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1–23장 · 지혜의 시작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나는 사람

한 사람이 어두운 방 안에 있습니다. 벽이 그를 가리고, 밖에서는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를 보겠느냐?」

그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자신의 행동도 문제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장이 묻는 것은 단순히 욕망을 어떻게 억누를 것인가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가장 달콤하게 여기며, 누구의 눈앞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가입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723장 본문 읽기 →

자신의 생각까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의 기도

집회서 23:1–6 본문 →

하나님을 아버지이자 주인이라고 부르는 이유

집회서 22장은 자기 입에 파수꾼을 세워 달라는 간구로 끝났습니다. 23장은 그 기도를 직접 하나님께 드리는 말로 이어 갑니다.

제 생명의 아버지이자 주인이신 주님, 제 입과 혀가 이끄는 대로 저를 내버려 두지 마시고, 그것들 때문에 넘어지도록 버려두지 마십시오.집회서 23:1 · 두루새김

아버지라는 호칭은 생명의 근원과 보호를 떠올리게 합니다. 주인이라는 호칭은 그 생명이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기도자는 자신을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동시에 자신의 욕망과 판단을 다스려 주시기를 구합니다.

누가 제 생각을 다스릴 채찍과 제 마음을 바로잡을 지혜의 가르침을 세워 주셔서, 그것들이 제가 모르고 지은 잘못도 봐주지 않고 제 생각과 마음의 죄도 결코 눈감아 주지 않게 하시며,집회서 23:2 · 두루새김

보통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조금 너그럽게 봐 달라고 기도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정반대의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의 잘못을 그냥 넘어가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채찍」과 「지혜의 가르침」은 고대의 엄격한 훈육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채찍이 다스리는 것은 몸이 아니라 생각입니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생각을 물리적으로 때려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내면의 잘못을 엄격하게 바로잡아 달라는 비유로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이 잘못이라고 알고 저지르는 행동만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잘못인지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상태도 죄를 키울 수 있습니다.

제가 모르고 짓는 잘못이 늘거나 제 죄가 불어나지 않게 하시고, 제가 적대자들 앞에서 넘어지거나 제 원수가 저를 보고 고소해하지 않게 해 주시겠습니까?집회서 23:3 · 두루새김

기도자는 단순히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를 면하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에 이르기 전에 자신을 바로잡아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기도자는 자신의 잘못을 덮어 주는 너그러운 침묵보다, 자신을 바로잡는 불편한 가르침을 구합니다.

교만한 눈길에서 뻔뻔한 마음까지

제 생명의 아버지이자 하나님이신 주님, 제 눈이 교만해지지 않게 하시고,집회서 23:4 · 두루새김

처음에는 아버지이자 주인이라고 불렀고, 이번에는 아버지이자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두 기도가 각각 생각을 바로잡는 가르침과 욕망의 절제를 구한다는 점에서, 반복되는 호칭은 기도를 두 부분으로 묶어 줍니다.

여기서 눈이 교만해진다는 것은 단순히 눈을 치켜뜨는 표정이 아닙니다. 남을 내려다보거나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는 태도가 시선에 드러난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눈길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눈길을 잊어버린 사람이 등장합니다.

먹을 것을 탐내는 마음과 음란한 욕심이 저를 사로잡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저를 뻔뻔한 마음에 내주지 마십시오.집회서 23:6 · 두루새김

「먹을 것을 탐내는 마음」은 먹고 마시는 육체적 욕구를 가리키며, 「음란한 욕심」은 성적인 욕망과 관련됩니다. 본문은 이러한 욕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욕구가 사람을 「사로잡」는 상황입니다.

배고픔을 느끼는 것과 음식에 대한 욕망에 지배되는 것은 다릅니다. 성적인 욕망을 느끼는 것과 그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책임을 저버리는 것도 다릅니다.

마지막의 「뻔뻔한 마음」은 특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강한 욕망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행동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내면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욕망이 강해지는 것보다 더 위험한 단계는 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잘못까지 정당화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기도는 끝나고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교사는 먼저 입의 습관을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제 입과 혀가 이끄는 대로」는 원문에서는 대명사만 사용하며 대상을 다시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바로 앞 22:27에서 입과 입술과 혀를 이야기한 흐름을 따라 「제 입과 혀」로 풀어 옮겼습니다. 잘못된 말과 그것을 낳는 충동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23:2–6에서는 생각과 마음과 욕망까지 등장하므로, 사람 안에서 잘못을 일으키는 충동 전반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입에 무엇을 익숙하게 만들 것인가

집회서 23:7–15 본문 →

맹세의 문제는 습관의 문제다

얘들아, 입에 관한 가르침을 들어라.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결코 붙잡히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입술 때문에집회서 23:7 · 두루새김

이 절에서 말하는 붙잡힘은 잘못된 말 때문에 죄에 걸려드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8절은 죄인과 남을 헐뜯는 사람과 교만한 사람이 자기 입술 때문에 걸려 넘어진다고 말합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그 결과는 말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돌아옵니다.

네 입에 맹세하는 버릇을 들이지 말고, 거룩한 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버릇도 들이지 마라.집회서 23:9 · 두루새김

여기서 맹세는 단순히 강한 확신을 표현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자신의 말이 참되다는 보증으로 불러오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맹세는 진실을 확인하고 약속의 책임을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레위기 19:12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출애굽기 20:7도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일을 금지합니다.

그런데 집회서의 가르침은 거짓 맹세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맹세를 자주 하는 습관 자체를 경계합니다.

집안 종이 계속 심문과 징계를 받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 몸에 매 맞은 자국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교사는 계속 맹세하는 사람이 그만큼 자주 잘못에 빠질 위험에 놓인다고 경고합니다.

물론 이 비유는 당시 종에 대한 체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사회적 환경을 반영합니다. 그 장면을 모든 시대의 정당한 훈육 방식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11절은 맹세를 너무 많이 할 때 생길 수 있는 잘못을 세 가지 상황으로 보여 줍니다. 맹세하면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맹세의 의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아무런 이유 없이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맹세는 단순히 말을 강하게 만드는 장식이 아닙니다. 입 밖으로 낸 말에 책임을 지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말을 습관적으로 과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에 담긴 책임도 가볍게 여기기 쉽습니다.

반복해서 사용하는 말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그 사람이 무엇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지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끊임없이 입에 올리면서도 그 이름의 거룩함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종교적인 말이 많다는 사실이 오히려 경외함의 부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말의 품격은 부모를 기억하는 일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죽음에 휘감긴 말이 있다. 그런 말은 야곱의 후손들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는 사람들에게서 떠날 것이고, 그들은 죄 속에서 뒹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23:12 · 두루새김

「야곱의 후손들」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교사는 말을 개인적인 취향이나 예절만의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어떤 말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삶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말이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는 이 절에서 모두 나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뒤 문맥에는 함부로 하는 맹세,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일, 상스럽고 무례한 말, 모욕하는 말이 등장합니다.

네 입에 상스럽고 무례한 말버릇을 들이지 마라. 그 안에는 죄가 되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집회서 23:13 · 두루새김

문제는 단순히 고상한 어휘를 사용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무례한 말을 반복하다 보면 다른 사람을 가볍게 여기고 상처 입히는 태도도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해라. 그는 높은 관리들 가운데 함께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도 이 당부를 잊거나 네 버릇 때문에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라게 될 것이니, 네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일이 없게 해라.집회서 23:14 · 두루새김

높은 관리들과 함께 앉는 자리를 떠올려 보면 그 뜻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거나 남을 모욕하는 말버릇은 오히려 부끄러운 결과를 낳습니다.

그때 부모를 기억하라는 명령은 자신이 누구에게서 태어났고 어떤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는지 잊지 말라는 권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15절은 그 위험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모욕하는 말버릇이 든 사람은 평생 결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23:15 · 두루새김

이 문장은 단순히 욕설을 사용하면 지혜를 배울 수 없다는 기계적인 규칙이 아닙니다. 모욕하는 말을 일상적인 습관으로 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존엄을 존중하지 않게 되고, 자신을 바로잡으려는 가르침에도 귀를 닫을 위험이 있다는 경고입니다.

처음에 기도자는 자신의 잘못을 봐주지 말고 바로잡아 달라고 구했습니다. 반면 15절의 사람은 자기 입에서 나오는 모욕에 익숙해져 가르침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고쳐 달라고 구하고, 다른 사람은 자신을 고칠 기회를 잃어 갑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해당 그리스어 동사는 3인칭 단수로 전해져 누가 높은 관리들 가운데 앉아 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의 「그는 높은 관리들 가운데 함께 앉아 있기 때문이다」는 이 형태를 따릅니다. 다른 그리스어 본문 전승에는 2인칭 형태가 있어, 네가 높은 관리들 가운데 앉아 있을 때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마지막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표현에도 부정어를 포함하는 읽기와 포함하지 않는 읽기가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세부 표현을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부모를 기억하라는 명령과 자신의 말버릇 때문에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경고의 연결은 분명합니다.

모든 빵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사람

집회서 23:16–17 본문 →

16절은 고대 지혜문학에서 볼 수 있는 수를 세는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두 부류는 죄를 늘리고, 셋째는 분노를 불러올 것이다. 타오르는 불처럼 달아오른 마음은 다 타 버릴 때까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제 몸으로 음행하는 사람은 불이 그를 태울 때까지 결코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23:16 · 두루새김

이런 표현은 잠언 30:18–19, 30:21–23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들을 차례로 소개하면서 마지막 대상을 특별히 강조하는 문학적 방식입니다.

본문은 이어 불처럼 타오르는 마음과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을 묘사합니다. 다만 어떤 표현이 첫째, 둘째, 셋째 부류에 각각 정확히 대응하는지는 문장이 압축되어 있어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적인 욕망이 절제되지 않을 때 그 결과가 점점 심각해진다는 경고입니다.

불은 땔감이 공급되면 계속 타오릅니다.

욕망도 비슷하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하다가 그것을 얻으면 잠시 만족합니다. 그러나 만족이 끝나면 다시 같은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욕망을 채우는 행동이 오히려 더 강한 욕망을 만드는 경우입니다.

음행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빵이 달콤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23:17 · 두루새김

여기서 빵은 음식 자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욕망의 대상을 먹을 것으로 비유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욕망을 분별하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모든 대상을 만족의 기회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무엇이 자신에게 적절하고 무엇이 다른 사람의 몫인지 구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모두 달콤한 것으로 여깁니다.

잠언 9:17에도 금지된 물과 몰래 먹는 빵이 달콤하다는 유혹의 말이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어리석음이 사람을 유혹하는 목소리로 등장하지만, 집회서 23장에서는 욕망에 지배된 사람 자신의 태도를 묘사합니다.

두 본문 모두 달콤함이 반드시 좋은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어떤 것은 당장 즐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즐거움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7절의 마지막은 이 욕망이 쉽게 멈추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음행하는 사람에게 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신학적 선언이라기보다, 절제되지 않는 욕망이 스스로 만족하여 멈추지 않는 위험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경고입니다.

이제 본문은 그 욕망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질 때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지 보여 줍니다.

어둠과 벽이 자신을 지켜 준다고 믿는 사람

집회서 23:18–21 본문 →

그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내가 아닌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남자는 마음속으로 말한다. 「누가 나를 보겠느냐? 내 둘레는 어둡고 벽들이 나를 가려 준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지극히 높으신 분은 내 죄를 결코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다.」집회서 23:18 · 두루새김

그러나 그가 확인하는 것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킬 가능성이 있는지입니다.

그에게 죄의 문제는 「해도 되는 행동인가」가 아니라 「들키지 않고 할 수 있는가」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행동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사람의 눈과 주의 눈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이다. 주의 눈은 해보다 만 배나 밝아서 사람들의 모든 길을 살피고 숨겨진 곳까지 들여다본다.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집회서 23:19 · 두루새김

낮에는 태양이 비추어 사물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밤에는 어둠이 찾아오고 벽 안쪽은 다른 사람의 눈에서 가려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그런 조건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밖으로 드러난 행동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 행동도 아십니다.

모든 것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뒤에도 마찬가지다.집회서 23:20 · 두루새김

이것은 창조주와 창조된 존재의 차이에 근거한 설명입니다. 사람은 눈에 빛이 들어와야 볼 수 있습니다. 벽이 가리면 볼 수 없고, 멀리 있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에 의해 지식이 제한되는 분이 아닙니다.

기도자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의 잘못을 하나님이 그냥 넘어가시지 않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러나 18절의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합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이 실제로 무엇을 보시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인정하는가에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의 결말

이 사람은 도시의 광장들에서 벌을 받을 것이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붙잡힐 것이다.집회서 23:21 · 두루새김

앞에서는 어둠과 벽으로 자신을 감추었던 사람이 이제 도시의 광장들에 등장합니다.

이것은 공간의 극적인 뒤바뀜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붙잡힐 것이다」라는 표현은 그가 스스로 계산하지 못한 결과를 맞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충분히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든 은밀한 잘못이 반드시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드러난다는 경험적 법칙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실제 세상에는 감추어진 채 드러나지 않는 잘못도 있습니다. 본문은 지혜문학의 경고를 통해 숨겨진 행동도 책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신학적 진실을 강조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해보다 만 배나 밝아서」라는 표현은 빛의 세기를 실제 수치로 측정하는 진술이 아닙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강한 빛보다도 하나님의 시선이 훨씬 더 철저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과장된 비유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시편 139:11–12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시편의 기도자는 어둠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기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139편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어디에서나 아신다는 사실이 경외와 놀라움,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집회서 23장에서는 그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이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비판합니다.

숨겨진 배신이 가정과 공동체에 남기는 상처

집회서 23:22–26 본문 →

한 사람의 행동이 세 관계를 침범하다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서 낳은 아이를 상속자로 내세우는 여자도 마찬가지다.집회서 23:22 · 두루새김

여기에는 부부 사이의 신뢰뿐 아니라 자녀의 출생과 상속의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문의 상속은 토지와 재산을 물려주는 일뿐 아니라 가족 계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녀의 출생을 속여 상속자로 세우는 일은 부부 관계의 배신인 동시에 가족의 법적·사회적 질서에도 영향을 미치는 행동으로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 여자는 지극히 높은 이의 율법을 따르지 않았고, 둘째로 자기 남편에게 잘못을 저질렀으며, 셋째로 남편이 아닌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해 부부의 약속을 깨뜨리고 다른 남자에게서 자녀들을 낳았기 때문이다.집회서 23:23 · 두루새김

세 가지는 서로 무관한 죄목이 아닙니다. 한 행동을 서로 다른 관계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여자는 율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남편과의 관계입니다. 부부 사이의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셋째는 혼인과 자녀의 출생을 둘러싼 관계입니다.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낳은 자녀를 기존 부부 관계의 상속 체계 안에 내세웠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아내가 아닌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남성을 비판했고, 이제 남편이 아닌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성을 비판합니다. 따라서 성적인 신의를 지켜야 할 책임을 여성에게만 부과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사례에서는 자녀와 상속, 공동체의 공개적인 조사, 후대까지 이어지는 수치가 특별히 강조됩니다. 이는 혼인과 혈통을 중심으로 여성의 행동을 엄격하게 판단했던 고대 사회의 질서도 반영합니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본문이 다루는 배신과 속임수의 문제를 가볍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로 배신이 잘못이라는 사실만으로 당시의 모든 법적·사회적 처벌 방식이 오늘날에도 정당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자녀에게까지 이어지는 결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여자는 사람들의 모임 앞으로 끌려 나올 것이고, 그 자녀들도 조사를 받을 것이다.집회서 23:24 · 두루새김

여기서 「사람들의 모임」은 단순히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공동체의 판단이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앞의 남성은 도시의 광장들에서 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여성 역시 공동체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자녀들도 조사를 받을 것이다」는 이 문맥에서는 자녀의 출생과 지위가 조사나 판단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자녀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벌을 받는지까지 「조사」라는 말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자녀들은 뿌리를 뻗지 못할 것이고, 그 여자의 가지들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집회서 23:25 · 두루새김

뿌리와 가지와 열매는 가문이 이어지고 번영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뿌리를 뻗지 못한다는 것은 안정적으로 자리 잡지 못한다는 뜻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후대의 번영이나 가문의 이어짐이 끊어지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부모의 행동 때문에 자녀의 사회적 지위와 가문의 미래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현실을 엄격한 경고로 표현합니다. 그렇다고 자녀들이 부모의 잘못을 자신의 죄로 지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신명기 24:16은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그곳에서는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를 죽여서는 안 되며, 각자가 자기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에스겔 18:20도 아들이 아버지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집회서 23:25를 특정한 출생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하나님께 저주받았다는 보편적인 선언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 여자는 자신에 대한 기억을 저줏거리로 남길 것이고, 그 수치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23:26 · 두루새김

여기서 지혜 교사는 잘못된 행동이 개인의 순간적인 선택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의 기억과 가문의 평판에 흔적을 남길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 구절은 특정한 행동이 남기는 파괴적인 결과를 강조하는 문학적 경고이지, 회개와 용서에 관한 모든 신학적 가능성을 논의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 행동이 자신만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이 배우자와 자녀, 가족의 신뢰, 공동체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어둠과 벽 뒤에 숨었던 사람의 독백은 이제 공개적인 사람들의 모임과 후손의 문제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이 본문이 보여 주는 잘못된 욕망의 확산입니다.

모든 빵이 달콤한 사람과, 계명이 더 달콤한 사람

집회서 23:27 본문 →

마지막 절은 지금까지의 경고를 한 문장으로 모읍니다.

남은 사람들은 주를 경외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고, 주의 계명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보다 더 달콤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집회서 23:27 · 두루새김

17절의 사람은 모든 빵이 달콤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멈추지 못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그것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27절이 보여 주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억지로 견뎌야 하는 불편한 규칙으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그 계명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 자체에서 좋은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의 욕망을 무조건 빼앗는 금지 목록이 아닙니다. 집회서가 말하는 지혜의 관점에서 계명은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분별하도록 돕는 가르침입니다.

지혜의 목표는 잘못된 욕망을 두려움으로 억누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좋은 것을 알아보고 그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추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시편 19:10–11의 고백과도 통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의 법도와 판단은 금보다 귀하고 꿀보다 달다고 묘사됩니다. 두 본문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단순히 의무나 제약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참으로 좋은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살아가는 사람

집회서 23:1–27 본문 →

따라서 이 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이 언제나 옳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내면까지 살피시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입니다.

어두운 방 안의 사람은 모든 것을 계산했습니다. 어둠이 자신을 가리고, 벽이 자신을 숨기며,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어둠은 자유를 보장하는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를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그 어둠 속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입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을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집회서 23장이 마지막에 보여 주는 지혜는 바로 그 반대의 삶입니다.

주를 경외하는 사람은 모든 빵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망이 달콤하다고 말하는 모든 것을 따라가지도 않습니다.

그는 무엇이 참으로 좋은 것인지 분별하려 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넘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던 사람이, 마침내 하나님의 가르침에서 더 깊은 기쁨을 발견하는 모습입니다.

집회서 23장은 어둠 속에서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앞에서 무엇이 참으로 달콤한지를 알아 가는 사람을 마지막에 남겨 둡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