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기 상권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9–12장 · 요나단이 이끈 때

용사는 쓰러지고 칼은 멎다

마카베오기 상권 9장에는 두 형제가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다는 적군에게 포위될 위험 앞에서 도망치기를 거부합니다. 남은 군사들이 지금은 목숨을 구하고 훗날 다시 싸우자고 설득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형제들을 위해 용감하게 죽자.」

그런데 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된 동생 요나단은 비슷하게 적군에게 포위되자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는 싸우다가 요단강에 뛰어들어 헤엄쳐 달아납니다. 그리고 살아남아 공동체를 다시 세웁니다.

한 사람은 달아나지 않음으로써 용기를 보여 주고, 다른 사람은 달아남으로써 백성을 이끌 기회를 보존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은 선택이었을까요?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119장 본문 읽기 →

삼천 명이 팔백 명으로 줄어들다

마카베오기 상권 9:1–7 본문 →

데메트리오스 왕은 니카노르의 패배를 듣고 다시 바키데스와 알키모스를 보냅니다.

앞 장에서 유다는 로마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제 셀레우코스 왕국이 유다를 공격하면 로마도 개입할 수 있다는 외교적 약속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9장의 첫 장면은 그 약속이 적군의 새로운 침공을 즉시 막아 주지는 못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번에 보낸 군대는 보병 이만 명과 기병 이천 명입니다. 바키데스는 여러 지역을 거쳐 예루살렘에 진을 치고, 다시 베레아로 향합니다.

유다는 엘라사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정예 병사 삼천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군의 규모를 확인하자 사람들이 진영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결국 남은 병사는 팔백 명뿐입니다.

유다는 자기 군대가 흩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고, 싸움은 그를 압박했다. 그들을 다시 모을 시간이 없어 그의 마음은 무너졌다.마카베오기 상권 9:7 · 본디새김

「마음은 무너졌다」는 표현은 단순히 전투 의욕이 조금 줄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의지하던 군대가 눈앞에서 흩어지는 상황이 그에게 얼마나 큰 타격이었는지를 드러냅니다.

앞서 그는 적군의 수가 많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3:18–22). 그러나 지금은 그 자신도 절망적인 상황의 무게를 느낍니다.

그는 승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상황에서 싸울 것인지 물러날 것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때가 다가왔다」 — 유다의 마지막 선택

마카베오기 상권 9:8–18 본문 →

유다는 남은 사람들에게 적을 치러 나가자고 말합니다.

그는 기운이 빠진 채 남은 이들에게 말했다. 「일어나 우리에게 맞서는 자들을 치러 올라가자. 혹시라도 우리가 그들과 싸울 수 있다면 말이다.」마카베오기 상권 9:8 · 본디새김

「혹시라도」라는 표현에는 불확실성이 담겨 있습니다. 유다는 지금 승리를 장담하지 않습니다. 싸울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면서 전투를 제안합니다.

그들은 그를 말리며 말했다. 「우리는 도저히 싸울 수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 목숨을 구합시다. 우리 형제들과 함께 돌아와 그들과 싸웁시다. 우리는 수가 적습니다.」마카베오기 상권 9:9 · 본디새김

지금은 병력을 보존하고, 다른 형제들과 합류하여 다시 싸우자는 전략입니다. 적군과 자기 군대의 수를 고려하면 현실적인 판단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이 제안을 명시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른 결정을 내립니다.

유다가 말했다. 「내가 그들에게서 달아나는 그런 일은 결코 없기를 바란다. 우리의 때가 다가왔다. 우리 형제들을 위해 용감하게 죽자. 우리의 명예에 비난거리를 남기지 말자.」마카베오기 상권 9:10 · 본디새김

그가 처한 상황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며, 그렇다면 형제들을 위해 용감하게 맞서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전투가 시작됩니다.

바키데스는 우익에 자리 잡고 있고, 기병과 궁수와 물매꾼들이 조직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양쪽에서 나팔이 울리고, 군대의 움직임으로 땅이 흔들립니다. 서술자는 전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유다는 적군의 주력이 오른쪽에 있음을 보고 용감한 병사들을 모아 공격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우익 부대를 무너뜨리고 추격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성공이 새로운 위험을 가져옵니다.

적의 좌익 부대가 방향을 돌려 유다와 그의 병사들을 뒤에서 쫓습니다. 앞쪽의 적을 무너뜨렸지만, 다른 쪽의 적이 후방을 공격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유다가 쓰러졌고 나머지는 달아났다.마카베오기 상권 9:18 · 본디새김

유다가 어떻게 마지막 순간을 맞았는지 자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앞서 그의 마지막 결심과 전투가 자세히 묘사되었던 것에 비하면 죽음의 순간은 매우 짧습니다. 이 간결함은 오히려 죽음의 무게를 더합니다.

유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동체를 위해 싸웠지만, 그의 죽음은 전투의 승리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병사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면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가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그가 자기 형제들을 위해 죽음의 위험을 감수했고, 이스라엘이 그를 구원자로 기억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유다는 단순히 오늘 전투에서 죽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때가 이르렀을 수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죽음을 명령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하여 용사가 쓰러졌는가」 — 한 사람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애가가 되다

마카베오기 상권 9:19–22 본문 →

유다가 죽은 뒤 요나단과 시몬은 그의 시신을 거두어 모데인으로 데려갑니다.

모데인은 유다의 아버지 마타티아스와 형제들의 저항이 시작된 곳입니다(2:1, 15–28). 이제 유다는 그곳에 있는 조상들의 무덤에 묻힙니다.

마타티아스가 우상 제사를 거부하고 광야로 떠났을 때, 유다의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전투를 거쳐 성소를 되찾고 백성을 구한 뒤, 그는 다시 조상들의 무덤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살아 있는 유다가 아니라 그의 시신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용사가 쓰러졌는가, 이스라엘을 구하던 이가.」마카베오기 상권 9:21 · 본디새김

그는 단순히 전쟁에 능한 장수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하던 이」입니다. 본문은 유다를 하나님과 같은 구원자로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싸우고 여러 위기에서 그들을 건져 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유다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치른 전쟁, 그가 세운 무공과 그의 위대함은 기록되지 않았다.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마카베오기 상권 9:22 · 본디새김

성경의 왕들에 대한 기록에서도 왕의 나머지 행적을 다른 기록에 남겨 두었다는 식의 맺음말이 자주 등장합니다(열왕기상 14:19, 29 등). 마카베오기 상권은 비슷한 역사 서술의 방식을 사용하면서, 유다의 행적이 기록된 것보다 훨씬 많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서술자는 그 모든 일을 기록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과 애가를 남기고 이야기를 다음 인물에게 넘깁니다.

유다의 위대함은 그가 죽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도 이스라엘이 그의 삶을 구원의 역사로 기억한다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무엘하 1장에서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듣고 애가를 부릅니다. 그 노래에는 「어찌하여 용사들이 쓰러졌는가」라는 탄식이 반복됩니다(사무엘하 1:19, 25, 27). 마카베오기 상권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여 유다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다윗의 애가에서 죽은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었습니다. 마카베오기 상권에서 죽은 유다는 왕이 아닙니다. 그는 외세에 저항하며 백성을 이끌었던 군사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도 왕의 죽음에 버금가는 국가적인 슬픔으로 묘사됩니다.

예언자가 없는 시대에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다

마카베오기 상권 9:23–31 본문 →

유다가 죽자 상황은 급격히 나빠집니다.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심한 기근이 찾아옵니다. 바키데스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지역의 주인으로 세웁니다.

바키데스는 단순히 군대를 주둔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에 선 사람들을 지역의 지배층으로 세웁니다. 이제 유다를 따르던 사람들은 외국 군대뿐 아니라 자기 지역의 권력자들에게도 감시와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이 유다의 친구들을 찾아 바키데스에게 끌고 가자 바키데스가 벌하고, 끌고 온 자들은 조롱했다고 기록합니다. 기근도 이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24절은 그 땅 사람들이 적대 세력의 편으로 넘어갔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모든 사람이 신념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배신했다고 읽을 수는 없습니다. 기근과 권력의 압박이 겹친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개인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큰 환난이 닥쳤다. 예언자가 그들에게 더는 나타나지 않게 된 날부터 그때까지 없었던 환난이었다.마카베오기 상권 9:27 · 본디새김

구약에서 예언자는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전하고, 왕과 백성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판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카베오기 상권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 그러한 예언자의 권위 있는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인식합니다.

이 문제는 이미 4:46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유다의 일행은 더럽혀진 제단의 돌들을 처리하면서, 예언자가 나타나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줄 때까지 적절한 곳에 보관해 두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언자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현실을 인정합니다. 유다를 대신할 인물을 하나님이 직접 지명하셨다는 새로운 계시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유다의 친구들이 모여 요나단을 선택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오늘 그대를 골라 세웠소. 그를 대신해 우리의 우두머리와 지도자가 되어 우리의 전쟁을 치르도록 하려는 것이오.」마카베오기 상권 9:30 · 본디새김

이들은 먼저 유다와 같은 사람이 없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는 그 일을 이어 가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위대한 인물을 잃은 공동체는 그 사람을 잊어서도 안 되지만, 그의 부재 때문에 모든 행동을 멈출 수도 없습니다.

요나단은 그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본문은 그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았다거나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그를 선택했고, 그가 그 책임을 받아들였다고 기록합니다.

예언자의 새로운 말씀이 기록되지 않은 자리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남아 있는 책임을 함께 분별하고 지도자를 세웁니다.

그러한 선택이 언제나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이 없다는 이유로 인간의 판단과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요나단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광야로 달아난 지도자와 혼인 잔치의 비극

마카베오기 상권 9:32–42 본문 →

요나단이 지도자가 되자 바키데스는 그를 죽이려 합니다.

요나단과 시몬은 이를 알고 드고아 광야로 달아납니다. 그들은 아스팔 물웅덩이 곁에 진을 칩니다.

처음 저항을 시작할 때도 그들은 왕의 명령을 피해 산과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여러 해 동안 싸워 온 유다가 죽은 뒤, 그의 동생들이 다시 광야로 들어갑니다.

성소는 이미 정화되었고, 이스라엘에는 유다의 싸움을 통해 형성된 공동체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힘은 여전히 강하며, 요나단은 안전한 도시에 머물러 지도력을 행사할 처지가 아닙니다.

그는 다시 도망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광야에서 요나단은 먼저 많은 짐을 처리하려 합니다. 그는 형제 요한을 보내 나바테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짐을 맡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앞서 마카베오기 상권 5:25에서도 유다의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살아남으려면 군사적 용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식량과 물자, 짐을 옮길 방법과 그것을 맡길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요나단의 지도력은 처음부터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비극으로 끝납니다.

메드바의 얌브리 가문 사람들이 요한을 붙잡고 그의 물건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본문은 요한이 붙잡힌 뒤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38절과 42절에서 형제들이 그의 피를 기억하고 복수했다고 기록하므로, 요한이 살해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를 잃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제들은 다시 요한을 잃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뒤, 얌브리 가문이 혼인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신부는 유력한 가문의 딸이고, 큰 호위 행렬과 함께 이동합니다. 신랑과 그의 친구들, 형제들이 악기를 가지고 마중 나갑니다. 손북과 악사들이 등장하고,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립니다.

한쪽에서는 형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혼인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요나단과 시몬은 산에 숨어 있다가 그 행렬을 공격합니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남은 사람들은 달아납니다. 요나단 일행은 물건들을 빼앗습니다.

혼인 잔치는 애도로, 그들의 악사 소리는 애가로 바뀌었다.마카베오기 상권 9:41 · 본디새김

혼인 잔치는 공동체가 미래를 기대하고 새로운 가정을 세우는 기쁨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애도의 자리로 바뀐다는 것은 일상적인 삶 자체가 폭력으로 파괴되었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요한을 살해한 얌브리 가문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지만 혼인 행렬에 참여한 개개인이 요한의 살해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서술자는 요나단 일행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려 줍니다. 그렇다고 그 사건에 연루된 모든 사람의 책임을 각각 판단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폭력에 대한 보복이 다시 새로운 죽음과 애도를 낳습니다.

요나단은 살아남아 공동체를 이끌지만, 그가 속한 세계는 아직 평화와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바키데스의 군대가 다시 그를 추격해 옵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7:34와 25:10에서도 심판과 황폐함을 묘사하면서 신랑과 신부의 기뻐하는 소리가 끊어지는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요단강에 뛰어든 사람들 — 살아남는 용기

마카베오기 상권 9:43–49 본문 →

바키데스는 큰 군대를 이끌고 요단강까지 옵니다.

요나단이 자기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제 일어나 우리의 목숨을 위해 싸우자. 오늘은 어제나 그제와 같지 않다.」마카베오기 상권 9:44 · 본디새김

유다는 「우리 형제들을 위해 용감하게 죽자」고 말했습니다. 요나단은 「우리의 목숨을 위해 싸우자」고 말합니다. 유다는 죽음이 다가왔다고 판단했고, 그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지 강조했습니다. 요나단은 적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를 강조합니다.

「보라, 우리의 앞에서도 뒤에서도 싸움이 닥쳐온다. 이쪽저쪽에는 요단의 물이 있고 늪과 숲도 있어 빠져나갈 곳이 없다.」마카베오기 상권 9:45 · 본디새김

요나단은 자신들의 처지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는 백성에게 곧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하지 않고, 퇴로가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니 이제 너희가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출되도록 하늘을 향해 부르짖어라.」마카베오기 상권 9:46 · 본디새김

요나단은 지금 구체적인 탈출 방법을 제시하기 전에 하나님께 구원을 구하라고 합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요나단은 바키데스를 공격하려 합니다. 바키데스는 뒤로 물러나 그 공격을 피합니다.

그다음 요나단과 그의 일행은 요단강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헤엄쳐 강 건너편으로 갑니다. 적군은 그들을 따라 강을 건너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요단강은 장애물이었지만, 동시에 적군의 추격을 막아 주는 경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싸웠고, 물에 뛰어들었으며, 헤엄쳐 달아났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과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어느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믿음이 좋은 인물이라고 판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용기일 수 있습니다. 다른 상황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물러나는 것이 필요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충성은 반드시 그 자리에서 죽는 것으로만 증명되지 않습니다.

요나단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을 직접 부르지 않고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다 역시 3:18–19에서 승리가 군대의 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도움에 달려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호수아 3장에서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강의 흐름을 멈추게 하셔서 백성이 마른 땅을 밟고 건넜습니다. 그러나 지금 요나단 일행에게는 강물이 멈추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여호수아 시대의 요단강 도하가 그대로 반복된 사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도 그런 직접적인 연결을 선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였던 요단강이 이번에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탈출의 통로가 되었다는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군대는 성벽을 세우고, 대제사장은 성벽을 허물다

마카베오기 상권 9:50–57 본문 →

바키데스는 요나단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채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여리고, 엠마오, 벧호론, 벧엘 등 여러 지역에 높은 성벽과 성문과 빗장을 갖춘 방어 시설을 설치합니다. 또한 예루살렘과 벳술, 가자라와 성채를 요새화하고, 군대를 배치하며 식량을 비축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적대하려고 그곳들에 수비대를 두었다.마카베오기 상권 9:51 · 본디새김

성벽을 세우는 일이 언제나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바키데스가 세운 성벽은 이스라엘을 감시하고 제압하기 위한 군사적 시설입니다. 여기에는 전투에서 한 번 이기는 것과 한 지역을 지속적으로 지배하는 것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들은 그 땅 지도자들의 아들들을 볼모로 잡아 예루살렘 성채에 가두었다.마카베오기 상권 9:53 · 본디새김

지역 지도자들의 자녀들을 인질로 삼는 것은 부모와 공동체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수단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 군사적 지배는 개인과 가족의 삶 깊숙이 들어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54절은 다른 종류의 성벽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알키모스가 성소 안뜰의 담을 허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본문은 그가 「예언자들이 만든 것들」을 허물었다고 덧붙입니다.

그런데 그가 담을 허물기 시작하자 뜻밖의 일이 발생합니다.

그때 알키모스가 타격을 입었고, 그가 벌이던 일은 가로막혔다. 그의 입이 막히고 몸이 마비되어 더는 한마디도 하거나 자기 집안에 관해 지시할 수 없었다.마카베오기 상권 9:55 · 본디새김

성소에 무엇을 할 것인지 명령하던 사람이 자기 집안에 관한 명령도 내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성소의 담을 허물려는 행동과 바로 연결하여 기록합니다. 따라서 독자는 그의 마비와 죽음을 그가 벌이던 일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띤 사건으로 읽게 됩니다.

알키모스의 권력은 그가 원하는 만큼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허물려던 일은 중단되었고, 그는 큰 고통 속에 죽습니다.

바키데스는 알키모스가 죽은 것을 보고 왕에게 돌아갔다. 유다 땅은 두 해 동안 평온했다.마카베오기 상권 9:57 · 본디새김

여기서 평온은 유다가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 직분을 차지하려 했던 알키모스가 죽었고, 그를 뒷받침하던 바키데스가 철수했기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을 압박하던 정치적·종교적 권력의 결합이 흔들리자 공동체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평온은 아직 견고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일부 해석에서는 이 담이 성소의 구별된 영역을 나타냈으며, 알키모스의 행동이 기존의 거룩한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였다고 이해합니다. 그러한 해석은 성소의 구조와 관련된 맥락에서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담이 정확히 어떤 기능을 했으며, 알키모스가 그것을 허물려 한 구체적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예언자들이 만든 것들」이라는 표현은 성소의 담을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과 연결된 것으로 제시합니다. 바벨론 유배 이후 성전을 다시 세울 때 학개와 스가랴 같은 예언자들이 그 일을 격려했다는 사실은 에스라 5:1–2에서 확인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알키모스가 허물려던 담을 그 예언자들이 직접 건축했다는 뜻인지까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55절은 하나님이 직접 그를 치셨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타격을 입었고」라는 수동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질병에 걸렸는지, 어떤 의학적 원인으로 마비되었는지를 특정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개입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 전쟁을 불러온 사람들

마카베오기 상권 9:58–69 본문 →

두 해 동안 평온이 이어지자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다시 모의합니다.

그들은 요나단과 그의 사람들이 안심하고 평온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문제 삼습니다. 그리고 바키데스를 다시 불러들여 그들을 하룻밤에 붙잡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요나단 일행에게 찾아온 평온은 누군가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기회로 보였습니다.

바키데스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큰 군대를 이끌고 옵니다. 그는 유다 땅의 동맹자들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요나단 일행을 붙잡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계획이 드러나면서 기습은 실패합니다.

요나단 일행은 음모를 주도한 사람들 가운데 약 오십 명을 붙잡아 죽입니다. 본문은 그들을 악행에 앞장선 자들로 규정하며, 요나단의 행동을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음모에 대한 대응으로 기록합니다. 그러나 개별적인 처벌 과정이나 절차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요나단과 시몬은 광야의 벳바시로 물러납니다.

요나단은 허물어진 부분을 다시 세우고 요새를 튼튼하게 합니다. 바키데스는 그곳을 포위하고 공성 기계를 만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나단과 시몬이 역할을 나눕니다.

요나단은 시몬을 성 안에 남겨 두고 소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는 주변의 적대 세력을 공격합니다. 한편 시몬은 성 안에서 나와 바키데스의 공성 기계를 불태웁니다.

유다는 적의 주력을 향해 용감하게 돌격했지만 다른 쪽에서 들어온 공격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요나단과 시몬은 성 안과 밖에서 역할을 나누고, 적군의 공성 능력을 약화시키면서 싸웁니다. 한 사람의 돌격보다 형제들의 협력과 상황에 맞는 대응이 강조됩니다.

그들은 바키데스와 싸웠고, 바키데스는 그들에게 참패했다. 그들은 그를 몹시 몰아붙였다. 그의 계획과 침공이 헛되었기 때문이다.마카베오기 상권 9:68 · 본디새김

그는 요나단을 붙잡고 저항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유다 땅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병력을 소모하고 공격을 계속해야 하는 부담만 커졌습니다.

바키데스와 그의 군대는 그에게 그 땅으로 오라고 권했던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게 크게 노하여, 그들 가운데 많은 이를 죽였다. 바키데스는 자기 땅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마카베오기 상권 9:69 · 본디새김

그들은 바키데스의 힘을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키데스 역시 자신의 군사적·정치적 이해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계획이 실패하자 그는 자신을 불러들인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

도움을 청한 사람이 더 강한 권력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요나단은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대목은 앞서 8장에서 유다가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사건과도 생각해 볼 만한 대조를 이룹니다. 유다는 자기 공동체에 가해지는 압제를 벗어나기 위해 로마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습니다. 반면 이 사람들은 요나단과 그의 동료들을 제거하기 위해 바키데스를 불러들였습니다. 따라서 두 행동을 같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외부 권력의 힘을 빌리는 사람은 그 권력이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리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적을 죽이려 하지 않고 사절을 보내다

마카베오기 상권 9:70–72 본문 →

바키데스가 철수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요나단은 사절을 보냅니다.

그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바키데스와 평화를 맺는 것, 그리고 사로잡힌 사람들을 돌려받는 것입니다. 그는 바키데스가 약해진 것을 알고도 반드시 끝까지 추격하여 죽이려 하지 않습니다.

요나단은 군사적 성공을 협상으로 연결합니다.

바키데스는 이를 받아들여 요나단의 말대로 했다. 또 자기가 살아 있는 모든 날 동안 그를 해칠 뜻을 품지 않겠다고 그에게 맹세했다.마카베오기 상권 9:71 · 본디새김

7장에서 바키데스와 알키모스가 이끄는 세력은 평화로운 말을 하고 맹세한 뒤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또한 니카노르는 평화를 말하면서 유다를 붙잡으려 했습니다. 따라서 요나단에게 적장의 평화 약속은 쉽게 믿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72절에서 그는 실제로 포로들을 돌려줍니다. 그리고 자기 땅으로 돌아갑니다. 서술자는 그가 다시는 그들의 지역으로 오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평화는 맹세했다는 사실만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약속한 일을 실제로 행할 때 비로소 그 약속의 무게가 드러납니다.

이것은 바키데스의 과거 악행을 지워 주지는 않습니다. 그가 저지른 학살과 박해는 여전히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과거의 잘못이 있었다는 이유로 가능한 모든 협상을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지금 포로들을 구하고 싸움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붙잡습니다.

요나단은 싸워야 할 때 싸웠지만,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순간에는 사절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큰 칼이 멎었다」 — 전쟁의 지도자에서 백성의 재판관으로

마카베오기 상권 9:73 본문 →

이스라엘에서 큰 칼이 멎었다. 요나단은 믹마스에 살았다. 그는 백성의 일을 판결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에서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없애 버렸다.마카베오기 상권 9:73 · 본디새김

「큰 칼이 멎었다」는 표현은 군사적 충돌이 중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칼은 전쟁과 살상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이제 이야기는 적군을 물리치는 일에서 공동체를 다스리는 일로 이동합니다.

지금까지 요나단은 대부분 달아나고, 싸우고, 요새를 지키고, 적과 협상하는 인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백성의 문제를 판단하고 질서를 세우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요나단은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유다 땅 곳곳에는 셀레우코스 왕국의 군사적 영향력이 남아 있었고, 요나단의 활동 범위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제한된 상황에서도 그는 백성의 일을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본문은 그가 이스라엘에서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없애 버렸다고 덧붙입니다. 이 표현은 공동체 내부의 갈등이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요나단의 통치는 단순히 외국 군대가 물러갔다고 시작되는 평온한 행정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 내부의 적대 세력을 제압하는 일까지 포함했습니다.

이 행동의 구체적인 방식과 범위를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어떤 절차를 거쳐 추방되거나 제거되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지도력은 적을 이기는 능력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전쟁이 멈춘 뒤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세워 갈 것인가까지 포함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사사기 2:16–19에 따르면 사사들은 외적의 압박에서 이스라엘을 구하고 백성을 이끌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백성의 삶과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는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요나단을 구약의 사사들과 완전히 동일한 제도를 가진 인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마카베오기 상권은 그를 정식으로 사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적의 위협에서 살아남아 백성의 일을 판결하기 시작했다는 마지막 묘사는 사사들의 활동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은 이야기

마카베오기 상권 9:1–73 본문 →

본문은 유다의 죽음을 잘못된 판단의 결과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요나단의 탈출을 비겁한 행동이라고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공동체를 지키려 했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과 선택은 달랐습니다. 공동체를 지키는 일이 한 사람의 용맹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그 한 사람의 생애가 끝난 뒤에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본문은 두 사람의 행동을 모두 무조건적인 모범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특히 요나단의 보복과 내부 반대자들에 대한 처벌에는 폭력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 행동들을 이해하는 것과 오늘의 신앙생활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는 믹마스에 살면서 백성의 일을 판결하기 시작합니다. 전쟁터에서 나팔을 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제 한 지역에서 공동체의 일을 다스리는 사람의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칼이 멎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적어도 백성의 삶을 다시 세우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의 죽음 앞에서 온 이스라엘이 애도했던 이야기는, 요나단이 살아남아 백성의 일을 판결하는 장면에서 조용히 끝납니다.

용사는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