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28장

이 장의 자리 · 24–43장 · 지혜의 찬양

불을 끄는 입, 사람을 묶는 혀

집회서 28장에서 가장 뜻밖의 장면은 작은 불티 앞에 선 사람입니다.

「둘 다 네 입에서 나온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두 가지 행동이 정반대의 결과를 만듭니다. 입김을 불면 불티가 살아나고, 침을 뱉으면 불이 꺼집니다.

우리는 말로 갈등을 키울 수 있고, 말로 갈등이 더 번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앞 장 마지막에서는 원한과 분노를 붙들고 있는 죄인의 모습이 남았습니다. 28장은 그 사람이 어떤 결과를 맞는지 경고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 이야기는 개인의 원한을 넘어 다툼과 헐뜯는 말, 공동체의 분열, 사람을 짓누르는 혀의 폭력으로 넓어집니다.

처음에 문제는 남이 나에게 저지른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끝에 이르면 질문이 바뀝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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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들린 죄와 풀리는 죄 — 용서가 하나님 앞의 문제가 되는 이유

집회서 28:1–5 본문 →

첫 절은 분명한 경고입니다.

보복하는 사람은 주께 보복을 받을 것이고, 주께서는 그의 죄를 반드시 기억해 두실 것이다.집회서 28:1 · 두루새김

보복하는 사람은 자신이 당한 잘못을 바로잡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이 똑같이 고통받아야 공정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회서는 그 사람의 시선을 상대방에게서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 네 죄도 용서받을 것이다.집회서 28:2 · 두루새김

첫 절에서는 주께서 죄를 반드시 기억해 두십니다. 다음 절에서는 죄를 용서받습니다.

보복을 붙드는 사람은 자기 죄가 붙들리는 상황에 놓이고, 이웃의 잘못을 놓아주는 사람에게는 자기 죄가 풀리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다만 이 대조를 하나님께 용서를 얻기 위해 인간이 먼저 일정한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거래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본문은 그렇게 단순한 교환 공식을 제시하기보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태도의 모순을 문제 삼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화를 품고 있으면서, 주께 낫게 해 달라고 청하느냐?집회서 28:3 · 두루새김

화자는 단순히 법적 책임을 벗어나는 문제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의 상처와 잘못을 가지고 나아가 회복을 구하는 상황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는 자신의 고통을 낫게 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자기와 같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서,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느냐?집회서 28:4 · 두루새김

화자는 잘못을 저지른 이웃을 특별히 못난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용서해야 하는 사람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제시합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피해자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모든 잘못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서로에게 자비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자신도 죽을 몸을 가진 사람이면서 원한을 품고 있다면, 누가 그의 죄를 씻어 주겠느냐?집회서 28:5 · 두루새김

몸을 가진 인간은 연약하며,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고, 자신의 삶을 완전히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는 조금의 자비도 허락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씻어 달라고 구한다면, 그 기도에는 심각한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상대방이 용서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먼저, 나 자신도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게 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언약에 따라 살아가는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레위기 19:18에서는 자기 백성에게 복수하거나 앙심을 품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명령은 여호와야훼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선언하는 말씀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웃을 대하는 방식은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놓인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레위기 19:17은 이웃을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는 일과 이웃의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는 일을 나란히 명령합니다. 따라서 보복을 포기하는 것과 잘못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구별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용서한다고 해서 위험한 관계를 반드시 계속해야 하거나, 피해 사실을 감추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집회서가 직접 문제 삼는 것은 정의로운 해결을 구하는 행동 자체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고통을 되돌려 주려는 보복심과 자비를 거부하는 마음입니다. 그 차이를 놓치면 용서의 가르침이 피해자에게 침묵과 무조건적인 화해를 요구하는 말로 잘못 사용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주제는 마태복음 6:12, 14–15에서 이웃을 용서하는 일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일이 연결되는 모습에서도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이 집회서 28장을 직접 인용한다기보다,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삶과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을 분리할 수 없다는 공통의 주제입니다.

마지막을 기억하라 — 분노가 끝나야 하는 이유

집회서 28:6–7 본문 →

3–5절이 질문을 통해 독자의 양심을 흔들었다면, 6–7절은 반복되는 명령을 통해 새로운 시선을 열어 줍니다.

네 마지막을 기억하고 미워하기를 그쳐라. 죽어 사라질 것을 기억하고 계명을 지켜라.집회서 28:6 · 두루새김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끊임없이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부당했는지,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상대방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집회서는 다른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자신의 마지막입니다.

이것을 죽음 이후의 구체적인 심판 과정에 관한 설명으로 넓힐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끝이 있는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분노에 사로잡히면 지금의 갈등이 삶의 전부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이겨야만 하고, 반드시 되갚아 주어야 하며,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끝까지 증명해야 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는 끝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복수에 바치는 삶이 과연 지혜로운지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집회서는 죽음에 관한 기억을 절망이나 체념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명을 지키라는 명령으로 연결합니다.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원한을 품지 마라. 지극히 높은 이의 언약을 기억하고, 모르고 한 잘못은 눈감아 주어라.집회서 28:7 · 두루새김

사람은 자신의 끝을 기억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떤 관계로 자신을 부르셨는지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지극히 높은 이의 언약」은 용서가 단순히 개인의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관계 안에서 요구되는 행동임을 보여 줍니다.

화자는 모든 악행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특히 상대방이 알지 못하고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넘어가라고 권합니다.

누군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을 때, 그 사람이 일부러 나를 해치려 했는지 아니면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했는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악의가 분명하지 않은 모든 행동을 공격으로 해석하면 갈등은 끝없이 늘어납니다. 반대로 사람에게는 몰라서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불필요한 원한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의 분노를 계속 키우면 그 결과는 개인의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분노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다른 사람의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본문은 그 과정을 불의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불은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집회서 28:8–12 본문 →

8절은 짧고 실용적인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싸움에서 물러나라. 그러면 죄를 줄일 것이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싸움에 불을 붙이고,집회서 28:8 · 두루새김

화자는 싸움에 계속 참여하는 행동 자체가 새로운 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처음에는 정당한 이유로 화가 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투는 과정에서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사실을 과장하거나, 이전의 잘못까지 끄집어내 공격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입은 피해를 해결하려다가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러나는 것은 반드시 상대방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갈등이 커지는 것을 멈추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죄 많은 사람은 친구들 사이를 흔들며,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들 사이에 헐뜯는 말을 퍼뜨리기 때문이다.집회서 28:9 · 두루새김

여기서 싸움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당사자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화롭게 지내던 사람들 사이에 거짓되거나 악의적인 말을 퍼뜨려 관계를 흔듭니다.

불이 땔감의 양에 따라 타오르듯, 사람의 분노도 그가 가진 힘에 따라 커진다. 재산이 많을수록 분노를 더 키우고, 싸움이 거세질수록 그 분노는 더 타오른다.집회서 28:10 · 두루새김

힘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압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실행에 옮길 더 많은 수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싸움이 거세질수록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은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본문을 힘이 있거나 부유한 사람이 반드시 화를 더 잘 낸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분노가 힘과 재산을 만나면 더 큰 피해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누군가가 분노를 품는 것과 그 분노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로 밀어붙일 수 있는 권력을 지니는 것은 다릅니다. 힘과 재산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분노가 미칠 수 있는 범위를 더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부추겨진 말다툼은 불을 지피고, 급하게 치닫는 싸움은 피를 흘리게 한다.집회서 28:11 · 두루새김

이 두 행 사이에는 갈등이 단계적으로 심해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말로 시작된 적대감이 실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불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불티 앞에 선 사람에게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네가 불티에 입김을 불면 타오르고, 그 위에 침을 뱉으면 꺼질 것이다. 둘 다 네 입에서 나온다.집회서 28:12 · 두루새김

이 비유는 사람의 말이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말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거나, 갈등을 해결할 가능성을 비웃는 말은 불에 땔감을 보태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신중한 말은 갈등이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정확히 확인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불필요한 모욕을 삼가는 태도가 그 예입니다.

물론 침묵이 언제나 올바른 선택은 아닙니다. 부당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 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보다, 그 말이 어떤 방향으로 상황을 움직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잠언 15:1에서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거친 말은 노여움을 일으킨다고 가르칩니다. 집회서 28장은 이 가르침을 실제 불티의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불을 끄는 방향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불을 옮겨 붙입니다.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혀 — 둘 사이에 들어와 평화를 무너뜨리는 말

집회서 28:13–16 본문 →

너희는 험담하는 사람과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을 저주하여라. 그들은 평화롭게 지내는 많은 사람을 망하게 했기 때문이다.집회서 28:13 · 두루새김

앞에서는 보복을 포기하고 이웃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험담하는 사람과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을 저주하라고 명령합니다.

먼저 본문이 실제로 강한 저주의 명령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험담을 조심하라는 부드러운 충고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비난의 대상은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미워하는 상대가 아니라, 평화롭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을 파괴하는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앞부분이 개인적 보복의 포기를 요구한다면, 이 구절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헐뜯는 말과 속임수를 강하게 꾸짖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긴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주라는 강한 표현 자체는 독자에게 여전히 어려움을 남깁니다.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혀는 많은 사람을 뒤흔들고, 그들을 이 민족 저 민족으로 흩어 놓았다. 굳게 지킨 도시들을 무너뜨리고, 권세 있는 사람들의 집들을 뒤엎었다.집회서 28:14 · 두루새김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혀」는 원문에서는 문자 그대로 「세 번째 혀」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제삼자의 헐뜯는 말이나 이간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믿으며 지내고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제삼자가 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나쁘게 말했다고 전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말을 비틀어서 전달합니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아무런 적대감이 없었던 사람들이 이 제삼자의 말 때문에 상대방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혀는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관계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파괴적인 말은 반드시 당사자들이 직접 주고받는 말일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는 방식만으로도 관계를 흔들 수 있습니다.

화자는 말이 사람을 무너뜨리는 힘을 보여 주기 위해 사회 전체가 무너지는 극단적인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국가나 공동체의 질서도 결국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협력에 기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되면 협력은 어려워집니다. 지도자들 사이에 불신이 깊어지면 권력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를 적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외부의 적이 없어도 내부에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15절에서는 거대한 도시와 권세 있는 사람들의 집에서 시선이 개인의 삶으로 옮겨 갑니다.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혀는 굳센 여자들을 내쫓고, 그들이 애써 얻은 것을 빼앗았다.집회서 28:15 · 두루새김

이 여성들은 약하거나 무능해서 쫓겨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 여성들이 정확히 어떤 이유로 쫓겨났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쫓겨난 것인지, 공동체에서 밀려난 것인지, 그들이 얻은 것을 빼앗기는 구체적인 과정이 무엇인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은 헐뜯는 말의 피해가 단순히 기분이 상하거나 평판이 나빠지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부당한 말 때문에 자신의 자리와 생계를 잃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굳세고 지혜로운 사람도 다른 사람의 악의적인 말로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험담과 헐뜯는 말의 문제를 피해자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 책임은 다른 사람의 말을 비틀고, 관계를 파괴하며, 부당한 피해를 일으키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 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결코 쉼을 얻지 못하고, 조용히 머물지도 못할 것이다.집회서 28:16 · 두루새김

헐뜯는 말은 누군가가 말한다고 해서 저절로 널리 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 믿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화자는 험담의 피해자가 되지 말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험담이 퍼지는 통로가 되지 말라는 경고도 함께 전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말을 흥미롭게 듣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야기하는 데 즐거움을 느끼며, 누군가에 대한 의심을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는 행동은 헐뜯는 말을 퍼뜨리는 데 참여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혀의 채찍과 쇠사슬 — 보이지 않는 폭력의 무게

집회서 28:17–23 본문 →

17절부터 화자는 말을 사람을 때리고 묶고 죽이는 힘으로 묘사합니다.

채찍에 맞으면 멍이 들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서질 것이다.집회서 28:17 · 두루새김

몸에 가하는 폭력의 이미지로 말이 가하는 폭력의 심각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뼈를 부수는 혀의 이미지는 말이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칼날에 쓰러진 사람은 많지만, 혀 때문에 쓰러진 사람은 그보다 더 많다.집회서 28:18 · 두루새김

화자는 혀가 사람을 무너뜨리는 힘을 칼과 비교하면서, 사람들이 쉽게 가볍게 여기는 말이 얼마나 큰 피해를 일으킬 수 있는지 강조합니다. 칼은 누구나 위험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말은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 위험을 잊기 쉽습니다.

그 혀로부터 보호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그 혀의 거센 분노를 겪지 않은 사람, 그 혀의 멍에를 끌지 않고 그 사슬에 묶이지 않은 사람이다.집회서 28:19 · 두루새김

멍에는 동물이 무거운 짐을 끌도록 하는 도구이고, 사슬은 사람을 묶어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화자는 악한 혀가 사람을 때릴 뿐 아니라 계속 짓누르는 힘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계속되는 헐뜯는 말과 협박, 모욕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일상에서 마음 편히 살아가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제한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혀의 멍에는 쇠로 만든 멍에이고, 그 사슬은 청동으로 만든 사슬이기 때문이다.집회서 28:20 · 두루새김

쇠와 청동은 단단하고 무거운 금속입니다. 본문은 말이 가하는 폭력을 가볍고 금방 사라지는 것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마치 금속으로 만든 사슬에 묶인 것처럼 사람을 오래 짓누를 수 있다고 묘사합니다.

그 혀가 불러오는 죽음은 참혹하다. 차라리 하데스가 그 혀보다 낫다.집회서 28:21 · 두루새김

악한 혀가 가져오는 고통을 너무도 참혹한 것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가 차라리 낫다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고통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비교이지, 고통받는 사람에게 죽음을 선택하라고 권하는 말이 아닙니다.

말은 눈에 보이는 무기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는 사람은 정말 악한 혀에 해를 입지 않는가?

그 혀는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는 사람들을 결코 붙잡지 못하고, 그들은 그 혀의 불꽃에 타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28:22 · 두루새김

그런데 15절에서는 굳센 여자들도 헐뜯는 말 때문에 자신의 삶의 자리와 애써 얻은 것을 잃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는 모든 사람이 헐뜯는 말과 모욕으로 인한 사회적 피해를 전혀 경험하지 않는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를 떠나는 사람들은 그 혀에 걸려들 것이다. 그 혀는 그들 가운데서 타올라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 혀는 사자처럼 그들을 향해 보내지고, 표범처럼 그들을 해칠 것이다.집회서 28:23 · 두루새김

악한 말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도구이지만, 그것을 삶의 방식으로 삼는 사람 자신에게도 파괴적인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악의를 품고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믿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헐뜯는 말을 일삼는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신뢰까지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만든 불은 결국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도 타오르게 됩니다.

23절의 사자와 표범은 이러한 위험을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두 동물은 사람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모습으로, 자신이 다스리지 못한 혀가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 힘이 되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에서 뼈는 사람의 깊은 생명력과 상태를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잠언 17:22는 상한 마음이 뼈를 마르게 한다고 말하고, 시편 32:3에서는 죄를 고백하지 않을 때 뼈가 쇠하는 고통이 묘사됩니다. 21절에서 하데스를 후대의 영원한 형벌 장소에 관한 교리적 설명으로 곧바로 연결할 근거는 없습니다. 22절에서 「붙잡지 못하고」에 쓰인 크라테세는 붙잡거나 지배하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악한 혀가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는 사람을 끝내 지배하거나 죄의 길로 끌고 가지 못한다는 지혜문학의 확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만으로 보호의 범위를 정확히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악한 말의 피해로부터 보호받는다는 의미도 본문의 문면에 남아 있습니다. 지혜문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지닌 안전과 복을 강하게 표현하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고난 없는 삶을 보장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집회서 자체도 의로운 사람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집회서 2:1–6).

금보다 소중하게 지켜야 할 것 — 입에 저울과 빗장을 만들라

집회서 28:24–26 본문 →

24절은 재산을 보호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보아라. 네 재산을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네 은과 금을 단단히 묶어 두어라. 네 말을 달아 볼 저울과 추를 만들고, 네 입에 문과 빗장을 달아라.집회서 28:24 · 두루새김

가시덤불은 외부의 침입을 막는 울타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귀중한 물건을 함부로 밖에 내놓지 않고 안전한 곳에 보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화자는 갑자기 지킬 대상을 말로 바꿉니다.

우리는 금과 은을 잃지 않기 위해 많은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정작 말은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쉽게 내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 말 한마디가 재산보다 더 귀중한 신뢰와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왜 말에는 저울과 추가 필요한가?

저울은 물건의 무게를 재는 도구입니다. 화자는 그 이미지를 통해 말도 내보내기 전에 살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저울은 무조건 무겁게 만들거나 가볍게 만드는 도구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무게를 정확히 재는 도구입니다.

잘못을 지나치게 부풀려서도 안 되고, 자신의 책임을 부당하게 줄여서도 안 됩니다. 상대방을 칭찬할 때도 사실을 비틀어서는 안 되며, 비판할 때도 공정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보면 저울은 단순히 말을 줄이는 도구라기보다 말이 참되고 알맞은지 살피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저울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입에는 문과 빗장이 필요한가?

문은 드나들 수 있게 하면서도 필요할 때 출입을 막는 장치입니다.

빗장은 문이 함부로 열리지 않도록 막습니다. 화자는 입을 영원히 닫아 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과 빗장을 달라고 합니다.

말해야 할 때에는 말하되, 말하기 전에 살펴야 합니다.

침묵해야 할 때에는 침묵하되, 두려움이나 비겁함 때문에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141:3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입술의 문을 지켜 달라고 여호와야훼께 간구합니다. 두 본문은 모두 인간이 자신의 혀를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언제나 옳은 말을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입에 빗장을 달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때로는 분노와 편견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말하기 전에 멈추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숨어서 너를 노리는 자 앞에 넘어지지 마라.집회서 28:26 · 두루새김

말의 위험은 언제나 분명하게 계획된 악행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심코 한 말이나 충분히 생각하지 않은 말 때문에도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도가 선했다고 해서 그 말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혀를 두려워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도 그 혀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저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쥐고스입니다. 저울을 뜻할 수도 있고, 멍에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앞의 19–20절에서 혀의 무거운 「멍에」를 표현할 때도 같은 쥐고스가 사용됩니다. 앞에서는 악한 혀가 다른 사람에게 무거운 멍에를 씌웠습니다. 이제는 자기 말을 달아 볼 저울을 만들어야 합니다. 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말을 하기 전에, 자신의 말을 정확하게 달아 보라는 것입니다.

입 앞에 세운 문

집회서 28:1–26 본문 →

본문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서 시작하지만, 마침내 자신의 입을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는 사람은 분노를 무조건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순간에도 그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살펴야 합니다.

본문의 마지막 그림은 그 선택을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듯 말을 지키려 합니다. 저울과 추를 준비하고, 입 앞에는 문과 빗장을 답니다.

그 문 앞에서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살피고, 상대방에 대한 판단을 돌아보며, 지금 하려는 말의 무게를 잽니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인지, 공정한지,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해치지는 않는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입을 영원히 닫아 두는 빗장이 아니라, 언제 열고 언제 닫아야 할지 아는 지혜입니다.

불티는 여전히 그 앞에 있습니다.

그가 다음에 입을 열 때, 그 불이 더 커질지 아니면 꺼질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