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사자의 울부짖음이 멎고 왕의 홀이 불타다
에스겔 19장은 뜻밖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두고 애가를 불러라.」에스겔 19:1 · 본디새김
지금까지 에스겔은 예루살렘과 그 지도자들의 죄를 고발해 왔습니다. 그들의 배신이 왜 심판을 불러오는지 설명했고, 그들이 맺은 약속을 깨뜨린 일도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애가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애가는 죽음이나 상실 앞에서 부르는 슬픔의 노래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한 도시가 무너지고 나라가 멸망했을 때 그 상실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애도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놀랍게도 하나님께 책망받던 바로 그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백성을 올바르게 이끈 왕들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들입니다. 그들의 울부짖음 때문에 땅이 황폐해졌습니다. 마침내 다른 나라들에 붙잡혀 끌려갑니다.
왕들이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사실과, 그 왕조의 몰락이 슬퍼할 만한 비극이라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악한 왕의 몰락은 단지 한 사람의 권력 상실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 백성이 의지하던 질서가 무너지고, 나라의 미래가 흔들립니다. 한때 왕들을 길러 내던 공동체는 자신의 자식들이 하나씩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 장에는 두 개의 그림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새끼들을 길러 내는 암사자입니다. 새끼들은 강한 사자가 되지만, 결국 이집트와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두 번째는 물가에서 무성하게 자란 포도나무입니다. 왕의 홀이 될 만큼 튼튼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뿌리째 뽑히고 불에 타서 더 이상 통치할 가지가 남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왕들이 사라집니다. 마지막에는 왕을 세울 수 있는 나무 자체가 무너집니다.
사자의 새끼가 사냥을 배우다
「이렇게 말하여라. 『네 어머니는 무엇이었느냐? 암사자였다. 사자들 사이에 누워, 젊은 사자들 가운데서 자기 새끼들을 길렀다.』」에스겔 19:2 · 본디새김
여기서 어머니는 특정한 한 왕의 생모만을 뜻하기보다 왕들을 낳고 길러 낸 유다 공동체, 또는 다윗 왕조를 품은 왕실의 모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10절에서 같은 어머니가 포도나무로 묘사되면서, 왕들을 품은 공동체의 모습도 떠올리게 합니다.
사자의 이미지는 유다 왕조와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창세기 49:9에서 야곱은 유다를 사자 새끼에 비유합니다. 이어지는 49:10에서는 유다와 통치자의 홀을 연결합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노래에서는 이 이미지가 어두운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그 암사자는 새끼들 가운데 하나를 길렀고, 그 새끼는 젊은 사자가 되었다. 그는 먹이를 찢는 법을 배워, 사람을 잡아먹었다.』」에스겔 19:3 · 본디새김
사자에게 먹이를 사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사자는 짐승이 아니라 왕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말은 왕의 권력이 폭력과 약탈로 나타났다는 고발로 들립니다.
사자는 위엄 있는 왕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사자가 사람을 잡아먹는 순간, 그 위엄은 백성을 위협하는 폭력으로 바뀝니다.
강한 왕이라고 해서 좋은 왕은 아닙니다. 사자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힘의 사용이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사자는 처음부터 모든 일을 능숙하게 하던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성장하면서 사냥을 배웠습니다. 이 비유에서 왕의 폭력은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익숙해진 행동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사람을 잡아먹던 사자는 오래도록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합니다.
이집트로 끌려간 첫 번째 사자
「『민족들이 그에 관해 들었다. 그는 그들의 구덩이에 붙잡혔고, 그들은 그에게 갈고리들을 걸어 이집트 땅으로 끌고 갔다.』」에스겔 19:4 · 본디새김
사냥하던 사자가 이제 사냥당합니다.
고대 왕권의 위엄을 상징하던 짐승이 이제 포획된 짐승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여기서 갈고리의 이미지는 특별히 굴욕적입니다. 사자는 더 이상 자신이 어디로 갈지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를 붙잡은 사람들이 이끄는 곳으로 끌려갈 뿐입니다.
이 첫 번째 사자는 일반적으로 유다 왕 여호아하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이 역사적 사건을 일반적인 왕들의 연대기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 왕의 이름도 말하지 않습니다. 재위 기간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외교적 상황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자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기까지라면 첫 번째 왕의 몰락을 노래한 애가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남겨진 어머니가 다시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하 23:30–34에 따르면 요시야가 죽은 뒤 백성은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여호아하스는 석 달 동안만 다스렸습니다. 이집트 왕 파라오 느고가 그를 붙잡아 왕위에서 물러나게 했고, 이집트로 끌고 갔습니다. 예레미야 22:10–12는 여호아하스를 살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가 끌려간 곳에서 죽고 다시는 고향 땅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사자가 이집트로 끌려가는 모습은 여호아하스의 운명과 잘 맞습니다. 이 장면은 에스겔 29:4에서 여호와야훼가 이집트의 파라오 턱에 갈고리를 걸겠다고 말씀하시는 장면과도 이미지상 연결됩니다. 강대한 통치자를 짐승에 비유하고, 그가 붙잡혀 끌려가는 모습을 통해 권력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는 아들
「『암사자는 자기가 기다렸으나 희망이 사라졌음을 보았다. 암사자는 새끼들 가운데 하나를 데려다가 젊은 사자로 삼았다.』」에스겔 19:5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노래의 시선이 바뀝니다.
본문은 무엇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의 사자가 이집트로 끌려간 이야기와 연결하면, 붙잡혀 간 왕이 돌아오거나 왕실의 처지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 길렀던 새끼를 잃었습니다. 그 상실 뒤에도 다른 새끼를 통해 희망을 이어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자의 이야기는 첫 번째와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그 새끼는 사자들 가운데 돌아다니며 젊은 사자가 되었다. 그는 먹이를 찢는 법을 배워, 사람을 잡아먹었다.』」에스겔 19:6 · 본디새김
3절의 표현이 거의 그대로 반복됩니다. 어머니는 새로운 희망을 품었지만, 그 희망을 맡은 사자는 이전 사자의 길을 되풀이합니다.
왕은 바뀌었지만, 왕권이 사람을 먹이로 삼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과부들을 알았고, 그들의 성읍들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의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땅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황폐해졌다.』」에스겔 19:7 · 본디새김
사자의 울부짖음은 보통 위엄과 힘을 나타내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힘이 남긴 파괴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합니다.
첫 번째 사자는 구덩이에 붙잡혔습니다. 두 번째 사자도 구덩이에 붙잡힙니다. 이번에는 그물까지 펼쳐집니다.
「『그들은 그에게 갈고리들을 건 채 그를 우리에 넣고, 바벨론 왕에게 끌고 갔다. 그의 소리가 다시는 이스라엘 산들에 들리지 않도록, 그들은 그를 요새들로 끌고 갔다.』」에스겔 19:9 · 본디새김
7절에서 사자의 울부짖음은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9절에서는 그 울부짖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됩니다.
한때 땅을 뒤흔들던 왕의 목소리가 사라진 것입니다.
폭력적인 왕의 울부짖음이 사라졌다는 점에서는 더 이상 그 위협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실의 어머니에게는 자신이 길러 낸 또 하나의 아들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산들에서 왕의 목소리가 끊어진 것입니다.
심판과 상실이 같은 침묵 안에 담겨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디새김의 「자기 과부들을 알았고」는 전해지는 히브리어 본문의 단어들을 가깝게 옮긴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들」을 가리키는 낱말을 다른 형태로 이해하거나 본문을 교정하여 「그들의 궁전들을 허물었다」 또는 「요새들을 파괴했다」는 뜻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과부들을 알았다」는 읽기에서는 여성과 약자를 향한 행동이 문제로 떠오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알았다」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뜻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성적 폭력을 단정적으로 덧붙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반면 궁전이나 요새를 파괴했다는 읽기에서는 왕이 다른 도시들을 파괴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이 두 번째 사자를 누구로 보아야 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열왕기하 24:8–15에 따르면 여호야긴은 유다 왕으로 석 달 남짓 다스리다가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했고,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두 번째 사자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다는 점은 이 사건과 잘 맞습니다. 에스겔 자신도 여호야긴이 끌려간 시기를 기준으로 자신의 활동 연대를 기록합니다(에스겔 1:2). 반면 시드기야로 보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시드기야 역시 결국 바벨론 군대에 붙잡혀 끌려갔습니다(열왕기하 25:6–7). 또 여호아하스와 시드기야는 모두 하무탈의 아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열왕기하 23:31; 24:18). 두 사자의 어머니를 역사적인 한 여성과 연결하면 이 읽기가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19장이 시드기야의 최종 몰락보다 앞선 시점에 선포된 예언이라면, 두 번째 사자의 포획 장면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애가의 형태로 예고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두 번째 사자를 여호야긴으로 읽는 것이 바벨론 포로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잘 맞지만, 시드기야를 가리킨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한 6–7절의 폭력과 파괴를 어느 한 왕의 짧은 통치 기간에 일어난 특정 사건들과 정확히 대응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이 애가는 개별 왕의 행적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역사서가 아니라, 무너져 가는 왕조 전체의 모습을 사자의 이미지로 압축한 시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이제 포도나무가 된다
「『네 어머니는 네 피 속에서 물가에 옮겨 심긴 포도나무 같았다. 물이 많아 열매를 맺고 가지가 무성했다.』」에스겔 19:10 · 본디새김
10절에서 비유가 갑자기 바뀝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대상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네 어머니」입니다. 앞에서는 어머니가 사자 새끼들을 길러 냈습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가지들을 길러 내는 포도나무입니다.
암사자는 새끼를 낳아 기른 뒤 그들이 붙잡혀 가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포도나무는 자기 몸에서 가지들이 자라나고, 마침내 나무 자체가 뿌리째 뽑힙니다.
첫 번째 비유가 왕들의 개인적인 운명을 강조한다면, 두 번째 비유는 왕들을 낳는 왕조 자체의 운명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포도나무의 처음 모습은 매우 풍요롭습니다.
이 포도나무는 처음부터 메마른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자라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포도나무에는 통치자들의 홀이 될 튼튼한 가지들이 있었다. 그 키는 뒤엉킨 잎들 사이로 높이 솟았고, 그것은 그 높이와 수많은 가지로 눈에 띄었다.』」에스겔 19:11 · 본디새김
일반적으로 포도나무의 가지는 건축 자재나 무거운 물건을 지탱하는 목재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지가 통치자의 홀이 된다는 말은 목재의 물리적 강도를 설명하기보다, 왕권을 이어 갈 힘과 계승자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17장에서는 포도나무가 낮은 상태로 자라며 다른 독수리를 향해 가지와 뿌리를 뻗었습니다. 여기서는 포도나무의 가지가 왕의 홀이 될 만큼 강하고 높게 자랐습니다. 17장이 종속된 왕국의 정치적 선택을 설명했다면, 19장은 한때 왕조가 가졌던 번영과 권력을 애도합니다.
특히 이 왕실에는 「수많은 가지」가 있었습니다. 왕조의 미래가 한 사람에게만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왕이 죽어도 다른 후손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다윗 왕조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져 왔습니다. 왕이 바뀌어도 왕실이 계속된다는 사실은 유다 공동체가 익숙하게 생각하던 정치적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바로 그 익숙한 현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10절에는 뜻을 확정하기 어려운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베다메카로, 문자적으로 「네 피 속에서」라는 뜻입니다. 이를 혈통이나 생명의 계승과 연결하여 이해하기도 합니다. 한편 자음의 차이를 전제하여 「네 포도밭에서」라는 뜻으로 읽는 방법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전해지는 히브리어의 표현을 그대로 남겼습니다. 이 표현이 가리키는 바를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창세기 49:9에서 유다는 사자에 비유됩니다. 49:10에서는 통치자의 홀이 등장합니다. 49:11에서는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가 등장합니다. 에스겔 19장에도 사자와 포도나무, 통치자의 홀이 함께 등장합니다. 두 본문 사이에 같은 왕권의 이미지들이 모여 있다는 점은 의미 있는 관찰입니다. 다만 에스겔이 창세기 49장의 각 구절을 직접 인용하거나 의도적으로 하나씩 대응시켰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유다에게 주어질 왕권과 풍요의 전망이 나타납니다. 에스겔에서는 그 왕권의 상징들이 무너집니다. 유다 왕실의 정체성을 나타내던 이미지들이 애도의 대상으로 바뀐 것입니다.
나무는 뿌리째 뽑혔다
「『그러나 그 포도나무는 분노 속에 뿌리째 뽑혀 땅에 내던져졌다. 동풍이 그 열매를 말려 버렸다. 그것들은 뜯겨 나가 말랐고, 그 포도나무의 튼튼한 가지는 불이 삼켰다.』」에스겔 19:12 · 본디새김
가지 몇 개가 꺾인 것이 아닙니다. 나무 자체가 뽑혔습니다.
앞의 사자 비유에서는 왕들이 하나씩 붙잡혀 갔습니다. 그때에는 다른 새끼를 통해 왕권을 이어 갈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왕들을 길러 내던 나무가 뿌리째 뽑혔습니다.
왕 한 사람이 사라지는 것과 왕조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광야에, 메마르고 목마른 땅에 옮겨 심겨 있다.』」에스겔 19:13 · 본디새김
처음에는 물가였습니다.
이제는 광야입니다.
처음에는 물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메마르고 목마른 땅입니다.
처음에는 열매와 가지가 풍성했습니다.
이제는 불에 탄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포로로 끌려간 왕실과 백성의 처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살던 땅과 왕국의 질서 안에 있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무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그 나무가 가진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왕실의 후손들이 살아 있다고 해서 그들이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통치자의 홀이 될 만한 가지들이 있었다고 해서 지금도 왕을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애가는 여기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동풍이 열매를 말리는 장면은 에스겔 17:10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포도나무는 동풍을 맞아 말라 버립니다. 두 본문에서 동풍은 유다 왕국을 무너뜨리는 외부의 파괴적인 힘을 떠올리게 하며, 역사적으로는 바벨론의 침략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장의 묘사를 살펴보면 동풍만이 유일한 원인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일, 열매가 마르는 일, 가지가 불타는 일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차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보다 왕조 전체가 무너져 가는 과정을 압축합니다. 실제 바벨론 지역 전체가 문자 그대로 물이 없는 광야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다 왕조가 본래의 땅에서 뽑혀 나와 더 이상 예전처럼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는 처지를 비유한 것입니다.
불은 바깥에서만 온 것이 아니다
「『그 가지들 가운데 한 가지에서 불이 나와 그 열매를 삼켰다. 그 안에는 튼튼한 가지, 곧 다스릴 홀이 없었다.』 이것은 애가이며, 애가가 되었다.」에스겔 19:14 · 본디새김
12절에서는 동풍이 나무를 말리고 불이 튼튼한 가지를 삼켰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가 밝혀집니다.
불은 나무 바깥에서만 다가온 것이 아닙니다.
나무 자신에게서 나온 불이 그 열매를 삼켰습니다.
유다 왕조가 멸망하는 과정에는 분명 외부의 강대국들이 있었습니다. 이집트가 왕을 끌고 갔고, 바벨론이 또 다른 왕을 붙잡아 갔습니다. 바벨론의 군사력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14절은 왕조의 몰락을 오직 외부의 힘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처음 등장한 사자들은 단지 강대국의 희생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들이었습니다. 외국의 군대에 붙잡혀 가기 전부터 그들의 권력은 폭력적으로 행사되고 있었습니다.
두 비유는 모두 지도자들의 책임을 지우지 않습니다.
11절에서는 통치자의 홀이 될 튼튼한 가지들이 있었습니다. 14절에서는 그 가지가 더 이상 없습니다. 다윗 왕조는 오랫동안 왕위를 이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왕조의 역사적 지속성이 끊어질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이것은 애가이며, 애가가 되었다」
첫 절에서는 애가를 부르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마지막 절에서는 이것이 애가이며 애가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단순히 「이것은 애가다」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애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처음에 주어진 애가의 형식이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왕조의 실제적인 몰락을 담는 노래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왕실의 영광은 이제 자랑의 노래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 힘과 번영을 이야기하던 자리에 상실의 노래가 남습니다.
에스겔은 멀리서 왕국의 몰락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바벨론에 끌려온 유다 포로 공동체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사람입니다(에스겔 1:1–3).
따라서 애가를 부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실패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어떻게 무너져 가고 있는지를 슬픔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불을 시드기야의 반역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지배 아래 왕위에 올랐지만 결국 바벨론에 반역했습니다(열왕기하 24:20). 에스겔 17장도 그가 이집트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면서 바벨론 왕과 맺은 계약을 깨뜨린 일을 비판했습니다. 그의 선택은 예루살렘의 최종적인 멸망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과정의 일부였습니다. 다만 19:14는 불이 나온 가지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불을 시드기야 한 사람의 행동으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왕에 걸쳐 이어진 왕실의 폭력과 불충실, 그리고 마지막 반역을 함께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과 왕국에 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에스겔은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약속을 받은 왕조가 불의와 반역을 저지르면서 역사적으로 심판받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을 근거로 유다의 마지막 왕들이 반드시 안전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에스겔 17:22–24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직접 연한 가지를 가져다가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심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9장에는 그런 새 가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왕조의 상실을 끝까지 노래합니다. 회복의 약속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이 애가의 슬픔을 서둘러 지워서는 안 됩니다.
울부짖음이 멎은 자리
에스겔 19장의 슬픔은 단지 강했던 왕들이 패배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지켜야 할 힘이 오히려 사람들을 위협했고, 왕조의 미래를 이어 가야 할 가지가 그 미래를 태우는 불의 시작점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왕들이 악했다는 사실은 그 왕조에 속한 백성이 겪는 비극을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왕들의 불의 때문에 왕조의 희망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 상실을 더욱 비통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사실은 그 심판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비극을 슬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더 이상 사자의 울부짖음도 들리지 않습니다. 물가에서 무성하게 자라던 포도나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른 땅에 옮겨진 나무에는 왕의 홀이 될 만한 튼튼한 가지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에스겔에게 이 상실을 노래하게 하십니다.
노래는 그 나무에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