 위로가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바로 다음 절에서 공의로운 판결과 연결됩니다.
고아와 짓눌린 이를 위해 판결하셔서 땅에서 난 사람이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시편 10:18 · 두루새김
여기서 「판결하시고」라는 것은 단순히 누가 옳은지 선언하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고아와 억눌린 사람들의 처지를 바로잡고 그들을 해치는 일이 계속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동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은 그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판결하신다는 것은 그 고통의 원인이 되는 악을 판단하고 막으실 권한을 가지셨다는 뜻입니다.
땅에서 난 인간
여기서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אֱנוֹשׁ)는 시편 8:4에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생각해 주시는지 물었을 때도 사용된 같은 단어입니다. 그곳에서는 광대한 하늘 앞에 선 작고 연약한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시편 10편의 마지막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작고 한계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땅에서 난 사람」이라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는 땅에 속한, 한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생사와 안전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시인은 그가 더 이상 두려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눈을 감은 사람과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시편 10편을 읽으며 마지막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눈과 귀의 대조입니다.
악한 사람의 눈은 힘없는 사람을 몰래 노립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보면서도, 자신은 하나님께 보이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악한 사람의 자신감입니다.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이 멀리 서 계신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귀 기울여 들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의 모든 공격이 이미 끝났다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고난받는 사람들이 모두 안전해졌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시편 10편은 하나님의 침묵이 언제나 곧바로 해결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분께 무엇을 요청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시편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악한 현실을 좋게 해석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다는 경험과 하나님이 실제로 보고 계신다는 믿음 사이에서, 여전히 하나님께 행동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고난받는 사람들을 보지 않으십니까? 악한 사람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그들을 보시고, 그들의 바람을 들으시며, 그들을 위해 판결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악한 사람이 으슥한 곳에서 약한 사람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몰래 노리는 바로 그 사람을 하나님도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점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해치기 위해 보시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괴로움을 살피시고, 그의 마음을 굳게 해 주시며, 그의 말을 들으시기 위해 귀를 기울이십니다.
시편 10편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인다는 질문으로 시작했지만,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