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딧기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0–14장 · 적진으로 들어간 유딧

머리를 잃은 군대, 믿음을 얻은 이방인

홀로페르네스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군대는 아직 그 사실을 모릅니다.

수많은 병사가 진영을 지키고 있고, 장군들과 지휘관들은 여전히 명령을 기다립니다. 베툴리아를 포위한 군사력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휘관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거대한 군대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유딧은 이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에는 군사적 승리보다 더욱 뜻밖의 변화가 하나 등장합니다.

암몬 사람 아키오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할례를 받아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키오르는 본래 아시리아 군대의 지휘관 회의에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존중해야 한다고 경고했다가 홀로페르네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머리를 잃었고, 다른 한 사람은 새로운 소속을 얻습니다.

이렇게 유딧기 14장은 두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스라엘을 업신여겼던 군대는 두려움에 빠지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했던 이방인은 그 백성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두 변화 모두 같은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홀로페르네스의 잘린 머리를 보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714장 본문 읽기 →

성벽 위에 매달린 머리 — 승리를 완성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유딧기 14:1–4 본문 →

유딧이 그들에게 말했다. 「형제 여러분, 부디 제 말을 들으십시오. 이 머리를 가져다가 여러분 성벽의 성가퀴에 매다십시오.」유딧기 14:1 · 본디새김

유딧은 자기 행동을 칭찬하고 축복하는 사람들에게 곧바로 새로운 명령을 내립니다.

성가퀴는 성벽 윗부분에서 방어하는 사람들이 몸을 숨기거나 그 사이로 적을 살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구조물입니다. 유딧은 그처럼 적군을 향해 드러나는 위치에 머리를 걸도록 합니다.

이 행동은 잔혹하지만 군사적인 의도를 가집니다.

고대 전쟁에서 적장의 머리나 시신을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일은 승리를 과시하고 상대를 위협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7:51–54에서는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베어 가져가는 장면이 나오고, 사무엘상 31:9–10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머리를 베고 시신을 전시합니다.

그런데 유딧은 단순히 승리를 과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를 매다는 명령을 곧바로 다음 날 아침의 군사 행동과 연결합니다.

「동이 트고 해가 땅 위에 떠오르면, 저마다 싸움에 쓸 무기를 드십시오. 힘 있는 남자는 모두 도시 밖으로 나가십시오. 그들을 이끌 지휘관을 세우고, 평야에 있는 아시리아 사람들의 전초 부대를 향해 내려가는 듯이 하십시오. 그러나 내려가지는 마십시오.」유딧기 14:2 · 본디새김

베툴리아 주민들은 지금까지 성문 안에서 버티는 처지였습니다. 물이 부족해 항복을 논의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이 밝자 갑자기 무기를 들고 성 밖으로 나섭니다.

아시리아 전초 부대는 이 뜻밖의 움직임을 보고하게 될 것입니다. 적의 지휘관들이 홀로페르네스를 찾으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지휘관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두려움이 군대를 덮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작전에는 두 가지 정보의 차이가 이용됩니다.

베툴리아 사람들은 홀로페르네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병사들은 모릅니다. 유딧은 두 집단이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적군 스스로 지휘관의 죽음을 발견하게 하려 합니다.

그녀가 성벽에 머리를 매달라고 한 것은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표지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진영에 들어가 직접 죽음을 알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군사적 위협을 느낀 병사들이 자기들의 지휘 체계를 따라 움직이게 만듭니다.

유딧은 적군의 명령 체계가 작동할수록 그들이 자신의 지휘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를 제거하는 일과 그의 군대를 무너뜨리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왜 당장 공격하지 말라고 했을까?

베툴리아 주민들은 아직 아시리아 군대에 비해 군사적으로 불리합니다. 지휘관을 잃었다고 해도 적군의 수가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유딧은 성급하게 내려가 정면으로 싸우도록 하지 않습니다. 먼저 적군이 스스로 두려움에 빠지도록 만든 다음, 그들이 달아날 때 추격하라고 합니다.

4절은 유딧의 전략이 방어에만 머물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녀는 베툴리아 사람들뿐 아니라 이스라엘 온 땅에 사는 사람들이 도망가는 적군을 뒤쫓도록 지시합니다.

한 산지 도시의 생존 문제가 더 넓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행동으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본문도 하나님께서 유딧에게 이 작전의 성공을 직접 예언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딧은 상대의 조직과 심리를 관찰하여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유딧은 뜻밖의 사람을 먼저 불러 달라고 합니다.

암몬 사람 아키오르입니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사람 — 아키오르

유딧기 14:5–9 본문 →

「그런데 이 일을 하기 전에 암몬 사람 아키오르를 제게 불러 주십시오. 이스라엘 집안을 업신여기고 그를 죽음으로 내몰듯 우리에게 보낸 자를 아키오르가 보고 알아보게 하려는 것입니다.」유딧기 14:5 · 본디새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지휘관을 세우거나 무기를 점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아키오르를 불러야 할까요?

그가 처음 했던 경고

유딧기 5장에서 홀로페르네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민족인지 묻습니다.

그때 아키오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조상들의 신들을 버리고 하늘의 하나님을 섬겼는지, 이집트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하나님께 순종할 때와 그분을 거역할 때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다면 그들을 공격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공격을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신다면 군사적 우세만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5:17–21).

홀로페르네스는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키오르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넘겨주도록 명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그도 함께 죽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6:1–13).

그런데 지금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홀로페르네스가 죽었고, 아키오르는 살아 있습니다.

아키오르는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고, 그가 이스라엘을 얼마나 업신여겼는지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해 진실을 말하려다가 죽음의 위협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아키오르는 자신이 했던 말이 옳았다는 증거를 보게 되지만, 그 증거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의 죽음입니다. 여기에는 승리의 기쁨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게가 있습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보고 쓰러진 사람

사람들은 웃시야의 집에서 아키오르를 불러왔다. 그는 와서 백성의 모임 가운데 한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유딧기 14:6 · 본디새김

아키오르는 그동안 홀로페르네스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있던 군대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도 바로 그 지휘관이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던 군사적 힘의 질서가 눈앞에서 무너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일으켜 주자, 그는 유딧의 발 앞에 엎드려 그녀에게 절하고 말했다. 「그대는 유다의 모든 장막과 모든 민족 가운데서 복을 받은 분입니다. 그들은 그대의 이름을 듣고 동요할 것입니다.」유딧기 14:7 · 본디새김

아키오르는 자신의 경고가 옳았다고 주장하거나 홀로페르네스의 죽음을 개인적인 복수의 성취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아키오르의 축복에 담긴 말이 그날 아침 적군의 반응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왜 아키오르는 유딧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어 하는가?

아키오르는 유딧에게 지난 며칠 동안 한 일을 모두 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유딧은 백성 한가운데서 자신이 성을 떠난 날부터 지금까지 한 일을 이야기합니다. 유딧이 홀로페르네스를 죽였다는 사실은 처음에는 그녀와 몸종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가 공동체 앞에서 공개적으로 전해집니다.

특히 아키오르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직접 보았지만,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딧의 설명을 들어야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키오르의 앎에는 두 가지가 결합됩니다.

자기 눈으로 확인한 증거와 유딧에게서 들은 증언입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백성은 큰 소리로 함성을 지르고, 자기들의 도시에서 기쁨의 소리를 터뜨렸다.유딧기 14:9 · 본디새김

여기서 유딧의 행동은 공동체 전체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아키오르에게는 그보다 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조금 더 깊이

아키오르가 정확히 어떤 감정 때문에 쓰러졌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충격, 놀라움 가운데 어느 하나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동요하다’에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 계열은 장 마지막에 아시리아 군대의 지휘관들이 느끼는 동요를 묘사할 때에도 나타납니다(14:19).

암몬 사람은 어떻게 이스라엘 사람이 되는가

유딧기 14:10 본문 →

아키오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한 모든 일을 보고 하나님을 굳게 믿었다. 그는 자기 포피의 살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집안에 속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유딧기 14:10 · 본디새김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그분을 믿는 것

아키오르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딧기 5장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길게 설명했고, 그들의 하나님이 어떻게 행동하시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홀로페르네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조언할 만큼 그 역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키오르가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다고 본문이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14:10은 새로운 전환을 기록합니다.

아키오르는 알고 있던 내용을 자기 삶의 방향으로 받아들입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경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굳게 믿었다’는 것은 순간적인 놀라움 이상의 반응으로 서술됩니다. 이어지는 할례와 공동체 소속의 변화가 그것을 보여 줍니다.

할례는 왜 중요한가?

할례는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언약의 표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집에서 태어난 남자뿐 아니라 돈으로 산 이방인 남자에게도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창세기 17:12–13). 출애굽기 12:48에서도 이스라엘과 함께 살고자 하는 이방인이 유월절에 참여하려면 집안의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나타납니다.

아키오르가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선언을 자신의 몸과 공동체적 소속에까지 연결했다는 뜻입니다.

신명기의 규정과 아키오르의 가입

신명기 23:3–6, 일부 절 구분에서는 23:4–7에 해당하는 말씀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여호와야훼의 총회에 들어오는 일을 금지합니다. 그런데 유딧기는 암몬 사람 아키오르가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집안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 사이에는 실제로 긴장이 있습니다.

홀로페르네스와 아키오르의 갈림길

홀로페르네스도 유딧의 하나님에 관해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군사적 성공을 도와주신다면 그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겠다고 말했습니다(11:23).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승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존재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계획에 맞추어 이해했습니다.

반면 아키오르는 자신이 섬기던 지휘관에게 불리한 말이라도 진실이라고 믿는 내용을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군대에서 버림받고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요한 대조는 단지 이스라엘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권력에 이용하려는 사람과, 자신이 가진 지위를 잃더라도 하나님에 관한 진실을 인정하려는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유딧기 14:10은 이 일을 명시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한 모든 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본문은 유딧의 행동을 하나님과 무관한 개인의 업적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계획과 용기,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신앙적 해석을 제시합니다.

베툴리아가 적군에게서 벗어나는 일이 공동체를 향한 구원이라면, 아키오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그 백성에게 속하게 된 일은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유딧기의 이야기는 군사적 승리와 신앙적 변화를 함께 놓으면서도,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자동으로 보장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키오르는 실제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확인한 아시리아의 장군들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구약 전체 안에서 읽으면 이사야 56:3–8의 말씀도 떠오릅니다. 그곳에서는 여호와야훼께 속한 이방인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백성에게서 구별하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도록 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집에서 기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유딧기가 이사야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출생에 따른 경계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두 본문이 함께 제기합니다.

이 점에서 아키오르의 모습은 여호수아 2장의 라합을 떠올리게 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듣고 그분이 하늘 위와 땅 아래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합니다(여호수아 2:9–11). 그리고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자기 가족과 함께 살아남아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여호수아 6:25).

라합과 아키오르는 상황이 다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도왔고, 아키오르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군대에 경고했다가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둘 다 이스라엘 밖에 있던 사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인정하고 그 백성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이것은 유딧기가 보여 주는 하나님의 구원을 단지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무너뜨리는 이야기로만 축소할 수 없게 만듭니다.

본문 마지막의 「오늘에 이르렀다」는 표현은 이야기의 서술자가 바라보는 시점까지 그의 소속이 지속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위기를 벗어난 뒤 자기 원래 자리로 돌아간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된 사람으로 이야기 속에 남습니다.

이제 아키오르의 이야기는 잠시 끝나고, 유딧이 세운 작전이 실행됩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의 규정은 그 이유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그들이 빵과 물로 맞이하지 않았으며,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일이 제시됩니다. 한쪽에서는 신명기의 ‘총회에 들어간다’는 표현이 반드시 모든 형태의 종교적 귀의나 공동체적 소속을 동일하게 금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구별합니다. 그 경우 유딧기가 말하는 이스라엘 집안으로의 편입과 신명기가 제한하는 총회 참여의 구체적인 범위가 서로 다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유딧기의 서술 자체가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그 백성에게 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낸다고 읽습니다. 이 경우 신명기의 배제 규정과 유딧기의 포용적인 서술 사이의 긴장이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러나 유딧기 14장은 이 문제를 법률적으로 해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어떤 규정의 해석에 따라 가입할 수 있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해가 떠오르자 시작된 두 번째 싸움

유딧기 14:11–13 본문 →

새벽이 밝자 사람들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성벽에 매달았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자기 무기를 들고 부대별로 오르막길로 나갔다.유딧기 14:11 · 본디새김

그들은 얼마 전까지 물 부족으로 낙심하고 지도자들에게 항복을 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기를 들고 부대별로 움직입니다. 달라진 것은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딧의 지시를 따라 적군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하고 움직입니다.

군대의 보고 체계가 작동하다

아시리아 병사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즉시 지휘관들에게 보고합니다.

보고는 지휘관들을 거쳐 장군들과 천부장들과 여러 우두머리에게 전달됩니다. 전초 부대가 적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정보가 여러 지휘 계층을 거쳐 위로 올라갑니다.

유딧이 예상했던 순서와 맞아떨어집니다.

그런데 보고를 받은 아시리아 지휘관들은 여전히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홀로페르네스의 장막에 이르러 그의 모든 일을 맡은 사람에게 말했다. 「어서 우리 주인을 깨워라. 노예들이 완전히 멸망하려고 감히 우리와 싸우러 내려왔다.」유딧기 14:13 · 본디새김

‘노예들’은 단순한 신분 설명이 아니라 상대를 업신여기는 언어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맞서 싸울 만큼 강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히 싸우러 내려온다는 행동 자체를 죽음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으로 여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제로 정면 공격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이도록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시리아 지휘관들은 바로 그 모습을 실제 공격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라고 부르며 업신여기는 동안, 정작 그들 자신이 유딧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유딧이 원한 것은 그들이 장군을 찾으러 가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 일이 일어납니다.

아무 대답도 없는 장막

유딧기 14:14–16 본문 →

바고아스는 들어가 장막의 휘장을 두드렸다. 홀로페르네스가 유딧과 함께 자고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유딧기 14:14 · 본디새김

그는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습니다. 홀로페르네스가 유딧과 잠자리를 갖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술자리 이후 두 사람이 함께 남도록 장막을 정리했던 사람이 바로 바고아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그가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알고 있습니다.

유딧은 이미 성으로 돌아갔고, 홀로페르네스는 죽었습니다. 바고아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마지막 상황에 따라 행동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휘장을 걷는 순간

아무도 응답하지 않자 그는 휘장을 젖히고 침소로 들어갔다. 그는 홀로페르네스가 발판 위에 죽은 채 내던져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머리는 몸에서 잘려 나가 있었다.유딧기 14:15 · 본디새김

그는 처음부터 시신을 찾으러 간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주인을 깨우러 갔습니다. 그러나 침상에 있어야 할 주인은 더 이상 명령할 수 없는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유딧기 10장에서 홀로페르네스의 장막은 화려한 모기장과 귀한 장식으로 묘사되었습니다. 12장에서는 그 장막이 홀로페르네스의 욕망이 이루어질 장소로 등장했습니다. 13장에서는 그곳에서 유딧이 홀로페르네스를 죽였습니다.

이제 14장에서 그 장막은 지휘관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장소가 됩니다.

바고아스가 찢은 옷

바고아스는 시신을 보자 울부짖으며 자기 겉옷을 찢습니다.

이야기는 바고아스가 다음 지휘관에게 질서를 유지하라고 명령하거나 군대를 정비하는 장면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는 울고, 옷을 찢고, 유딧을 찾으러 달려갑니다.

바고아스의 첫 반응은 군사적 대응이 아니라 충격과 혼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유딧은 장군들이 홀로페르네스의 장막으로 달려가지만 그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4:3). 따라서 ‘그를 찾지 못한다’는 말을 시신조차 발견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뒤의 서술과 어긋납니다. 이 문맥에서는 군대를 지휘할 살아 있는 홀로페르네스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옷을 찢는 행동은 구약에서 슬픔과 충격, 재난 앞에서 나타나는 몸짓입니다. 창세기 37:29, 34에서 르우벤과 야곱이 옷을 찢고, 열왕기하 19:1에서는 히스기야가 위협적인 소식을 듣고 옷을 찢습니다.

「히브리 여자 하나가 수치를 안겼다」 — 제국이 느낀 굴욕

유딧기 14:17–19 본문 →

바고아스는 유딧이 머물렀던 장막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유딧은 없습니다.

그는 이제 그녀가 홀로페르네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외칩니다.

「노예들이 배반했다. 히브리 여자 하나가 느부갓네살 왕의 집안에 수치를 안겼다. 보아라, 홀로페르네스가 땅에 쓰러져 있고 그의 몸에는 머리가 없다.」유딧기 14:18 · 본디새김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여전히 노예라고 부릅니다. 유딧을 소개할 때도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저 히브리 여자 하나라고 말합니다.

아시리아 군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신들에게 복종해야 할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들을 이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이 하찮게 여긴 여인 하나가 최고 지휘관을 죽였습니다.

누구의 체면이 무너졌는가?

홀로페르네스는 유딧과 잠자리를 갖지 못하고 보내면 자신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12:12). 그에게 수치는 아름다운 여인을 자기 뜻대로 차지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유딧을 자기 뜻대로 차지하려 했던 바로 그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실제로 닥친 수치는 자기 군대의 최고 지휘관이 그 여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야기는 홀로페르네스의 욕망이 자신이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큰 굴욕으로 이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이 장면을 남자가 여자의 아름다움에 속았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식의 단순한 교훈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아름다움 자체가 아닙니다. 홀로페르네스가 유딧을 독립적인 목적과 판단을 가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으로 차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유딧의 얼굴과 말에 감탄했지만, 그녀가 무엇을 위해 행동하고 있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오해가 그의 몰락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같은 소식이 만든 두 종류의 외침

아시리아 군대의 우두머리들은 이 말을 듣자 자기 속옷을 찢었으며, 그들의 마음은 몹시 동요했다. 진영 한가운데서 그들의 외침과 부르짖음이 몹시 크게 터져 나왔다.유딧기 14:19 · 본디새김

베툴리아에서는 유딧의 이야기를 듣고 백성이 큰 소리로 함성을 지르며 기쁨의 소리를 냈습니다. 아시리아 진영에서도 큰 외침과 부르짖음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두 소리의 의미는 정반대입니다.

베툴리아의 함성은 기쁨에서 나왔습니다.

아시리아의 외침은 충격과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두 공동체가 같은 사건을 전해 듣습니다. 그러나 한쪽은 구원의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은 재앙의 소식으로 받아들입니다.

두려움이 옮겨 간 새벽

유딧기 14:1–19 본문 →

유딧기 14장은 아직 전쟁이 끝난 장이 아닙니다.

유딧은 아시리아 군대가 홀로페르네스의 죽음을 알게 되면 두려움에 빠져 달아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 예상의 앞부분은 실현되었습니다. 적의 지휘관은 죽었지만, 그 지휘관의 진영에 속했던 이방인 하나는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 일을 두려워만 하는 사람의 차이는 출생한 민족으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새벽빛은 두 진영 위에 똑같이 비치고 있습니다.

베툴리아 성벽에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가 매달려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무장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멀리 아시리아 군영 한가운데서는 지휘관들의 외침이 터져 나옵니다.

그들은 아직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노예들’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향해, 이제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목소리로 울부짖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