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1–23장 · 지혜의 시작
깨진 우정에도 돌아갈 길이 있습니다
깨진 질그릇 조각을 붙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그릇은 좀처럼 제 모습을 되찾지 못합니다. 집회서 22장은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그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훨씬 심각해 보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한 사람이 친구를 향해 큰 칼을 빼 들었습니다. 누구라도 우정이 끝났다고 생각할 만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지혜 교사는 뜻밖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를 향해 큰 칼을 빼 들었더라도 희망을 잃지 마라. 돌아갈 길이 있기 때문이다.」
왜 깨진 질그릇 같은 어리석음에는 그토록 비관적이면서, 칼까지 빼 든 우정에는 희망을 남겨 둘까요?
이 장은 무엇이 망가졌는지만이 아니라, 망가진 것을 다시 바로잡을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 가능성은 잘못의 크기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있는지, 관계를 회복할 신의가 남아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손을 털어 버리는 이유
더러워진 돌과 오물 덩어리 — 공동체가 감당해야 하는 부담
집회서 22장은 충격적일 만큼 노골적인 비유로 시작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더러워진 돌에 비유된다. 누구나 그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고 휘파람을 불며 비웃을 것이다.집회서 22:1 · 두루새김
게으른 사람은 오물 덩어리에 비유된다. 그를 집어 드는 사람은 누구나 손을 털 것이다.집회서 22:2 · 두루새김
두 비유에는 공통된 움직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대상에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보기 싫은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마주하거나 접촉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문맥상 교사가 비판하는 대상은 일시적으로 지쳤거나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맡은 책임을 피하여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남기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고대의 농업과 수공업 중심 사회에서 노동은 개인의 생계만이 아니라 가족과 집안 전체의 생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생활환경에서는 자신의 몫을 계속 피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의 수고를 늘리는 문제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사람은 멸시받아 마땅하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실제로 게으른 사람을 향한 공동체의 혐오와 수치를 강한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그 표현의 가혹함을 인정하면서, 비판의 초점이 사람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책임을 피하는 태도에 있다는 점을 구분해야 합니다.
자녀의 수치, 그리고 그 시대의 시선
3절부터는 가정으로 시선이 옮겨집니다.
가르침을 받지 못한 자식을 낳는 것은 아버지에게 수치가 되고, 딸은 손실을 가져온다.집회서 22:3 · 두루새김
실제로 둘째 행의 그리스어 튀가테르(θυγάτηρ), 딸에는 「가르침을 받지 못한」이라는 꾸밈말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앞 행과 연결해 가르침을 받지 못한 딸을 뜻한다고 읽을 수도 있지만, 딸 일반에 관한 판단으로 읽힐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본문에는 아버지와 남편을 중심으로 딸의 처지를 평가하던 고대 가부장적 사회의 시선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딸이 결혼하여 남편의 집으로 옮겨 가는 사회적 관행과 가족의 명예, 혼인과 재산의 문제를 배경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곧 딸의 가치가 아들보다 낮다는 영원한 신학적 원칙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슬기로운 딸은 자기 남편을 얻을 것이고, 수치를 안기는 딸은 자기를 낳은 사람에게 슬픔이 된다.집회서 22:4 · 두루새김
본문은 슬기로운 딸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따라서 이 단락 전체를 딸은 본질적으로 손실이라는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없습니다.
4절의 「얻을 것이고」에 사용된 동사는 클레로노메오(κληρονομέω)로, 일반적으로 몫을 상속받거나 물려받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재산이 아니라 남편이 목적어로 등장합니다. 이것을 좋은 남편을 자기 몫으로 얻는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남편의 가정과 재산에 참여하는 관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완전히 확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교사가 부모의 기쁨과 슬픔을 단순한 출산이나 혈연 자체가 아니라 자녀의 삶의 태도와 연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5절에서는 뻔뻔한 행동이 아버지와 남편 모두를 부끄럽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가부장적인 명예 질서 속에서 표현되지만, 앞뒤 문맥에서 반복되는 관심사는 가르침을 받았는지, 자기 행동을 절제할 수 있는지에 있습니다.
슬픔에는 슬픔에 맞는 말이 필요하다
이제 교사는 자녀의 훈육에서 말과 가르침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때에 맞지 않는 이야기는 죽은 사람을 슬퍼하는 동안 울리는 음악과 같다. 채찍질과 가르침은 언제나 지혜에 속한다.집회서 22:6 · 두루새김
여기서 교사는 말의 내용만으로 그 말이 알맞은지 판단하지 않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언제,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주면 위로가 되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이 함께 슬퍼해 주는 일이라면, 즐거운 이야기는 오히려 그의 고통을 외면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교사는 채찍질과 가르침이 언제나 지혜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고대 지혜 전통의 엄격한 훈육관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몸에 가하는 벌을 포함하는 말이므로 그것을 단순한 부드러운 조언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이 격언만으로 오늘날 모든 상황에서 체벌이 정당화된다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가르침이 주어져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깨진 질그릇을 붙이는 사람
가르침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할 때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깨진 질그릇 조각을 붙이는 일과 같고, 깊이 잠든 사람을 깨우는 일과 같다.집회서 22:9 · 두루새김
조각들을 이어 붙일 수는 있겠지만, 본래의 온전한 그릇처럼 사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잠든 사람에게는 전달되지 않습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가르치는 사람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노력해도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졸고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이야기가 끝나면 그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무슨 말이야?」집회서 22:10 · 두루새김
이 장면이 우스운 이유는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커다란 차이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대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지혜 교사가 말하는 어리석음은 단순히 이해력이 느리거나 지적 능력이 부족한 상태와 구별해야 합니다. 앞의 6절과 연결하면 문제의 중심은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에 있습니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처음부터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다릅니다.
가르침은 말이 전달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듣는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배움이 일어납니다.
죽은 사람보다 더 오래 애도해야 하는 사람
죽은 사람을 두고 울어라. 그는 빛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을 두고도 울어라. 그는 깨달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을 두고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울어라. 그는 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의 삶은 죽음보다 더 나쁘다.집회서 22:11 · 두루새김
이것을 살아 있는 어떤 사람의 생명보다 죽음이 더 낫다는 보편적인 판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지혜 교사는 어리석음의 고통과 파괴성을 크게 드러내는 대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문맥상 어리석음은 단순한 장애나 인지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가르침을 거부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해로운 결과를 남기는 삶의 태도와 연결됩니다.
죽은 사람을 슬퍼하며 우는 기간은 7일이지만, 어리석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슬퍼할 날은 그의 평생이다.집회서 22:12 · 두루새김
죽은 사람을 위한 7일의 애도는 고대 이스라엘의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50:10에서 요셉은 야곱을 위해 7일 동안 애도하며, 사무엘상 31:13에서도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사울의 죽음 뒤에 7일 동안 금식합니다.
이것은 슬픔의 두 종류를 대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죽은 사람을 잃은 슬픔과,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계속 망가뜨리는 것을 지켜보는 슬픔입니다. 후자는 때로 더 견디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아무리 타일러도 그가 자신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처음의 깨진 질그릇 비유가 더욱 깊어집니다. 깨진 그릇을 붙이는 사람의 고통은 단순히 수고가 많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자신이 바라는 온전함을 회복시킬 수 없다는 무력감에 있습니다.
언제까지 짊어지고 있어야 하는가
그래서 교사는 마침내 거리를 두라고 권합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말을 많이 나누지 말고, 깨달음이 없는 사람에게 다가가지 마라. 고생하지 않도록 그를 경계해라. 그러면 그가 털어 내는 것에 더럽혀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게서 비켜서라. 그러면 쉼을 얻고, 그의 분별없는 짓 때문에 지치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22:13 · 두루새김
이 명령은 앞의 두 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끝없이 말하고, 자신의 행동으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무조건 감당하려 한다면,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마저 지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쉬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던 11절과 달리, 여기서는 어리석은 사람에게서 비켜설 때 살아 있는 사람이 쉼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교사는 어리석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방법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의 어리석음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지킬 것인지도 가르칩니다.
「그가 털어 내는 것에 더럽혀지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무엇이 실제로 튀어나오는지 분명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거친 행동에 휘말려 함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입니다.
무엇이 납보다 더 무겁겠느냐? 그것을 어리석은 사람 말고 무엇이라고 부르겠느냐?집회서 22:14 · 두루새김
납, 모래, 소금, 쇳덩이 같은 물질은 실제로 짊어질 수 있는 짐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을 견디는 일은 단지 몸의 힘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무책임을 계속 감당하는 일은 마음을 지치게 하고, 시간과 관계를 소모시킵니다.
잠언 27:3에도 돌과 모래의 무게를 어리석은 사람의 분노와 비교하는 격언이 있습니다. 두 본문 모두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부담이 실제 짐의 무게보다 더 무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집회서의 경고를 누구든 힘든 사람은 버리라는 명령으로 넓혀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의 후반부는 오히려 어려움을 겪는 친구 곁을 지키라고 명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은 고통을 겪는 사람과, 잘못을 바로잡기를 거부하며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사람입니다.
흔들려도 풀리지 않는 마음
무거운 짐과 깨진 질그릇을 이야기하던 교사는 갑자기 건축물로 시선을 돌립니다.
건물에 짜 맞춘 나무들은 단단히 묶여 있어, 흔들려도 그 이음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신중하게 헤아린 생각 위에 굳게 선 마음은 위기가 닥쳐도 겁내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22:16 · 두루새김
핵심은 건물에 아무런 충격도 가해지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흔들림이 생겨도 이음이 풀리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신중하게 헤아린 생각」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적인 감정이나 충동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한 판단이 마음을 지탱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무거운 짐을 감당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무조건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언제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을 갖추고 있습니다.
깨달음 있는 생각 위에 굳게 자리 잡은 마음은 매끈하게 다듬은 벽에 모래를 발라 만든 장식과 같다.집회서 22:17 · 두루새김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지혜로운 마음이 아름답게 꾸며진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장식이 놓이는 바탕이 잘 다듬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모래를 쌓아 올리는 것과, 다듬어진 벽면에 장식을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나 18절에서는 전혀 다른 구조물이 등장합니다.
높은 곳에 놓인 말뚝들은 바람 앞에서 결코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처럼 어리석은 생각에 기대는 겁 많은 마음은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버티지 못할 것이다.집회서 22:18 · 두루새김
차이는 바람이나 흔들림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을 견디도록 무엇이 지탱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18절에서 문제 되는 마음은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비판받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닥쳤을 때 자신을 붙들어 줄 만한 판단의 바탕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굳게 선 마음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두려운 상황에서도 무엇을 따라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왜 교사는 어리석은 사람의 부담을 이야기한 다음 이처럼 굳게 선 마음을 설명했을까요?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사람의 마음을 가장 심하게 흔드는 일 가운데 하나가 소중한 관계에서 입는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돌을 던지면 새는 날아가지만, 친구에게도 돌아갈 길이 있을까
눈의 상처와 마음의 상처
눈을 찌르면 눈물이 흐르듯, 마음을 찌르면 감정이 드러난다.집회서 22:19 · 두루새김
친구가 분노하거나 슬픔을 드러낼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반응만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반응 뒤에 어떤 상처가 있는지는 따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새들에게 돌을 던지면 새들이 달아나고, 친구를 모욕하면 우정이 깨질 것이다.집회서 22:20 · 두루새김
돌을 던진 사람이 단지 장난이었다고 주장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친구를 모욕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말을 했는지와 관계없이 우정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우정은 상대방이 스스로 가까이 머무는 관계입니다. 물건을 붙들어 둘 수는 있지만, 친구가 마음으로 곁에 머물도록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모욕은 단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더 이상 가까이 머물고 싶지 않게 만드는 행동입니다.
칼을 빼 들었는데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이유
그런데 여기서 본문은 예상과 다르게 전개됩니다.
친구를 향해 큰 칼을 빼 들었더라도 희망을 잃지 마라. 돌아갈 길이 있기 때문이다.집회서 22:21 · 두루새김
칼을 빼 드는 행동은 단순한 말다툼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친구를 위협하거나 실제로 상처 입힐 수 있는 행동입니다.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관계가 반드시 영원히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말합니다.
친구를 거슬러 입을 열었더라도 두려워하지 마라. 화해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욕하거나 교만하게 굴거나 비밀을 드러내거나 속여서 공격한 것은 예외다. 그런 잘못을 저지르면 어떤 친구든 떠날 것이다.집회서 22:22 · 두루새김
친구를 향해 칼을 빼 든 일도 회복될 수 있다면서, 왜 비밀을 드러내거나 모욕하는 행위는 친구가 떠날 만큼 심각하다고 말할까요?
본문은 직접 그 이유를 해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열된 행동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욕은 상대방의 존엄을 깎아내립니다. 교만하게 구는 것은 상대방을 동등하게 존중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비밀을 드러내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맡긴 것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속여서 공격하는 것은 상대방의 신뢰나 방심을 이용해 해를 끼칩니다.
모두 우정의 바탕인 존중과 신의를 훼손하는 행동들입니다.
칼을 빼 드는 일도 결코 가볍지 않지만, 교사는 심각한 충돌 이후에도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반면 비밀을 이용하고 일부러 배신하는 행동은 친구가 다시 믿고 가까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칼로 위협하는 행위보다 비밀을 드러내는 행위가 언제나 더 심각하다는 절대적인 순위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비유를 통해 화해 가능성과 신뢰 파괴의 위험을 함께 가르치는 것입니다.
잘못을 용서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과, 상대방이 다시 신뢰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21절이 말하는 돌아갈 길은 화해의 가능성이지,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관계를 반드시 회복하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22절의 마지막 문장은 그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친구는 떠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행동 앞에서는 그렇게 거리를 두는 것이 관계의 파괴를 인정하는 현실적인 반응일 수 있습니다.
가난할 때 곁에 남는 사람이 친구다
우정은 형편이 달라질 때 시험받는다
지혜 교사는 이제 좋은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합니다.
그가 가진 좋은 것들로 함께 배부르도록, 이웃이 가난할 때에도 그를 저버리지 말고 믿음을 쌓아라. 그의 유산을 함께 물려받도록, 그가 어려움을 겪을 때 곁에 머물러라.집회서 22:23 · 두루새김
가난할 때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적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에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우정이 형성되는 중요한 자리는 상대방에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때만이 아니라, 얻을 것이 없어 보이거나 오히려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서로 주고받는 관계와 미래에 함께 누릴 유익에 대한 기대가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두 행에서 요구되는 행동을 살펴보면 친구의 좋은 것들을 누리기 위해 먼저 해야 하는 것은 가난할 때 그를 저버리지 않고, 어려움을 겪을 때 곁에 머무는 일입니다.
교사는 함께 누리는 풍요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다만 풍요가 오기 전에 관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불꽃이 나타나기 전에 연기를 보아라
23절의 따뜻한 권면 뒤에는 갑자기 가마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불에 앞서 가마의 김과 연기가 피어나듯, 피를 흘리게 하는 일에 앞서 욕설이 오간다.집회서 22:24 · 두루새김
연기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리는 징후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 폭력이 발생하기 전에 이미 언어의 폭력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19–22절의 상처 입은 우정과 직접 연결됩니다. 친구를 모욕하는 말이 오가고, 서로의 비밀을 드러내고, 거짓말과 위협이 쌓이기 시작하면 관계는 더 심각한 파괴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관계가 완전히 무너진 다음에야 문제를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아직 불꽃이 크게 번지지 않았을 때 연기를 알아봅니다.
친구를 감싸 주되, 배신을 모른 척하지는 않는다
이제 교사는 처음으로 자신의 다짐을 직접 말합니다.
나는 친구를 감싸 주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고, 그를 피해 결코 숨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22:25 · 두루새김
앞에서는 다른 사람을 향한 교훈이 이어졌지만, 여기서는 「나는」이라는 일인칭이 나타납니다. 그는 좋은 친구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이 친구를 위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선언합니다.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 전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마저 그를 피할 수 있습니다. 만나면 도움을 요청받을까 두렵거나, 그의 어려움에 자신도 얽힐까 걱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사는 그렇게 숨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또 하나의 긴장이 발생합니다.
그 때문에 내게 나쁜 일이 생기면, 그 일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그를 경계할 것이다.집회서 22:26 · 두루새김
여기서 교사는 친구를 감싸 주겠다는 다짐과 친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함께 놓습니다. 친구를 보호한다는 것은 그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인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의를 지킨다는 이유로 해로운 행동을 무조건 감추거나, 배신을 계속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친구에게 충실했던 사람이 결국 그 친구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면, 그 사실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우정에는 신의가 필요하지만, 신의는 한쪽 사람만 지켜야 하는 의무가 아닙니다. 친구를 감싸 주는 사람도 보호받아야 할 존엄과 신뢰를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교사는 자기 입을 두려워한다
이 장의 마지막 절은 앞의 모든 교훈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합니다.
누가 제 입을 지켜 주시고 제 입술을 슬기롭게 봉해 주셔서, 제가 혀 때문에 넘어지지 않고 제 혀가 저를 망치지 않게 해 주시겠습니까?집회서 22:27 · 두루새김
그런데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입과 혀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신에게도 위험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지혜는 다른 사람의 어리석음을 알아보는 능력만이 아닙니다. 자신 역시 잘못된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고, 소중한 관계를 망칠 수 있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경계할 줄 아는 사람이 비로소 지혜를 배우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입을 지킬 파수꾼과 입술을 닫아 둘 봉인이라는 서로 다른 이미지가 나란히 놓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두 이미지를 입을 지켜 주고 입술을 슬기롭게 봉해 주는 행동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두 표현 모두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는 뜻을 전달합니다. 이 물음은 다음 장 첫머리에서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인 기도로 이어집니다(23:1). 따라서 22장 마지막 절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의 시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22:27 자체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비슷한 기도의 이미지는 시편 141:3에도 나타납니다. 시편의 기도자는 하나님께 자기 입을 지켜 달라고 구합니다. 집회서의 표현이 그 시편에서 직접 가져온 것인지까지 확정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말까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두려는 지혜와 경건의 태도가 서로 통합니다.
깨진 것을 다시 세우는 지혜
처음에 깨진 질그릇을 붙이는 일이 헛수고처럼 묘사되었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심각하게 손상된 우정에도 돌아갈 길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울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앞에서는 한 사람이 새들에게 돌을 던져 새들이 달아났습니다. 친구에게 모욕적인 말을 던지는 사람도 그렇게 친구를 떠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람은 어떤 말도 함부로 던지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입을 지켜 달라고 구합니다. 자신의 입술이 함부로 열리지 않도록 슬기롭게 봉해 달라고 구합니다.
아직 말을 내뱉지 않았고, 아직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을 멈추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깨진 우정을 회복할 길을 찾는 것도 지혜이지만, 우정을 깨뜨릴 말을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때 그것을 멈추는 일 역시 지혜입니다.
집회서 22장은 그렇게 자신의 입술을 지켜 달라고 간구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