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
요한복음 10장은 양과 목자의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목자는 양을 보호하며, 마침내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습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목가적 풍경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자리를 생각하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바로 앞 장에서 한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멀었던 사람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눈을 뜨자,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불러 거듭 심문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했지만, 지도자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침내 그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9:3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셨습니다(9:35). 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은 시력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자리였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을 찾아 만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이름으로 하나하나 부르고 데리고 나간다」(3절). 뜻밖에도 목자가 하는 일 역시 양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눈여겨볼 연결이 있습니다. 9:34에서 지도자들이 눈뜬 사람을 내쫓았다는 동사와 10:4에서 목자가 자기 양들을 내보낸다는 동사는 같은 동사 에크발로(ἐκβάλλω), 밖으로 내보내다·쫓아내다의 활용형입니다.
물론 두 장면의 행동은 다릅니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공동체에서 배제했고, 목자는 자기 양들을 이끌어 풀밭으로 데려갑니다. 한쪽에서는 거절당한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다른 쪽에서는 목자의 인도를 받는 양들이 밖으로 나갑니다.
이 연결을 의도적인 문학적 대비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양을 잘 돌보는 목자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을 참으로 돌보는 사람인가, 누가 그들을 자신의 권위 아래 가두고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이 장에는 네 장면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문과 목자에 관해 말씀하시고(1–18절),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갈라집니다(19–21절). 봉헌절의 성전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둘러싼 논쟁이 더욱 날카로워지고(22–39절),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믿습니다(40–42절).
이 흐름을 관통하는 것은 한 가지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때,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들의 말보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서 보이는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양들을 가두는 사람이 아니라 앞서 가는 사람
예수님께서는 먼저 두 종류의 사람을 대조하십니다. 문으로 들어오는 목자와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오는 도둑입니다.
목자와 도둑은 출입 방식만이 아니라 양들에게 접근하는 목적부터 다릅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돌보기 위해 들어오지만, 도둑은 양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으려고 들어옵니다.
「문지기가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는 자기 양들을 이름으로 하나하나 부르고 데리고 나간다.」요한복음 10:3 · 본디새김
많은 양이 한곳에 있어도 목자는 자기 양들을 알아봅니다. 무리 전체를 향해 막연히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부릅니다.
「자기 양들을 다 내보내면 그는 양들보다 앞서 간다. 그리고 양들이 그를 따른다. 그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0:4 · 본디새김
여기에는 강압적인 통제보다 서로를 알아보는 관계가 그려져 있습니다. 양들이 목자를 따르는 까닭은 목자가 뒤에서 몰아붙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과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은 서로 대응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를 압니다. 뒤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내 것들을 알고 내 것들은 나를 안다」(14절)라고 말씀하실 때, 이 관계가 더욱 깊은 의미를 얻게 됩니다. 반대로 양들은 낯선 사람에게서는 달아납니다. 목소리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눈뜬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라는 지도자들의 요구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행동은 낯선 목소리를 따르지 않는 양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모든 신자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구별한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은 양에게 본래 뛰어난 분별 능력이 있다는 사실보다, 목자와 양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입니다. 양이 알아보는 것은 어떤 추상적인 진리의 공식이 아니라 자기 목자의 목소리입니다.
6절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밝힙니다.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라고 여겼을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리시는 목자와 도둑의 구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앞 장에서는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보지 못했고, 이제는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문이 되시고, 목자가 되시는 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다시 설명하십니다. 앞에서는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목자였으니, 예수님께서 자신을 목자라고 밝히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가 다시 그들에게 말했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복음 10:7 · 본디새김
그리고 11절에 이르러서야 「나는 좋은 목자다」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문이시면서 동시에 목자가 되실 수 있을까요?
이것은 비유의 모든 등장인물과 사물을 현실의 한 인물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려 할 때 생기는 어려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여러 이미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역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문이라는 이미지는 예수님을 통하여 열리는 생명의 길을, 목자라는 이미지는 그 길로 들어온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돌보시는가를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구원받고, 드나들며 풀밭을 찾을 것이라고 하십니다(9절). 구원은 안전한 울타리 안에 영원히 머무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양들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뿐 아니라 살아갈 양식을 얻기 위해 풀밭으로 나갑니다.
구원은 죽음을 피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양들이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도둑은 훔치고 잡아 죽이고 멸망시키려고만 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가지고 또 넘치게 가지도록 왔다.」요한복음 10:10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종종 풍요로운 물질적 생활이나 성공을 약속하는 구절로 읽힙니다. 그러나 본문의 대조는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도둑은 양들에게서 생명을 빼앗고,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십니다. 28절은 그 생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단지 장래에 오래 산다는 뜻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5:24). 따라서 넘치는 생명은 지금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함하면서, 죽음과 멸망이 마지막 말이 되지 못하는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8절의 「나보다 먼저 온 이들은 모두 도둑이고 강도다」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글자 그대로 읽으면 예수님보다 앞서 온 모든 지도자와 예언자가 도둑이라는 뜻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모세가 예수님에 관하여 기록했고(5:46),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했다고 밝히므로(1:29–34), 이 말씀을 모든 이전 시대의 인물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해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권위를 받지 않고 스스로 목자 행세를 한 거짓 지도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고, 예수님의 자리를 차지하여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권한을 독점하려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앞의 도둑 이미지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벌어진 충돌을 근거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에스겔 34장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양들을 먹이지 않고 자신들을 먹이며, 약한 양을 돌보지 않고, 병든 양을 고치지 않으며, 흩어진 양을 찾지 않았습니다(겔 34:2–6). 목자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목자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12–13절의 삯꾼은 이리가 나타나자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양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그가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이고 양들에게 마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0:13 · 본디새김
문제는 삯 자체가 아니라 위기의 순간 드러나는 관계입니다. 양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면 삯꾼은 자기 안전을 먼저 선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양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목자
「나는 좋은 목자다. 좋은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복음 10:11 · 본디새김
지금까지 목자는 양들을 부르고, 인도하고, 먹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다고 하십니다.
원문의 「좋은」(καλός)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훌륭하고, 본받을 만하고, 그 이름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지닌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목자가 참으로 좋은 목자인지를 뒤따르는 행동이 설명합니다. 좋은 목자는 양들을 자기 생존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자기 생명을 양들의 생존을 위해 내어줍니다.
보통 양을 지키는 목자가 죽으면 양들은 더욱 위험해집니다. 목자를 잃은 양들은 이리에게 더 쉽게 공격받고 흩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자가 죽는다는 것이 어떻게 양들을 살리는 길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한 목가적 비유로 읽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목자의 직업윤리를 넘어 자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다는 말씀은 11절, 15절, 17절, 18절에 반복되고, 반복될수록 뜻이 선명해집니다.
「나는 좋은 목자다. 그리고 나는 내 것들을 알고 내 것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가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나는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는다.」요한복음 10:14–1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양들 사이의 앎을 설명하시면서 아버지와 자신 사이의 앎을 끌어오십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상대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아시는 관계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을 아시는 관계를 그 앎과 연결하십니다.
양들은 목자가 관리하는 익명의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내 것들」, 곧 「내게 속한 것들」이라고 부르십니다. 한국어로는 소유물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 문맥에서 소속은 지배보다 보호와 돌봄의 관계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친밀한 관계가 곧바로 예상 밖의 방향으로 확장됩니다.
「그리고 나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을 가지고 있다. 그 양들도 내가 데려와야 한다.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리고 한 양 떼가 되고 목자는 하나일 것이다.」요한복음 10:16 · 본디새김
이 양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본문에서 명시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들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요한복음 11:52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일과 연결되고, 12:20–22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는 장면도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함께 고려하는 해석도 가능하므로, 16절의 다른 양들을 한 집단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우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한 양 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어에서 우리는 아울레(αὐλή), 양 떼는 포임네(ποίμνη)로 구별되고, 16절에는 두 단어가 모두 나타납니다. 다른 양들이 속하지 않은 것은 현재의 「우리」이고, 그들이 함께 이루게 되는 것은 「양 떼」입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일치는 모든 양이 기존의 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곳에 있던 양들이 한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한 양 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 교회 제도의 모든 문제에 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 됨의 중심은 울타리의 형태가 아니라 목자의 정체입니다.
다른 양들을 데려오시는 일도 그분의 사명에 포함되어 있고, 그 모든 일을 이루는 길의 중심에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시는 행위가 있습니다. 17–18절은 그 죽음이 어떤 성격을 가지는지 설명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나에게서 빼앗지 않는다. 도리어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다. 나는 그것을 내놓을 권한을 가지고 있고 다시 얻을 권한도 가지고 있다. 이 명령을 내 아버지께 받았다.」요한복음 10:18 · 본디새김
여기에는 자발성과 순종이 함께 있습니다.
그 죽음은 단순히 자신의 독자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권한과 명령을 아버지께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께 받으신 사명을 자신의 의지로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목숨을 얻으실 권한도 있다고 하시니, 요한복음의 전체 이야기 속에서 읽으면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내다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중에 발생한 불행한 사건에 의미를 덧붙인 것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것을 자신의 사명 안에서 설명하십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갈라집니다.
같은 말씀을 듣고도 갈라지는 사람들
19절에서 유대 사람들 가운데 다시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말했다. 「그는 귀신을 지니고 있고 미쳤다. 어찌하여 그의 말을 듣느냐?」요한복음 10:20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앞의 목자 비유와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하셨는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이들은 말했다. 「이 말들은 귀신 들린 사람의 말이 아니다. 귀신이 눈먼 이들의 눈을 열 수 있겠는가?」요한복음 10:21 · 본디새김
여기서 9장의 사건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만 따로 떼어 평가하지 않고, 그분이 실제로 행하신 일을 함께 생각합니다. 본문은 이 사람들이 모두 완전한 믿음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이미 일어난 일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단서가 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일입니다. 이 단서는 다음 장면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겨울의 성전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정체
22절에서 장면이 바뀝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봉헌절이 열렸다. 겨울이었다.요한복음 10:22 · 본디새김
봉헌절은 오늘날 하누카라고 부르는 유대 절기입니다. 기원전 2세기 안티오코스 4세의 통치 아래 성전이 더럽혀진 후, 유다 마카베오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성전을 되찾아 기원전 164년에 다시 봉헌한 사건을 기념합니다. 이스라엘의 예배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성전을 다시 봉헌했던 일을 기념하는 때에, 예수님의 정체와 하나님께 대한 관계가 논쟁의 중심이 됩니다.
요한이 이 절기를 언급한 정확한 문학적 의도를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장소가 성전이고, 시간이 봉헌절이며, 논쟁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그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우리 목숨을 들어 올려 두시겠습니까?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라면 거리낌 없이 우리에게 말하십시오.」요한복음 10:24 · 본디새김
「우리 목숨을 들어 올려 두시겠습니까」는 원문을 가깝게 옮긴 낯선 표현입니다. 상대를 애태우거나 불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목숨을 빼앗는다는 뜻이나 분노를 일으킨다는 뜻으로 보는 해석도 있어 의미가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목숨」(ψυχή)은 앞에서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내놓으신다고 하신 바로 그 낱말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했지만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나를 두고 증언한다.」요한복음 10:25 · 본디새김
사람들은 명확한 선언을 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증거가 주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놀라운 능력을 과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분이 누구신지 드러내는 증언입니다.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주신 일은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신 행위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라는 말씀을 눈앞에서 보여 준 일이었습니다(9:5–7). 사람들은 기적의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그 일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정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을 다시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들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나는 그 양들을 알고 그 양들은 나를 따른다.」요한복음 10:26–2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믿지 않으므로 내 양이 아니다」라고 하시지 않고, 양들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사람들을 주신다는 주제(6:37–39)가 이 말씀의 배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 구절을 놓고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믿음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다양한 신학적 설명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처음 양이 되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의 직접적인 목적은 자신을 거절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양들이 보여 주는 차이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 양들은 영원히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내 손에서 채어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복음 10:2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이리가 양들을 채어 가고 흩어 놓았습니다(12절). 같은 위험을 말하지만 결과는 달라집니다.
삯꾼의 손에서는 양들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에서는 빼앗기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것은 모든 것보다 크다. 그리고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 양들을 채어 갈 수 없다.」요한복음 10:2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사본에 따라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 크다고도, 주신 아버지가 크시다고도 읽힙니다. 어느 읽기를 따르든 문맥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손과 아버지의 손이 나란히 등장하고, 두 경우 모두 아무도 양들을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복음 10:30 · 본디새김
이 선언은 양들의 보호에 관한 약속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두 분의 손에서 양들을 빼앗을 수 없다는 말씀 뒤에 두 분이 하나이시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하나」는 한 인격이라는 뜻으로 곧장 읽을 수도, 같은 목표를 가진 두 존재라는 정도로 제한할 수도 없습니다.
이 선언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을 자처하신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33절). 요한은 그 반응을 통해 예수님의 선언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뒤로 물러나지 않으시고, 그들이 권위 있는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본문을 들어 반문하십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했다. 「너희 율법에 『내가 말했다. 너희는 신들이다』라고 적혀 있지 않으냐?」요한복음 10:3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시편 82:6의 직접 인용입니다. 시편 82편에서는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을 행하는 존재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들은 약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지 않았습니다(시 82:2–4). 하나님은 그들을 「신들」이라 부르셨지만, 결국 사람처럼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시 82:6–7).
여기서 신들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립니다. 하나님에게서 권위를 위임받은 인간 통치자나 재판관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시편 첫머리의 하늘 회의 장면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하늘의 신적 존재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시편 전체의 문맥에서는 후자의 해석이 중요하게 논의되지만, 두 읽기 모두 해석의 전통 속에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이 임한 이들조차 성경에서 신들이라고 불렸다면,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세상에 보내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 모독이 되느냐고 물으십니다. 핵심은 자신을 시편 82편의 존재들과 같은 수준에 놓으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그런 표현이 사용된 적이 있다면, 아버지께서 특별히 보내신 자신에게 그 표현을 적용하셨다는 이유만으로 모독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논증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 논쟁을 단순히 호칭의 문제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나를 믿지 마라.」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한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되고 또 알아 가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0:37–3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주장만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하시는 일을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그 일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자신의 위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알게 되고 또 알아 가게」라는 말에는 처음 알아보는 일과 그 앎을 이어 가는 일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설명을 듣고도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3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가십니다.
이 장에서 이미 두 번이나 손이 등장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서도, 아버지의 손에서도 아무도 양들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붙잡으려던 사람들의 손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지 못합니다. 앞에서는 양들을 보호하는 손을, 여기서는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손을 말하지만, 요한이 배치한 장면들은 분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생명을 지키는 손과 사람을 붙잡으려는 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봉헌절의 역사는 마카베오기 상권 4:36–59와 하권 10:1–8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24절의 「우리 목숨을 들어 올려 두시겠습니까」는 원문 텐 프쉬켄 헤몬 아이레이스를 가깝게 옮긴 말이며, 이어지는 요청으로 보아 예수님의 정체를 분명히 밝히라는 답답함을 표현한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목숨」으로 번역된 프쉬케가 앞에서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내놓으신다고 하신 단어라는 점은, 직접적인 말장난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두 장면을 함께 읽으면 강한 대비를 만듭니다. 29절의 사본 차이는 원문의 대명사와 형용사 형태가 달라서 생깁니다. 30절의 「하나」에 해당하는 헨은 중성형이어서 한 인격이라는 의미로 곧장 읽을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잠시 뒤 아버지가 자기 안에 계시고 자신이 아버지 안에 계시다고 말씀하시므로(38절) 같은 목표를 가진 두 존재라는 정도로 제한할 수도 없습니다. 38절의 그노테와 기노스케테는 같은 동사에서 왔지만, 앞의 형태는 깨달음에 이르는 일을, 뒤의 형태는 계속되는 앎의 측면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장은 에스겔 34장의 약속과 이어집니다. 그 장에서 여호와야훼는 불의한 목자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뒤 직접 자기 양들을 찾아 돌보겠다고 선언하시고(겔 34:11–16), 자기 종 다윗을 그들을 위한 한 목자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겔 34:23–24). 에스겔 본래의 문맥에서는 흩어진 이스라엘의 회복과 올바른 통치에 관한 약속이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러한 목자의 일을 하시고 동시에 아버지와 자신 사이의 특별한 일치를 선언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돌보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예수님의 행동 안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직접적인 인용이 아니라, 목자와 양에 관한 공통된 이미지와 약속을 통해 형성되는 정경적 연결입니다.
표징이 없던 자리에서 믿음이 시작되다
요한복음 10장의 마지막은 조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 다시 요단강 건너편, 세례자 요한이 처음 세례를 주던 곳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고(1:29),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했습니다(1:34).
많은 이가 그에게 와서 말했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이 이 사람을 두고 말한 것은 모두 참되었다.」요한복음 10:41 · 본디새김
앞에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일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은 표징을 하나도 행하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기억합니다. 그 증언이 참되다고 판명된 것은 그가 가리켰던 예수님을 사람들이 실제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을 가리켰습니다.
성전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답변을 요구했으며, 마침내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 건너편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처음에 목자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고 이끌고 나갔다면,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그 목소리를 알아보고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요한복음 10장이 보여 주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자신의 권위 아래 가두려는 지도자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고, 양들이 살아갈 길을 열어 주시며, 그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하나 되시어 그 일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에 머무르십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오래전에 그곳에서 들었던 요한의 증언을 떠올립니다. 그때에는 표징 하나 없이 전해졌던 말이 이제 그들의 눈앞에 계신 예수님 안에서 참된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복음서 기자는 짧게 기록합니다.
거기서 많은 이가 그를 믿었다.요한복음 10:42 · 본디새김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