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기 상권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3–8장 · 유다 마카베오의 싸움
평화의 말과 배신
마카베오기 상권 7장에는 평화를 제안하는 사람들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바키데스는 평화로운 말을 보내고, 알키모스는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니카노르는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만나자고 제안합니다. 제사장들은 적국의 지휘관을 평화롭게 맞이하며 왕을 위해 드리는 제사까지 보여 줍니다.
그러나 평화를 가장 많이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살인을 저지르고, 약속을 깨뜨리고, 성전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합니다.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누가 평화를 원하는가가 아닙니다. 누구의 말이 믿을 만하며, 무엇이 참된 평화를 가능하게 합니까?
7장의 끝에서 유다 백성은 승리를 기념하는 새로운 절기를 정합니다. 그런데 서술자는 그 기쁨을 기록한 직후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유다 땅은 며칠 동안 평온했다.」
왜 그토록 큰 승리를 거두고도 평온은 며칠에 불과했을까요?
왕좌에 앉기 위해 다른 왕의 얼굴을 지우다
이야기는 새로운 왕 데메트리오스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데메트리오스는 로마를 떠나 몇 사람만 데리고 해안의 한 도시에 도착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왕이 되었고, 조상들의 왕궁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 일이 데메트리오스에게 알려지자, 그가 말했다. 「그들의 얼굴을 내게 보이지 마라.」마카베오기 상권 7:3 · 본디새김
군대는 그들을 죽이고, 데메트리오스는 왕좌에 앉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쟁자들을 직접 만나거나 심문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얼굴조차 보지 않겠다고 합니다. 왕권의 이전이 협의나 합의가 아니라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장에서 얼굴을 본다는 표현은 뒤에 다시 등장합니다. 니카노르는 유다에게 평화롭게 얼굴을 보자고 제안하지만, 속임수가 드러나자 유다는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7:28–30).
처음에는 왕이 경쟁자의 얼굴을 거부하고, 나중에는 유다가 적의 얼굴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두 장면의 이유는 다릅니다. 왕은 권력의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자리에 있고, 유다는 자신을 속여 붙잡으려는 사람을 피합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만남이 신뢰의 자리가 아니라 권력과 음모의 자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새로운 왕의 즉위와 함께 유다 땅에도 새로운 위기가 찾아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 첫 절의 연대는 본디새김에 「51년」으로 되어 있지만, 앞 장의 연대와 다른 그리스어 본문을 고려하면 셀레우코스 왕조 기원 151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연대를 오늘날의 기원전 연도로 환산하면 대략 기원전 161년 무렵입니다.
대제사장이 되려는 사람이 왕에게 백성을 고발하다
이스라엘에서 율법을 어기고 경건하지 않게 살던 자들이 모두 그에게 왔다. 제사장 직무를 맡고 싶어 하던 알키모스가 그들을 이끌었다.마카베오기 상권 7:5 · 본디새김
알키모스는 먼저 백성을 고발합니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왕의 친구들을 죽이고 자신들을 고향에서 쫓아냈다고 주장합니다. 이어 왕이 신뢰하는 사람을 보내 유다의 파괴 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왕에게 제시하는 기준은 율법이나 성소의 거룩함이 아닙니다. 누가 왕의 친구이며, 누가 왕의 영토에 피해를 주었는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왕국의 정치적 문제로 제시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얻으려 합니다.
본래 대제사장 직분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고 성소의 예배를 담당하는 자리였습니다. 출애굽기 28–29장과 레위기 8–9장은 제사장 직무를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알키모스가 그 직분을 얻는 과정에서는 성소에서의 봉사보다 왕의 인정과 군사적 후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왕은 바키데스를 파견하면서 알키모스에게 제사장 직분을 맡깁니다. 바키데스는 왕국에서 지위가 높고 왕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알키모스에게는 「경건하지 않은」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붙습니다.
제국의 관점에서 바키데스의 충성은 훌륭한 자질입니다. 하지만 그 충성이 유다 땅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응징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알키모스 역시 왕의 지원을 얻지만, 그 지원이 그의 종교적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왕에게 인정받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섬기는 사람은 반드시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바키데스는 큰 군대를 이끌고 떠나 유다 땅으로 왔다. 그는 속임수를 품고 유다와 그의 형제들에게 사절들을 보내 평화로운 말을 전했다.마카베오기 상권 7:10 · 본디새김
독자는 그 말이 속임수라는 사실을 먼저 압니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큰 군대를 이끌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함께 살핍니다. 평화를 말하면서 동시에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위협하고 있다면, 그 말만으로 상대의 의도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와 달리 그들의 말을 믿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깊이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론의 후손을 믿었던 사람들이 살해당하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평화 제안을 거절한 뒤, 서기관들이 알키모스와 바키데스를 찾아갑니다. 그들은 공정한 처리를 요구합니다.
그 가운데 하시딤이 가장 먼저 평화를 구합니다.
이들은 앞서 마타티아스의 저항에 가담했던 집단으로 등장합니다(2:42). 그들은 율법에 충실하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이 군대와 함께 왔으니, 그가 우리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오.」마카베오기 상권 7:14 · 본디새김
이스라엘에서 제사장 직무는 누구나 원한다고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28:1에서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민수기 18장은 그 직무가 아론의 집안에 맡겨졌음을 강조합니다.
하시딤은 바로 이 전통에 의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외국 왕이 보낸 군대라 하더라도,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이 함께 왔다면 적어도 동족에게 부당한 일을 행하지는 않으리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유다의 군사적 저항에 전적으로 동참하는 것만이 율법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신뢰가 이용당합니다.
그는 그들에게 평화로운 말을 하고 이렇게 맹세했다. 「우리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친구들을 해칠 일을 꾀하지 않겠소.」마카베오기 상권 7:15 · 본디새김
그들은 예순 명을 붙잡아 하루에 죽입니다.
그들은 적을 공격하다가 붙잡힌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구하러 왔고, 맹세를 믿었기 때문에 붙잡혔습니다.
신뢰가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신뢰 자체가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 혈통과 그에 걸맞은 행실 사이의 심각한 단절을 보여 줍니다. 아론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제사장 직분의 중요한 조건이지만, 그 혈통 자체가 정의로운 행동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갑자기 시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들은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살과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둘레에 쏟았고, 그들을 묻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마카베오기 상권 7:1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시편 79:2–3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시편 79편은 이방 민족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황폐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백성을 살해한 참상을 탄식합니다. 죽은 이들의 몸이 방치되고 묻어 줄 사람조차 없는 상황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뜻을 넘어, 공동체의 존엄과 질서가 무너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시편 79편에서 참상을 일으킨 자들은 예루살렘을 침범한 이방 민족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외국 군대의 지원을 받은 알키모스가 사건의 중심에 있고, 아론의 후손이라는 신분을 믿었던 사람들이 희생됩니다.
과거 예루살렘을 침범했던 폭력이 이제는 이스라엘 공동체 내부의 종교적 권력 다툼과 결합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시편의 인용은 이 죽음을 단순한 정치적 충돌로 남겨 두지 않습니다. 희생자들을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들로 기억하며, 그들의 죽음을 하나님 앞에 호소해야 할 불의로 제시합니다.
그들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이 온 백성을 덮쳤다. 백성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저들에게는 진실도 공정함도 없소. 저들은 자기들이 한 약속과 맹세를 어겼소.」마카베오기 상권 7:18 · 본디새김
약속을 맺을 수 없고, 그 약속을 믿을 수 없다면 공동체의 관계를 유지할 토대도 무너집니다. 더구나 그 맹세를 한 쪽에는 하나님의 법을 섬겨야 할 제사장이 있습니다.
이제 갈등은 외국의 압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신뢰를 요구하면서 실제로는 그 신뢰를 파괴하는 사람들 때문에 공동체 자체가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의 맹세의 직접적인 발화자가 누구인지는 그리스어 문장에 이름이 다시 나오지 않아 약간의 여지가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신뢰의 근거로 언급된 인물은 알키모스지만, 바키데스 역시 함께 왔으며 군사력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의 발언으로 읽든, 두 사람이 이끈 세력이 맹세를 어기고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이야기의 핵심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의 권위는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가
바키데스는 예루살렘을 떠나 베젯에 진을 칩니다. 그는 자신에게 넘어왔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과 백성 몇몇을 붙잡아 죽이고, 그 시신을 큰 우물에 던집니다.
하시딤은 평화의 맹세를 믿었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키데스의 편에 서거나 그에게 넘어왔던 사람들까지 죽임을 당합니다.
제국에 복종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기대도 보장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키데스는 알키모스에게 그 지방을 맡기고 군대를 남겨 둔 뒤 왕에게 돌아갑니다. 알키모스에게는 이제 대제사장 직분에 대한 왕의 승인과 그 직분을 뒷받침하는 군사력이 주어졌습니다.
알키모스는 대제사장 직분을 차지하려고 싸웠다.마카베오기 상권 7:21 · 본디새김
왕이 제사장 직분을 맡겼다고 해서 그가 공동체 안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권위가 드러납니다. 왕이 부여하는 정치적 지위와 공동체가 인정하는 종교적 정당성입니다.
왕의 명령과 군사력으로 직분을 차지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백성의 신뢰까지 얻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 백성을 어지럽히던 자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었다. 그들은 유다 땅을 장악하고 이스라엘에 큰 타격을 입혔다.마카베오기 상권 7:22 · 본디새김
본문은 알키모스의 제사장 활동이나 성전 예배를 자세히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권력을 얻고 지키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를 기록합니다.
유다는 알키모스와 그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저지른 온갖 악행을 보았다. 그들의 악행은 이방 민족들이 한 짓보다 더 심했다.마카베오기 상권 7:23 · 본디새김
이 표현을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모든 이방인보다 악하다는 일반적 판단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서술자가 비교하는 대상은 지금 알키모스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실제로 행한 일과 앞서 유다 땅에서 벌어진 외국 세력의 폭력입니다. 같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율법과 성소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데도 오히려 자기 백성에게 큰 해를 끼쳤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예레미야 7:4–11에서 예언자는 백성에게 「여호와야훼의 성전」이라는 이름만 반복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불의가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성전이라는 사실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면제해 주는 특권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알키모스가 아론의 후손이며 대제사장 직분을 차지했다는 사실도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맡은 직무는 그 자체로 책임을 요구합니다. 그 직무를 가진 사람이 공동체를 보호하지 않고 해친다면, 그가 차지한 자리의 이름과 실제 행동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생깁니다.
유다는 알키모스와 함께 적에게 넘어간 사람들을 응징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 역시 폭력을 수반합니다. 본문은 유다의 행동을 공동체를 해치는 세력을 제압하는 일로 제시하지만, 모든 개별적인 처벌이 어떠한 절차를 거쳐 이루어졌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알키모스는 유다의 세력이 강해진 것을 보고 다시 왕에게 돌아갑니다.
대제사장 직분을 얻기 위해 왕에게 고발했던 사람이, 이제 그 직분을 지키기 위해 또다시 왕에게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유다 땅에는 새로운 적장이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25절의 본디새김 문면에는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제공된 번역은 알키모스가 유다에게 「맞설 수 있음을 알았다」고 하지만, 표준 그리스어 본문에는 우 뒤나타이, 곧 「맞설 수 없다」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이 읽기는 알키모스가 스스로 유다를 감당하지 못해 왕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의 흐름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다만 본디새김이 따른 인쇄 본문과의 차이는 번역상 남아 있는 문제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 가문에 속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직무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었습니다(사무엘상 2:12–17, 29–30). 반대로 사무엘은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사무엘상 3:1–10). 두 이야기는 제사장 직무의 정당성이 단순한 출신이나 지위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평화롭게 얼굴을 보자는 제안이 함정이 되다
왕이 새로 보낸 지휘관은 니카노르입니다.
그런데 니카노르 역시 큰 군대를 이끌고 오면서 평화의 말을 사용합니다.
「나와 여러분 사이에 싸움이 있어서는 안 되오. 여러분의 얼굴을 평화롭게 보려고 몇 사람만 데리고 가겠소.」마카베오기 상권 7:28 · 본디새김
이 말은 앞에서 바키데스가 사용했던 수법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두 사람 모두 큰 군대를 이끌고 왔고, 두 사람 모두 속임수를 품고 평화를 제안했습니다.
29절에서 두 사람은 실제로 만나 평화롭게 인사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적들은 유다를 붙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인사와 납치 계획이 같은 순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 속임수를 알게 되고 니카노르를 두려워하며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앞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한 지휘관이지만, 위험을 알아차렸을 때 두려워하지 않는 초인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그의 용기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전투에서는 적과 맞설 수 있지만, 상대가 거짓말로 접근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 만남을 피하는 것이 적절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니카노르는 계획이 드러나자 정면 전투에 나섭니다. 카파르살라마 부근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그의 군대가 패해 다윗의 도시로 달아납니다.
그러나 니카노르의 적대감은 이 패배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그의 분노는 유다 개인을 넘어 성소를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32절의 희생자 수는 본디새김에서 약 오천 명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다만 시나이 사본과 일부 그리스어 본문에는 펜타코시오이, 곧 약 오백 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숫자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왕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성전을 불태우겠다고 하다
이 일들이 있은 뒤 니카노르는 시온산으로 올라갔다. 제사장들 가운데 몇몇과 백성의 장로들 가운데 몇몇이 성소에서 나와, 그에게 평화롭게 인사하고 왕을 위해 바치는 번제를 보여 주려 했다.마카베오기 상권 7:33 · 본디새김
왕을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과 왕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니카노르를 맞이한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왕국에 적대적인 반역 집단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려 했을 수 있습니다. 왕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조상들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는 행동으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니카노르는 이 행동에 호의적으로 응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더럽혔고, 거만하게 말했다.마카베오기 상권 7:34 · 본디새김
니카노르는 분노하여 맹세합니다.
그는 격분하여 맹세했다. 「유다와 그의 군대가 지금 내 손에 넘겨지지 않으면, 내가 무사히 돌아올 경우 이 집을 불태우겠다.」 그는 격분한 채 나갔다.마카베오기 상권 7:35 · 본디새김
여기서 협상의 조건이 바뀝니다.
제사장들이 왕을 위해 드리는 번제를 보여 주었지만, 니카노르는 그것을 평화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소를 인질처럼 사용하여 유다의 항복을 요구합니다. 이 위협이 단순한 말로만 들리지 않았던 것은 앞서 예루살렘 성전이 실제로 약탈당하고 더럽혀졌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21–24, 54–59).
니카노르가 분노하며 떠난 뒤, 제사장들은 성소 안으로 들어가 제단과 성전 앞에 섭니다.
그들은 울며 기도합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이 집 위에 불리고, 이 집이 당신의 백성을 위한 기도와 간구의 집이 되도록 이 집을 택하셨습니다.」마카베오기 상권 7:37 · 본디새김
니카노르는 성전을 자기 손으로 불태울 수 있는 건물로 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백성의 기도를 받으시는 집으로 바라봅니다.
한쪽은 성전을 파괴할 수 있는 자신의 권력을 말하고, 다른 한쪽은 성전을 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합니다.
제사장들은 이어 니카노르와 그의 군대가 칼에 쓰러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미 평화를 요청했던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성소를 지키는 제사장들은 공개적으로 모욕당했으며, 이제 성전을 불태우겠다는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기도를 모든 종교적 갈등에서 적의 죽음을 구해도 된다는 일반적인 명령으로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특정한 역사적 위기 속에서 드려진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카노르는 자신이 무사히 돌아오면 성전을 불태우겠다고 맹세합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그 모욕적인 말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미래 행동을 분노 속에서 선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합니다.
그 대조는 유다가 전투를 앞두고 드리는 기도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라 6:9–10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오는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를 지원하도록 명령하며, 제사장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도록 합니다. 특히 「더럽혔다」는 표현은 성소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모욕당한 사건의 심각성을 더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신체적 행동을 했는지는 이 절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지만, 그들을 부정하게 만들거나 수치스럽게 대우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열왕기상 8:29–30에서 솔로몬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하신 곳을 향해 드리는 기도를 들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가두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은 바로 앞에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열왕기상 8:27). 성전이 중요한 이유는 건물 자체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그곳에 두시고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승리를 보장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며 기도한다
니카노르는 벧호론에 진을 치고 시리아 군대의 지원을 받습니다. 유다는 삼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아다사에 진을 칩니다.
전투 직전 유다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왕이 보낸 자들이 모욕하는 말을 했을 때, 당신의 천사가 나가 그들 가운데 십팔만 오천 명을 쳤습니다.」마카베오기 상권 7:41 · 본디새김
이것은 열왕기하 18–19장과 이사야 36–37장에 기록된 아시리아 왕 산헤립의 침공을 가리킵니다. 아시리아의 사신들은 예루살렘을 위협하면서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니카노르 역시 성전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하고 모욕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기도는 단순히 과거의 압도적인 승리를 재현해 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그는 과거에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모욕하던 강대한 적에게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를 기억합니다.
「오늘도 이와 같이 저 군대를 우리 앞에서 부수어 주십시오. 남은 자들이 그가 당신의 성소를 거슬러 악하게 말했음을 알게 해 주시고, 그의 악행에 따라 그를 심판해 주십시오.」마카베오기 상권 7:42 · 본디새김
전투의 결과가 하나님의 성소를 향해 오만하게 말했던 자의 잘못을 드러내는 사건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가하고 싶은 처벌을 임의로 선포하는 대신, 그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기도와 전투는 이 장에서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싸울 준비를 하면서도 결과를 자신의 능력만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열왕기하 19장에서는 천사가 나가 적군을 칩니다. 하지만 마카베오기 상권 7장에서 곧이어 벌어지는 전투에는 천사가 직접 나타나지 않습니다. 서술자는 유다의 기도와 뒤이은 승리를 연결하여 기록하지만, 산헤립 시대와 동일한 방식의 기적이 반복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과거의 기적을 자신의 손에 쥔 보증서처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기적을 행하셨던 하나님께 다시 도움을 구합니다.
6장의 엘르아살은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7장의 하시딤은 율법을 존중하는 믿음을 가지고 평화를 구했지만 살해당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함께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7장의 승리를 단순히 올바르게 기도했으므로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다는 공식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마친 뒤 이야기는 곧바로 전투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산헤립이 보낸 사신들은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백성에게 항복을 요구하면서, 그들의 하나님도 아시리아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수 없다고 조롱했습니다(열왕기하 18:28–35). 히스기야는 그 말을 듣고 성전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임을 고백하고, 아시리아 왕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들으시고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열왕기하 19:14–19). 그 뒤 열왕기하 19:35는 여호와야훼의 천사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고 기록합니다.
성전을 불태우겠다고 맹세한 사람의 오른손
아달월 열사흗날, 두 군대가 맞붙습니다.
니카노르의 군대는 무너지고, 니카노르 자신은 전투에서 가장 먼저 쓰러집니다.
니카노르가 쓰러지자 군사들은 무기를 내던지고 달아납니다.
유다의 군사들은 도망치는 적을 아다사에서 가자라에 이르기까지 추격합니다. 주변 유대 마을의 주민들까지 나와 적군을 에워쌉니다. 달아나던 군대는 진로가 막혀 되돌아가다 추격군과 다시 맞닥뜨리고, 결국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처음에는 유다가 삼천 명의 군사와 함께 진을 쳤지만, 마지막에는 주변 마을 사람들이 전투에 참여합니다. 승리가 유다와 그의 직속 군사들에게만 속한 일이 아니라 유다 땅의 공동체 전체가 함께 경험한 사건으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군사들은 노획물과 노략물을 거두고, 니카노르의 머리와 그가 거만하게 뻗었던 오른손을 잘라 냈다. 그것들을 가져다가 예루살렘 곁에 내걸었다.마카베오기 상권 7:47 · 본디새김
앞서 니카노르는 유다를 자신의 손에 넘겨 달라고 요구하며 성전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했습니다(7:35). 그는 자신의 권력이 성소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은 그의 오른손을 그 오만한 행동과 연결합니다.
니카노르가 성전을 향해 행사하려 했던 권력이 이제는 무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다의 얼굴을 평화롭게 보겠다고 했지만 그 만남을 납치의 함정으로 이용했습니다. 이제 그의 머리는 예루살렘 곁에 공개적으로 내걸립니다.
처음에 평화의 만남을 가장했던 사람의 얼굴이 마지막에는 패배의 표지가 된 것입니다.
적장의 머리와 손을 자르고 공개적으로 내거는 행위는 고대 전쟁에서 승리를 드러내고 적의 권력을 모욕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행위의 잔혹함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승리의 기쁨과 함께 실제 전쟁이 수반한 폭력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장면을 오늘날 신앙인이 적대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직접적인 행동 지침으로 삼는 것은 본문의 역사적 성격을 넘어섭니다. 본문은 고대의 전쟁 승리와 그 승리를 기념한 방식을 기록하며, 모든 시대의 독자에게 그러한 행위를 반복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전쟁의 현장에서 백성의 기쁨으로 옮겨갑니다.
한 번의 승리를 해마다 기억하게 하다
니카노르가 패배하자 백성은 몹시 기뻐합니다.
그들은 그날을 큰 기쁨의 날로 지내고, 해마다 아달월 열사흗날을 기념하기로 정합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4장에서 유다와 그의 동료들은 성소를 다시 봉헌하고, 그날을 해마다 기념하기로 했습니다(4:59).
성소 봉헌 기념일은 빼앗겼던 예배의 자리를 회복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아달월 열사흗날은 그 성소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던 적장의 패배를 기억합니다.
그들에게 성소는 단순히 지켜야 할 국가적 상징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자신들의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니카노르의 패배는 단지 한 적장을 죽인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과 예배의 자리를 다시 위협하던 위험에서 벗어난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서술자는 축제의 기쁨을 기록한 뒤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덧붙입니다.
유다 땅은 며칠 동안 평온했다.마카베오기 상권 7:50 · 본디새김
새로운 왕은 여전히 왕좌에 앉아 있습니다. 알키모스가 추구하던 제사장 권력의 문제도 이 장에서 완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유다 땅을 둘러싼 제국의 지배 구조 역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니카노르라는 한 사람은 쓰러졌지만, 그를 파견했던 권력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며칠 동안」이라는 표현은 유다 백성이 경험한 평온의 소중함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아달월에 구원을 경험한 날을 기념한다는 점에서는 에스더 9:17–22의 부림절과도 주제적 유사성이 있습니다. 다만 마카베오기 상권은 여기서 부림절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본문 자체가 설명하는 이유는 니카노르의 패배와 그로 인한 백성의 기쁨입니다.
평화가 며칠에 불과하더라도
평화로운 말이 사람들을 속이는 도구가 되고, 맹세가 학살의 전주곡이 되며, 하나님을 섬겨야 할 직분이 권력 다툼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이 장은 모든 말을 불신하라는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제사장들은 계속 기도하고, 유다도 계속 하나님께 말합니다. 그들이 붙드는 것은 사람의 말이 모두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과거 행적과 약속이 여전히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고 정당한 종교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을 옳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한 약속을 지키는지,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는지, 자신의 지위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훼손하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시딤의 비극은 신앙의 전통을 존중하는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전통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동까지 분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아달월 열사흗날, 예루살렘 곁에는 니카노르의 머리와 오른손이 내걸려 있습니다. 그가 성전을 위협하며 거만하게 뻗었던 손입니다. 그 아래에서 백성은 기뻐하고, 그날을 해마다 기억하기로 합니다.
「유다 땅은 며칠 동안 평온했다.」 그 며칠은 모든 싸움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위협받고 배신당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성소를 지키고 다시 기뻐할 수 있었던 실제의 시간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